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대표 33인으로 부르며, 그밖에 만세 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접, 간접적으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보통 민족대표 48인 또는 프랭크 스코필드를 포함 민족대표 49인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모두 만세 운동이 실패한 후에 구속되거나 재판정에 서게 된다. 약 3개월 동안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조선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는 집회인수가 106만여 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자가 4만 7천여 명이었다. 1919년 3월 당시 일제 강점기 조선의 전체 인구는 1,678만 8천400명이었다. 일본인 학자 야마베 겐타로에 의하면 운동의 참여자는 50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한다. 신복룡에 의하면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만세를 부른 사람의 수효는 46만 3086명 정도로 보았다.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면 당시 조선 인구 중 2.76%에서 2.97%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조선총독부의 기록대로라면 전체 국민 중 6.31%가 만세 시위에 참여한 것이다.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에 의한 강경책을 펴던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된다.
1946년 3월 1일 제27회 기념식을 시초로 국가 경축일로 지정되었고,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관한법률〉을 공포함으로써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3‧1 운동은 경성에서 시작되어 불과 수개월 만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일본과 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벌어져 1년여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임종국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60일 동안 1,214회의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출처 :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0200&code=kc_age_40
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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