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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썩.
엉덩이에 약간의 아픔이 있었지만, 대단히 아픈 정도는 아니었기에 애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딘가에서 빛이 들어오는 듯 완전히 캄캄하진 않았기에 애나가 어느 정도 주위 사물을 식별할 정도는 되었다.
애나가 떨어진 곳은 커다란 통로였다.
자신을 받쳐준 건 여러 겹의 가죽과 모포, 그 위에 가득 올려진 지푸라기였다.
그 밑으로는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하수도였다.
애나는 총명한 아이였으므로, 순간적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머릿속에 그려 내었다.
집사가 말한 이단심문관이라는 건 정황으로 볼 때 적, 혹은 그에 준하는 사람일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비슷한 내용을 대화하셨던 걸로 보아, 이단심문관은 항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이단심문관...이라. 분명 가정교사에게 어느 정도 배운 것 같은데...
애나는 자신이 과거에 배운 걸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자신의 나라, 헤인스 왕국에 인접하고 있는, 교황이 지배하는 강대한 나라 교국 비스마르크.
여신 제노아의 종교, 제논 교가 성행한 그 곳에서 교황 바로 아래에 군림하는 것이 이단심문관이다.
헤인스 왕국의 반대쪽 접경지역은 몬스터가 우글거린다는 블랙 마운틴(Black Mountain)이고,
재력에 비해 군사력이 떨어지는 헤인스 왕국은 막대한 조공을 교국에 바치며
교국의 신전기사를 몬스터 퇴치에 사용하고 있었다.
신전기사들은 기사 서임을 받을 때부터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기에 몬스터 퇴치에 효과적이며,
그런 신전기사들 중 특출난 신성력을 발휘해, 신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이단심문관이 된다고 배웠다.
또한, 이단심문관은 여신 제노아의 신탁을 받아, 마녀들을 색출해 내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고도 배웠다.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우리 가문에 마녀가 있다고 생각하면, 모든 게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가정교사도, 이단심문관이 마녀나 그 가족을 어떻게 하는지까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생각을 빠르게 정리한 애나는, 일단 이 하수도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했다.
쌍둥이자리의 6월이라고는 해도, 밤의 바깥은 쌀쌀하다.
현재 자신은 질 좋은 옷감으로 만들어진 드레스형 원피스 한 벌만을 입고 있으니, 뭔가 걸칠 것이 필요했다.
애나가 떨어질 때 받쳐준 모포.
하수도를 걸어야 하니 물을 먹을 텐데, 물을 먹으면 무거워지니 쓸 수 없다.
그 아래의 가죽이라면...?
애나는 주먹만한 돌을 집어 들어, 그대로 바닥에 내리쳤다.
돌 파편이 튀며 볼을 할퀴어 피가 나왔지만 개의치 않고 내리치기를 계속했다.
한참을 내리치자, 꽤 쓸만한 뾰족한 쐐기가 되었다.
가죽에 돌 쐐기를 박고, 그대로 찢었다.
비록 한 장이지만 엄청나게 컸기에 로브처럼 몸을 말고 지푸라기로 고정했다.
긴 금발머리도 지푸라기로 대충 묶어 로브 속으로 넣은 후 후드 부분을 뒤집어 썼다.
한창 어리광을 부릴 나이이건만, 애나는 눈물조차 보이지 않은 채 이 모든 작업을 마쳤다.
그리고는 출구를 찾아 거침없이 걷기 시작했다.
실내용 구두를 신고 있었지만, 하수도의 물이 애나의 발목 너머까지 차올라 있었기 때문에 물이 그대로 들어왔다.
하지만 애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항상 거름냄새 나는 흙을 만지며 놀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냄새에 신경쓰지 못할 정도로 생각에 집중해서 그랬을까.
그렇게 걷다 지쳐 쉬기를 다섯 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저 멀리, 일렁이는 불빛이 보인 것 같았기에 애나는 다시한번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한참을 걸어서 하수도를 빠져나온 애나는,
분명 밤이건만 이상할 정도로 환한 불빛에 의아해한 채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가, 이윽고 털썩, 주저앉았다.
환한 불빛이 시작된 곳이 그곳에 있었다.
애나의, 아인스워드 후작의 저택이, 엄청난 불꽃에 휩싸여 타오르고 있었다.
저택을 휩싼 불꽃이, 애나의 루비 같은 두 눈동자를 시기하듯 기세를 드높여 붉게 타올랐다.
애나는 드레스 자락이 더러운 물에 젖는 것도 모른 채 그 자리에 하염없이 주저앉아,
자신이 뛰어놀던 정원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두 함께 했던 저녁식사를, 유모와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