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정착민으로 시작했던 인류 문명은 우주선을 쏘아올리면서 끝났다. 지구인들은 박수 치고 서로를 얼싸안으며 자신들이 이룩해낸 과학의 산물을 자랑스러워 했을 게다, 아마도. 3인칭 전지적 유저의 시점에서 바라보니 실제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우주선을 타고 떠나간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를 걱정하는 모습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만반의 상황을 각오하고 떠났으니 당장은 희망적인 미래가 펼쳐질 거라고 생각해서일까? 뭐, 그럴 수도 있다. 무엇이 있을지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어딘가. 그 곳에 무사히 착륙할 수 있는 것부터도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살면서 접해왔던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상상 속의 세계'라는 건 종종 그 한계를 뛰어넘곤 했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세상이지만, 결코 그 상상력으로 모든 것을 채울 수 없는 아이러니라고 할까.
시드마이어가 이끄는 파이락시스 게임즈의 문명 시리즈 신작이 바로 그 '상상을 뛰어넘는 영역'에 정식 도전장을 냈다.
지금까지의 문명 시리즈와는 다르다. 과거 어느 시점엔가 발견되었던 요소들을 연구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토대로 한 테크트리가 만들어졌던 전작들. 승리를 위해 여러 가지 경로를 택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 방향은 대개 '과거 → 현재'라는 커다란 방향성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미래적인 요소가 약간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지금까지의 '문명'은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역사가 본연의 포인트였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아예 대놓고 미래다. 정착민 대신 정찰유닛을 통해 영역을 넓혀나가고, 자원을 획득해 세력을 넓혀나가는 기본 구조는 같다. 돈 대신 에너지를 주 자원으로 사용하고,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행위가 지구 밖 어딘가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다를 뿐.
여기에 몇 가지 핵심 요소가 더해지면서 수많은 갈래로 플레이해볼 수 있는 분기가 만들어진다. 먼저 '방사형의 테크 웹'. '문명: 지구를 넘어서'의 기술 발전은 어느 한 방향이 아닌 사방팔방으로 뻗은 네트워크형으로 이루어진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시대의 기술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지 알 수 없기 때문. 그 옛날 가죽옷 입고 괴상한 소리로 의사소통하던 원시인들이 오늘날 전자기기 하나 켜놓고 바다 건너 저편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을지를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두 번째는 세 가지의 '이데올로기'. 각각 '조화', '정화', '우월'로 번역되는 세 가지 이념은 세력의 발전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외계생명체들과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 행성을 정화해 지구와 같은 환경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기술적 우월함을 앞세워 정복 일변도의 정책을 펼칠 것인가.
이 각각의 이데올로기는 세력의 전체적인 방향성을 결정함과 동시에 수많은 경우의 수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똑같이 우월주의를 메인으로 택한 유저라 해도 다른 두 이데올로기의 수치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퀘스트 시스템'이다. 턴을 진행하다보면 무작위로 퀘스트가 발생하게 되며, 이것을 어떻게 진행하느냐에 따라 향후 게임 플레이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변수가 된다. 퀘스트라고 하지만, 사실상 우리 식으로 정확히 표현하자면 '선택지'나 '분기'라는 표현이 좀 더 적합할 듯하다.
이를테면, 내 세력의 농장지대를 공격하는 외계생명체들을 내버려둘 것인가, 박멸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퀘스트가 있다. 내버려두기를 선택한다면 당장은 손해가 따르겠지만 언젠가 외계생명체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무언가를 할 수도 있다. 박멸시킬 경우 반대 상황이 될 것이고.
이러한 변수 요소들이 가미되면서 '문명: 지구를 넘어서'는 수많은 플레이 양상을 그릴 것으로 보인다. 직설적으로 바꿔 말하면, 매번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의미다.
아직은 개발이 진행 중이기도 하고, 불과 20~30분 정도 플레이해본 것으로 이 게임의 운명을 논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그럴 수 있는 수준의 타이틀도 아니고.
다만, 이번 E3는 '문명: 지구를 넘어서'가 첫 공개되어 많은 사람들을 설레게 했던 이후로 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알린 공식적인 자리다. 짤막한 체험 끝에 이어진 개발팀 게임플레이 디자이너와의 인터뷰를 통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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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진척 상황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알려달라.
글자 그대로 알파 버전이다. 전체적인 벨런스를 맞춰가는 단계라고 할까. 아트 리소스가 아직 안 들어간 것들이 몇 개 있기도 하고. 조금 전에 플레이해봤으니 알겠지만, 유닛 초상화가 들어가야 할 화면에 강아지 사진이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다.
개발 작업은 재미있나.
