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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층] 교토 사람은 왜 겉과 속이 다른가

아이콘 럼자기
댓글: 7 개
조회: 2686
2022-03-29 14:57:57

얼마 전 게시물에 덧글을 달았더니
이런 답글이 달렸더군요.


그래서,. 오늘은 간단하게나마 이 '귀족적'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때는 1192년.
일본은 하나의 역사적 분기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바로 막부시대가 개막된 것이죠.
사진에 보이는 인물이 바로, 일본에 최초로 막부를 열게 된 미나모토 요리토모입니다.


원평합전이라 불리는 일대 혼란기를 마치고
막부시대를 열게 되면서
일본에는 기존과는 다른 사회 체계가 성립하게 됩니다.

기존의 귀족들이 몰락하고, 이른바 무사들이 할거하기 시작한 것이죠.

새롭게 권력층에 올라서게 된 세력은 기존의 귀족 세력과는 구분되어 '무가(武家)'라고 칭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과는 구분되는 기존의 귀족 세력은 '공가(公家)'라고 불리게 되죠.

이렇게 막부 시대가 되면서,
정치의 중심지는 막부가 위치한 곳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는 바로 이러한 막부의 위치에서 유래된 명칭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치적 중심지가 옮겨갔음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의 수도는 바로 교토였습니다.

사실 '교토(京都)'라는 말은 
우리말의 서울과 마찬가지로 한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보통 명사가 하나의 지명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헤이안쿄를 건설하여 천도한 794년 이래로, 무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공식적인 수도로 군림한 것이죠.

하지만 명목상의 수도라고 해서 항상 번영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전국시대의 개막을 알린 '오닌의 난'.
이 일이 일어나면서, 교토는 완전히 폐허가 되다시피 했죠.

안 그래도 막부 성립으로 인해 권위가 떨어져 있던 천황은 끼니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고
궁궐은 동란으로 인해 파괴된 채 방치되었으며 궁녀들은 몸을 팔아야 했을 정도입니다.

복구를 해야 했지만, 
천황은 물론이고 무로마치 막부도 이 때는 당장 살아남는 것조차 힘든 시점이었으니
그곳을 근거로 하던 사람들의 생활 역시 곤궁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귀족인 '공가'든, 그 아래 살아가던 서민들이든 말이죠.

자, 그렇게 전국시대가 이어지던 어느날
희대의 풍운아가 교토를 방문합니다.



바로 오다 노부나가입니다.

이마가와를 물리치고, 거기에 사이토 가문까지 멸망시킨 다음
파죽의 기세로 수도로 올라온 신예 다이묘였죠.

하지만 사실 노부나가는 딱히 좋은 가문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막부에서 정식으로 임명된 지방관인 슈고(守護)도 아니고
슈고의 대리인 격인 슈고다이|(守護代)의 직계도 아닌 방계가 
하극상으로 윗 사람들을 다 내쫓고 자리를 차지한...

교토의 진성 귀족 출신인 '공가'들이 봤을 때는 그야말로 쌍놈 중에 왕 쌍놈이었던 셈이죠.


그런 사람이 교토에 군사를 몰고 와서 거드름을 피웁니다.
'공가'들로서는 아니꼬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죠.
하지만 당장 군사력이고 재력이고 간에 상대가 안 되니 찍 소리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노부나가는 기존의 문화와는 구분되는 신문물을 교토로 들여와 유행시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다도'인데요.
사실 이전까지 다도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만
그것이 무사 가문에 유행처럼 퍼져 나간 것은 바로 노부나가의 영향이었습니다.

적어도 다도에 쓰이는 도구 하나의 가격이 미친 듯이 뛰어오른 건 바로 노부나가 때문이었죠.



처음 봤을 때는 완전 개쌍놈이었는데
알고 보니 뭔가 뽀대 나는 쌍놈이네?
공가들이 보기에도 뭔가 멋지더란 말이죠.

게다가 당장 굶어 죽을 걸 살려주고
다 박살 나서 폐허가 되어 있던 교토에 어느 정도 활기를 불어넣어 주니
공가들도 노부나가를 쉽게 대하지는 못했습니다.
기껏 한다고 해봐야
좋은 말인 척 슬쩍 비꼬면서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고작이었겠죠.

