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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라쎄이냐이 전투로 살펴본 독일군의 KV 충격

아이콘 Hakde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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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7 18:12:59

 

 

 

 

 

1. 들어가며

 

필자가 지인들과 독소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 때 많은 부족한 감을 느끼게 되는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독소전 초기, 즉 1941년도의 전투 흐름이다.

 

국내에서는 이 독소전 초기에는 독일군이 소련군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모스크바 코앞까지는 승승장구했다는 식의 단편적인 이해가 횡행하는게 현실이며 필자도 한때 그런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자료를 접해본 결과로는 독소전 초기의 국경지대의 전투도 우리의 통념을 뛰어넘어 굉장히 복잡한 혼전이 있어왔으며, 이미 초기부터 독일군은 격전을 치뤄오며 많은 어려움을 겪고들 있었음을 알게 되어갔다.

 

그렇게 독일군이 어려움에 처하게 된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고, 다른 글에서 차차 언급을 하겠지만, 이번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이 시작하자마자 난데없는 출현으로 독일군 제 6 기갑사단과 제 1 기갑사단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꺾어버린 소련군의 신예 중전차 KV-1, KV-2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한 실전으로 KV 전차의 데뷔전, 라쎄이냐이(독일어로는 로씨니) 전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전투는 대국적 상황에서 보면 단 2일 정도의 지연만을 초래한 별거아닌 전투로 치부될 수도 있겠으나 그 나름대로 독소전 초기 국경지대의 전투와 이후 1941년 내내 이어진 KV 전차에 맞서던 독일군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바가 크다고 생각되어 골라본 것이다.

 

우선 간단한 당시 전차 이야기로 시작을 해보자. 2차대전 중의 전차들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면 독소전에 돌입할 당시 독일군 전차들의 수준은 당시 서유럽 국가들의 기준에 맞춘 수준이었음을 들어보셨을 것이다.

 

화력은 1940년 무렵부터 주력 3호전차들의 경우 50mm KwK (L/42)를 장비하기 시작했고, 지원전차 개념의 4호전차들은 75mm KwK (L/24)를 장비하였는데 이들 전차포의 위력은 당시의 서유럽 열강의 일반적인 전면장갑 30~50mm의 전차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독일군 전차들의 방어력도 기껏해야 전면장갑 30mm 내외의 빈약한 수준에 중량은 20~30톤 정도였다. 다시 말하면 독일군은 그 이상의 화력과 방어력을 갖춘 적 전차의 가능성을 거의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이미 대전 이전부터 이러한 통념을 뛰어넘는 전차들의 개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소련의 걸작전차 T-34와 KV 전차는 이미 1938년 경부터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1939년 중에 승인이 되어 1940년에는 생산에 돌입하고 있었다.

 

T-34의 선진적인 개념도 놀라운 것이지만, KV 전차에 국한되어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는 독일이 가히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중(heavy)전차였다.

 

T-34에도 채용된 76.2mm (L/41) 전차포를 장비한 KV-1은 독일 전차의 방어력을 훨씬 뛰어넘는 80mm에 가까운 관통력을 낼 수 있었고, 방어력 면에서도 포탑, 차체 공히 75mm 장갑판으로 방호되어 당시 독일군이 보유하고 있던 37mm, 50mm, 75mm의 어떤 전차포 및 대전차포로도 관통이 거의 불가능했다.

 

또한 포병전차 개념으로 등장한 변형인 KV-2는 152mm M-10 야포(M1938/1940)의 화력과, KV-1과 동등한 75mm 장갑판의 막강한 방어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KV 전차들도 지나친 화력과 방어력의 강화로 인해 기동성이 대단히 나쁘다는 고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기동력을 희생해서 얻어낸 화력과 방어력의 격차가 너무나도 컸다는 사실이었다.

 

상상해보라, 이전에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던 중전차가 앞길을 가로막고서 반격을 해대는데, 온갖 노력 끝에 자신들이 지닌 어떤 무기도 그 괴물을 퇴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어떤 심정이 될까? 승리의 도취감에서 깨어나 바닥없는 무력감으로 빠져드는건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 법이다. 바로 독소전 개전 직후 며칠만에 최일선의 몇몇 독일군들이 KV 전차 때문에 절감해야 했던 사건들이 그런 것이었다.

 

 

 

 

2. 독소전 개전 당시 KV 전차의 배치 상황

 

실전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과연 독소전 개전 당시 KV 전차가 얼마나 소련군에 장비되어 있었는가를 따져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KV 전차는 매우 인상적인 화력과 방어력을 가졌으며 소련군이 구상하는 기갑부대 편제에서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도록 계획되고 있었으나 개전시까지도 배치는 매우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1941년 6월 시점에서 소련군의 기갑부대는 기계화군단 예하의 전차사단이 주요한 구성단위였으며, 1941년 초에 개정된 전차사단 편제에서는 KV 전차를 각 전차사단에 2개 중전차대대에 62대, 포병연대본부에 1대 도합 63대를 장비하게 되어있었다.

 

결국 6월 22일까지는 총 61개 전차사단이 인가되고, 이중 실제 배치된 부대가 56개 사단이었으므로 실소요량은 3528대였던 셈이다. 그런데 실제 일선에 지급된 KV 전차는 KV-1과 KV-2를 모두 합해서 단 508대, 평균잡아 14.4%에 불과했다.

 

KV 전차를 장비한 전차사단별로 보다 자세한 배치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사단별 통계가 불분명한 부분은 군단별 통계를 이용하였으며, 일부 누락된 부대가 있을 수 있음을 밝혀둔다.)

 

Table 2.1. 1941년 6월 바바롯사 작전 개전 당시 KV 전차를 장비하고 있던 전차부대 통계

군관구 기계화군단   전차사단   KV 전차 총수
오데사 군관구  2   11, 16   10 (7.9%)
발트 특별군관구  3   2, 5   52 (41.2%)
끼예프 특별군관구  4   8   50 (79.4%)
  32   49 (77.8%)
 8   12, 34   71 (56.3%)
 15   10   63 (100%)
  37   (1.6%)
 19   40   6? (9.5%)
  43   5 (7.9%)
 22   19, 41   31 (24.6%)
서부 특별군관구  6   4   63 (100%)
  7   51 (81.0%)
 11   29, 33

  3 (2.4%)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소련군 내에서 KV 전차를 완편으로 장비하고 있던 사단은 제 6 기계화군단의 제 4 전차사단과 제 15 기계화군단의 제 10 전차사단의 2개 사단밖에 없었으며, 대략 6~7개 사단을 제외한 다른 전차사단들은 KV 전차를 반 수 이하 또는 전혀 지급받지 못했다.

 

그리고 KV 전차를 지급받은 부대들도 장비를 수령한지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체계적인 훈련과 운용 전반에 대한 교육이 극히 부족했다. 심지어 개전시까지 탄약 지급 상황도 나빠 76.2mm 포탄의 재고를 1일치 이상 제대로 확보한 사단도 드물었다.

 

 

 

 

3. 국경 지대의 전투 개시

 

3. 1. 1941년 6월 22일 독일-소련 양측 상황 비교

 

 

이제 본격적인 실전의 이야기로 들어가보기로 하자. 여기서 살펴볼 독일군 제 6 기갑사단과 제 1 기갑사단은 모두 동프로이센 전선에 전개한 제 4 기갑집단 예하 라인하르트 기갑대장의 제 41 차량화군단 소속이었다.

