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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내청코 팬픽 단편]그녀는 평소대로가 아냐

아이콘 엘라인하르트
댓글: 2 개
조회: 15330
2015-05-30 16:27:49

 1.

 언제나와 다름없는 평범한 금요일의 오후였다. 그저 평소보다 특별동으로 향하는 복도가 조금 추웠고, 평소보다 하늘이 어두침침해서 기분이 나빴을 뿐이다. 오늘도 수업시간은 아무런 일도 없이, 누구와의 대화도 없이 지나갔다. 정말로 평소와 다르지 않았을 터였다.
 “여어.”
 언제나 부실에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은 유키노시타였다. 나는 수업이 끝나도 대화할 상대는 없고 따로 할 일도 없는 한가한 인간인지라 최대한 빠르게 부실로 향한다. 하지만 나보다 먼저 부실에 도착하는 이 여자는 뭘까. 게다가 열쇠까지 챙겨서 말이다. 나보다도 한가한 거 아냐? 나한테 ‘어차피 히키가야 군은 한가할 테니까.’ 같은 소리 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내가 인사를 건넸지만 유키노시타는 읽고 있는 문고본에서 눈도 떼지 않았다. 역시나 평소대로다. 나도 적당히 의자를 끌어와 앉는다. 집에서 읽던 라노벨 한 권을 가방에서 꺼내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조용한 부실에서의 시간, 의뢰가 들어와 바빠지면 귀찮지만 평범하게 이 부실에서의 시간은 좋아한다. 유키노시타와 둘이 있다는 것은 혼자 있는 것과 별 차이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유이가하마가 늦네.”
 “유이가하마 양은 친구랑 쇼핑 가기로 해서 오늘은 못 온다고 연락을 줬단다.”
 “그랬냐.”
 뭐, 그럼 오늘은 누가 찾아오지 않는 이상은 평화로운 한 때가 지속되겠구만. 대화도 없고 사건도 없는 정말로 평화로운 한 때, 만약 이 평화를 깨는 놈이 있다면 초평화 버스터즈 같은 놈일 거다. 주로 폿포 같이 생긴 놈만 안 와줬으면 좋겠다.
 유키노시타가 갑자기 일어나서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홍차를 끓이려고 하는 건가. 컵의 수를 보니 내 것도 끓여주려는 것 같다. 나야 뭐 고맙다. 오늘은 맥스 커피도 챙겨오지 않았으니 입가심 정도로는 충분하다.
 유키노시타는 금방 홍차를 끓여서 가지고 와 내 앞에 한 잔, 자신 앞에 한 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적당히 후후 입으로 불어 식힌 후 한 모금을 들이켰다. 여전히 좋은 향기다. 다시 한 번 유키노시타의 홍차에 감탄하며 책을 한 페이지 더 읽어나갔다.
 평소답다. 라는 것은 역시 평화롭다는 것과 일맥상통하겠지. 일반적으로 평소라는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고요한 상태일 테니까. 혹시 사건에 휩싸이면서 평소와 똑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 머리가 이상한 것이다. 틀림없다. 
 너무나 평화로운 오후. 홍차로 속을 따듯하게 데우면서 머리에 책에 쓰여 있는 글자를 하나씩 집어넣는다. 그것을 머릿속에서 글로 다시 구성하여 이해한다. 아아, 평화롭고 고요하다는 건 정말 극락이구만. 일 따위 하지 않는 평화로운 몸으로 살고 싶다.
 “있잖니. 히키가야 군.”
 “엉?”
 평소와 다른 것은 이 때부터였다. 유키노시타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건다는 것은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사적인 일로 말을 거는 것은 거의 전무할 정도이다. 설마 갑자기 말을 걸어놓고 매도할 생각은 아닐 테고,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나는 히키가야 군을 좋아해. 사귀어주지 않겠니?”
 무슨 뜻을 전하고 싶은 걸까.

 2.