문명 5를 작업할 때와 비교해보면 아무래도 좀 더 즐겁다. 아트 팀을 예로 들자면, 기존에는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소재로 삼다보니 역사적 요소들을 최대한 똑같이 구현해야 한다는 압박이나 강박관념에 시달리곤 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번에는 완전한 '상상의 요소'를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기 때문에 아트 팀도 굉장히 즐거워 했다.
아, 게임을 해보니 퀘스트 요소가 존재하던데, 멀티플레이에서는 어떤 식으로 적용되나?
멀티플레이에도 퀘스트 시스템은 존재한다. 현재 보면 유저가 선택하는 발전 방향에 따라 적합한 내용의 퀘스트가 주어진다. 여러 유저가 플레이할 때는 랜덤하게 퀘스트가 발생하게끔 만들고 있는 중이다. 자신의 플레이 진행에 따라 다른 퀘스트가 발생하기 때문에 멀티플레이에 참여한 모두는 서로 다른 퀘스트를 받아 더욱 다른 방향을 띠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자칫 플레이를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옵션으로 퀘스트가 발생하지 않도록 설정하고 플레이할 수도 있게 할 것이다.
미래 소재의 게임은 굉장히 오랜만이다. 이런 배경을 채택하게 된 어떤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나?
내 개인적인 이유부터 시작하자면, '알파센타우리'의 오리지널을 즐기면서 자랐던 것이 큰 영향이 됐다고 생각한다. 엄밀히 보면 '문명 5'에서도 우주선을 발사하는 등, 우주와 관련된 요소가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팀 내에서도 '우주로 나가서 진행되는 플레이는 어떨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기도 했다. 공상과학적인 게임을 만드는 것은 팀 내에서 하나로 모아진 목표였다. 스튜디오 전체에서도 '우주를 배경으로 플레이를 디자인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주목하고 있기도 했고.
시연 플레이에서 보여줬던 것 중에 인공위성이 있다. 위성이 어떤 지역을 비추면 일정한 범위 내에 유닛 치유 또는 공격력 강화와 같은 환경적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것들은 문명 5에서 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이와 같은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작업'들을 해볼 수 있다는 점도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한국에서 시드마이어를 사랑하는 팬들이 많다. 개인적으로도 매우 천재적인 게임 디자이너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 그를 비롯한 파이락시스의 개발진은 주로 게임 디자인 아이디어를 어떤 식으로 얻나?
내 생각에는... 우리 디자이너들이 서로 다양한 경험을 가졌고 다양한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이 주 원동력이라고 본다. 내 경우에는 앞서 말했던 알파센타우리를 매우 좋아하고, 그 외에 슈팅 게임을 즐겨 하는 편이다. 또 어떤 동료는 문명 5를, 또 어떤 동료는 엑스컴: 에너미 언노운 개발에 참여한 적도 있다.
함께 모여 즐기는 것으로는 전략 보드게임을 꼽을 수 있다. 공통적으로 재미있다고 느끼는 아이디어는 대개 여기서 많이 나온다. 이 과정에서 다른 게임을 통해 얻은 경험이나 생각을 공유하기도 한다.
주로 점심시간을 이용해 누군가 가져온 보드게임을 함께 즐기곤 한다. 아주 오래된 옛날 보드게임들을 하게 될 때도 종종 있다. 또, 어떤 것은 2~3일 동안 이어서 플레이하기도 한다.
시드 마이어는 우리와 같이 플레이하지는 않는다. 언젠가는 꼭 한 번 같이 하자고 해볼 생각이다(웃음).
올 가을 출시를 예정하고 있다고 했다. 구체적인 일정에 대한 단서를 줄 수 있나? 또, 한글화 계획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출시 일자는 아직 날짜는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논의 중인 내용을 이야기할 수는 없는 점 양해 바란다. 한글화에 대해서도 확정된 바는 없다. 다만 내부적으로 그렇게 하려는 의지는 있다.
PC나 콘솔 게임의 비중이 크지 않은 한국이지만, 그 중에서도 문명 시리즈는 무시할 수 없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과 관련해 한국의 문명 팬들에게 한 마디 부탁한다.
여태까지 선보였던 문명 시리즈를 보시면 '역사를 배워간다'는 성격이 강했다. 그에 비해 이번 '지구를 넘어서'를 작업하면서는 과거와 현재가 아닌 미래의 이야기를 생각해볼 기회가 많이 있었다.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유저들에게 질문을 던져보고 싶기도 했다.
한국에 문명 팬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있다는 점을 알아주길 바란다.
예전 확장팩을 통해 세종대왕을 선보였을 때, 목소리나 억양이 이상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만들 당시에는 전혀, 꿈에도 몰랐다. 나중에 피드백을 전달받고서야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런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언제나 한국 유저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 어떤 경로로든 많은 이야기와 의견들을 전해주길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