 

제 41 군단은 우익에 위치한 만슈타인 보병대장의 제 56 차량화군단과 더불어 북부집단군 전체의 핵심적인 기동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독일 북부집단군의 바바로사 작전 초반 계획은 중앙의 제 4 기갑집단이 틸지트-샤울랴이 축을 따라 북동진하여 드비나 강에 이르는 길을 트는 동안에, 좌익의 제 18 군이 틸지트-샤울랴이-리가로 진격하여 리가 서쪽에 위치한 소련군을 소탕하고, 우익의 제 16 군이 중부집단군의 제 3 기갑집단 및 제 9 군과의 간격을 메꿔가며 레닌그라드로의 진격을 보조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제 4 기갑집단이 신속한 전진을 하여 드비나 강에 도달, 소련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배후를 교란해야 했다.

 

이때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제 1 기갑사단은 제 1 기갑연대 예하 1, 2대대에 3호전차(50mm L/42 KwK) 71대, 4호전차(75mm L/24 KwK) 20대, 2호전차 43대, 지휘전차 11대를, 기타 부대에 1호전차 15대 등을 장비하여 총 163대의 전차를 장비하고 있었다.

 

또 제 6 기갑사단은 제 11 기갑연대 예하에 1, 2대대와 추가로 제 65 기갑대대를 배속받아서 연대 전차전력이 체코제 35(t) 전차(37mm KwK) 155대를 주축으로 하여 4호전차 30대, 2호전차 47대, 지휘전차 13대 등 245대의 전차를 장비하고 있었다.

 

이 두 사단을 얼핏 전차 수로만 보면 제 6 기갑사단이 제 1 기갑사단에 비해 기갑대대도 1개 더 많고 더 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제 1 기갑사단같은 경우는 전차 수는 적지만 신뢰성 높은 독일제 3호전차를 대거 지급받고 있었으며, 특히 사단 보병전력의 기계화가 잘 되어있어서 예하 4개 보병대대 중 2개 대대(8개 중대)가 장갑인원수송차량(SPW) 총 125대를 장비하고 있었다.

 

반면 제 6 기갑사단은 사단전력 대부분이 37mm 포를 장비하고 역시 체코 스코다 사의 38(t) 전차보다도 신뢰성이 떨어지는 35(t) 전차였다. 당시 바바로사 작전에 참가한 전 기갑사단 중에서 35(t) 전차를 장비하고 있던 유일한 사단인지라 제 6 기갑사단 소속으로 싸웠던 장병들의 회고에서는 이에 대한 심한 불평을 많이들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보병전력도 단 1개 중대만이 SPW를 수령해서 타격력이 제 1 기갑사단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맞서는 소련 발트 특별군관구는 동프로이센 전면의 리투아니아에 크게 2개의 기갑예비를 확보하고 있었다. 틸지트 전선 북쪽 약 100km 일대의 샤울랴이와 텔샤이 사이에 제 12 기계화군단(제 23, 28 전차사단, 제 202 차량화사단으로 구성)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굼비넨 전선 동쪽 약 80km 일대의 카우나스 부근에는 제 3 기계화군단(제 2, 5 전차사단, 제 84 차량화사단으로 구성)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중 제 12 기계화군단같은 경우는 위치상으로 동프로이센에서 발트 3국으로의 길목에 놓여 있어서 발트 군관구 전체로도 중요한 전방위 기동예비였으나 장비는 매우 부실한 상황이었다.

 

예하의 제 23 및 28 전차사단은 T-34나 KV 전차같은 신형전차를 전혀 지급받지 못한채 군단 전체로는 T-26이나 BT 전차같은 경전차 749대가 전력의 전부였다.

 

게다가 제 28 전차사단 경우 예하의 전차부대가 샤울랴이 북쪽에, 보병부대가 리가 남쪽에 서로 100km 가깝게 떨어져 주둔중이어서 전 사단의 신속한 집결 자체가 매우 힘들었으며, 다른 사단들도 정도야 덜했지만 유사한 문제들을 겪고 있었다.

 

제 3 기계화군단은 사정이 나아서 예하 제 2 및 5 전차사단이 KV 전차와 T-34 전차를 각기 1개 대대급 정도로 총 4개 대대가 이 신예전차들을 지급받고 있었다.

 

4개 대대 모두가 완편을 채울 수는 없었지만 기록에 의하면 KV 전차 52대, T-34 전차 57대를 장비하고 있었고, 군단 전체로는 총 651대의 전차를 보유하여 그 나름대로 만만치않은 전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군단이었던 것이다.

 

 

3. 2. 1941년 6월 22~23일 독일군 제 1 기갑사단의 진격

 

독일군은 6월 21일 밤부터 후방의 집결지로부터 공격 개시선으로의 진출을 시작했다. 이미 메멜 강(네무나스 강)에 공병들이 가설해놓은 부교를 건너 이동을 한 것이다. 그리고 6월 22일 2시 55분부터 5분간 이어진 짧고 집중된 예비포격을 필두로 3시 정각에 일제히 부대간 지경선을 따라 일제히 전진을 시작하였다.

 

 제 41 군단 소속의 제 1 기갑사단은 틸지트에서 샤울랴이로 이르는 도로 양쪽을 따라 신속하게 북상하기위해 다음의 3개 전투단(Kampfgruppe)을 편성하였다.

  • (좌익) KGr. Krüger : 제 113 차량화보병연대 + 제 1 기갑연대 대부분 등

  • (중앙) KGr. Westhoven : 제 1 차량화보병연대 + 1개 전차중대 등

  • (우익) KGr. Badnski : 제 102 보병사단 소속 1개 보병연대 + 지원부대 등

 

우익의 KGr. Badnski가 제 6 기갑사단과의 간격을 메꾸기 위한 보조적 성격이 강한데 반하여 좌익과 중앙의 KGr. Krüger와 KGr.Westhoven이 공격의 중추적 역할을 맡은 것을 알 수 있다.

 

공격은 이 지구를 방어하고 있던 소련군 제 125 소총사단을 통타하면서 전방위선 돌파를 계속하여 22일 오전 중에 KGr. Westhoven은 유라 강에 걸쳐있는 국경도시 타우로겐에 돌입하였다.

 

타우로겐의 전투는 제 125 소총사단 주력을 맞아서 13시 무렵 1개 전차중대가 유라 강을 넘어 타우로겐 북쪽 시가로 돌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이후 20시까지 전개된 소탕전을 거쳐 KGr. Westhoven은 타우로겐의 격렬한 소련군 저항을 분쇄하고 서서히 샤울랴이 방향으로 북동진을 할 수 있었다.

 

좌익의 KGr. Krüger의 초반 진격은 그보다는 원활해서 비교적 저항이 경미한 타우로겐 동쪽에서 유라 강을 도하, 타우로겐 북쪽을 돌아 소련군 배후로 진출하고자 하였으나 역시 타우로겐 북쪽에서 소련군과 혼전에 돌입하여 다소 지연이 이어졌다.

 

어쨌건 이 양 전투단은 사단 구역 내의 중요한 유라 강 상의 3개 교량 중 2개를 확보하여 순조로운 지원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22일 밤 중에 완전히 와해된 소련군 제 125 소총사단을 추격하여 독일군 제 1 기갑사단의 양 전투단은 23일 새벽 일제히 진격을 재개, 이날 중 켈메 남쪽까지 진출하여 드비싸 강에 바짝 다가섰다.

 

이러한 제 1 기갑사단의 켈메-샤울랴이 방향으로의 진출에 대해 소련군도 기동예비인 제 12 기계화군단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리가로 이르는 가장 상태좋은 도로가 깔린 타우로겐-켈메-샤울랴이 축을 방어하기 위해 샤울랴이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제 202 차량화사단은 그보다 약간 남쪽에 위치하고 있던 제 9 대전차대대와 함께 22일 오후 늦게부터 전진을 개시했다.