 “갑자기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란다. 히키가야 군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어.”
 유키노시타의 입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일전에 나에게 말했다. 자신은 폭언도 하고 실언도 하지만 허언만은 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의 말이 그렇게 거짓말 같이 느껴지는 것일까. 현실감이 들지 않아서? 아닐 터다. 솔직히 말해 그녀가 날 좋아한다고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나에게 완전히 무감정하진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녀가 가끔씩 나에게 보이는 기대 등을 보면 오히려 그녀는 나를 높게 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녀가 내게 호감을 보이는 것이 그렇게까지 현실감이 없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미소가 걸렸다. 그녀의 미소는 내가 아는 한 두 가지다. 정말로 기뻐서 짓는 미소와 화났을 때 짓는 경직된 미소. 하지만 지금의 미소는 그 둘과는 현저히 달랐다. 그녀의 감정에서 비롯되는 미소가 아니라고 느꼈다. 그녀의 미소는 말할 것도 없이 거짓이라고 느꼈다.
 “……너라면 농담으로 이런 소리를 하진 않겠지.”
 “당연한 소리네. 그러면 히키가야 군, 얼른 대답을 들려주지 않겠어?”
 “솔직히 지금은 네가 이상한 말을 한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아. 이런 상태에서 고백을 듣는다면 당연히 내 대답은 No다.”
 “그렇구나.”
 묘하게 담담한 반응이다. 진심으로 고백한 것이 아니란 걸까? 하지만 그녀는 어딘가 자조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분명 진심을 담아 한 고백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매몰차게 거절한 건가 싶어 미안해진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귀로 들어왔다. 표정과 일맥상통하는 어딘가 자조적인 목소리, 이상하게 웃음이 섞인 것 같기도 하다. 분명 평소대로라고 생각했는데 어딘가가 어긋나 있는 것 같다. 불현듯 마음이 불안해진다. 뭔가 잘못돼 있는 것 같다. 
 소름끼치는 감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유키노시타를 바라보니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소 짓고 있었다. 왜 그러니? 하고 물어보는 것 같은 눈빛, 내 동공은 분명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에 통증이 온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 같아.
 “유키……노시타?”
 “푹 자렴. 금방 깨워줄 테니까.”
 

 3.

 여긴 어딜까. 그런 생각을 하며 깨어난 지도 이미 5분. 나는 의자에 몸이 묶인 채로 어딘가의 발코니에 앉아있었다. 익숙한 치바의 야경이 눈에 비친다. 치바에서 벗어나진 않았으니 그리 먼 곳은 아닌데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 어째서 난 묶여있는 걸까. 의자에 내 몸을 묶고 있는 것은 본격적인 밧줄이었다. 웬만한 힘으론 끊어지지 않을 듯한, 줄다리기 같은 종목에서 사용할 것 같은 튼튼한 밧줄이었다.
 “어머, 정신이 들었니?”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린다. 뒤를 돌아보니 역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유키노시타 유키노. 아마도 나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납치한 범인. 어째서 납치한 것이냐, 하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책에서 문맥을 읽듯이 사건의 맥락을 살피면 간단하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사실만 늘어놓자면 분명 그녀는 내가 고백을 받아들여주지 않아서 납치한 것이겠지. 그렇다면 내가 할 질문은 그 쪽이 아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어째서라니? 내가 히키가야 군을 사랑하니까, 당연한 거잖니?”
 “평소의 너답지 않잖아.”
 “어머, 히키가야 군은 나에 대해 잘 모르잖니? 나는 히키가야 군에 대해 이것저것 알고 있지만 말이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그녀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그녀, 평소대로의 그녀라면 이런 짓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겐 보이지 않는 그녀의 속마음도 있는 거겠지. 나는 분명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없으니까. 유키노시타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돌려보내줘. 코마치가 걱정할 거야.”
 “히키가야 군은 평소대로구나. 일단은 납치당한 거니까, 좀 더 자신을 걱정해야 하지 않겠니?”
 “……너라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납치는 의외였지만 말이야.”
 “그러니?”
 “아아.”
 그녀는 더욱 내 옆으로 다가와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딘가 허탈한 표정이 눈에 들어와서 나도 조금은 미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진지하게 고백한 것이라면 그것을 거절한 나에게 그녀를 위로할 권리는 없다. 그녀를 위로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녀가 다음으로 좋아하게 되어야 할 상대다.
 “야경이, 예쁘구나.”
 “그러네, 치바도 이렇게 보면 꽤 야경이 예쁜 도시구만.”
 “있잖니. 히키가야 군.”
 “왜 그러냐.”
 “난 네가 말한 대로 평소의 유키노시타가 아니란다.”
 “하?”
 그녀는 일어나서 나에게 다가와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혀가 들어온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왜 그녀는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걸까. 이래봤자, 내 안에서 그녀의 이미지가 더 좋아지진 않을 텐데. 하지만 나는 저항 하나 못하고 그녀에게 첫키스를 뺏겼다.
 “후훗.”
 그녀는 내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어딘가 귀축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묘하게, 불안했다.

