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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아님] 소설] WOW단편, 참회

귤우경
댓글: 4 개
조회: 1724
추천: 7
2017-01-05 17:24:49



 "시간을 죄어 묶을 때면 종종 재미있는 흔적을 발견하곤 한다. 누군가 그 흐름에 돌덩이를 하나둘 던져놓은 듯한 모습이야. 딱히 흐름을 바꾸려는 시도 같진 않구나. 크로노르무, 이 흔적이 무얼 뜻하는지 알겠니?"

  "편지 같은 것 아닐까요? 흐름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시간을 거슬러 온 누군가 남긴 마지막 흔적 같은..."

 - 청동용군단의 대담 중

 

 


눈을 감을 때 종종 보이곤 했던 형형색색의 광채들과, 그리고 그 본질이 자신이라는 듯 끊임없이 찾아오는 어둠.
이따금 고요히 찾아오는 환상들. 한없이 고요한 와중에 울려퍼지기만 할 뿐인 소리들. 나를 책망하는 목소리와 나를 믿어주는 목소리들.
온 주위를 둘러싼 그 혼란의 바다를, 떠내려간다는 표현이 맞을듯한 유영으로 표류한지 얼마나 되었을까.
내가 누구였는지, 이곳이 어디인지, 무얼 해야하는지는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흐릿해지며 나를 잃고 이 바다에 몸을 맡기고 싶어져만 간다. 
하지만 뭔가 바로잡고 싶다는, 그래야만 한다는 한없는 욕구가 내 가슴을 종종 헤집어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어와 다시금 정신을 차리곤 하였다.
그러한 욕구가 심해질때면 마치 누가 그래야만 한다고 귓가에 속삭이는 듯 목소리로 들리기 까지 하는 것이었는데, 
그럴때면 이 혼돈을 벗어나 내 발로 다시금 오롯이 서고 싶다는 마음이 나를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오랜, 아니 혹은 잠깐이었는지 모를 시간을 보낸 지금 나는 내 몸에 닿는 거친 돌의 감각에 눈을 떴다.

 

 "오랜만에 새로운 자로구나. 이번 영혼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봐, 놈을 데려가라. 어서! "
 
 어마어마한 소리의, 하지만 극히 낮은 음습한 울림을 지닌, 흡사 포효와 같은 외침에 놀라 일어나는 내 눈 앞에 보인 것은, 산더미같은 몸에 박쥐와 같은 날개, 흡사 마치 유황불을 뿜는 듯 끊임없이 열기가 솟아 오르는 입을 가진 괴물이었다. 그 육중한 팔을 꿈틀대며 움직이며 나를 위협하듯 움직이는 그의 몸, 그리고 그 거대한 육체에 달린 빈약한 날개는 나에게 공포와 더불어 까닭모를 증오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잠깐 거대한 얼굴을 내려 나를 잠시 보고는 몸을 돌려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다른 곳으로 떠나가 눈 앞이 트이자 나는 내가 서있는 곳이 꽤 고지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의 발 아래로 저 먼 곳에는 짙은 보랏빛 돌로 이루어진 원형의 투기장 형상이 보였다. 하늘은 온통 내가 떠내려온 혼란의 색채로 가득차있었으며, 군데군데 눈알과 같은 것들이 둥둥 떠있었다. 그 곳곳에는 온통 역겨운 빛깔의 연기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고, 투기장 주위론 거대한 마차들이 줄 서 있는 듯 했는데 그 주위에서 무수한 종족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이 곳은 대체..."
 "그래! 이 곳이 바로 뒤틀린 황천의 4103번 구역이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온통 붕대를 휘감은 에테리얼이 한명 서있었다. 군데 군데서 지직 거리는 번개가 뿜어져 나오는 그의 뒤로는 온통 정신을 사로잡는 빛깔의 파도만이 가득했고, 악마 형상의 차원문이 그 파도와 대지의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저 차원문이 바로 네가 들어온 곳이지. 나를 따라와라. 시간이 없으니 걸으며 설명해 주겠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에테리얼이니, 거대한 악마니, 처음 보는 정체모를 것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일단은 그를 따라가며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아까도 말했던 것 같지만, 어쨌든. 이 곳은 뒤틀린 황천의 4103번 구역이다. 용서받지 못할 자들의 영혼이 거쳐가는 최후의 투기장이지."