 

소련군의 예비부대의 진격이 이렇게 신속하게 이뤄지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22일 오전에는 소련 최고지도부가 독일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22일 오전까지도 독일이 전면침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인 국경에서의 위력과시가 아닌가 하여 일선 부대들에게 즉각적인 반격을 하지 말고, 일단 기다리라는 명령을 계속 발령하고 있었다.

 

결국 외교 채널들을 통해 전면전의 개시가 확실해진 오후부터야 공식적인 반격명령들이 하달되었고, 이런 초반의 혼란 속에 소련군 2선 예비는 좀더 국경에 가까운 요지들에 전개할만한 시간적 여유를 빼앗기게 되었다.

 

22일 밤 늦게부터 선도부대가 켈메에 도착하기 시작하여 23일 내내 제 202 차량화사단의 후위부대가 도착하며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자 제 1 기갑사단은 신속한 진격을 위해 켈메를 동쪽으로 우회하여 배후를 찌르는 방향으로 전환한다.

 

이미 켈메 서쪽으로는 역시 제 12 기계화군단 소속의 제 23 전차사단과 제 28 전차사단이 서서히 독일군과 접촉을 이루면서 독일군 제 38 군단 소속의 제 1, 11, 21 보병사단과 혼전에 돌입중이었다.

 

반면에 켈메 동쪽에서는 라쎄이냐이 방향으로 투입중인 소련군 제 3 기계화군단 소속 제 2 전차사단의 진격이 부진한데다, 이 사단과 제 202 차량화사단 사이의 간격을 메꿔줄 제 48 소총사단의 방어태세가 미흡하여 신속한 돌파에 의한 충격을 가중시킬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제 1 기갑사단이 뚫은 활로의 좌익을 방호하고 전과확대를 하기 위해 2선 제대로 대기중이던 제 36 차량화보병사단이 제 1 기갑사단을 바짝 쫓아 투입되었다.

 

 

 

3. 3. 1941년 6월 22~23일 독일군 제 6 기갑사단의 진격

 

독일군 제 6 기갑사단도 다른 여느 독일군 부대와 마찬가지로 22일 새벽 3시부터 공격 개시선에서 소련 내륙을 향한 진격을 개시하였다.

 

제 1 기갑사단의 경우에는 타우로겐 시가전에 첫날의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던데 반하여, 제 6 기갑사단은 공격 개시선 전면의 울창한 숲과 습지대에 은신한 소련군 제 125 소총사단의 산발적인 저항이 큰 골칫거리였다.

 

제 6 기갑사단이 배정받은 도로는 이러한 숲과 습지대 사이로 난 좁은 도로였기 때문에 방어력이 취약한 지원차량들이 계속 공격을 받을 경우 사단 전체의 진격이 힘들 것이므로 독일군은 오전 내내 이런 소규모 소련군 소탕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러한 초반 진격부터 전차들의 탄약 소모가 막심하여 오전 중 예하 전차부대들이 탄약 재보급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전과 다른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대략 정오 무렵에 제 6 기갑사단은 이들 숲 지대의 소련군 소탕을 마쳤으며, 살투오나 강을 강행도하하여 첫날 목표인 드비싸 강에 도달하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결국 예기치 않던 숲 지대에서의 시간 지연으로 이미 라쎄이냐이 일대에 1선 예비로 주둔중이던 소련군 제 48 소총사단 병력이 남서진하여 드비싸 강으로의 진격을 집요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제 48 소총사단도 긴급히 투입된 병력이다보니 제대로 된 방어선을 구축하지는 못하고 제 6 기갑사단에 조금씩 다시 밀려나기는 하였으나 22일 중으로 라쎄이냐이 동쪽에서 드비싸 강을 도하한다는 작전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제 6 기갑사단은 23일 새벽 중 전열을 정비하고 좌측의 제 1 기갑사단과 우측의 제 8 기갑사단의 진격 페이스를 맞추기 위해 다음의 2개 전투단(KGr.)을 편성하였다.

  • (좌익) KGr. Raus : 1개 보병연대 + 제 65 기갑대대 등

  • (우익) KGr. von Seckendorff : 1개 보병연대 + 제 11 기갑연대 1대대 등

 

이들 양 전투단은 23일 이른 시각부터 각각 바싹 붙어서 제 48 소총사단을 북동쪽으로 계속 밀어붙이고 있었다.

 

마침내 23일 오후들어 제 48 소총사단의 저항은 기세가 크게 꺾여서 대략 15시 무렵 KGr. von Seckendorff는 드비싸 강으로 가는 길목의 작은 마을 라쎄이냐이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이미 이때 제 48 소총사단은 드비싸 강 서안에서의 저항을 포기한 상태였으며, 잔여병력은 드비싸 강 동안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제 12 기계화군단과 제 3 기계화군단 예하 사단들의 지원을 기대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바싹 붙어 진격을 계속하던 제 6 기갑사단 소속 양 전투단은 라쎄이냐이에서 각기 갈라져서 KGr. Raus는 정북진하여 제 1 기갑사단 KGr. Westhoven의 드비싸 강 교두보 확보와 보조를 맞추고자 하였으며 KGr. von Seckendorff는 북동진하여 역시 드비싸 강 동안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양 전투단은 급히 퇴각하는 제 48 소총사단을 쫓아 17~18시를 전후하여 드비싸 강 동안에 모두 작은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23일 오후의 드비싸 강 동안의 교두보 확보 이후에 전황은 급박하게 심상치 않은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KGr. Raus의 라쎄이냐이 북쪽 교두보는 이미 약화된 제 48 소총사단의 경미한 저항만을 받고 있었지만, KGr. von Seckendorff는 동쪽에서 급히 전진하고 있던 제 2 전차사단과의 충돌이 임박한 실정이었다.

 

소련군 제 3 기계화군단 소속이던 제 2 전차사단도 22일의 혼란한 명령 끝에 그날 저녁 늦게서나 주둔지이던 카우나스 일대로부터 라쎄이냐이 방향으로 서진을 개시하였다.

 

소련군은 이 시점에서 이미 정보계통이 극도로 혼미해져서 지휘부의 제대로 된 판단이 매우 힘든 노릇이었다.

 

제 2 전차사단은 제 48, 125 소총사단의 1선 방어선이 위태해지자 독일군 제 41 군단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무작정 라쎄이냐이로 보내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 서쪽에 위치한 제 56 군단의 진격이 훨씬 더 위협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제 56 군단 소속 제 8 기갑사단의 행방을 소련군은 22~23일 내내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제 56 군단은 이미 22일 첫날 전면의 소련군 방어선을 완전히 분쇄하며 네무나스 강과 드비싸 강 사이의 공간을 통해 케다이나이 등 카우나스 방향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소련군 제 2 전차사단은 진격도상 바로 남쪽 20여 km 지점을 따라 거의 평행하게 반대 방향으로 독일군 제 8 기갑사단이 찔러들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정보 부족으로 지정된 위치인 라쎄이냐이로의 전진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제 8 기갑사단 또한 괜히 이런 싸움에 말려들어 진격 페이스를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하여 후방을 제 290 보병사단과 제 3 차량화보병사단에게 맡기고 흘끔 곁눈질한채 맹진해버리는, 실로 기묘한 상황이 벌어지기까지 한 것이다.

 

그 결과 그나마 55대의 T-34 전차와 KV 전차, 145대의 T-26 전차, BT 전차 등을 보유한 이 위협적인 제 2 전차사단은 드비싸 강 동안 교두보의 KGr. von Seckendorff를 향해 정면으로 돌입하고 있었다.

 

이미 23일 오후 늦게 제 2 전차사단의 선도부대들은 퇴각하는 제 48 소총사단 병력과 조우하여 T-26 전차, BT 전차들을 앞세워 KGr. von Seckendorff의 교두보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작은 교두보를 둘러싸고 소련군은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잘 훈련된 독일 보병부대는 이러한 경전차들과 급하게 투입된 보병의 서투른 첫번째 반격을 그럭저럭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23일 자정 무렵이 다되어 전개된 보다 강력한 소련군의 역습은 독일군으로서도 상당히 버거운 것이었다.