 4.

 손목이 아프다. 등이 불타는 것 같다.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저려온다. 여기가 어딘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녀가 나를 쫒아오고 있는 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혼란한 머리를 부여잡고 앞으로 달린다. 지구는 둥그니까, 언젠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내 머리는 정신이 나간 듯 허무맹랑한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무섭다. 나의 뒤에 그녀가 서있을 지도 모른다. 그녀가 나의 등을 찢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숨이 차올라 호흡 곤란이 올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다리를 멈출 수 없었다. 너무나도 무서웠다. 나를 사랑한다고 몇 번이고 얘기하던 그녀가 너무나 무서웠다.
 싫어. 더 이상 그녀가 주는 이상한 약을 먹기 싫다. 그녀가 나에게 들려주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듣기 싫다. 그녀의 피가 들어있는 음식이 먹기 싫다. 그저 그 공간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이 싫었다. 쓰러지려고 하는 몸을 이끌고 내가 아는 거리가 나올 때까지 달린다. 주변의 시선이 이끌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파랗게 부어오른 팔뚝을 보고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 온 몸에 뱀처럼 휘감겨 있는 파란 멍을 보고 무섭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점점 머리가 안 돌아간다. 여기는 정말 내가 모르는 곳일까? 사실 아는 곳이 아닐까? 잠시 멈춰서 숨을 돌리고 주변을 둘러보고 싶지만, 다리는 본능에 이끌려 멈춰주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본능에 이끌린 탓일까. 나는 내게 가장 익숙한 문을 발견했고, 급하게 그 문을 열었다.
 “오, 오빠!?”
 내 얼굴이 인쇄된 종이 뭉치를 들고 있는 코마치와 나는 우리 집 현관에서 마주친 것이다. 그 사실이 너무나 반가워서, 너무나 마음이 안심 되어서, 긴장의 끈을 탁 하고 놓았다. 산소를 제대로 공급 받지 못하던 뇌가 마침내 쉬기 시작했다.

 5.

 “……어째서 다친 건지는, 알려주시기 싫다는 거죠?”
 “예.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입원은 하지 않아도 돼요. 응급 처치로도 충분한 정도네요. 무리 하지 않고 집에서 며칠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다만, 등의 상처들은 흉터가 남을 것 같습니다.”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병원을 나왔다. 팔은 깁스를 했고, 온 몸에 붕대를 감았다.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요 며칠간 학교는 병결로 쉬었더니 정신도 어느 정도 안정된 것 같다. 처음 며칠간은 심각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있던 것 같지만, 코마치가 노력해준 덕에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녀왔어.”
 “어서와, 오빠.”
 코마치는 평소보다 더욱 다정하게 날 대해줬다. 코마치가 아니었다면 난 정신이 나갔을 것이다. 코마치의 머리를 쓰다듬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 항상 하던 일을 반복한다. 
 어째서 유키노시타가 그렇게 된 것인가. 내가 정말 유키노시타라는 인간을 손톱만큼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가? 그녀가 그 방에서의 며칠 동안 내게 보여준 모습은 평소대로의 그녀와는 하늘과 땅만큼의 갭이 있었다. 이성이라는 것은 포기한 듯한, 사랑을 강요하던 그녀의 모습이 머리에 리플레이 된다.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녀의 미소를 떠올리면, 이제는 그 광기에 찬 모습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그녀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서 그녀는 그렇게 된 것인가. 하지만 내가 그 고백을 받아주지 않으리란 것은 그녀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내가 고백을 받았더라도, 아니면 그녀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뇌 되었더라도 그녀와 내가 공유하고 있던 신념과 어긋나는, 가식뿐인 관계 밖에 만들 수 없었을 터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나에게 그렇게까지 사랑을 강요했는가. 머리가 아팠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녀를 이해하려고 해보아도 그녀의 행동에 변명을 해줄 수 없다. 그녀는 그냥…… 미쳐있었다. 

 6.

