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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퀘] 태평양 전쟁의 시작! 진주만 기습

아이콘 간달푸
댓글: 11 개
조회: 4664
2010-10-26 23:11:12

어제 올린 태평양전쟁의 발발배경에 이어서

 

오늘의 주제는

 

원래 어제 본래 주제였던

 

'태평양 전쟁'의 시작인 '진주만 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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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강경파가 집권을 하고 일본. 침략과 팽창을 멈추지 않겠다는

일본의 의지를 얼추 짐작하면서도 먼저 행동에 나설 수 없었던 미국은, 그저 석유 금수조치가

일본의 침략야욕을 꺽어줄 억지력이 되어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어. 얼핏 보면 지독히도 낙관적일 지도

모르는 이 관점은 사실 상당한 설득력이 있지. 일본이 팽창하고 있기는 하지만 미국에게 함부로 전쟁선포를

할만큼 강한 국가는 아니였고, 인적 자원도 무척 부실했으며,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도, 그 수급처도, 또

자원을 가공할 기술도 부족한 상태였어. 즉 미국 수뇌부는 '머리가 있는 나라라면 우릴 못 건드리겠지'라는

심정이였지....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함으로써 어느정도 석유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지만, 이에 일본은

만족할 수 없었어. 군대를 키워가려면 더욱 많은 석유가 필요하고 또 당시 건조중이었던 많은 전함을 써먹

으려면 석유와 철광석이 필수적인데, 당시만 해도 석유와 철광을 가장 많이 수출하던 미국이 지하 자원에

대한 수출을 전면 금지하고 대일 수입 역시 끊어 버리니 살 맛이 나질 않았던 거지.

(만약 일본이 이쯤에서 전쟁을 멈추기로 하고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는다면 우리는 일본어를 쓰는

'조선 출신 일본인'이 되어 있을수도...) 초 강경파 '도조 히데키'를 수상으로 임명한 일본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전혀 없어고 미국과 전쟁도 불사할 생각이었어....

 

결국 일본 수뇌부는 1941년 12월 1일 히로히토가 참관하는 어전회의에서 도조 히데키는 히로히토 앞에서

대미 개전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여러가지 설명을 덧붙였는데 한줄로 요악하면 이래.

 

"내가 귀싸대기를 맛깔나게 후리면 감동먹어서 우리랑 협상할거임!"

 

평화적인 협상이 아닌 전쟁을 통해 미국에게 단숨에 큰 피해를 입히고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여 유리한 입장

에서 협상을 하겠다는 것이였지. 여기서 연합함대 총사령관 야마모토는 미국 하버드 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었고

미국의 저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반대했지만 결국 전쟁이 결정되자 기습을 통한 단시간내에 최대한

많은 피해를 주는 기습작전을 준비하게 돼. 이것이 바로 "진주만 기습"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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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55분 진주만. 적당히 평화로운 배치]

 

- 도라 도라 도라 -

 


12월 7일 하와이. 새벽 3시 즈음 잠이 오지 않아 바깥으로 나와 항구 근처를 어슬렁 거리던 한 청년이 갑자기

수면위로 부상하는 검은 물체를 발견하지. 그 청년은 다급히 경찰에 신고했고, 놀란 경찰이 달려가서 확인해

보니 그것은 일본 국적의 잠수하이였지.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와이 근처에서 좌초해 해변까지 쓸려온 것

이였어. 같은 시각 하와이의 레이더 기지에서는 다른 한 대의 잠수함이 그처에서 활동중임을 알아챘어.

 

오아후 북쪽 레이더 기지에선 거대한 비행물체가 확인되었지. 확실한 공격 직전 상황이였어.

그런데....하와이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평범~하게 하루를 시작했어..(안보 불감증은 이래서 위험한거야)

당시 관리들은 미국에 공격이 가해질 것을 알곤 있었지만 목표물을 잘못 알고 있었지. 일본으로부터 5,000마일

떨어진 필리핀에 공습을 감행할 것이라고 말이야.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의 아침은 그렇게 평화로웠어.