 

야음을 이용해 경전차들이나마 대규모로 투입되면서 압박을 가해오는데다가 충분한 반격을 가할 수 있을 독일군 전차부대들이 아직 교두보로 제대로 지원을 나오지 못하던 상황이어서 단 2개 소대에 불과한 보병만으로 이를 막아내기에는 힘들었다.

 

마침내 드비싸 강 동안 교두보를 방어하던 독일군 보병 2개 소대는 밤중에 모두 전멸하였다.

 

독일군 제 6 기갑사단 사령부로서도 이러한 상황 전개는 매우 다급한 것이었다. 사단사령부는 그래서 상황이 어느정도 수습되고 날이 밝은 후인 24일 08시를 기해 제 11 기갑연대 2대대를 증원하여 소련군의 반격을 밀어내고 드비싸 강 동안 교두보를 다시 확보할 것을 명령하게 된다.

 

하지만 반대편, 소련군도 마찬가지였다. 소련군 제 2 전차사단은 24일 날이 밝으면 여세를 몰아 드비싸 강 서안으로 진출, 라쎄이냐이 방향으로 밀어붙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단의 창끝이 충돌할 1941년 6월 24일 그날은 독일군의 전혀 새로운 경험을 예고하고 있었다.

 

 

 

4. 라쎄이냐이 전투

 

4. 1. 1941년 6월 24일 독일군 제 6 기갑사단을 막아선 KV 전차

 

6월 24일 라쎄이냐이 동쪽에서의 전투는 예상외로 소련군의 선제 공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독일군 병력이 라쎄이냐이 방향에서 서서히 집결하며 준비를 가다듬는 동안에 소련군 제 2 전차사단은 예하의 포병 지원사격과 함께 그들의 신예 중전차 KV 전차와 다수의 경전차들을 짝지어 드비싸 강 서안의 KGr. von Seckendorff를 향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아직 KGr. von Seckendorff 쪽에서는 제 11 기갑연대 1대대 일부밖에 집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독일군에게는 소련군의 이러한 공세 자체로도 놀라운 일이었으나, 그들은 곧 눈앞에 나타난 KV 중전차의 위력 앞에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KGr. von Seckendorff가 보유한 모든 대전차화기 — 37mm Pak, 50mm Pak, 대전차총(Panzerbüchse) 등 — 가 총동원되어 쇄도해오는 KV 전차에 사격을 가했는데도 전혀 관통될 기미는 안보이고 무기력하게 튕겨나왔다.

 

독일군은 심지어 포병연대가 보유한 10.5cm leFH(leichte Feldhaubitze.경곡사포)와 15cm sFH(중곡사포)까지 직사하였지만 KV 전차에는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대개 아무리 강한 전차여도 15cm 중곡사포의 고폭탄 위력이라면 박살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던 독일군으로서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거기에 이들 KV 전차들 중 일부가 독일군의 치열한 방어탄막을 뚫고들어와 후방에 위치한 지휘전차(Panzerbefehlswagen)를 들이받아 전복시켜서 해당 지휘관이 부상당하는 사태까지 알려지자 급속한 위기의식이 전투단 전체에 확산되었다.

 

그 결과 KGr. von Seckendorff 전체는 아니었지만 일부 장병들과 장교들마저 패닉 상태에 빠져버려서 어떤 장교는 전장을 이탈하고 직속상관에 이른 지휘계통을 다 무시한채 제 4 기갑집단 사령부까지 가서 "모든게 다 끝장났다!"라고 외쳐대기까지 했다.

 

그나마 이런 분위기가 독일군의 파국적인 상황으로 치닫지 않은 이유라면, 첫째로는 제 6 기갑사단 전체적으로는 경험많은 장교들이 비교적 침착성을 발휘하여 동요하는 부하들의 통솔에 성공했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두번째로는 소련군 전차병들이 워낙 미숙하여 KV 전차의 이러한 막강한 위력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그저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기만 해서 독일군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많이 입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전열을 정비한 독일군 제 6 기갑사단은 대략 12시 30분을 전후하여 집결을 마친 제 11 기갑연대 2대대가 라쎄이냐이 동쪽에 저지선을 설정하고 서진하는 소련군 전차들을 맞아 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이 제 6 기갑사단의 주력을 형성하는 체코제 35(t) 전차들은 37mm KwK를 장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조금 화력이 더 나은 75mm L/24 KwK를 장비한 4호전차들이 KV 전차를 상대하는 주력이 되었다.

 

아무래도 당시 독일군 기갑부대의 최대 강점이라면 역시 우수한 조직력에 있었는지라 이들은 KV 전차가 정면으로 상대해서는 안될 전차임을 깨닫고, 최대한 약점이 될듯한 무한궤도 등 구동계통이나 전차병들이 열어놓은 해치 등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특히 산발적인 사격이 아니라 한대한대 지휘관의 통일된 지시에 따라 중대 전체가 퍼붓는 탄막에 다수의 경전차들과 일부 KV 전차를 주저앉히고 소련군이 전차를 버리고 도망가게 만드는게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너무나도 탄약 소모가 막심하여 독일군 4호전차 중대는 전투에 돌입한지 불과 두 시간 정도만에 탄약 재보급을 위해 다시 전장을 이탈해야만 했다.

 

제 11 기갑연대 2대대의 공격은 15시 무렵 재개되었고 점차 가중되는 독일군의 반격에 소련군은 드비싸 강 서안으로 5km 가까이 밀고 들어온 것을 고비로 서서히 다시 물러서고 있었다.

 

양군의 공방은 밤 늦게까지 계속되었지만 소련군도 드비싸 강 서안 종심 약 1km의 교두보를 중심으로 격렬한 포병지원 하에 막아서는지라 독일군 KGr. von Seckendorff는 끝내 강 서안의 소련군을 드비싸 강 서안에서 축출하지도, 동안에 교두보를 확보하지도 못한채 24일을 보내고 말았다.

 

한편 이보다 북쪽에서 드비싸 강 동안 교두보를 확보한 KGr. Raus의 경우에는 KGr. von Seckendofff 처럼 전면에서 KV 전차의 대거 습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역시 오전 중에 드비싸 강을 도하한 KV 전차들의 일부가 방향을 틀어 KGr. Raus의 배후로 진출하는 바람에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이날 오전 중에 KGr. Raus를 보조하던 제 65 기갑대대 중 1개 중대와 대대사령부가 라쎄이냐이 방향의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드비싸 강의 두 교두보를 향해 갈라지는 삼거리 부근에 예비대로 돌려졌는데, 소련군이 이후 이 삼거리에서 KGr. Raus로 이르는 도로 한가운데를 막아서고 독일군 트럭 보급종대를 습격하고 도로를 차단한 것이다. (위의 사진의 KV-2가 도로를 막아섬)

 

단 한 대의 KV-2가 도로 한가운데에 서버린 이 상황 때문에 사단 본대에서 KGr. Raus로 향하는 연락로가 완전히 막혀버려서 이 방향으로도 제 6 기갑사단은 더 이상 진격을 할 수 없었다.

 

오후부터 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독일군은 급히 증원병력을 보내어 길 한가운데를 막고 있는 KV-2 전차를 쓸어버리고자 하였으나 이 KV-2 전차는 어떠한 독일군의 공격에도 격파되기는 커녕 152mm 중포와 기관총으로 접근하는 독일군에게 크나큰 어려움만을 안겨주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독일군은 50mm Pak38로 무장한 전차엽병(Panzerjäger) 부대 투입에 이어 제 41 군단 직속의 88mm Flak 1개 포대(Batterie)와 사단 포병연대의 10.5cm leFH 포대 등 가용한 중포들을 이 지점으로 계속 투입해서 사격을 가했다.