 “히키타니~ 가출이라도 했었던 거야? 안 어울리네~”
 시끄러, 죽여 버린다. 토베. 뭐, 언제나 소란스럽고 시끄러운 토베 같은 녀석을 제외하면 나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다. 2주나 학교에 등교하지 않았던 사람이 돌아왔는데도 차가운 반응이다. 솔직히 말해 내가 교실로 돌아왔을 때 “쟤 누구?” 하고 바라보던 녀석들이 꽤 됐다. 문화제 일이 거의 잊혔다고 생각하면 긍정적이지 못할 이유는 없다. 
 유이가하마는 아직까지 직접 와서 말을 걸진 않았지만 계속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사정은 말해줄 수 없을 것이다. 유키노시타는 그녀의 친우다. 내가 직접 나서서 유이가하마 안에서의 ‘유키농’의 이미지를 깰 필요는 없고, 그러더라도 유이가하마가 쉽게 믿어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 둘의 우정은 세르눈티우스와 메로스의 우정에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말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보았지만 역시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학교에 오면 유키노시타와 마주칠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왜 학교에 왔는가, 그것은 간단하게 설명하긴 힘들다. 휴학을 하고 유키노시타가 졸업할 때까지 알바를 하며 돈을 버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터이다. 분명 그 쪽이 제일 안전하겠지. 하지만 내 마음은 여러모로 복잡한지 학교는 어떻게 할 거냐는 부모님의 물음에 갈 거라고 대답했다. 나는, 이렇게까지 당했으면서도 다시 유키노시타 유키노를 믿으려 하는 건가?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녀는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그녀가 아무리 아름답고 순수한 미소를 짓더라도 난 그 미소에서 광기를 찾으려 들겠지.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학교에 온 이유…… 그것은 역시 간단하다. 유키노시타와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나의 문제고, 나의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하니까. 아무리 그녀의 손에 의해 끔찍하게 파괴된 관계라도, 그 문제를 시간의 흐름에 맡기고 넘길 수는 없다. 나는 그녀와 담판을 지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째서 그녀가 그런 짓을 했는지 묻을 것이다. 그녀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저 찝찝함만 남는 것보다는 낫다. 나에게는 코마치라는 든든한 아군이 있다. 그녀가 또 다시 나를 피폐하게 만들더라도 나는 그리 쉽게 무너지는 존재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녀가 아무리 내게 트라우마를 심는데도 중학교 시절의 흑역사보다는 약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수업은 금방 끝이 났다. 특별동으로 향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가 그 부실에 있을지 없을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그녀라면 있을 것이다. 그녀라면 그 부실에서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앉아있을 것이다. 그녀를 믿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 감이 그렇게 말하였다. 그녀라면 있을 것이라고.
 “힛키! 잠깐만 기다려.”
 유이가하마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급하게 뛰어왔는지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 평소다워서, 그만 울컥할 뻔 했다. 그저 내가 학교에 안 나왔던 것을 걱정하는 표정, 유이가하마 다운 표정. 그녀만은 아직 그대로라는 사실이 내 마음을 안정시켜줬다. 유키노시타가 내게 보여준 그 모습을 매체에서 보여주는 얀데레에 비유하는 것은 나로서도 기분이 나쁘고, 사실과도 조금 다르다. 하지만 겹치는 부분이 있기에 혹시 유이가하마도 무슨 짓을 당한 것은 아닐까 조금 걱정했지만, 그녀의 표정에 걱정을 제외하곤 어두운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빛나보였다.
 “무슨 일…… 있었어?”
 “일단 부실로 가자. 설명을 한다면 거기서다.”
 “……웅.”
 유이가하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내 뒤를 따라왔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유키노시타와 담판을 지을 순 없어서, 어디까지나 거짓말을 하고 유키노시타의 반응을 살필 작정이지만 지금의 그녀에게 내 거짓말이 통할지가 의문이다. 유이가하마는 생각 외로 감이 좋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그 분위기에 맞춰 생활했던 경험 덕분인지 사람에 대한 눈은 의외로 정확한 편이다. 잘 얼버무릴 수 있을까.
 조용한 분위기에 휩싸여서 2주 동안 걷지 않았던 복도……는 아닌가. 걷지 ‘못했던’ 복도가 정확하다. 걷지 못했던 복도를 걸으며 할 말을 정리한다. 분명 일전엔 차갑다고 생각했던 복도 바닥의 공기, 지금은 마음을 차갑게 돌려줘서 기분이 나쁘지 않다. 몇 발짝 걸었다고 생각하니 이미 부실 문 앞이었다.
