유토가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점액질로 뒤덮인 슬라임들이 일제히 끈적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투명한 몸 안에서는 연금술 물질이 기포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중 한 마리가 점프하며 아리를 향해 빠르게 덮쳐왔다.
"아리! 엎드려!"
론도의 경고에 아리는 재빨리 자세를 낮췄다. 동시에 론도는 품속에서 여러 개의 단검을 꺼내 들고 날카롭게 외쳤다.
"슈리켄 버스트!"
날카로운 단검들이 허공을 가르며 빠르게 날아갔다. 단검이 슬라임들의 몸에 박히자, 그들의 점액질 몸이 흔들리며 기포가 터져나왔다.
곧 내부에서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붐!"
론도가 손가락을 튕기자 단검에서 강렬한 섬광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단검이 박힌 슬라임들이 터지며 점액과 연금술 물질이 사방으로 튀었다. 곧, 연쇄 폭발이 일어나면서 근처의 슬라임들마저도 폭발에 휩쓸려 사라졌다. 그 여파로 실험실 안은 잠시 연기에 휩싸였고,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으윽... 시야가 안 보여!"
아리가 연기에 눈을 뜨지 못한채로 외쳤다.
"쿨럭! 자, 잠깐만 기다려! 금방 걷힐 테니까!"
론도가 기침을 하며 연기를 뚫고 아리에게 다가갔다.
몇 초 후, 연기가 서서히 걷히자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론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아리는 짜증스럽게 몸에 들러붙은 슬라임 점액을 떼어내고 있었다.
"으으... 이 끈적거리는 것 좀 봐!"
아리는 팔에 묻은 점액을 떼어내며 단검을 툭툭 털었다.
"그래도 꽤 멋졌지 않냐?"
론도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멋지긴... 이 점액 덕분에 몸이 제대로 안 움직이잖아!"
아리가 투덜거리자 론도는 어깨를 으쓱하며 농담을 던졌다.
"적어도 우리가 슬라임에게 삼켜지진 않았잖아."
"하아...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
아리는 짧게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터져나간 슬라임의 점액이 바닥에 널려 있었고, 실험실은 마치 진흙탕처럼 끈적였다.
"어쨌든 고비는 넘겼네."
론도가 바닥에 남은 점액을 털어내며 웃었다.
"그래, 잘했어."
아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유토가 있는 쪽으로 다가간 그녀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순순히 투항하세요. A씨의 치료와 더불어 그동안의 일에 대해 자백한다면 큰 처벌은 면하게 해드릴게요."
하지만 아리의 경고에도 유토는 미소를 지으며 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의 눈빛은 오히려 더 흥미롭다는 듯 반짝였다.
"흠... 단검으로 외피를 뚫고 내부의 마력석에 직접 폭발을 일으킨다라... 흥미롭군. 다음번에는 외피를 조금 더 튼튼하게 만들어야겠어."
유토의 태도에 아리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실험이나 생각하고 있다니... 정말 구제불능이네."
아리의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론도도 단검을 다시 움켜쥐며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 말로는 안 통할 것 같다."
아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단검을 들어 올렸다.
"그럼 싸워야지."
유토는 천천히 두 손을 뒤로 깍지 끼며 여유롭게 말했다.
"그렇다면 너희들의 힘을 보여줘 봐라.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한번 보자고."
그와 동시에 실험실 안쪽에서 다시 슬라임들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거대했고, 그들의 투명한 점액 속에서 작은 마력석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론도가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이번엔 더 강력해 보이는데... 어쩌지?"
다가오는 슬라임들을 날카롭게 응시하며 아리가 조용히 론도에게 속삭였다.
"론도."
"어? 왜?"
"아까 그거 다시 한 번 해봐. 이번엔 아까보다 더 크게."
"어? 상관은 없는데... 아마 소용없을걸?"
"상관없어. 일단 해봐."
론도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리를 바라보았지만, 곧 그녀의 확신에 찬 눈빛을 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단검을 양손에 쥐고 한껏 긴장된 표정으로 슬라임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슬라임들이 서서히 다가와 두 사람을 에워싸자, 론도는 단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슈리켄 버스트!"
그의 외침과 함께 수십 개의 단검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날아간 단검들이 슬라임들의 몸에 박히자, 마력석들이 빛을 내며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 순간, 아리가 허리춤에서 작은 원통을 꺼내어 빠르게 던졌다.
"지금이야!"