 

10.5cm leFH의 치열한 사격으로 이 KV-2는 무한궤도가 파괴되어 행동불능에 빠진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소련군 전차병들은 이 전차를 포기하지 않았다.

 

독일군이 믿을만한 88mm Flak의 사격도 KV-2의 전면장갑을 관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후 중에 도로를 다시 개통시키려는 독일군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어 어둠이 찾아오자 독일군은 공병을 투입하여 폭약으로 이 전차를 날려버리고자 은밀히 이 KV-2에 접근하였으나 소련군은 또 접근하는 공병들을 발견하고 기관총 사격을 퍼부어서 공격조를 격퇴한다.

 

작전 개시 불과 3일차에 일선 독일군이 보유한 최고의 중포들인 88mm Flak, 10.5cm leFH에 이어 공병의 육탄공격까지 막아내는 이 단 한 대의 KV-2 전차 앞에 정예 제 6 기갑사단 전체가 멈춰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는 본격적인 독일군의 KV 전차 충격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4. 2. 1941년 6월 25일 소련군 제 2 전차사단의 포위와 섬멸

 

6월 24일 내내 벌어진 격전 끝에 24~25일 밤새 제 6 기갑사단과 제 2 전차사단은 양측 모두 재정비에 힘을 쏟느라 비교적 조용한 대치상황을 맞이하였다.

 

소련군 제 2 전차사단은 이미 가뜩이나 부족한 탄약 재고로 인해 더 이상 싸우기도 힘든 상황이었으며 주변을 죄어오는 독일군의 움직임에 퇴로를 모색하고 새로운 방어선으로 물러날 필요가 있었다.

 

6월 25일의 날이 밝자 KGr. von Seckendorff 전면에 위치하던 소련군 제 2 전차사단의 예하부대들은 이미 밤새 드비싸 강 동안으로 후퇴한 상태였으며, 독일군은 아침 9시부터 다시 드비싸 강으로의 진격을 재개할 수 있었다.

 

또 KGr. Raus로 향하는 길을 막고 있던 KV-2 전차도 25일 오전 중으로 결국 고립된 상태에서 탄약이 떨어지면서 독일군의 치열한 압박에 제압되어 KGr. Raus도 오전 11시 경부터 24일 내내 어렵게 고수하던 교두보로부터 전진할 수 있었다.

 

이날의 상황은 이제 전날과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소련군 제 2 전차사단의 경우 북동쪽으로의 탈출을 통해 인접한 우군과 접촉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였으므로, 밤새 제 6 기갑사단을 위협하던 KV 전차 등 잔여 전차전력은 모두 퇴로를 봉쇄하고 있던 제 1 기갑사단 정면으로 향하게 되었다.

 

진격을 개시한 제 6 기갑사단의 전면에는 울창한 숲 지대를 기대어 산발적인 저항을 펼치는 후비대들만이 가로막고 있었다.

 

소련군 제 2 전차사단은 이미 이른 아침부터 독일군 제 1 기갑사단 전면에 돌파구 마련을 위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하여, 오전 내내 제 1 기갑사단은 힘겨운 싸움이 이어졌다.

 

사우코타스에 위치하고 있던 사단사령부 목전까지 소련군 전차와 보병이 밀고 들어왔지만, 다행히 이들은 기껏해야 T-26 경전차를 장비하고 있던 부대들이었고 제 83 경대공포대대의 88mm Flak의 손쉬운 먹이감이 되었다.

 

그러나 사우코타스와 보실리스키스 사이 일대를 방어하고 있던 제 1 차량화보병연대 2대대는 KV 전차가 포함된 소련군의 역습을 받고서 역시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제 1 기갑연대 일부에서도 KV 전차만은 막을 수 없다는 놀라움이 터져나오면서 상황은 한층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나마 보실리스키스에서 바이소갈라로 이르는 도로 일대를 방어하고 있던 독일군 부대는 좀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일대에는 제 1 기갑사단의 사단포병인 제 73 포병연대 일부가 포진 중에 있었는데, 소련군의 KV 전차가 밀고오는 상황에서 다급한 나머지 3대대에 소속되어 있던 10cm Kanone를 직사한 결과 소련군의 KV 전차 몇 대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88 mm Flak 이외에도 10cm Kanone가 KV 전차의 유효한 대전차화기로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이 처음 확인된 사건이었다.

 

상황은 독일군이 집결한 제 1 기갑연대 주력과 지원부대를 08시 20분에 전면 투입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역시 소련군에 비해 월등한 조직력을 자랑하는 독일군 기갑부대의 출격만이 어려운 수세적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길이었다.

 

이후 벌어진 독일군과 소련군의 혼전 상황은 제 1 기갑연대 2대대의 다음 전투보고를 통해 그 단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당시에는 KV 전차의 제식명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서 KV-1, KV-2를 중량에 따라 43톤 전차, 52톤 전차 등으로 부르는 일이 많았으나 이런 표현들은 모두 제식명으로 의역하였다.)

"사우코타스 일대에서 우리가 처음 조우한 KV-1과 KV-2 전차는 정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우리 제 1 기갑연대 6중대 및 7중대는 약 700m 전방에서 사격을 개시하였으나 이것들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우리가 점점 적에게 가깝게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듯 했다.

곧이어 약 50~100m까지 간격이 좁혀졌다.

엄청난 양측 사이의 포화가 이어졌지만 아군이 성공했다는 어떤 가시적인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소련군 전차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채 전진하고 있었다.

모든 철갑탄은 그 전차의 장갑판에서 무기력하게 튕겨나갔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 소련군 전차들이 지금 우리 제 1 기갑연대 사이를 뚫고 후방의 제 1 차량화보병연대 소속의 보병들과 여러 보급품이 쌓여있는 후방까지 진출하려는 놀라운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우리 전투단과 사단 사령부까지 위협하며 더욱 후방의 보급종대까지도 갈 수 있었다!

이에 우리 제 1 기갑연대는 급히 방향을 돌려 이들 KV-1과 KV-2와 나란히 평행하게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우리는 그들을 다시 따라잡고 다수의 적 전차를 때려대었다.

이러한 놀라운 작전 끝에 우리는 Rotkappchen이라 불리우는 특수 탄환을 불과 30~50m의 지근거리에서 퍼부어서 몇 대를 기동불능 상태로 빠뜨릴 수 있었다.

나중에야 일제 반격이 개시되었으며 소련군은 최종적으로 격퇴되었다.

보실리키스와 사우코타스 일대의 방어선이 확실하게 잡힌 것이다. 이후로도 때때로 격렬한 방어전은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제 1 기갑연대 소속 전차들을 통해 기동불능에 빠지고 고립된 KV 전차들은 보병들이 달려들어 다량의 고폭약을 차체에 매달아 날려버리거나 승무원들의 항복을 이끌어내면서 그 기세가 급속히 꺾여갔다.

 

실상 소련군 제 2 전차사단의 잔여 전차전력은 오전 9~10시 무렵에 이어진 이러한 혼전 끝에 이미 치명타를 입고 있었다.

 

원래 KV 전차나 T-34 전차의 보유량이 워낙 적었는데다가 그나마 전날인 24일 제 6 기갑사단과의 전투에서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었고, 탄약 재고는 사실상 바닥난 상태였으니 25일 오전 제 1 기갑사단과의 전투가 제대로 될리가 없었다.

 

얼마 남지않은 KV 전차의 위협은 이렇게 25일 아침 갖가지 방법이 동원된 독일군의 필사적인 방어 앞에 사라져갔다.

