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작소설
날개 잃은 자
1화. 전편
방벽
가장 먼저 날개를 펼친 것은 총사령관도, 사령관도 아니었다.
고목나무지대에는 수많은 천족 데바가 모여 있었다.
오래전에 생기를 잃은 거대한 나무들이 뒤틀린 가지를 하늘로 뻗고 있었다. 가지 사이로 스며든 어비스의 푸른빛이 갑옷과 무기 위에서 희미하게 흔들렸다.
무기를 점검하는 소리와 키스크를 옮기는 소리, 흩어진 단원을 찾는 목소리가 메마른 숲을 채웠다.
“인원 다시 확인해!”
“치유성은 포스 뒤쪽에 붙어!”
“중앙에 도착하면 바로 아티팩트부터 공격한다!”
사방에서 명령이 오갔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천족 전체를 향한 명령은 아니었다.
각 레기온이 자신의 단원을 불러 모으고, 자신들이 향할 전장을 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라이네는 대검을 등에 멘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에게는 첫 공명전이었다.
이렇게 많은 데바를 한자리에서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고목 사이마다 푸른 날개가 보였고, 머리 위로는 늦게 도착한 데바들이 끊임없이 내려왔다.
갑옷과 무기의 형태도, 등에 새겨진 레기온의 문양도 제각각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화려한 계급 문양을 지닌 데바들이었다.
총사령관과 사령관.
대장군과 장군.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주변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라이네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곧 저들 가운데 누군가 앞으로 나설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 아티팩트를 먼저 공격할지.
어느 레기온이 선봉을 맡을지.
마족이 어느 방향으로 나타나면 누가 그들을 막을지.
높은 계급을 가진 사람이 천족의 병력을 나누고, 수많은 레기온을 하나의 군대처럼 움직이게 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아무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총사령관은 자신의 레기온 포스장들과 중앙 아티팩트까지의 최단 경로를 확인하고 있었다.
한 사령관은 공격대를 둘로 나누어 어느 방향에서 아티팩트에 접근할 것인지 지시했다.
대장군과 장군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단원들을 정비하고, 아티팩트가 깨어나는 순간 가장 빠르게 공략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누구도 전쟁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진지했다.
“중앙에 도착하면 멈추지 마.”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레기온의 지휘자가 단원들에게 말했다.
“마족이 보여도 일단 아티팩트부터 붙는다. 초반 공략 시간을 놓치면 축복이 줄어든다.”
“마족이 뒤를 잡으면 어떻게 합니까?”
“다른 쪽에서 막겠지.”
그 말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티팩트를 오래 공략한 데바일수록 더 많은 주신의 축복을 받는다.
강해진 육체와 예민해진 감각, 더욱 단단해진 날개는 아티팩트가 사라진 뒤에도 남았다.
매달 아티팩트는 다시 생성되었지만, 이미 얻은 축복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 전쟁에서 벌어진 격차는 다음 전쟁으로 이어졌다.
다음 전쟁에서 벌어진 차이는 그다음 전쟁에서 더욱 커졌다.
그러니 누구도 아티팩트 공략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높은 계급의 데바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의 힘만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믿고 따르는 단원들이 있었고, 그 단원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축복이 필요했다.
자신의 레기온을 아티팩트로 데려가는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공략을 시작하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축복을 얻으려는 것 역시 잘못이 아니었다.
문제는 모두가 같은 선택을 한다는 데 있었다.
각자의 레기온을 위해.
각자의 단원들을 위해.
다음 전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모든 레기온이 아티팩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아무도 그곳으로 이어지는 길을 바라보지 않았다.
라이네는 높은 계급의 데바들을 번갈아 살펴보다가 옆에 서 있던 송설에게 물었다.
“누가 전체 명령을 내립니까?”
그의 키보다 긴 포크 형태의 법봉을 어깨에 기대고 있던 송설이 고개를 돌렸다.
“전체 명령?”
“예.”
라이네는 높은 계급의 데바들이 모여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총사령관이나 사령관이 전장을 나누는 것 아닙니까?”
송설도 그쪽을 잠시 바라보았다.