 꿀꺽, 하고 침을 삼킨다. 손잡이를 돌린다. 문은 열려 있다. 이 문 앞에 그녀가 있다. 나에게 일상을 초월하고 평범함을 벗어난 2주간을 선사해준 그녀가 있다. 내 등에 몇 십 번이고 자신의 이름을 적은 그녀가 있다. 나에게 광기의 찬 사랑이란 게 무엇인지 알려준 그녀가 있다. 다시 한 번 정신을 차린다. 유이가하마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쉬이 이 문을 열 수 없었다. 하지만 내 각오는 그렇게까지 약하지 않았는지 천천히 문이 열렸다.
 “유키농, 얏하로!”
 “어서 오렴.”
 아아, 평범하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유이가하마를 반겼고, 언제나처럼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 고귀한 검은 머리카락을 나부끼고 있었다. 언제나 보여주던 아름다운 자태로 독서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녀를 봤을 때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세상이 끝나도 그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 나는 그녀의 편린을 맛보았을 터인데, 어째선지 그녀의 그런 모습에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그녀다워서, 내가 겪은 2주간이 내 망상이 아니었는지 의심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내 등의 흉터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의 필체로 그녀의 이름이 수 십 번 적혀져 있을 내 등. 2주간의 기억을 증명해주는 내 등의 존재가 있기에 나는 의심을 거둘 수 있었다.
 “유키노시타.”
 “왜 그러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목소리.
 “알고 있을 거 아냐. 내가 너에게 뭘 묻고 싶은지, 너에게 무엇을 듣고 싶은지.”
 “……? 미안한데 히키가야 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어.”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2주일동안 끝없이 들어왔던 그 목소리가 내 귀에 한마디 한마디 박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예전에 그녀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린다. 분명…….
 “무슨 소리냐. 2주 전부터 네가 나한테 저지른 짓들을 잊었다고 말하려는 거냐?”
 “미안한데, 히키가야 군. 조금 냉정해지렴. 나는 2주 전의 금요일부터 집안 일 때문에 본가에 가 있었단다. 아직 집에 돌아가 보지도 못했어. 학교에 나오지도 않았는데 히키가야 군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있을 리가 없잖니.”
 그래. 정확하게 기억났다. ‘나는 폭언도 하고 실언도 하지만 허언만은 하지 않는다.’ 라고, 분명 그녀는 말했었다. 그것이 그녀일 텐데,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가? 그녀가 나와 보낸 시간을 나는 기억하고 있는데, 내 등이 기억하고 있는데, 어째서 그런 뻔한 거짓말을 하는가. 이런 건 평소대로가 그녀가 아니야. 
 “어이, 유키노시타…….”
 “힛키! 유키농은 정말 학교에 나오지 않았잖아. 힛키가 뭔가 착각한 거 아닐까?”
 ……그녀에겐 진실을 알려줄 수 없다. 말하고자 하면 내 등을 보여주면 될 테지만, 그 끔찍한 모습을 유이가하마에게 보여줄 순 없고, 그것이 그녀의 친우인 유키노시타의 짓이란 걸 알려줄 수는 더더욱 없다.
 “하하…… 정말 그렇게 얼버무리려고 하는 거냐? 왜 그렇게 평소답지 않은 거냐. 유키노시타.”
 그녀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항상 그녀가 취하는 제스쳐.
 “평소답지 않은 건 히키가야 군, 당신이잖니. 정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그녀의 말이 아니었다. 그녀라면 당당하게 말해줘야 할 것이다. 유이가하마 앞이라서 숨기려고 드는 것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뻔뻔했다.
 구역질이 난다. 그녀가 나에게 저지른 짓을 하나부터 열까지 부정하는 모습에 구토가 올라온다. 그녀의 뻔뻔한 표정에 화가 치민다. 머리가 어지럽다. 이 와중에도 내 기억을 의심하고 싶어 하는 나마저 짜증난다. 그녀가 나에게 저지른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진실이다. 그녀가 지금 나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하나부터 열까지 평소의 그녀와 달랐다.
 “힛키, 진짜루 왜 그러는 거야!”
 나는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유키노시타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꼴사납게 구토를 하고 깽판을 치는, 정신이 나간 듯한 내 모습을 유이가하마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 마디는 해야겠다.
 “유키노시타. 계속 말하고 싶었던 거, 이제 제대로 말할게.”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떤 밉상 같은 말을 하며 갸웃거려도 귀엽게만 보였던 그녀의 그 제스쳐가 더욱 내 속이 뒤틀리게 만든다.
 “최악이야. 너.”
 나는 금방이라도 토를 쏟아낼 듯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부실에서 뛰쳐나왔다.