 

소련군은 마지막으로 11시 무렵부터 사우코타스 남쪽에서 잔여 병력의 재집결과 돌파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를 정찰기 등의 활동으로 미리 파악한 독일군은 제 73 포병연대 소속의 곡사포 4개 포대와 제 3 대공포연대 소속의 88mm Flak을 지원받아 강력한 탄막을 소련군에게 퍼부어대었고, 이미 KV 전차와 같은 비장의 돌파력을 거의 상실한 소련군의 반격은 다시 격퇴되었다.

 

이제 이어진 오후의 전투는 독일군에게 한결 손쉬운 것이었다.

 

 KGr. Krüger는 사우코타스 일대에서의 소련군의 조직적인 반격을 15시 경에 모두 소탕하고 남서쪽에서 진격해오던 제 6 기갑사단의 KGr. Raus와 약 20시를 전후하여 조우할 수 있었다.

 

KGr. West는 보실리스키스에서 남서쪽으로 전진을 계속하여 역시 다음날 새벽까지 KGr. von Seckendorff와 연결하여 소련군 제 2 전차사단을 완전히 여러 갈래로 분단해놨다. 그리고 남쪽에서는 제 269 보병사단이 제 1 기갑사단과 제 6 기갑사단이 갈라놓은 소련군 잔존병력을 포위, 압박하고 소탕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세세한 싸움은 26일 새벽까지도 이어졌지만 소련군 제 2 전차사단은 26일 날이 밝을 무렵까지 사단장 솔리얀킨 소장마저 전사하며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셈이었다.

 

그리고 26일 오후가 되자, 독일군 제 41 군단은 꼬박 2일간 그들을 혼란과 놀라움으로 몰아넣었던 소련군 제 2 전차사단과 KV 전차들의 잔해를 뒤로 한 채, 다시금 멀리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맹진격을 재개하였다.

 

이미 더 서쪽에서 제 18 군 소속 보병부대들의 선전 끝에 제 12 기계화군단 전력이 붕괴되고, 이곳에서 제 2 전차사단 전력이 괴멸되었으니 드비나 강까지 더 이상 거칠 것은 없었다. 그 뒤로 제 41 군단은 3주간 750km의 돌파라는 놀라운 기록을 작성하며 독소전 초반의 승리를 이끌어나가게 되었다.

 

 

 

5. 독일군의 KV 전차 대응방법 정리

 

라쎄이냐이 전투를 1941년 독일군의 KV 전차 대응에 대한 예로서 든 것은, 독일군으로서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전차를 대적한 첫경험이자 매우 짧은 경험이면서도 이 괴물 중전차를 격퇴하기 위해 사실상 수중에 가진 모든 방법들을 다 동원한 전투였기 때문이다.

 

이후 소련 내륙 깊숙히 전진해가며 좀더 다른 노하우를 쌓아가기는 하였으나 혁신적인 대처 병기가 나오지 않던 상황에서 발전의 한계가 있었다. 이하에서는 그러한 대응 방법들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5. 1. 전차포(KwK) 및 대전차포(Pak)

 

라쎄이냐이 전투에서 볼 수 있듯이 독일 기갑부대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구겨진 것은 그전의 폴란드 및 프랑스전역에서와는 달리 불과 작전 3일차만에, 그것도 한줌밖에 안되는 소련군 전차들의 반격에 사단의 기갑부대 전체가 쩔쩔매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글 서두에서 이야기했듯이 근본적으로 독일이 당시 구형 3호전차, 체코제 35(t), 38(t) 전차 등에 사용하고 있던 37mm KwK및 Pak는 KV 전차에 심각할 정도로 무기력했다.

 

정면은 물론이요 후면으로 돌아가 차체의 약한 부분을 아무리 찾아내어 100m 이내의 거리에서 두들겨도 애시당초 널리 쓰이던 39년형 철갑탄(Panzergranate 39, Pzgr.39)로는 관통력이 40mm를 넘지 못했으니 75mm 이상의 장갑을 두른 KV 전차에는 무리였다.

 

심지어 텅스텐 탄심을 가지고 있는 40년형 철갑탄(Pzgr.40)을 쓴다 하더라도 60mm 이상을 관통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50mm 급의 포에서는 전차포로 50mm KwK (L/42)를 장비한 3호전차가 투입중이었고, 기갑사단 같은 우선 순위의 사단들의 전차엽병부대들은 그보다 더 우수한 50mm Pak (L/60)을 지급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Pzgr.39로 KV 전차를 대적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Pzgr.39로는 50mm Pak로도 100m 이하의 거리에서야 70mm 가까운 관통력이 간신히 나오는 입장이었는데 기동성이 딸리는 대전차포로 이만한 거리까지 전차를 끌어들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면 Pzgr.40을 쓰는 수가 있겠으나 이 포탄은 독일의 텅스텐 자원 부족 때문에 대전 초기는 물론 전쟁 기간 내내 일선부대에 보급이 제대로 안되던 포탄이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국경지대의 전투 이후 지속적으로 KV 전차들을 맞닥뜨리면서 아주 드물게 3호전차나 50mm Pak가 50mm Pzgr.40으로 KV 전차 장갑을 관통했다는 이야기(심지어 50mm Pzgr.39로도 관통을 이뤄냈다는 이야기까지)가 없지 않으나 이것을 일반적이라 보기는 힘들 것이다.

 

 결국 국경지대 전투와 같은 초반부터 독일은 그래도 전차포 중에서는 가장 구경이 큰 75mm KwK 37 (L/24)를 장비한 4호전차를 KV 전차와 상대하기 위해 내보냈다.

 

그런데 조금 아이러니한 것은 이 전차포는 짧은 포신 때문에 포구초속도 낮은 곡사화기로 분류될만한 물건이란 사실이다. 그만큼 장거리에서 저격을 할만큼 탄도가 안정된 포는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으로서 이 선택을 강요받은 이유로는 일단 우선 가장 작약이 많이 든 무거운 포탄을 쏠 수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KV 전차는 정상적인 포탄의 운동에너지로 관통할 수 없는 장갑을 가지고 있었으니 일단 다량의 폭약으로 차체에 충격을 주고 기동불능에 빠뜨리는 방향으로 대처가 이뤄져야만 했다.

 

그래서 특히 K.Gr.rot Pz.(Kanone Granate rot Panzer. APCHE 계열이라고 보면 되며 발전된 형식이란 의미로 탄자에 빨간 테를 둘렀기 때문에 흔히 Rotkappchen — 빨간 모자라고 불리움)의 대량 사격이 이러한 목적에 가장 적합했다.

 

이 75mm K.Gr.rot Pz.는 탄자 중량이 50mm Pzgr.39의 3배 이상에 이르렀기에 무한궤도를 날려버리고 구동륜을 파괴하는데 더 유리했다.

 

또 독일군에 HEAT 계열의 포탄으로 Gr.38 Hl (또는 Hl/A) (Granate Hohllandung)이 지급되기는 하였으나 아직 Gr.38 Hl의 관통력은 K.Gr. rot Pz. 탄에 비해 떨어졌으며 성능도 일정하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이 또한 드물게 75mm K.Gr.rot Pz.가 직접 KV 전차를 관통해서 격파했다는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다. 필자로서 정확히 어떤 부분이 관통되었는지까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탄자의 곡사 특성상 다소 얇은 KV 전차의 차체 상면이나 접합부 같은데 명중하지 않았을까 막연히 추측할 따름이다.)

 

이렇게 75mm K.Gr.rot Pz. 등으로 KV 전차가 주저앉으면 그 다음에는 보병들이 달려들어 경험 미숙한 소련 전차병의 항복을 유도한다든가 하는 방법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독일군 전차부대가 소련군 전차부대에 비해 훨씬 월등한 조직력을 가지고 소련군 전차들을 졸졸 쫓아다니며 가지고 놀 수준이 될 때나 가능한 이야기인 것이다.