 

 영혼이라고? 그러고보니 아까의 거대한 괴물도 나를 보며 영혼이라 말했던 것 같다.
 
 " 영혼이라고 했소? "
 
 그가 나를 힐긋 보더니 얼굴이라 생각되는 부위의 붕대를 펄럭거리며 말했다.
 
 " 그래. 영혼이다. 너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자. 그 죄가 무엇인지를 떠나 자신이 가진 선(善)의 한계를 뛰어넘은 자이다. 그러한 자의 영혼에는 그 행위의 경중에 상관없이, 특이한 문양이 얽히게되지. 그 문양은 악마들의 영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인데, 특이한 파장을 내뿜는 것으로, 그 문양이 새겨진 영혼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스스로의 행방을 결정하지 못한 채 그저 뒤틀린 황천을 포류하게 되지. 보통은 그 와중에 황천에 스며들어 그저 혼돈이 되어버릴 뿐이지만, 간혹 그 영혼이 살아남을 경우 저 차원문, 영혼에 악마의 문양을 가진 자들을 불러들이는 곳으로 오게 되는 것이지. 너와 같이 말이다. "
 
 내가 죽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덤덤하게 받아들여졌다. 색채 속을 표류하며, 이건 꿈이거나, 사후 세계일 것이라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죄에 관해서 역시, 내심 색채 속을 표류하며 날 계속 불러 일으킨 그 욕구, 바로잡고 싶다는 욕구의 근원일 것이라 생각하니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이해했소. 그런데 원래 이렇게 기억나는 것이 없는 것이오? 마치 머리 속에 안개가 낀 듯 정확히 기억나는 것이 없소. 그저 기본적인 것들 뿐..."
 "그렇다. 뒤틀린 황천에 스며들지 않고 이 곳에 도착한 것 만으로도 드문 일이지. 기억을 잃어 흐릿해진 자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자아가 지나치게 손상되어, 흉악한 모습으로 도착하는 것들도 있다. 네 몸을 보아라. 그저 너의 상념이 뭉친 안개에 불과하고, 네 성별이니 종족따위는 알 수 없는 것이지."
 
 과연 그러했다. 손이며 발이며 마치 안개를 모아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 안개는 짙은 잿빛으로, 세상의 온갖 음울함을 모아둔 듯 했으며, 그 내면에는 뭔가 어두운 문양이 있는데 저자가 말한 악마의 문양인 듯 했다.

 

 "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이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영혼들을 모아서 뭘 하려는 거요? "
 
 이런 일을 오래 해왔는지, 그는 피곤한듯 붕대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 너는 투기장으로 간다. 그 곳에서 너와 같은 자들과 싸워서, 상대에게 남은 순수한 영혼의 마지막 한점까지 모아야 한다. 그 여정의 어느 지점에서든 너는 너의 영혼을 회복할 수 있다. 어쩌면, 네가 남기고온 후회와 한탄이 충분히 강력하다면 단 한 번의 승리로도 상대의 영혼을 무자비하게 빨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순수한 영혼을 아무리 모아도 자신을 찾지 못하는 자들도 있지..."

 

 잠시 붕대를 음울하게 펄럭이더니 걸음을 빨리하며 말했다.


 " 원래는 너와 같은 영혼들이 차원문의 곳곳에서 헤메이다 자신을 잃고 뒤틀린 황천으로 사라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꽤 재미있는 방식을 고안해 냈지. 너희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우리는 투기장이라는 괜찮은 돈벌이를 얻을 수 있는 바로 이 방식 말이다. "

 

 말을 시작할때와는 달리 돈벌이 얘기를 하자 꽤 흥이 났는지 붕대에 감긴 그의 몸이 옅은 빛을 내는 것이 보였다. 
 문득 고블린과 다를게 없는 놈들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말에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 말을 이었다.

