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페이지에 있던 내용이 지금 토론게시판에서 많이 애기하는 셧다운제도로 인해 사람들의 많은 의견을 주고받는것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어 작성합니다)
나는 수년 전에 나 자신이 아버지로서 이 원칙을 깨뜨렷음을 기억 하고 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3살 난 딸아이의 생일 파티가열리고 있었다. 그때 딸아이는 자기가 받은 선물을 모두 꼭 움켜쥔 채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우선 내가 주목한 것은 우리 딸아이의 이기적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아이의 부모들이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그 당시 대학에서 인간관계론을 강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나는 그들이 내가 그 상황을 잘 처리할 것을 기대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그것은 나를 상당히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방안의 분위기는 아주 긴장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딸아이의 주위에 몰려들어 서로 손을 내밀고서 자기들이 방금 준 선물을 같이 갖고 놀려고 야단이었고 딸아이는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나는 우리 딸에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사는 법을 가르쳐야겠다. 나누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가 아닌가?'
우선 나는 첫 번째 방법으로 그냥 물어만 보았다."애야, 친구들이 준 장난감을 함께 나누어 가지고 놀지 않겠니?"
"싫어"하고 딸은 딱 잘라 대답하였다.
두번째 방법은 설득해 보는 것이었다."자, 애야, 친구들과 장난감을 나누어 갖고 놀아야지 이 다음에 네가 친구들 집에 갔을 때 그 애들도 자기 장난감은 나누어 갖고 놀지 않겠니?"
딸아이의 즉각적인 대답은 역시"싫어!"였다.
딸아이의 이 같은 반응은 내가 아이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어서 나는 더욱더 당황하기 시작하였다.세 번째 방법은 뇌물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자, 아빠 말을 들으면 특별한 선물을 주지. 맛있는 껌을 주마."라고 말하였다.
"껌 따윈 필요 없어요"라고 아이는 소리쳤다.
나도 화가 나기 시작하였다. 네 번째 시도는 위협과 공포를 동원하는 방법이었다."말을 듣지 않으면 진짜 혼날 줄 알아라."
"상관없어요"라고 딸애는 울면서 소리쳤다."이 선물은 내 것이에요. 딴 애들과 나누어 갖고 놀 필요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완력을 사용하였다. 겨우 몇 가지 장난감을 빼앗아 다른 아이들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애들아, 이것을 가지고 놀렴."
우리 딸은 아마도 남에게 나누어 주기 전에 그 장난감을 소유하는 경험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실제로 만일 내가 어떤 것을 소유하지 않는 다면 어떻게 그것을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겠는가?). 딸애는 바로 그러한 경험을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감정적으로 성숙된 아빠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나는 내 딸의 성장과 발달, 부녀간의 관계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의 내 체면에 더 많은 신경을 썻던 것이다. 나는 단순히 내가 옳다는 판단을 내려 놓고서 딸애는 무조건 나누어 가져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 딸애가 잘못되었다고 본 것이다.
어쩌면 내 자신이 낮은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딸아이에게 높은 수준의 기대를 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딸아이에게 인내심이나 이해심을 보여줄 수도 없었고 또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이가 친구들에게 장난감을 주도록 기대한 것이다. 결국 나는 자신의 부족함을 보상하려는 시도에서 지위와 권한을 동원하여 내가 원하는 행동을 딸아이에게 강요하였던 것이다.
완력을 동원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약하게 만든다. 힘을 빌리는 당사자가 목적 달성을 위해 외적 요소에 대한 의존심을 키우기 때문이다. 또 힘을 동원하는 것은 독립적으로 사리를 판단하는 능력과 내면적인 성숙 및 자제력의 발달을 방해하기 때문에 강요받는 사람 역시 약하게 만든다. 나아가 마침내는 그 관계 자체도 약화된다. 왜냐하면 협동심 대신 두려움이 앞설 때 사람은 더욱
독단적이고 방어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빌려온 힘의 원천(이는 신체적인 건장함이나 물리적인 힘, 권한, 자격, 신분, 외모 혹은 과거의 업적 등 여러 가지일 수 있다)이 변화하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만일 내가 그때 좀더 성숙하였더라면 스스로가 가진 내면적 장점, 즉 나눔과 성장에 대한 나의 이해, 사랑과 양육에 대한 나의 능력에 의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내가 이 같은 능력을 가졌더라면 딸 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딸 아이를 설득해 본 후에 모두가 좋아하는 재미있는 놀이를 함으로써 우리 아이에게 쏟아지는 감정적인 압력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일을 통해 아이들이 어떤 것에 대한 소유감을 일단 가진 다음에는 매우 자연스럽고도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그것을 나누어 가진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또한 나는 가르쳐야 할 때와 가르치려고 시도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관계가 틀어져 있고 서로의 감정이 팽팽하게 대립되어 있을 경우 가르치려는 시도가 자칫하면 비판이나 무시의 형태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사이가 좋을 때 조용히 아이 혼자만 데리고 어떤 내용을 가르치거나 가치에 대해 애기하게 되면 아이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휠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감정이 성숙되지 못해서 내가 가진 인내심과 자제 능력의 수준으로는 아이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어쩌면 소유감이란 진정한 나눔의 감정보다 선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결혼생활이나 가족 생활에 서 그저 기계적으로 주기만 하거나 서로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소유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자기의 가치를 경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가 아이들의 성장을 진정으로 돕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소유 의식을 가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솔선수범해서 나눔의 가치를 가르쳐 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현명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