 

무선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훈련도 부족한 소련군을 상대해 라쎄이냐이에서 통용되고 이후로도 1941년 내내 종종 써먹은 이 방법은 그런 면에서 결국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소련군이 1941년 후반기부터 이런 전차들을 미숙하나마 대거 투입하면서부터 이러한 방법은 수 차 혹독한 댓가를 치루기도 했다.

 

 

 

5. 2. 곡사포(leFH, sFH), 중대공포(sFlak), 장포신곡사포(Kanone)

 

75mm 포탄으로도 씨가 안먹히는 KV 전차였으니 독일군으로서 더 강력한 화력으로서 생각해 볼 수 있던 것은 당연히 포병연대나 중대공포부대에 배치되는 대구경포들이었다.

 

일단 독일군이 비교적 쉽게 투입할 수 있는 것은 일반 포병연대에 광범위하게 지급되어 있는 10.5cm 경곡사포(leFH)와 15cm 중곡사포(sFH)였다.

 

통상 당시 독일군 1개 사단은 예하의 1개 포병연대에 4문(간혹 6문)으로 1개 포대(Batterie)를 편성하고 3~4개 대대에 각 3개 포대씩 배치하여 총 36~48문 정도의 곡사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이중 6~9개 포대는 경곡사포로, 3개 포대는 중곡사포로 장비하는게 또한 일반적이었다.

 

 

곡사포는 사용 목적이 아무래도 다량의 탄약을 적지에 퍼붓는 것이니만큼 개개 탄체의 작약 무게도 상당하고 이로 인한 파괴력도 상당했다.
 
그러나 라쎄이냐이 전투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경곡사포 및 중곡사포 정도의 직사로 KV 전차를 격파하기에는 여전히 무리였다.
 
곡사포의 특성상 포열이 짧고 포구초속이 낮은 관계로 포탄의 운동에너지 자체는 별로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기동성을 뺏는다는 목적으로 경곡사포와 중곡사포가 구동계통에 명중되면 거의 틀림없이 무한궤도와 일부 기동륜들이 엉망으로 박살나는 것은 다수 확인이 되었으나 전차의 무장 자체를 모조리 무력화시키기에는 다소의 한계가 있었다.

 

아마도 정말 격렬한 탄막을 펼친다면야 약한 포탑이나 차체 상면을 관통하는 운좋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기동전을 펼치던 독일군으로서 그만큼 집중된 화력을 퍼부을만큼 곡사포병을 집결하는 것도 그다지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은 실제 훗날 소련군이 대규모 공세 개시 전에 집중하던 무시무시한 예비포격에 의해 간혹 발생하였다.)

 

요즘 MBT야 복잡한 전자장비로 가득차 있어서 곡사포의 직격으로 이런 예민한 장비들을 고장내는 부수적인 효과라도 기대할 수 있겠으나, 당시 전차란게 그런 것도 아니니 포탄의 외부 충격으로 내부가 엉망이 되는 것도 크게 기대하긴 힘들었다.

 

그 다음 독일군의 기대를 모은 것은 전설적인 88mm Flak이 있었다.

 

88mm Flak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전역에서도 마틸다와 같은 영국군 전차를 수평사격으로 상대해 유효한 관통력을 보여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던 포였다.

 

대공포는 특성상 고고도까지 날아가야 하기 때문에 장포신에 높은 포구초속을 가지고 있으니만큼 전차 격파에 그만큼 유리할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독소전에서도 독일군 지휘관들은 이러한 특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라쎄이냐이 전투에서 보듯 88mm Flak 등이 지원나가서 방어전에서 소련군의 경전차들을 유린하는데는 톡톡히 써먹었다.

 

흔히 롬멜이 북아프리카에서 88mm Flak 화망을 잘 써먹은 것만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그 시점에서 롬멜의 화망 구성 방법은 독소전에서도 널리 쓰이던 일반적인 독일군의 방법이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는 없다.

 

그런데 이 시기의 88mm Flak은 KV 전차에 대해 하나의 약점을 드러낸다.

 

88mm Flak의 화력은 매우 우수했지만, 문제는 88mm Flak에 지급할만한 철갑탄(Pzgr.)이 독일군에게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일선 대공포부대들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대 항공기 사격이었으므로 순전히 고폭탄만 지급된 상태에서 이것을 전차에 쏴야했으니 중장갑을 자랑하는 KV 전차의 정면 상대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88mm Flak이 고폭탄을 쐈을때 KV 전차의 전면장갑을 관통하지 못한 것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88mm Flak에 철갑탄을 쓴다면 2000m 밖에서도 KV 전차를 관통할 수 있었다.)

 

물론 측면이나 후면에서는 종종 고폭탄으로도 관통을 해냈지만 4톤이 넘는 육중한 88mm Flak을 측면이나 후면에 여유있게 내리꽂을 정도로 배치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T-34라면 정면에서도 88mm Flak에 고폭탄으로 맞상대가 가능했지만 KV 전차는 그 이상의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이것은 이후로도 88mm 용의 철갑탄이 대량 보급되기까지 독일군을 괴롭히던 문제였다.

 

그렇다면 당시 독일군에 KV 전차를 정면에서 상대할만한 포가 하나도 없었을까?

 

그것은 아니었다. 단 하나의 예외로 6월 25일 독일군 제 73 포병연대에서 우연찮게 써먹은 포, 바로 10cm Kanone가 있었다.

 

(Kanone의 번역에 대한 의견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필자는 장포신곡사포 정도로 일단 쓰기로 하겠다.)

 

Kanone는 프랑스어 어원을 존중해 카농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곡사포(Feldhaubitze, field howitzer)보다 더 긴 포열과 좀 가벼운 포탄을 써서 곡사포보다 더 멀리 포탄을 안정한 궤도로 날려보낼 수 있는 포이다.

 

독일군은 이 10cm Kanone를 대량으로 지급하지는 않았지만 일선 사단포병에도 중(重)포 대대에 1개 포대 정도는 지급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보병사단의 경우 지급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음.)

 

특히 기갑사단은 거의 필히 1개 포대(4문)를 장비하는 포였다.

 

이 포를 전차에 대해 수평사격한다는 것은 사실 이전까지는 아무도 제대로 상상하지 못하던 것이었는데, 워낙 상황이 다급해지니까 이 방법이라도 써보게 된 것이었으며, 그 효과는 괜찮았다.

 

10cm Kanone는 포탄 중량이 15kg이 넘어 88mm Flak의 10kg 짜리 포탄보다도 위력이 강했으며 52구경장의 장포신에 포구초속 835m/s으로 역시 88mm Flak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그만큼 고폭탄을 써도 88mm Flak에 비해 1.5배에 이르는 위력을 낼 수 있었다.

 

철갑탄과 같이 탄자가 장갑을 뻥뻥 뚫는 수준은 아니어도 KV 전차 전면에 명중하여 내부까지 격파할 수 있다는 사실은 1941년 6월 25일 발견된 유일한 희망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10cm Kanone를 KV 전차의 필살병기로 써먹기에는 역시 현실적인 제약이 너무 많았다.

 

일단 Kanone의 특성상 중량이 무려 6톤을 넘어선다는게 큰 문제였다.

 

88mm Flak의 4톤 정도의 무게로도 적 전차와 맞닥뜨리는 최일선에서 포를 방열하는게 엄청난 어려움이 있었는데, 6톤이 넘는 포를 적시에 방열하고 사격준비를 한다는 것은 훨씬 더 어려웠다.

 

또한 10cm Kanone는 88mm Flak보다 훨씬 구경하기 힘든 병기라는 점도 있었다.

