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뇌르(Flâneur)
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만들어진 ‘목적지 없이 거리로 나와 도시의 군중 속에 몸을 숨겨 철저하게 관찰자로만 도시를 구경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개념입니다.
도심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풍경과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모습, 도시 소음을 그대로 100%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보통 직장을 가거나 뭘 구매하는 등 이동하느라 주변을 놓치는 사람들이 많지만, 플라뇌르는 의도적으로 느리게 걸으며 건물의 질감과 사람들의 표정, 골목의 냄새를 수집합니다. 옛날에 파리에서 거북이를 산책시키는 게 유행하기도 했는데, 거북이의 느린 속도에 맞춰 도시를 아주 미세한 단위까지 관찰하겠다는 플라뇌르들의 의지였습니다.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 목적 없이 걷는 플라뇌르들의 행위는 그 자체로 조용한 저항인 거죠.
그렇다고 플라뇌르들은 도시를 정복하거나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공간이 주는 감각적인 인상들을 자기 내면에 차곡차곡 쌓아나갈 뿐입니다. 군중 속의 고독을 즐겼다고나 할까요?
버추얼 플라뇌르(Virtual Flâneur)
19세기 파리의 플라뇌르 정신을 그대로 디지털 공간으로 옮겨온 개념입니다. 버추얼 플라뇌르들은 게임이 깔아놓은 선형적 트랙에서 탈피해, 가상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독립된 살아숨쉬는 세계로 받아들입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 아니라 그 공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죠.
버추얼 플라뇌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감각적 몰입’입니다. 보통 유저들은 인게임 아이콘이나 나침반, 미니맵 등을 보며 퀘스트 지점으로 질주할때, 버추얼 플라뇌르들은 오히려 미니맵이나 나침반, 아이콘을 끄고 바닥의 재질에 따라 달라지는 발소리나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빛의 각도와 그 변화를 주로 관찰합니다. 개발자가 공들여 만든 물리 엔진과 광원 효과, 환경음을 시스템적인 기능이 아니라 정서적 배경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효율이나 경쟁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로지 가상 세계의 일부가 되어 녹아드는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 버추얼 플라뇌르들의 핵심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게임 속에서 의도적인 지연과 멈춤을 추구합니다. 적을 물리치거나 레벨을 올리는 행위는 이들에게 오히려 몰입을 더 깨뜨리는 행위일 뿐이죠. 대신, 아무것도 없는 산 위에 올라가 해를 지켜보거나, 마을 어귀에 서서 NPC들의 일상적인 루틴을 관찰하며 그 세계가 실제로 살아있는 것 같다는 감각을 즐깁니다. 현실의 플라뇌르들이 도심 속에서 고독을 즐겼듯이, 버추얼 플라뇌르들도 코드와 텍스쳐로 이루어진 가상 세계 속에서 순수한 관찰자로 존재합니다.
결국 버추얼 플라뇌르들에게 게임은 목표를 달성하고 성과를 내야할 과제가 아니라, 언제든 돌아가 머물 수 있는 또 하나의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