하지만 여기서 또 한 번 역사가 뒤집힙니다.




그 잘 나가던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히데요시가 권좌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노부나가는 비록 방계이긴 해도 거슬러 올라가면 무사 가문이긴 합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가문? 그딴 거 없습니다.
차마 겉으로는 말 못해도 속으로는 쌍놈 취급하던 노부나가에 비하면
얘는 진짜 오리지널 백퍼센트 천연 쌍놈입니다.

유행을 선도하고 어쩐지 좀 뽀대가 났던 노부나가와는 다르게
얘는 노는 것도 쌍놈 스타일입니다.
그나마 노부나가 따라한다고 다도를 하긴 하는데 그나마도 졸부 티를 팍팍 냅니다.

히데요시도 이런 자기 약점을 알고 있었죠.
게다가 출신이 워낙 쌍놈이라 스스로 쇼군에 취임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쓴 방법이,
바로 '공가'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서 관백에 취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히데요시는 무사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공가 체계에 편입되었으며,
이때문에 히데요시 정권은 기존의 막부체계와는 다른 통치 체계를 지니게 됩니다.
막부가 아닌 조정의 율령체계를 기반으로 통치하고자 한 것이죠.

자, 이 모습을 본 공가들은 어땠을까요.

지 잘났다고 치고 받으면서 교토까지 홀랑 태워먹은 무사들의 싸움이 끝나고
마지막 승리자를 보니 이건 뭔 족보도 없는 개쌍놈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건 공가들이 기존의 막부 체계를 타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히데요시를 끌어들인 거라고도 볼 수 있죠.
정권의 정당성을 공가에게서 가져온 이상
이전과는 다른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을 테니까요.

겉으로야 히데요시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저 무식한 쌍놈들... 이란 생각이 저변에 깔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사실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일본인 특유의 정서가 
언제부터 유래된 것인지에 대해선 아직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전국시대가 비록 뒤통수와 하극상의 연속이기는 했어도
명목상으로는 '의'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무사상을 칭송하는 건 분명했죠.

하지만 전국시대가 저물어 가고
히데요시에 의해 기존의 무사 정권과는 다른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지면서
이런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어 가게 됩니다.

이러한 경향은 히데요시의 사후, 
정권을 장악하고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는데요
비록 히데요시와는 다르게 정권의 중심을 조정에 둔 것이 아니라 
무사 기뱐의 막부를 성립시키기는 했어도
도쿠가와 역시 궁극적으로는 이전의 무사 시대와는 다른 시대상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전의 다른 막부시대와는 다르게
에도 막부 시대에는 공가들이 상당한 대접을 받았고
정례적으로 교토의 공가들을 천황의 사절 형식으로 에도에 초대해 대접하는 의식도 치렀습니다.

당연히 사회상 역시 변혁을 맞이하게 됩니다.
기존의 무사들처럼 화딱지 난다고 바로 칼부림 하거나 하면
바로 영지를 몰수 당하고 패가망신 하게 되죠.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지배층 간의 얘기고 서민들 상대로야 칼로 썰든 회를 치든 상관이 없었지만 말이죠.


 
이런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사무라이들이 받아들인 건 바로 공가들의 실전 기술이었습니다.
툭하면 칼부터 뽑아드는 무식한 무사 놈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싫어도 익숙해질 수 밖에 없었던 바로 그것.
겉과 속이 다른, 이른바 혼네와 다테마에의 개념이 지배층에도 자리 잡게 된 것이죠.
성질 난다고 에도 시내에서 함부로 칼부림 했다가는 패가망신하게 되니,
이른바 '귀족적인' 대응을 하게 된 셈입니다.



같은 관서 지방임에도
오사카와 교토의 정서가 다른 건 결국 그 지방의 토대가 되는 계층 때문이기도 합니다.

고대로부터 사카이를 비롯해 상인들이 중심 계층으로 활약했던 오사카 지역은
그러한 성향 때문에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익숙하고

근 천년의 세월을 지나 지금까지도 정신적인 수도로 칭송받는 교토는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던 귀족들인 공가의 정서를 이어받아 속마음을 감추는데 능숙해진 것이죠.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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