“아니.”
너무 간단한 대답이었다.
“그럼 저 계급은 왜 있는 겁니까?”
“많이 싸웠고, 그만큼 강하다는 표시지.”
“전장을 지휘할 권한은 아닙니까?”
“적어도 모두를 따르게 만들 권한은 아니야.”
라이네는 그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아무도 천족 전체를 지휘하지 않습니까?”
“지휘하려는 사람은 있을 수도 있겠지.”
송설이 어깨를 가볍게 움직였다.
“다만 각 레기온이 자기 판단으로 움직이는 구조라서, 하나로 묶이기는 쉽지 않아.”
“높은 계급이 명령해도 말입니까?”
“자기 레기온은 잘 따르겠지.”
송설은 아티팩트 공략을 준비하는 레기온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사람들도 다 이유가 있어서 저렇게 움직이는 거야. 아티팩트를 공략해야 축복을 받고, 그래야 다음 전투에서 더 오래 버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천족 전체는…….”
“그래서 더 어려운 거지.”
송설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이전보다 조금 부드러워졌다.
“각자 옳은 선택을 하고 있는데, 그게 모이면 빈틈이 생기기도 하니까.”
라이네는 다시 총사령관과 사령관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자신의 레기온을 훌륭하게 지휘하고 있었다.
다만 천족 전체를 지휘하지 않을 뿐이었다.
송설이 손가락으로 라이네의 대검 끝을 가리켰다.
“그것보다 검 좀 낮춰. 옆 사람 날개 자르겠다.”
라이네는 급히 대검을 옆으로 눕혔다.
검끝이 향해 있던 곳의 데바가 그를 흘겨보고 한 걸음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나한테 사과할 건 아니고.”
송설은 라이네의 갑옷과 장비를 차례대로 살폈다.
가슴의 고정끈.
허리에 묶인 회복 물약.
등에 멘 대검의 위치.
마지막으로 날개의 상태까지 확인한 뒤 물었다.
“키스크에서 부활해 본 적 있어?”
라이네는 잠시 말을 잃었다.
죽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이 너무도 태연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아직 없습니다.”
“처음 부활하면 바로 일어서지 마.”
“왜 그렇습니까?”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송설은 법봉 끝으로 자신의 다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눈은 떴는데 몸이 아직 죽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 숨부터 쉬고, 손가락부터 움직여.”
“그다음에는요?”
“자기가 어디서 죽었는지 확인해야지.”
라이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갑니까?”
송설의 입가에 남아 있던 미소가 조금 희미해졌다.
“가야 하면.”
짧은 대답이었다.
라이네는 더 묻지 못했다.
그때 송설이 멀리서 가방과 로브 안쪽을 연달아 뒤지는 남자를 발견했다.
“김세.”
남자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왜?”
“또 뭐 없어?”
“다 있어. 확인하는 중이야.”
“그 말을 하는 사람은 보통 뭔가 없던데.”
김세는 가방을 한 번 더 뒤적이다가 손을 멈췄다.
“법서가 어디 있지?”
송설은 말없이 그의 허리를 가리켰다.
법서는 처음부터 그곳에 매달려 있었다.
주변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김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법서의 끈을 고쳐 맸다.
“있네.”
라이네의 굳어 있던 어깨도 조금 풀렸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대열 앞쪽에 서 있던 단장이 손을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우주 레기온의 단원들이 차례로 입을 다물었다.
라이네도 급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단장의 갑옷에 새겨진 어비스 계급은 장교였다.
총사령관도, 사령관도 아니었다.
대장군이나 장군은 더더욱 아니었다.
고목나무지대에 모인 수많은 데바 가운데 단장보다 높은 계급을 가진 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단장은 천족 전체에 명령할 권한이 없었다.
다른 레기온을 원하는 곳으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티팩트 공략을 포기하고 늪지대로 가라고 요구할 명분도 없었다.
단장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레기온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이들과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총사령관과 사령관들은 중앙 아티팩트까지의 거리를 확인하고 있었다.
단장은 중앙을 지나 이어지는 길을 보고 있었다.