 

" 잠깐, 그렇다면 패배하여 순수한 영혼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사라지는 것이오? "
 
 그의 몸이 잠깐 멈추더니, 짙은 어둠을 띄기 시작했다. 어느새 말을 시작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이 곳에 도착해 처음 만났던 악마와 같은 울림이 있었다.

 

 " 하하하. 사라지다니. 그저 구경하며 돈을 걸 뿐인 일을 악마들이 도울 리가 없지. 패배하여 네 영혼의 순수한 부분을 모두 잃게되면, 네 영혼은 악마에게 귀속되어 그 하수인으로 태어나는 것이지. 그 운명에서 너를 찾을 기회는 결코 없다. 너의 영혼의 본질은 완전히 흩어져버린 채, 영혼이라는 이름의 껍데기만 남을 뿐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질문은 끝이다. 너의 영혼을 위해 싸워야할 때가 다가오니 마음의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 삶이 어떤 것이었든 너의 본질은 곧 다가올 순간에 결정나는 것이니 말이다. 아 물론, 네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네가 패배한다면 그 누구도 알 수 없겠지만. "

 

 그의 마지막 말 이후로 우리는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반드시 바로잡아야한다. 하지만 무엇을? 그것을 알기 위해선 승리해야만 한다. 악마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다시는 나를 찾을 수 없는 운명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사유의 도중, 한순간 진정한 승리는 욕망한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어린아이가 울부짖듯 소리치는 것이 들린 듯 했다.
 내가 생전에 무얼 했든, 집착으로 인해 망쳐버린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말을 들어 상념을 지워버리고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꽤 오랜 시간 걸어내려와서야 우리는 투기장의 입구에 도착했다. 에테리얼이 입구의 무언가를 조작하는 동안, 소란스럽던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투기장은 멀리서 내려다봤을 때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거대한 크기였다. 보랏빛 벽돌들로 이루어진 건물은, 군데군데 에테리얼 특유의 번쩍이는 무늬들과 보석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투기장 주위에 보이는 마차들도 대부분 투기장과 같이 무지막지한 크기로, 그 주인들의 체구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마차 주위에 있는 무리들은 악마와 같은 종족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온갖 말들로 지껄이고 있었는데, 그 특유의 어투와, 킁킁대는 콧소리 때문에 무척 요란스러웠다.  다만 유독 한군데 특이하게도 노움의 무리가 있어 쳐다보고있자 어느새 일을 끝마친 에테리얼이 옆에서 말했다.

 

 " 아제로스의 우체국 직원들이다. 황천에서 건진 물건들을 빼돌려 이런 곳에서 소모한다는 것 같더군. 재미있는 놈들이야. "

 

 노움들이 내 눈길을 눈치채고 괜히 사방의 기계 덩어리들을 투닥일 즈음, 투기장 입구에 있던 문이 문이 우르릉 대는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거대한 오우거가 나와 에테리얼과 무언가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에테리얼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 투기장의 6번 구역에서 네 전투가 있을 것이다. 네 상대는 총 9번을 싸워서 이긴 자로, 그 기억의 대부분을 회복한 자라 하는 군. 저자를 따라가면 된다. "

 

 나는 묵묵히 끄덕인 채 나를 이끄는 오우거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에테리얼이 내 등 뒤에서 조용히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 나는 네게 걸겠다. 네가 처음 차원문을 통해 들어왔던 순간, 나는 보았다. 네 몸에 잠깐이지만 어려있다가 사라진 그것은 분명히... "

 

그의 마지막 말은 문이 닫히는 소리에 묻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투기장 내부는 어둡고 조용했다. 눈에 들어오는 빛은 종종 벽돌들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내가 무수히 봐온 그 색채들 뿐이었으며, 귀에 들어오는 소리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심지어 내 앞에 걷는 오우거의 발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다. 오우거의 등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동안 나는 문득 현실감을 잃어 지금 이것이 내가 색채를 표류하며 겪는 환상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 아니야. "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내 옆에서 들려왔다. 어둠과 고요 속에서 갑자기 들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는 무척 친숙하고 또 애절하여서,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으나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어둠만이 있을 뿐이었다.