연막탄이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실험실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론도의 단검들도 폭발을 일으키며 격렬한 섬광을 터뜨렸다. 순식간에 실험실 안은 연기로 가득 차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유토는 안개 속에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두 사람이 있을 방향을 향해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이라도 치려는 모양인데,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순순히 나간다면 막지는 않으마."
그러나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유토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웅——
연구실 안의 환풍기가 작동하며 굉음과 함께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연기가 조금씩 걷히더니, 이내 실험실 안이 점차 드러났다.
연기가 완전히 사라진 후, 유토는 정면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슬라임들에게 포위당한 채 서 있었고, 분한 표정으로 유토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군."
유토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자신만만하게 싸움을 걸어오고, 연막까지 뿌려댄 결과가 고작 이거냐? 책임지지도 못할 행동으로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다니... 역시 그 친구를 구하러 온 놈들답게 멍청하군."
그는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슬라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든 행동에는 결과가 따르는 법. 이게 너희들의 오만이 불러온 결과다."
유토가 손가락을 튕기자, 슬라임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리와 론도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고, 점액질의 괴물들은 그들을 집어삼키듯 달려들었다.
잠시 후——
슬라임들이 흩어지며 두 사람이 사라진 바닥이 드러났다. 유토는 그곳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흠..."
그는 의아한 듯 바닥을 자세히 살폈다. 분명 슬라임들의 산성에 의해 두 사람은 녹아 사라졌어야 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깨끗하군."
유토는 낮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바닥에는 흔적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건——"
그가 혼잣말을 이어가던 순간, 목덜미에 차가운 금속이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나 유토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짜가 분명하군."
그는 씨익 웃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린 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앞에는 조금 전 슬라임에게 녹아 사라진 줄 알았던 두 사람이 있었다. 론도는 유토의 목에 단검을 겨누고 있었고, 아리는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유토는 흥미롭다는 듯 낮게 중얼거렸다.
"대단하군. 단순한 환술인가? 그렇다기엔 물리력도 있었는데... 연금술 없이 물체를 구현했다니, 모험가들의 스킬도 연구해 볼 만하겠어."
아리는 자신들을 감탄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유토를 향해 냉정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마지막 자비입니다. 항복하지 않으면 여기서 죽이겠습니다."
그녀는 유토의 목덜미에 칼끝을 바짝 들이댔다. 그러나 유토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의 태도에 아리는 이를 악물었고, 결국 그녀의 칼이 유토의 피부를 얕게 찔렀다.
선홍빛 피가 칼날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유토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목표는 나를 제압하고 저 친구를 구출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내 목표는 뭘까?"
"뭐?"
아리는 영문을 이해하지 못한 채 유토를 노려보았다.
그때, 그녀의 옆에서 론도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야, 잠깐 아리! 저길 봐!"
론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 A가 누워 있는 실험대 위에서 끈적한 점액이 흐르고 있었다. A를 감싸고 있는 슬라임들이 그의 몸을 서서히 집어삼키고 있었다.
"뭐...?!"
충격에 휩싸인 아리가 다시 유토를 노려보자, 그는 실소하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정말로 저 친구를 구하고 싶었다면 기회가 있을 때 나를 죽였어야 했어."
그는 한순간 눈을 감고 짧게 숨을 고른 뒤,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정말로 막고 싶었다면, 자비 따위 베풀지 말고 확실히 막았어야 했어. 쓸데없는 온정은 배려가 아니다, 사태를 외면하고 조장할 뿐이지."
"이게 배려가 불러일으킨 비극이다."
"이 개자식이!"
론도가 주먹을 꽉 쥐고 유토의 얼굴을 후려쳤다. 유토는 충격에 뒤로 고꾸라졌고, 론도는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그를 거칠게 붙잡아 멱살을 쥐었다.
"그러고도 당신이 A씨의 친구야?! 그러다 A씨가 죽으면 어떡할 거야?!"
론도는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유토는 별다른 반항도 없이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나? 해야 할 게 있지 않나?"
그 한 마디에 아리의 눈이 커졌다.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곧바로 A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쾅!
A를 감싸고 있던 슬라임들이 갑작스럽게 폭발했다.
"뭐?!"
폭발의 여파로 거센 바람이 실험실을 휩쓸었고, 연기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아리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바람과 연기를 막으며, A가 있던 방향으로 몸을 기울였다.
"설마..."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론도도 거친 숨을 내쉬며 연기 속을 응시했다.
그리고—
연기 너머에서 희미하게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연기 속에서 떠오르더니 곧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조금 전과 같은 바람이였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전의 바람은 A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지만, 지금은 A 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류였다.