대장군과 장군들은 아티팩트에 가장 먼저 닿을 수 있는 진입로를 살폈다.
단장은 그 진입로 옆으로 뻗은 늪지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천족의 날개는 보이지 않았다.
단장이 늪지대의 위험을 처음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지난 전투에서도 그곳은 비어 있었다.
모두가 중앙 아티팩트로 몰린 뒤에야 검은 날개들이 늪지대를 통과해 중앙의 옆을 찔렀다.
아티팩트를 공격하던 천족은 앞과 옆에서 동시에 밀려오는 마족을 막지 못했다.
뒤늦게 병력을 돌렸지만, 그때는 이미 중앙이 깊숙이 포위된 뒤였다.
한 번만 있었던 일은 아니었다.
모두가 자신의 레기온을 위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모일 때마다 천족 전체에는 같은 빈틈이 생겼다.
전쟁이 끝나면 다음에는 다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다음 달 아티팩트가 다시 생성되면 모든 것은 처음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축복을 얻어야 했으니까.
더는 뒤처져서는 안 되었으니까.
누군가 늪지대를 막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아무도 가지 않았다.
단장은 그 반복을 알고 있었다.
다른 레기온에 늪지대로 가라고 명령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단장이 보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사람들뿐이었다.
그가 손을 내렸다.
“인원 확인.”
각 포스에서 곧바로 대답이 이어졌다.
송설도 자신의 단원들을 돌아보며 숫자를 확인했다.
“전원 있어.”
김세가 뒤늦게 손을 들었다.
“나도 있어.”
송설이 그의 허리를 내려다보았다.
“법서는?”
김세가 자신 있게 끈을 두드렸다.
“여기.”
짧은 확인이 끝났다.
고목나무지대의 다른 레기온들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아티팩트가 완전히 깨어나는 순간에 맞춰 가장 빠른 경로로 진입하기 위해 마지막 준비를 이어가고 있었다.
라이네 역시 우주 레기온이 중앙 아티팩트로 향할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 자신도 처음으로 주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중앙에서 오래 버티고, 아티팩트 공략에 힘을 보태면 자신도 지금보다 강한 데바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레기온보다 먼저 출발하려는 것이라 생각했다.
단장은 중앙 아티팩트의 푸른빛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늪지대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가 먼저 간다.”
대열에 낮은 긴장감이 흘렀다.
아직 다른 레기온은 움직이지 않았다.
라이네가 자신도 모르게 송설을 바라보았다.
송설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어깨에 기대고 있던 법봉을 바로 세웠다.
단장이 명령했다.
“중앙을 지나 늪지대 입구로 이동한다.”
라이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늪지대.
아티팩트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아무리 오래 싸워도 주신의 축복을 받을 수 없었다.
단장은 짧게 덧붙였다.
“마족이 도착하기 전에 길목을 잡는다.”
누구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우주 레기온의 단원들이 일제히 날개를 펼쳤다.
수십 쌍의 푸른 날개가 동시에 펼쳐지며 거센 바람이 일었다. 고목 아래 쌓여 있던 마른 잎들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주변에 있던 다른 레기온의 데바들이 그제야 우주를 돌아보았다.
라이네도 늦지 않게 날개를 꺼냈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그가 상상했던 첫 출정과는 달랐다.
천족 전체를 향한 출정 명령은 없었다.
다른 레기온들은 아직 아티팩트가 깨어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침묵 속에서 단장이 가장 먼저 땅을 박찼다.
우주 레기온의 데바들이 그 뒤를 따랐다.
라이네도 대열의 끝에서 날개를 움직였다.
우주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아티팩트가 아니었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은 늪지대의 길목이었다.
우주 레기온이 고목나무지대를 벗어났다.
아래로 뒤틀린 나무들이 빠르게 밀려났다.
앞에는 중앙 아티팩트가 있었다.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거대한 수정 구조물이었다. 푸른빛이 표면을 따라 희미하게 흐르고, 복잡한 문양들이 수정 사이에서 떠올랐다 사라졌다.
전쟁이 시작되면 저 빛은 하늘까지 솟아오를 것이다.