 '쿵!'
 

 얼마나 걸었을까. 오우거가 발을 구르는 소리에 그를 쳐다보자 오른쪽의 문으로 들어가라며 손짓하고 있는게 보였다. 
 문은 나와 비슷한 크기로, 머뭇거리다 손으로 밀자 문이 열리며 후끈한 열기와 함께 밝은 불빛이 보였다.
 내가 들어온 곳은 무기고인 것 같았다. 꽤 넓은 크기로, 벽에는 온갖 무기들이 끝없이 걸려있었으며 군데군데 작은 임프들이 뛰어다니며 무기를 나르고 있었다. 구석에 있는 모루에서는 처음 보는 종족이 무언가를 열심히 궁리하며 자기들끼리 의논을 하는 것이 보였다.
 방의 정면에는 온갖 야수들의 모양으로 장식된 문이 있었는데, 북소리니 고함소리니가 끝없이 스며나와 저 곳이 입구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내가 머뭇거리며 서있자 옆에서 '슥' 하는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악마가 한명 나타나더니 다가와 말했다.
 
 " 이 곳은 무기를 고르는 곳이오. 저 벽에서 마음에 드는 무기를 고른 뒤, 준비가 된다면 저 문으로 들어가면 되오. 당신의 상대가 방금 준비를 마쳤다고 하니 어서 무기를 고르시오. "

 

무기를 고르러 벽으로 다가가서 보니 이 곳에는 정말 온갖 무기가 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무기도 있었으며 익숙한 검과 창, 망치등도 보였다. 내가 적당한 무게의 양손검을 골라 문으로 다가가자 악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행운을 비오. 혹여 패배한다 하여도 걱정하지는 마시오. 나는 내 하수인을 다루는 법을 잘 안다오. "

 

 코웃음치며, 나는 문을 힘차게 열었다.


 내가 들어간 곳은 둥그런 원형 투기장이었다. 내 주위에는 아직 투명한 결계가 쳐져있어 진입하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사방은 무척 높은 관중석으로, 온갖 종족이 앉아있었는데, 처음 이 곳에 와서 본 거대한 악마도 자리를 잡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맞은 편에는 내 상대인 듯한 자가 거대한 망치를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9번 승리하였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말해주겠다는 듯 우락부락한 근육을 뽐내고 있는 잿빛의 오크였다. 그는 나를 보더니 이겼다는 듯 자신의 망치를 높이 들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관중석의 악마들이 함께 고함을 지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결계가 사라졌다.

 거대한 오크가 발을 쿵쿵 구르더니 온 몸을 앞으로 내던지듯 달리는 것을 봄과 동시에 나도 내 검을 굳게 잡고 왜인지 익숙한 발걸음을 앞으로 향하여, 투기장의 중앙에서 마침내 격돌했다. 치켜든 망치를 우르릉 소리를 내며 거세게 내려찍는 것을 굳게 잡은 검을 옆으로 세워 막았다. 망치가 옆으로 흘려졌지만 검이 무지막지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굉장한 힘이었다. 

 

" 나는 살아생전 전쟁터에서 거대한 망치로 너와 같은 나약한 자들을 수도 없이 으깨버렸다! 너도 마찬가지 운명일 뿐이지. "
 
 그가 망치를 어마어마한 힘으로 옆으로 휘두르며 외쳤다.
 망치가 채 도착하기도 전에 부르르 떨리는 공간을 가까스로 뒤로 돌아 피하며 검을 횡으로 휘두르자 무언가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자신의 팔에 난 검상을 슥 쳐다보더니 외쳤다.
 
 " 크하하하, 반항할 줄은 아는 놈이구나. "
 
 그가 다시금 내려치는 망치를 옆으로 가까스로 피하고 검을 올려 찌르려는 순간 그가 내려친 망치가 이번엔 왠지 가볍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채 움직이기도 전에 내려치던 망치를 옆으로 돌려 검을 쳐냈다.
 순간 자세가 흐트러져 휘청하는 사이 그가 망치의 머리로 내 가슴을 세게 가격하였다.
 