푸른빛을 중심으로 연기가 빨려들어가더니, 마침내 그들의 시야에 푸른빛의 정체가 드러났다.
"저건... 마력석...?"
아리는 공중에 떠 있는 푸른빛의 돌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마력석이 밖으로 나왔다는 건... A씨는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순간, 불안감이 온몸을 덮쳐왔다. 아리는 주저하지 않고 A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연기 속을 헤집던 그녀는 곧 바닥에 쓰러져 있는 A를 발견했다.
"A씨!"
아리는 다급히 A를 부르며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마력석이 빠져나간 흔적인지 그의 심장 부근이 뜯겨 나가 있었고, 그녀의 부름에도 A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아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 멀리서 론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 A씨는 찾았어?!"
론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아리는 A를 힘겹게 업으며 론도를 향해 외쳤다.
"찾았어! 지금 갈게!"
아리가 A를 업고 빠져나오자, 론도가 A의 상태를 확인하며 물었다.
"A씨는... 괜찮은 거야?"
론도의 질문에 아리는 그저 작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론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아리가 그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A씨를 데리고 알카드노로 가자. 매드 회장님이라면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래, 그러자."
론도가 고개를 끄덕이고 아리와 함께 연구실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휘이이이이이잉—!
갑자기 거센 바람이 실험실을 휩쓸었다.
그와 동시에 실험실 안에 있던 설비들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물건들이 빨려가는 방향을 바라보았고, 그곳에는 연구실 안의 모든 물건들을 빨아들이고 있는 마력석이 떠 있었다.
"뭐야, 저거... 설마 폭주하고 있는 거야?!"
두 사람은 빨려 들어가는 설비들과 마력석을 바라보며 매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마가티아 대폭발이 다시 한 번 이 땅에 일어나게 될 걸세."
론도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던 유토의 멱살을 붙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이봐요! 저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내버려 둘 거냐고요!"
하지만 유토는 론도의 호통에도 그저 실소를 터트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실험은 성공이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게 되겠지."
"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저걸 어떻게 막아야 하냐고!"
론도는 유토의 멱살을 더욱 세게 움켜잡으며 소리쳤지만, 유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아리가 론도를 잡아끌며 다급하게 외쳤다.
"일단 빨리 나가자! 여기 계속 있다간 우리도 휘말릴 거야!"
"크윽, 젠장!"
론도는 이를 악물며 유토의 멱살을 놓았다.
그러고는 곧, 주저 없이 유토를 업어 들었다.
그 모습에 유토가 의아한 듯 론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하는 거지? 난 이 사건의 범인인데... 왜 나까지 구하려고 하지?"
유토의 물음에도 론도는 아무런 대꾸 없이 아리를 따라 연구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토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조금 전 일로도 깨닫지 못한 거냐? 그런 알량한 배려로는 모든 비극을 막을 수 없다는 걸."
그러나 이번에는 론도가 먼저 그의 말을 끊었다.
"살아서 책임지라고 데려오는 거니까, 입 좀 다물어!"
론도의 단호한 외침에 유토는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자 론도는 헉헉거리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죽는다고 책임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단순히 목숨을 걸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하냐고!"
그의 목소리는 분노와 절박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고, 사람들에게 사과해! 네 목숨 따위로 상처 받은 사람들이 위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론도는 이를 악물며, 숨이 가빠질 정도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에 업힌 유토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론도의 등을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들어왔던 하수구 통로 위로 올라온 일행들은 잠시 건물의 벽에 기대어 앉아 숨을 골랐다.
론도는 땀을 뻘뻘 흘리며 거친 숨을 내쉬고는 유토를 바라보며 물었다.
"헉헉, 그런데 아저씨..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론도의 질문에 유토가 그를 바라보자 론도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 말했던 그녀가 누구에요? 아저씨는 친구를 구할려고 실험을 진행했던거 아니에요?"
론도의 질문에 유토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고민하는 듯 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 목적은 드랭을 살리는게 아니야."
"엥? 그럼 무슨 목적으로.."
"그 친구가 이 실험으로 살아나던 아니던 그런건 상관없었다. 내 목적은 그 날 끝마치지 못했던 일을 그를 대신해서 매듭짓는 것."
"그 결과로 그가 살아나던 아니면 이대로 영원히 떠나버리던 상관없었다. 다만.. 그녀가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다."
론도는 헉헉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유토의 말에 당황한 듯 되물었다.