항구에서는 일요일을 맞아 물놀이를 나온 사람들도 보였고, 수병들은 저마다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

 


진주만으로부터 북쪽으로 200마일 떨어진 해상에서는 일본 해군 진주만 공격대의 항공모함에서 진주만에 공습을

가하기 위한 비행기들이 출진을 준비하고 있었고 조종사들은 스로틀(조종간)을 잡아당길 무렵이였어.

더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고 12월 2일 진주만 공격개시 명령인 "니다카 산에 오르라 1208"을 하달받은

진주만 공격대는 망설임 없이 출진을 준비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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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함선들이 위치했던 위치. 대파되어 좌초된 위치와 거의 일치함]

위에서부터 네바다, 애리조나, 좌측의 테네시, 우측의 웨스트 버지니아, 매이랜드,

오클라호마, 캘리포니아, 맨 아래의 펜실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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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아카기]

초기에는 60기를 함재했으나 이어진 개수로 90기까지 탑재할 수 있었던 일본 항공모함의 얼굴마담

 


그리하여 제1항모전단 소속의 항공모함 "아카기", "카가"와 제2항모전단 소속 항공모함 "소류", "히류", 그리고

제5항공전대 소속 항공모함 "즈이가쿠", "쇼가쿠"에서 발진한 138대의 뇌격기, 수평 폭격기, 급강하 폭격기,

전투기는 두개로 나뉘어 각기 제1차, 제2차 공격을 감행했어. 제 1차 공격은 매우 성공적이였지. 공습목표를

전부 파괴했고 진주만의 함선들에 큰 피해를 입힌 것이였어. 제1항모전단 소속의 제독 나구모 중장은 기함

아카기에서 기습에 성공했다는 암호명 "도라 도라 도라"....아군 기습이 성공했음을 알리는 전보였어!

 

[붉은선이 일본기의 공격방향, 붉게 표신된 배가 공격대의 목표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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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모함 아카기에서 발진준비중인 일본군 전투기의 대표 명사, "영식 함상 전투기" 통칭 "제로기"]
폭탄 투하 및 공중전도 수행이 가능했던 전투기지만 최후는 자살공격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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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폭발을 일으킨 USS 애리조나]
 


한편 미군은 그들이 훈련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일본군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걸 깨달았으나 혼란

상태는 가실 줄 몰랐어. 진주만에 위치한 태평양 함대 소속의 군함 94척에 달린 780문의 대공포 중에 제대로

인원이 배치된 것은 고작 1/4에 불과했고 육군이 보유한 31문의 고사포에 인원이 배치된 곳은 고작 4문 뿐이

였지. 더군다나 고사포의 포탄이 준비되지 않아 갔다고 한들 포를 쏠 수 있던 것도 아니였어. 결국 대평양

함대 사령부의 빈센트 머피 중령이 통신장교를 불러 긴급히 무전을 타전시키지


"진주만은 지금 공습받고 있다. 연습이 아니다."


해군 작전부장, 대서양 함대 사령관, 동양 함대 사령관, 기타 전 함대 사령관에게 발송된 이 무전은 미국

서해안 기지의 메이 아일랜드 해군기지를 경유해 워싱턴에 보고되었고, 또한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에서도

이 무전을 잡을 수 있엇어. 그러나 엔터프라이즈의 통신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지.

 

일본군은 두번으로 나뉜 공격을 통해 수많은 피해를 입혔지만 미군은 포기하지 않고 반격을 개시했어. 평화롭던

호놀룰루의 아침은 삽시간에 지옥이 되었지 미군이 하늘에 흩뿌린 대공포탄이 탄막을 만들어 가끔씩 일본

전투기를 격추시켰고 일본기의 공격과 미군이 뿌린 포탄에 의해 시민들이 하나둘 쓰러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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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 파편에 의해 사망한 민간인....]

 

 

군인 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포화에 휩쓸린 것이였지.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긴급 방송을 되풀이했어.