 " 커헉 "
 
 순간 자리에 쓰러져 검을 쥐고 헉헉대는 나에게, 오크가 망치를 치켜올리고 다가왔다.

 

 " 끝이다! "

 

 순간, 몸이 마음대로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 두 다리를 가슴 쪽으로 끌어 올렸다가 펄쩍 뛰며 힘껏 내뻗었다. 발이 오크의 배를 가격하는 것이 느껴졌다. 오크가 뒤로 주춤하는 사이 벌떡 일어나 검을 아래에서 위로 온 힘을 다해 그어 올렸다. 살갗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오크의 검은 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 끄아아아아!!! "

 그의 눈이 일순 붉게 물들더니 방금 한 팔을 잃었다 생각되지 않는 끔찍한 속도로 망치를 들고 대각선으로 내리쳤다. 왜인지 그러한 광경에도 아무렇지 않은 내 모습이 보였다. 거대한 망치를 상대하는 것이 익숙한 일이라도 되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몸을 재빨리 반바퀴 돌려 망치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뒤 검을 흩뿌렸다.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 그를 쳐다보자 그의 망치가 잿빛의 팔과 함께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는 양 팔을 잃은 채로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한껏 고취되어 검을 들고 그에게 다가가자 그가 뒤로 주춤거리다 풀썩 넘어졌다. 망치를 옆으로 밀어내고 그의 턱에 검을 들이밀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그에게 내가 말했다. 그 말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 입으로부터 솓구쳐 나왔다.

 

 " 네 영혼은 나의 것이다. "
 
 숨이 멎어버린 듯 했다.

 ' 네 영혼은 나의 것이다. ' 
 너무나도 익숙한 말이었다. 내가 부여잡은 검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무언가 알 것만 같았다. 내 시선이 오크에서, 한팔을 치켜들고 검을 잡고있는 내 손으로, 그리고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간 내 검으로 향한다. 악마의 그 모습이 어째서 그렇게 증오스러웠는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극한의 땅으로 항해해 나아가 나의 검을 찾았던 순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대지에서 내 검을 들고 서있던 순간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서리한'

 

 마침내 셀 수 없는 많은 언데드들이 나를 우러러보던 그 때를 기억해냈다.
 
 " 나는 리치왕이다. "
 
 순간 투기장의 악마들이 눈을 부릅떴다. 오크를 쓰러트리고 그의 목숨을 취할 듯 검을 치켜들고 있던 인간의 영혼이 음습한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악마들조차 겪어보지 못한 한기가 투기장 전체에 으슬으슬 일어나더니 끔찍한 한기가 번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대지가 잿빛으로 물들며 얼어붙기 시작했다.

 

오크가 나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다리를 놀려 문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무의식 중에 손을 뻗자 오크의 목덜미를 검은 손아귀가 나타나 잡아 올리는 것이 보였다. 목 졸려 죽어가는 그의 그림자에서 아마도 순수한 영혼일 무언가가 흐느끼듯 빠져나와 내 주위로 다가왔다.

 나는 리치왕이다. 그러나 무언가가 아직 남아있었다. 나를 잃어버리게 할 그 끝없는 혼돈의 바다에서 나를 끝없이 존재하게 만든 것, 내가 그토록 바로 잡으려 했던 것, 환상을 겪을 때면 항상 내 옆에 있던 한 여인. 가슴 속을 헤집어 놓던 죄책감. 내가 아직 알지 못한 그것은 도대체 무얼까? 
 순간, 담담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 나는 마티아스 레너. "
 