수많은 데바가 그 아래 모여 마족과 싸우고, 아티팩트를 공격할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남은 자들에게 주신의 축복이 내려올 것이다.
라이네는 대열 끝에서 중앙 아티팩트를 바라보았다.
가까워질수록 수정 구조물은 더욱 거대해졌다.
아직 전투는 시작되지 않았다.
마족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저곳이 오늘 가장 많은 축복이 내려올 장소라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우주 레기온은 중앙을 향해 곧게 날았다.
라이네는 자신도 모르게 속도를 높였다.
첫 공명전.
첫 아티팩트 공략.
처음으로 받게 될지도 모르는 주신의 축복.
지금 출발한 레기온은 우주뿐이었다.
이대로라면 누구보다 먼저 중앙에 도착할 수 있었다.
라이네는 앞서가는 단장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단장은 늪지대 입구로 이동하기 전에 중앙을 먼저 확보하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 기대는 중앙 아티팩트가 가까워졌을 때 무너졌다.
단장이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대열의 선두가 기울었다.
우주 레기온은 중앙을 향하던 경로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라이네는 처음에는 진입 방향을 바꾸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티팩트 주변의 지형을 돌아 더 유리한 곳으로 접근하려는 줄 알았다.
그러나 대열은 멈추지 않았다.
푸른 수정 구조물이 옆으로 밀려났다.
아티팩트와의 거리가 다시 벌어졌다.
우주 레기온은 중앙을 그대로 지나쳤다.
라이네가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눈앞을 채우던 푸른빛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고목나무지대에서는 그제야 날개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뒤늦게 출발한 천족 레기온들이었다.
수십 쌍의 푸른 날개가 중앙 아티팩트를 향해 일제히 몰려왔다.
그들은 우주가 지나온 길을 따라 날았다.
그러다 중앙을 벗어나 늪지대로 향하는 우주의 대열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곧 바람 사이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쟤들은 어디 가는 거야?”
“방향 잘못 잡은 것 아니야?”
“늪지대 쪽인데.”
“벌써?”
거리는 멀었지만 데바의 감각은 예민했다.
흩어지는 말들이 끊겨 들렸다.
“마족도 아직 안 왔잖아.”
“저기로 가면 아티팩트는 못 치는데.”
“또 저러네.”
짧은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라이네가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날아오는 데바 몇 명이 우주를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늪지대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서 뭘 하려고?”
“길목을 막겠다고 서 있겠지.”
“누가 시켰는데?”
“아무도.”
“그런데 왜 가?”
대답 대신 웃음이 터졌다.
비웃음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웃음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중앙에 가 봐야 오래 버티지도 못하잖아.”
“아티팩트 공략할 전력이 안 되니까 저기로 빠지는 것 아니야?”
“그래도 제일 먼저 날아가니까 뭔가 있어 보이기는 하네.”
“장교가 또 지휘관 놀이하는 거겠지.”
라이네의 손이 대검 자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몸을 돌리려는 순간, 옆에서 법봉이 뻗어왔다.
송설이 라이네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앞 봐.”
라이네는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들으셨습니까?”
“들었지.”
송설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십니까?”
“가서 뭐라고 하게?”
“우리가 왜 이쪽으로 가는지 설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설명하면 따라올 것 같아?”
라이네는 대답하지 못했다.
송설은 중앙으로 몰려가는 날개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도 자기 할 일을 하러 가는 거야.”
“하지만 우리를 비웃고 있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보상도 없는 곳으로 가장 먼저 달려가고 있으니까.”
“우리가 틀렸다는 겁니까?”
송설이 라이네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모르지.”
“예?”
“마족이 이쪽으로 오지 않으면 우리가 틀린 거야.”
라이네의 입이 다물어졌다.
송설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아무도 몰라.”
우주는 계속 날았다.
뒤에서는 더 많은 천족 병력이 중앙 아티팩트로 모여들었다.
가장 가까운 자리를 선점하려 속도를 높이는 포스와 조금이라도 먼저 공격을 시작하기 위해 서로의 앞을 가로지르는 데바들이 뒤엉켰다.