 에필로그 - 

 “최악이야. 너.”
 그의 말이 귓가에서 계속 맴돈다. 유이가하마 양이 내게 뭐라고 위로를 해줬던 것 같지만, 그녀의 말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나는 어리둥절하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뛰쳐나간 그를 쫒아가 왜 그런 말을 했냐고 묻지도 못했다. 
 왜, 왜? 왜 그는 나한테 그런 말을 한 거야? 왜 그의 눈이 나를 바라볼 때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던 거야? 평소보다 몇 배나 썩은 눈을 하고 나를 그렇게 노려본 이유가 뭐야? 이해할 수 없어. 이상해. 평소랑 달랐다고, 그는. 
 머리가 아파……. 나는 요 2주간 그랑 마주친 적도 없는데, 어째서 그는 나에게 그런 질문을, 추궁을 한 건지 모르겠어.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빨라져만 간다.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간다.
 왜 그에게 미움을 받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왜 그가 평소와 달랐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내가 학교에 나오지 않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모르겠어. 그야, 난 없었으니까.
 그가 헛것을 보고 헛소리를 한 것뿐이야. 분명 그가 뭔가를 착각한 걸 거야. 나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나를 위로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의 표정이, 나를 증오하고 경멸한다는 것 같은 그 눈빛이 계속 떠오른다. 그라는 사람이 거기까지 이성을 잃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집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쓰러질 지도 모른다. 얼른 침실로 가자. 누워서 한 숨 자면 이 악몽이 끝나 있을 거야. 그럴 리 없는데도, 이 현실을 긍정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에게 미움 받았다는 사실은 그렇게까지 내 마음을 파고들고 있었다. 
 나를 이해해줄 것만 같았던 그가 이제 내게 다가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단 한 명의 이해자도 없는 생활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나는 좋아하던 남자에게 미움 받아도 굳건히 서있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 아니야. 
 “어서와. 유키노.”
 “언……니?”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이리로 와봐. 울었어?”
 왜 집에 언니가 있는 거지? 하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언니에게 잡아당겨져 언니의 품에 안겼다. 언니에게서 나는 좋은 향기와 따듯함이 얼굴을 감싼다. 왜 갑자기 이러는 걸까. 하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면 언니는 매일 내개 짓궂게 굴면서도 언니 노릇은 확실하게 해줬다. 나를 걱정해주는 것일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니는 유키노 편이야.”
 그렇게 싫어했던 언니가 나를 위로해준다. 마음에 틈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니라면 언니가 이렇게까지 내 마음을 파고들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내 마음을 채우는 언니의 마음이 생각보다 따듯하게 느껴져서, 무심코 나를 끌어안는 언니에게 몸을 맡기고 만다.
 “옳지. 너무 걱정하지 마렴, 웬만한 일이라면 이 언니가 해결해줄 테니까 말이야.”
 “……응.”
 이렇게 언니랑 화해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역시 언니보다 날 잘 아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하지만 그 따듯함에 감싸여 나는 여러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의 몸에서 왜 나랑 비슷한 냄새가 났고, 내가 본가에 돌아간 2주 동안 왜 언니가 보이지 않았는지. 그런 건 이제 됐다. 그녀의 품은 생각보다 넓어서 나의 모든 것을 포옹해줄 것만 같았다. 나를 최악이라고 말하지 않을 거야. 그런 믿음이 있었다.
 “언니는 유키노를 사랑하니까. 뭐든지 부탁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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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쓴 내청코 팬픽입니다. 오랜만에 애게 들어오니까 소설이 꽤 올라와있길래 저도 한 번 투척해봤습니다 ㅋㅋㅋㅋ

Lv48 엘라인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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