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규(姜宇奎, 1855~1920) 의사는 일제강점기 최고령 독립운동가이자 한의사 출신의 의열투쟁가입니다. 1919년 당시 65세의 노구를 이끌고 제3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떨쳤습니다. [1, 2, 3]
1. 주요 생애와 민족 교육 활동
출생과 인술 베풀기: 1855년 평안남도 덕천군에서 태어나 형에게 한학과 한방 의술을 배웠습니다.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주하여 한약방을 운영하며 주민들에게 인술을 베풀었습니다. [1, 2, 3]
만주 망명과 신흥동 개척: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기자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만주 길림성 요하현으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한인 동포들과 함께 '신흥동'이라는 마을을 개척하고 신학문을 가르치는 광동학교를 설립해 청소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했습니다. [1, 2, 3]
2. 남대문역 폭탄 의거 (1919년 9월 2일)
의거의 계기: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세 시위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여 직접적인 타격을 가할 목적으로 조선 총독 처단을 결심했습니다. 러시아 군인에게서 구입한 수류탄을 몸에 숨겨 서울로 잠입했습니다. [1, 2, 3]
거사 진행: 1919년 9월 2일, 새로 부임하는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남대문역(현 서울역) 광장에 도착해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폭탄을 던졌습니다. [1, 2]
결과와 파장: 폭탄이 다소 떨어진 곳에서 폭발하여 사이토 총독에게는 타격을 주지 못했으나, 일제 관원과 경찰, 신문기자 등 37명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비록 처단에는 실패했지만, 백발노인의 이 의거는 일제에게 강력한 경고를 날리고 전 세계에 조선의 독립 열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1, 2, 3, 4]
3. 체포와 순국
거사 직후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빠져나왔으나, 보름 뒤인 9월 17일 친일파 경찰 김태석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으며,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중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습니다. 오늘날 옛 남대문역 자리인 서울역 광장에는 그의 기개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1,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