총사령관과 사령관, 대장군과 장군의 계급 문양도 그 안에 섞여 있었다.
강한 자들이 중앙으로 모이고 있었다.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다.
강한 데바가 아티팩트를 오래 공격해야 점령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들이 더 많은 축복을 받아 강해지면 다음 전쟁에서 천족은 더 오래 버틸 수 있었다.
누군가는 반드시 아티팩트를 공략해야 했다.
문제는 모두가 그 누군가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라이네는 멀어지는 중앙을 바라보았다.
아티팩트 주변에는 이미 충분해 보일 만큼 많은 천족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도 푸른 날개들은 계속 중앙으로 향했다.
반대로 우주가 향하는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푸른빛이 등 뒤로 멀어질수록 주변의 색도 바뀌었다.
마른 땅이 검붉게 젖었다.
살아 있는 나무는 점점 줄어들었고, 썩은 뿌리가 땅 위로 불쑥 솟아 있었다. 낮게 깔린 붉은 안개가 발밑을 덮기 시작했다.
늪지대였다.
중앙 아티팩트와 늪지대 사이에는 좁은 길이 하나 놓여 있었다.
한쪽에는 깊게 꺼진 진흙 웅덩이가 이어졌고, 다른 한쪽에는 굵은 뿌리가 뒤엉킨 비탈이 솟아 있었다.
많은 병력이 한꺼번에 통과하기에는 불편한 길이었다.
반대로 막기에는 좋은 장소였다.
단장이 속도를 낮췄다.
대열 전체가 그를 따라 지상으로 내려갔다.
푸른 날개들이 차례로 접히며 젖은 땅 위에 내려섰다.
라이네의 장화 아래에서 진흙이 끈적하게 울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마족은 보이지 않았다.
검은 날개도, 무기 부딪치는 소리도, 정찰병의 신호도 없었다.
멀리 중앙에서 들려오는 천족의 함성만 희미했다.
라이네는 늪지대 안쪽을 바라보았다.
붉은 안개.
썩은 나무.
고여 있는 검은 물.
그뿐이었다.
정말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뒤에서 들었던 웃음이 다시 떠올랐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 아니냐는 말.
중앙에 가 보아야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말.
장교가 지휘관 놀이를 한다는 말.
라이네는 주변 단원들을 살폈다.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웃지 않았다.
단장은 도착하자마자 늪지대 입구에서 가장 좁은 지점을 가리켰다.
“첫 방어선은 여기다.”
거대한 방패를 든 수호성들이 앞으로 이동했다.
“수호성은 전면. 검성은 그 뒤에 선다.”
라이네도 다른 검성들을 따라 자리를 옮겼다.
“호법성과 치유성은 양쪽 비탈 아래. 마도성과 궁성은 후방 고지로.”
김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지가 어디야?”
송설이 옆의 낮은 바위 언덕을 가리켰다.
“저기.”
“저게 고지야?”
“여기서는 저게 제일 높아.”
김세는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법서를 붙잡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단장은 길목 뒤쪽으로 걸어가며 땅의 상태를 확인했다.
주변의 바위와 나무뿌리를 차례대로 살핀 뒤 한 지점을 가리켰다.
“키스크는 여기 세운다.”
단원 하나가 물었다.
“입구에서 너무 멀지 않습니까?”
“지난번에는 가까웠다.”
단장의 대답은 짧았다.
“첫 번째 돌파에서 파괴됐다.”
아무도 다시 묻지 않았다.
키스크가 옮겨졌다.
푸른 수정이 젖은 땅 위에 세워지고, 기단에서 흘러나온 빛이 서서히 형태를 갖추었다.
날개를 둥글게 펼친 여신의 형상이 붉은 안개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빛이 주변의 어둠을 밀어냈다.
단장은 첫 번째 방어선으로 돌아왔다.
“방패 간격을 좁혀.”
수호성들이 서로의 방패를 맞붙였다.
“너무 좁습니다.”
“마족이 밀어붙이면 벌어진다.”
단장이 직접 방패 사이의 간격을 확인했다.