"뭐...? 그러니까, 아저씨의 목적은 처음부터 A씨를 살리는 게 아니었다고?"
그의 질문에 유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그 친구의 생사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어."
유토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어딘가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론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그럼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건데? 대체 무슨 이유로!"
유토는 론도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날, 드랭이 사라진 이후... 그녀는 마치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었지."
"그녀?"
론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유토는 작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필리아."
그 이름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론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설마... 키니의 어머니, 필리아 씨 말하는 거야?"
유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이 론도의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랐다."
유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항상 기다리고 있었다. 드랭이 다시 돌아오기를... 하지만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어."
"그렇다고 이런 위험한 실험을 했다는 거야?!"
론도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네가 했던 짓이 필리아 씨를 더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고는 생각 안 했어?"
유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래.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어."
그는 작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녀를 위해서였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단순히 내 욕심이었는지도 모르지."
론도는 유토를 노려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결국 자기합리화였다는 거네."
론도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저으며 다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의 옆에서 아리도 유토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라도 깨달았다면, 그걸로 된 거예요."
유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리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이제 스스로 생각해야겠죠."
유토는 그녀의 말을 가만히 새겨듣듯 고개를 끄덕였다.
론도는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더 이상 따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곧 그들의 머리 위에서, 마을 한가운데를 뒤흔드는 듯한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콰앙!
세 사람은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건...!"
그들은 건물 너머, 거대한 형체의 괴물을 바라보았다.
연구실에서 폭주한 마력석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니었다. 실험실의 수많은 설비와 연구 재료를 흡수한 끝에 거대한 괴물로 변해버렸다.
형체를 일정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진흙과도 같았다. 끈적이고 불길한 마력이 뒤섞인 몸체는 흐물흐물하게 움직이며 주변을 집어삼켰다.
광장의 지면이 갈라지며 거대한 마력 덩어리가 지상으로 기어 올라왔다.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자, 마을의 건물들이 무너지고 거리의 가로등과 표지판이 마력에 닿자마자 융해되어 흡수되었다.
"저게... 마력석이 폭주한 결과라고?"
론도는 이를 악물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괴물은 거대한 육체로 건물들을 휘감으며 주변을 휩쓸고 있었다. 붉은 빛이 점멸하며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한순간에 거리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알카드노로 가서 상황을 알려야 해!"
론도는 정신을 다잡고 몸을 일으켰다. 아리도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알카드노로 향하기 위해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그들의 눈앞에 거대한 괴물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젠장, 저게 왜 이쪽으로 오는 건데!"
"지금 그런 소리 할 때야?! 먹히기 싫으면 뛰어!"
세 사람은 A를 업어 들고 괴물의 반대 방향으로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괴물은 그들을 쫓듯이 건물을 집어삼키며 움직였다. 아리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붕괴음과 함께 메아리치는 굉음을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이 속도로 뛰어도 따라잡힐 것 같아!"
"젠장,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정신없이 뛰던 중, 뒤를 살피던 론도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는 일행들을 붙잡으며 외쳤다.
"잠깐만! 저기 좀 봐!"
론도의 말에 아리도 급히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헉... 헉... 뭐야, 어디로 가는 거야?"
괴물은 그들을 쫓아오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이 따라간 곳에는 제뉴미스트 학회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유토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마력석을 쫓아가는 거다."
그의 말에 론도와 아리는 유토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유토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낮은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연쇄 융합은 본래 주변 물체를 계속해서 연금술로 융합하는 술식이다. 그런데 이젠 몸과 의지를 가지게 되었으니 스스로 연금술을 시행할 대상을 찾아 움직이고 있는거다."
아리는 숨을 헐떡이며, 제뉴미스트 학회를 향해 돌진하는 괴물을 바라보았다.
"그럼... 마력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삼키려 한다는 거예요?"
유토는 지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것도 단순히 흡수하는 게 아니라, 주변의 마력과 물질을 융합하면서 점점 더 거대해지고 있어. 이 상태로 방치하면 마을 전체가 먹혀버릴 수도 있다."
"그럼 막을 방법은요?! 이대로 저게 마을을 집어삼킬 때까지 지켜만 보라고요?!"
론도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그러자 유토는 맥없이 중얼거렸다.
"마력석에 담긴 에너지가 모두 소모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집어삼킬 거다."
"그런...!"
유토의 말에 론도가 절망한 표정으로 괴물을 바라보자, 아리가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우선 여기서는 방법이 없으니 알카드노로 돌아가자!"
아리의 말에 론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