 

1개 사단에 고작 4문밖에 없는 육중한 포를 사단 방어구역 여기저기 끌어대 쓰기도 힘들었고, 생산량도 적어 손실 후에 10cm Kanone를 다시 수령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후 독일군은 KV 전차를 전면에서 관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포라는 이유로 10cm Kanone를 최대한 이용해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이러한 엄청난 무게와 적은 수량 때문에 섣불리 최전선에서 방열 도중에 소련군 전차대에 휩쓸려버리는 사건도 여러 차례 겪게 된다.

 

참고로 아래 표는 이상에서 살펴본 주요 중화기들의 1941년 6월 1일 전 독일 육군 및 공군(중대공포는 공군 소속임)에 배치된 수량 통계이다. 독소전에 투입된 양은 당연히 이보다 적다. 특히 중대공포 경우는 다수가 본토방공 용도로 배치되어 있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Table 5.1. 1941년 6월 1일자 전 독일 육군 및 공군 중화기 보유량

 

  37mm Pak 50mm Pak38 sFlak 10.5cm leFH 15cm sFH 10cm K18 PzKpfw.IV (75mm kz)
배치수량 15522 1047 4409 7076 2867 760 572

 

 

 

 

5. 3. 보병 및 공병의 육박공격

 

결국 가지고 있는 중화기가 소용이 없거나, 유효한 중화기라도 실질적으로 매우 사용이 힘든 실정에서 독일군은 보병, 공병 등이 직접 전차에 폭약을 매고 돌진해서 전차를 날려버리는 방법이 많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독소전 초반에 환경이 유리했던 것은, 소련군에서 제대로 된 보전 합동전술이 정착이 되지 않고 전차들 사이의 지휘체계가 워낙 엉망이어서 그야말로 분위기따라 막무가내로 적 전선에 쇄도하는 식의 공격이 횡행했기 때문이었다.

 

독일군은 이 경우 일단 우수한 소화기 탄막으로 전차와 보병을 분리시킨 후에 전차에 가까운 거리로 접근하여 대전차지뢰 등을 취약한 무한궤도 등에 끼워넣는 방법으로 기동불능 상태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고, 이렇게 고립시킨 후에는 공포에 빠진 전차 승무원들을 위협하여 항복을 받아내거나 좀 더 많은 폭약을 포탑링이나 엔진룸 등에 끼워넣어 전차 자체를 날려버리고는 했다.

 

이러한 육박공격의 패턴이야 사실 KV 전차에만 해당되는 것이라 보기는 그렇고, 일반적인 보병의 대전차공격 방식이니 여기서 세세히 설명하지는 않겠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어느 정도 이러한 정형화된 공격패턴마저 KV 전차에게 통하지 않는 때도 있었다는 것을 하나 짚고 넘어갈 수 있겠다.

 

독일군이 이후 KV 전차에 혀를 내두른 사건 중에 하나로 공병들이 KV 전차에 접근하여 무려 대전차지뢰 4개를 설치해서 폭발시켰는데도 KV 전차가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보고도 있었다.

 

보통의 당시 전차라면 대전차지뢰 4개를 한꺼번에 터뜨리면 구동계통이 날아가는건 물론이요, 보통 불을 뿜고 완파되기 마련인데 여전히 안에서 승무원들이 살아서 무장을 작동하고 있는 모습에 독일 공병들이 경악한 것이었다.

 

여하튼 KV 전차는 보병에게는 육박공격의 신뢰감마저 떨어지게 만든,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대단히 골치아픈 중전차였음은 분명하다.

 

 

 

6. 맺으며

 

이상에서 우리는 라쎄이냐이 전투을 통한 전형적인 독소전 초기 국경지대의 전투의 전개 과정과, 독일군이 KV 전차를 맞닥뜨려 얼마나 충격을 먹었는지, 그리고 이 KV 전차와 맞서 싸우기 위해 어떠한 방법들을 터득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던 것은, 단순한 진리의 확인이긴 하지만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겠다.

 

첫째로, 병기 성능의 현격한 격차만으로도 얼마나 실전에서 적에게 강한 충격으로 다가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련의 T-34와 KV 전차는 독일이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현실적인 격차로 독일군에게 순식간에 소련이 만만한 적만은 아니라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더 나아가 준 공황 상태까지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KV-2 전차 1대가 1개 기갑사단의 진격을 꼬박 하루 넘게 봉쇄한 사례 등은 시대를 뛰어넘는 개념의 소산이 거둘 수 있는 효과는 전술-전략의 차원뿐만이 아닌 하위의 병기 차원에서도 매우 크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사례였다.

 

둘째로, 더욱 중요한 것은 신병기는 반드시 철저한 준비를 거쳐 대대적으로 사용될 때만이 그 충격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이다.

 

이 또한 병기 실전투입에 있어 하나의 중요하고 당연한 원칙이기는 한데, 현실에서 이것을 지키기 매우 힘들다는 점이 또한 전사 연구자들을 약간의 딜레마에 빠뜨리는 것도 문제이다.

 

라쎄이냐이 전투에서 볼 수 있다시피 소련군 제 2 전차사단에게 더 많은 KV 전차가 있었고, 좀 더 조직적으로 훈련된 전차병이 있었다면 하는 생각은 독소전 초기 연구가들 사이에 참으로 많이 회자되고는 한다.

 

독일군은 분명 KV 전차의 화력과 방어력에 엄청난 인상을 받았지만, 정작 코뿔소처럼 앞만 보고 돌진하고 제대로 피해도 못입히는 모습에 일선 장교들 상당수가 심각하게 동요하지 않고 비교적 침착하게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아갈 수 있었다.

 

다른 전구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부분적이나마 우수한 장비를 한 소련군 전차사단이 국경지대에서 좀 더 피해를 입혔더라면 역시 많은 부분에서 전쟁 준비가 미흡했던 독일군은 훨씬 일찍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여기에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역시 일선의 전투에 있어서 병참-보급-지원체계의 중요성 문제를 빼놓을 수 없는듯 하다. KV 전차는 화력과 방어력 면에서 대단히 우수한 전차였지만 고질적인 기동성 문제로 초기 전투에서 대다수의 전차들이 전투 중이 아닌 행군 중의 고장으로 탈락되고 버려졌다.

 

독일군의 티거나 초기의 판터가 기계적으로 대단히 불안한 전차였음에도 비교적 충실한 수리-지원체계 덕에 가동률을 어느 수준 이상 유지할 수 있었던 사실과 크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또한 당시 KV 전차를 장비한 부대들에게는 가용한 76.2mm 포탄 재고가 1~2일 정도가 고작이었다.

 

후방의 탄약과 연료를 추진할 보급부대들이 차단당하고 Luftwaffe의 공습에 당하며 고립되던 마당에서 제아무리 KV 전차라도 처음 하루 이틀처럼 며칠 이어 계속 독일군을 방어해내기란 힘들었다.

 

(이것도 1944년 무렵에 독일이 고스란히 역으로 당하는 문제의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이런 라쎄이냐이 전투라든가 독소전 초기전역은 중, 후기만큼의 물고 물리는 박진감은 떨어질지 모르겠지만 필자에게는 여전히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다.

 

필자로서도 그만큼 자료를 모으고 접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았으며, 여기까지 써내려가는 것도 사실 힘에 겨운 부분도, 미흡한 점들도 아직 많다.

 

여하간에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앞으로는 제발 독소전은 "물량만 판을 치던 무식한 전쟁"이라는 정말 맥빠지는 소리를 하기 이전에 좀 더 구체적인 사례들을 연구하고 전쟁의 흐름에 끼친 영향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쪽으로 많이들 노력하셔서 필자에게도 많은 도움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출처:http://blog.daum.net/schultz/1976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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