“지금 붙여 놓아야 버틴다.”
다음은 검성들의 자리였다.
“앞줄이 밀리면 바로 들어간다.”
라이네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두 번째 줄.
수호성의 방패 사이로 적이 들어오면 막아야 하는 자리였다.
단장이 라이네 앞에서 멈췄다.
잠시 시선이 마주쳤다.
라이네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단장의 시선이 그의 대검으로 내려갔다.
“첫 전투인가?”
“예.”
“앞으로 나가지 마라.”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라이네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검성은 앞에서 싸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방패가 무너질 때까지 기다려.”
단장이 방어선 앞의 땅을 가리켰다.
“저쪽은 진흙이 깊다. 발이 빠지면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죽는다.”
라이네가 늪지대를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는 땅이었다.
“어떻게 아십니까?”
단장은 잠시 그곳을 바라보았다.
“빠져 봤으니까.”
그 말을 남기고 다음 자리로 이동했다.
라이네는 단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계급이 알려 준 지식이 아니었다.
지도에서 얻은 정보도 아니었다.
직접 들어갔고.
직접 무너졌고.
직접 죽어 본 사람이 기억하는 것이었다.
방어선은 빠르게 만들어졌다.
첫 번째 선과 두 번째 선.
밀려날 경우 후퇴할 길.
키스크까지 이어지는 부활자의 복귀 경로.
누구도 크게 외치지 않았다.
단원들은 각자의 자리를 알고 있다는 듯 익숙하게 움직였다.
라이네만이 한 박자씩 늦었다.
송설이 지나가며 그의 팔을 잡아 안쪽으로 당겼다.
“거기 서 있으면 방패가 밀릴 때 같이 깔려.”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말고 기억해.”
송설은 곧바로 다른 단원에게 향했다.
준비가 끝났다.
우주 레기온은 늪지대 입구를 가로막고 섰다.
그들 뒤에는 중앙 아티팩트가 있었다.
그들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람조차 거의 불지 않았다.
검붉은 물에서 기포가 올라왔다가 힘없이 터졌다.
안개가 나무 사이를 천천히 흘렀다.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이쪽으로 오지 않는 것 아닙니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중앙에서 함성이 터졌다.
푸른 빛기둥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아티팩트가 완전히 깨어난 것이다.
전투가 시작됐다.
하지만 늪지대는 여전히 조용했다.
라이네는 대검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가 다시 움켜쥐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의심이 커졌다.
지금 중앙에 있었다면 이미 아티팩트를 공격하고 있었을 것이다.
주신의 축복을 얻을 시간을 쌓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오지 않는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뒤에서 비웃던 데바들의 말이 맞는 것은 아닐까.
우주는 아무도 오지 않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장의 과거 경험이 이번에는 틀린 것이 아닐까.
라이네가 단장을 바라보았다.
단장은 움직이지 않았다.
늪지대 안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초조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설명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그때였다.
붉은 안개 안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철벅.
물이 밟히는 소리였다.
라이네가 고개를 들었다.
다시 한번.
철벅.
이번에는 다른 방향이었다.
철벅.
철벅.
철벅.
서로 다른 곳에서 소리가 이어졌다.
방어선 위로 긴장이 퍼졌다.
수호성들이 방패를 세웠다.
검성들이 무기를 뽑았다.
송설의 법봉 끝에 빛이 맺혔다.
단장이 손을 들어 올렸다.
“조용히.”
모든 소리가 멈췄다.
붉은 안개가 흔들렸다.
처음에는 그림자 하나였다.
나무 사이로 검은 형체가 스쳐 지나갔다.
그 뒤로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
그림자는 점점 많아졌다.
마침내 안개 속에서 검은 날개 하나가 펼쳐졌다.
라이네의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마족의 선발대였다.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단장은 손을 내리지 않았다.
“아직이다.”
검은 날개가 하나둘 안개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열.
스물.
서른.
끝이 아니었다.
그 뒤편의 붉은 안개가 서서히 새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단장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전원 대기.”
라이네는 그제야 알았다.
우주 레기온은 아무도 오지 않는 길을 막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오기 전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