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서방 교회의 대분열과 백년전쟁
문제는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돌아간지 1년만에 죽으며 발생했습니다. 추기경들은 프랑스의 입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탈리이아인을 교황 후보로 밀었고, 결국 이탈리아인 우르바노 6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됩니다. 그러나 프랑스인 추기경 13명은 이 결과에 불복, 프랑스인 추기경 로베르를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로 옹립합니다. 이를 서방 교회의 대분열이라고 합니다.
첫 글에서 1054년 교회가 카톨릭과 정교회로 분열되었으며, 이를 동서대분열이라고 칭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이제 300년이 지나 카톨릭 교회는 내부의 갈등으로 분열되고 있었으며 정교회는 동방의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십자군이라는 악행에 대한 징벌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네요.
단순히 교황의 자리를 두고 싸우는 것이었다면 크게 확전이 안됐겠지만, 이 교황령과 과 프랑스의 대립을 유럽의 국가들이 양측을 지지하는 입장이 갈리면서 일이 커지게 됩니다. 이중 가장 대표적인 갈등이 백년 전쟁인데, 우선 백년 전쟁의 배경을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 에드워드 3세의 초상화
우선 1328년에 프랑스의 왕 샤를 4세가 병으로 죽게 됩니다. 문제는 샤를 4세가 일찍 죽는 바람에 직계 후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래 법률대로라면 계승권 1위는 샤를 4세의 외손자였던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이며, 계승권 2위는 샤를 4세의 사촌 필리프 6세였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귀족들은 영국의 왕이 프랑스의 왕을 겸하면 왕의 힘이 너무 강해져 귀족들이 탄압받을것을 염려, 같은 프랑스인이기도 한 필리프 6세를 왕으로 추대합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으나, 당시 스코틀랜드의 독립전쟁이 한참이었기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의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고, 결국 스코틀랜드가 독립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독립, 에드워드 3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어 프랑스에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합니다.
▲ 필리프 6세의 초상화
이어 에드워드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노려 필리프 6세는 프랑스 내의 영국 왕의 영토를 몰수할 계획을 꾸미는데, 노르망디 공작 "정복자" 윌리엄이 영국의 왕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국 왕의 영지중 하나가 되어 상속되온 노르망디와 플랜테저넷 왕조를 연 헨리 2세가 아키텐의 여공작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역시 부계로 상속된 아키텐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 아키텐의 위치
당연히 멀쩡한 봉토를 회수하려면 명분이 필요했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영국 왕에게 "주군에게 무력으로 대적했다"는 반역죄를 씌우려는 목적으로 프랑스는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을 지지, 영국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가라앉게 됩니다. 1년 후에 스코틀랜드는 다시 영국에 병합되게 되고, 무력 충돌이 시작되게 됩니다. 이어 프랑스와 관계가 험악했던 부르고뉴와 플랑드르가 영국을 지지하면서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선전포고, 백년전쟁의 막이 오릅니다.
당연히 프랑스를 적대하는 국가들은 서방 교회의 갈등에서 이탈리아의 교황청을 지지했고, 영국을 적대하는 국가들은 프랑스를 지지하게 됩니다. 이로써 서방 교회의 분열은 정치적, 세속적 전면전까지 확대되게 됩니다.
23. 대분열의 지속과 흑사병
대분열이 영국-플랑드르-부르고뉴 동맹과 프랑스-카스티아 연합의 전면전으로 확대되면서 이제는 더 이상 교회의 높으신 분들 싸움인 것이 아니라 민중들에게도 체감되는 사건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전쟁은 당연히 징병과 전투, 점령된 지역에 대한 약탈을 수반하므로 평민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줬는데, 설상가상으로 동쪽에서 흑사병이 전래되기 시작합니다.
▲ 흑사병이 창궐한 유럽의 도시
흑사병, 그러니까 페스트는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유래된, 설치류에 매개로 하는 전염병입니다. 페스트는 치명적으로 높은 전염성과 치사율을 보유한 질병으로, 21세기 현대에도 제 1종 전염병으로 분류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흑사병은 처음에 킵차크 칸국의 군대로부터 동로마 제국으로 감염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며, 이후 카파 포위전에서 빠져나온 보균자 시칠리아 선원들이 서유럽에 이 질병을 옮기게 됩니다.
▲ 흑사병의 확산 과정
흑사병에 죽은 인원은 전 세계적으로 적게는 7천 5백만 명에서 많게는 2억명정도로 추산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농노를 기반으로 하는 봉건제는 완전히 붕괴하게 됩니다.
이와중에도 교회는 서로가 진짜 교황이라고 주장하며 허구한날 서로를 파문하며 싸웠고, 이에 대한 반발로 롤라드파나 후스파, 공의회수의파같은 이단들이 세를 얻어 기존 교회들과 무력 충돌을 벌이기도 해 유럽엔 생지옥이 펼쳐지게 됩니다.
이 싸움에 지친 추기경들이 피사 공의회에서 모여 기존의 두 교황 모두를 폐위하고 새로 알렉산드르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한다고 선언했으나, 기존의 교황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교황이 셋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심지어 백년전쟁의 격화로 아비뇽 교황청마저 프랑스 지지파와 부르고뉴 지지파로 분열되어 잠시동안은 교황이 넷이라는 황당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24. 중세의 끝
교황의 자리를 두고 싸운 이 일련의 분쟁들, 그동안에 닥친 흑사병이라는 희대의 재앙에 대한 교회와 귀족들의 무기력함, 그리고 농노 기반 경제의 붕괴는 유럽을 이전과는 다른 세계로 만들었습니다. 봉건제는 무너졌으며, 자치권을 쟁취한 자유 도시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게 되어 부르주아지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상인들은 새로운 교역로와 부, 명예를 위해 새로운 땅을 탐색했고, 이는 1492년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전으로 이어지게 되죠
또한 교황의 자리를 둔 서방 교회의 대분열은 아비뇽 유수 140년만인 1449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협상과 전쟁을 통해 다른 교황들을 폐위하면서 로마 교황청의 교황 니콜라오 5세가 유일한 교황으로 남으면서 종식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백년전쟁은 1453년에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게 되고, 프랑스는 이 전쟁을 통해 완전한 중앙집권화에 성공, 봉건제가 몰락하고 전제 군주정이 시작되게 됩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세속 군주들과 동등했던 교회는 마침내 세속 군주들의 봉신으로 전락하게 되죠.
같은 해, 동방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되어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게 되어 우리가 중세라고 알던 세계의 판도는 사라지게 되고, 이제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룬 국가들이 등장하는 근대가 시작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1453년을 중세의 끝이라고 합니다.
중세라는 700년에 달하는 세월동안 수많은 이들이 성지 회복을 위해, 명예를 위해, 부를 위해, 왕이 되기 위해 싸웠으나 결국 그들의 이름은 역사책에서나 등장할 뿐 현재에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들의 땅이 아니며, 부는 기업들의 것이고, 만인의 위에 군림하는 왕은 사라지고 국민이 뽑는 대통령이 나라를 이끄니 인생무상을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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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엔 세계의 명문가들에 대한 연작을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