 돌아보자, 어린 아이가 한명 서 있었다. 
 그가 입은 단정한 옷은 로데론 왕가의 왕실용 예복이었다. 군데군데 잘 정돈된 옷차림은 그가 얼마나 사랑받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가 옆구리에 차고있는 훈련 검은 심하게 낡아있었다. 한 드워프와 함께 웃고 떠들며 훈련해 나가던 때를 그릴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이 점점 성장해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 그의 가슴에는 휘장이 있었다. 그 문양을 알고 있었다. 은빛 성기사단으로 받아들여질 때 얻는 표장. 그 영광스럽던 빛의 날을 나는 기억할 수 있었다.
 그의 품에서 피가 담긴 병과, 검은 보석같은 것이 떨어졌다. 그 주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범한 죄를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목에는 이제 로켓이 걸려있었다. 그 로켓에는 한 여성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이름을 부를 수도 있었다. 
 
 " 제이나. "
 
 고개를 들어 마티아스 레너라 말한 그의 얼굴을 보자 알 수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줄곧 그래왔다는 듯 당연하다는 듯 내 옆에 조용히 서서, 자신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말했다.

 

" 나는 아서스 메네실. "

 

한기가 멎었다. 인간의 영혼은 잿빛이 아닌 새하얀 순백을 띠기 시작했다. 아니, 이제 그의 살아생전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란 망토를 걸친 채 당당히 서 있는 금발의 한 남성이. 그의 주위에는 한없이 밝은, 그러나 포근한 빛이 조금씩 어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악마가  황급히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고, 주위의 크고 작은 악마들이 웅성거리며 어찌할 줄 몰라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오크가 죽음의 손아귀에서 풀려나 땅에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주위로 번져나가던 얼음조각들이 녹아버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사이엔가 악마들이 웅성거리며 관객석을 빠져나가려 하는 것이 느껴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전, 아제로스 용사들과 티리온 폴드링에게 패배하여, 목숨을 잃기 직전 아버지의 영혼과 마주한 그 순간에, 내가 가졌던 죄책감이 무엇인지 기억났다. 내가 무엇을 바로잡고자 한 것인지 비로소 기억해냈다.

 순간 강렬한 빛이 투기장을 감쌌다. 투기장이 자리한 대지와 그 주변의 뒤틀린 황천을, 혼란스러운 색채에서 더 없이 밝은 성스러운 빛이 한순간에 터지듯이 감싸안았다. 
 그 부정한 대지에 존재하던 수 없는 악마들은 영혼조차 남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그 빛의 엄숙하지만 더 없이 따뜻한 포옹이 끝난 뒤, 투기장의 그 자리, 인간 아서스 메네실이 있던 곳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 리치왕이시여, 티리온 폴드링과 아제로스의 용사들이 성채에 진입하였습니다. "
 
 발키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그들이 성채의 모든 이들을 물리친다면, 얼어붙은 왕좌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여라. "

 

 나는 투영의 전당으로 걸어들어갔다. 투영의 전당의 구석, 먼지가 쌓여있던 작은 함을 열어, 리치왕으로서 외면해왔던 물건들을 꺼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영혼 조각, 은빛 성기사단의 표장, 실바나스의 피, 어릴 적의 훈련 검, 그리고 제이나의 펜던트... 
되찾은 아서스로서의 내 영혼이 다시금 리치왕에 잠식되기 전에, 그 모두를 하나하나 쳐다보고 깊이 사과했다. 그리고 내가 고통받게 한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사과했다. 그 후 물건들을 모아 하나의 함에 넣고 봉인하여 품 속에 넣고, 서리한을 뽑아든 채, 얼어붙은 왕좌로 향했다.

 나를 향해 다가올 아제로스 최고의 용사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그리고 마침내 닥쳐올 합당한 나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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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둔지 좀 돼서 현재 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어요...

저는 어둠한 작업을 못 해서 글에 나오는 아이템들을 본 적이 없답니다 ㅠ

그리고 노움들은 아마 쩌는 양자역학을 이용해 아제로스로 무사 귀환했을 겁니다. 킹갓노움!


 + 어째 그림이 없으면 안 되는 것 같아 근 11년 만에 그림을 그려봅니다... 미술 시간 이후로 처음 ㅋㅋㅋㅋㅋ

Lv35 귤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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