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8. 31
우리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까운, 우리를 닮은 사람에게 가장 날카로운 칼날을 세웁니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그의 저서 《문명 속의 불만》(Das Unbehagen in der Kultur, 1930)에서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이라는 개념을 말합니다. 그는 이 개념으로 서로 이웃한, 거의 닮은 집단들 사이의 반목에 주목합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언어가 매우 유사합니다. 라틴어에서 갈라져 나온 두 언어의 화자들은 심지어 서로의 언어를 알아듣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이슬람의 지배를 이겨내는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을 함께 겪었고, 가톨릭 국가로서 15~16세기 대항해시대를 나란히 이끌었습니다. 그럼에도 포르투갈은 쌍둥이처럼 닮은 스페인에 흡수될까 걱정하며 '우리는 스페인이 아니다'라는 국민적 정서를 키웁니다. 이런 감정은 북독일과 남독일 사이에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도 똑같이 흐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에 4·19로 맞섰고, 전두환·노태우의 5·18에 항거했으며, 박근혜·윤석열의 국정농단에 촛불로 저항했던, 참으로 닮아 있는 우리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닮은 이들이 서로를 겨누는 일은, 역사 속에서 늘 되풀이되어 온 오래된 장면입니다.
가장 선명한 예가 프랑스혁명입니다. 왕이라는 공동의 적이 쓰러지자, 함께 혁명을 이끌던 이들은 이제 서로를 겨누기 시작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반혁명파와 온건파는 물론, 혁명 진영 안에서 혁명성이 의심되는 이들까지 차례로 숙청했습니다. 처음엔 그리 크지 않았던 분파 사이의 차이가, 이제 목숨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서로를 '혁명의 배신자'로 몰아 형장으로 보냈고, 한때 혁명을 이끌던 당통마저 그렇게 처형되었습니다. 그리고 당통을 보낸 로베스피에르 자신도 몇 달 뒤 같은 칼날 위에 올랐습니다. 혁명은 밖의 적이 아니라 안의 동지를 잡아먹으며 끝났습니다.
우리가 그때의 프랑스처럼 동지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존중의 언어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어떤 평론가들은 오직 자신의 주장만이 순수하고 정직하다 여기며, 반대편의 목소리를 거짓의 속삭임처럼 치부해버립니다.
그런데 이것이 평론가들만의 일일까요? 우리의 언어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SNS에서, 어제까지 같은 편이던 이를 조롱하고 '변절자'라 부릅니다. 저들이 파는 말투를, 이제 우리가 사서 씁니다. 그리고 그 말들로 가득 찬 화면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우리 모두를 지치게 합니다.
우리는 12·3 내란을 함께 이겨낸 사이입니다. 내란의 겨울, 소스라치게 추운 광장에서 서로의 온기로 지켜낸 동지입니다. 내란을 이겨내야 한다는 하나의 큰 뜻 앞에서, 우리의 작은 소망 따위는 잠시 눌러둘 수 있었습니다. 더 큰 목적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억강부약 대동세상이라는 목적은 같아도, 그리로 가는 길 위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가리킵니다. 다른 것은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다름을 우리가 어느새 조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생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름을 서로 알아본다는 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서로 닮았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닮은 우리가, 프랑스혁명이 그러했듯 말로 서로를 단두대에 올릴 필요까지 있을까요?
한동안 이 광경을 지켜보며, 차마 글을 쓸 수 없었습니다. 성숙함이란 생각이 같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생각을 조롱이 아니라 말로, 경멸이 아니라 논쟁으로 마주하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그 성숙함을 증명할 시간이 아닐까요?
많은 생각 가지게 합니다.
우리는 함께 달려왔었습니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기어이 다시 민주 정부 만들었습니다.
특별한 무언가 바라지 않았습니다.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것도 아닙니다.
이제 앞으로 우리의 생활 밝았으면 좋겠습니다.
희망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보편적으로 대다수 위한 세상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