"육군 정보국에서 명령을 전합니다. 시민들은 일체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전화도 사용하지 마십시오. 지금

하와이는 적기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전화를 쓰지 말것, 밖으로 나오지 말 것, 그리고 라디오 뉴스를 잘

들어주십시오. 반복합니다. 육군 정보국에서 명령을 전달합니다...."

라디오 뉴스 사이에 섞인 폭음은 전쟁과는 무관하리라고 생각했던 낙원 하와이에도 전쟁의 광기가 휘몰아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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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습 한 달 전 하와이의 모습]

 

오전 8시 30분, 10여분에 걸친 공격 지속에 관한 토론끝에 일본 해군은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음을 인정하고

북북서 방향으로 퇴각을 개시했어. 약 2시간에 걸친 기습공격....결과는 참담했어....

 

전과 (미국의 발표)

  격침 - 전함 5척, 급유선 1척

  대파 - 전함 3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2척

  중파 - 전함 1척, 경순양함 4(1)척

  항공기 - 464(352)기 이상 

 격납고 - 8동 파괴

 

피해

항공기 29기

특수잠함정 5척  

 


진주만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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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12월 7일을 굴욕의 날로 선포하고 3일 뒤 미국 의회는 반대표 하나를

남긴 채 전쟁을 선포하지. 미국인들은 일본의 아메리카 대륙 침공을 대비해 전쟁준비를 시작했고, 애국심에

군대에 지원하는 이도 부쩍 늘었어.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일본에 대한 반감이 나타나자 이를

반겼으며, 미 정부에 한인으로 구성된 육군 부대를 훈련시켜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지. 캘리포니아 주 방위군

휴스 대령은 한인으로 구성된 중대를 조직하는 데 협력하겠다고 약속했으며 나아가 15세부터 64세까지의 한인

50명이 지원, 곧 중국인과 필리핀인도 지원함에 따라 동양인으로 구성된 대대가 창설되기도 했어. 대대의

이름은 "맹호군", 정식 인가는 1942년 4월 26일에 나왔고 대대기가 수여되었지.

 


그리고 진주만으로 말미암아 미국의 진짜 위력이 터져나오기 시작하지. 1차대전처럼 2차대전 역시 뒤에서 군대를

보내고 무기를 팔면서 돈이나 벌 생각이었던 미국에게 직접적인 공격이 가해짐에 따라 단 한번도 가동된 적 없는

미국의 전시 생산체제가 가동된 거야... 이로 인해서 그 누구도 소화해낼 수 없는 압도적인 물량의 군대, 장비,

차량, 비행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지.(전에 내가 미국이 치트키 썻다면서 올린 사진을 참고하면 이해하기

쉬울거야) 미군의 중반기 주력 전차였던 M1 셔먼 전차의 경우 대전 기간동안 약 5만 4천대(육군 세계 4위라는 우리나라의

3세대 이상 전차 수가 1500대 정도인데....5만 4천대라니....)가 생산되었다고 하니......

그 놀라운 생산능력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어....

 

 

진주만 기습 작전은 가장 성공적인 작전중의 하나야. 이 기습의 성공 이후의 해전 뿐만 아니라

현대 항모전투단의 원형을 이루는 교리가 되기도 하지. 군사적 작전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지만 완벽한

작전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부분도 있기는 해. 이 작전은 당시 '야마모토'가 항모를 이용한 작전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던 대본영을 상대로 자신의 총사령관 직위를 걸고 허락받은 만큼 당시에는 획기적인

작전이었고, 철저한 준비를 통해 이루어졌지. 하지만 치욕적인 피해를 입은 미국은 이 참패를 통해서

자신의 작전교리를 전부 뜯어고치고 일본에 철저한 복수를 하고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 계기가 되지

 

 

Captured Blog: The Pacific War

[소형 보트를 타고 항공 모함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승무원 을 구하는 모습]

 

Captured Blog: The Pacific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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