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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퀘] 간달푸의 정훈교실 "대량살상무기 '독가스'의 등장"

아이콘 간달푸
댓글: 7 개
조회: 1537
2010-12-05 19:44:51

1915년 4월 22일, 독일군이 그들과 대치하던 프랑스군에 대해 인류 최초로 독가스를 살포했어.

오후 5시 벨기에 이프르 전선, 하루 종일 계속된 독일군의 포화가 잠시 멈춘 사이 프랑스 군인들은

독일군 진영 쪽에서 피어 오른 노란 안개가 그들 쪽으로 접근하는 것을 목격했지.

 

프랑스군은 이 노란 안개가 독일군이 보병 돌격에 앞서

터트린 연막탄으로 생각하고 참호의 사격 위치에 자리잡았어.

 

연막탄이라고 생각한 노란 안개가 프랑스군 진지에 도달한 그 때,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어.

파인애플과 후추를 섞어 놓은 것 같은 냄새를 맡은 프랑스 군인들은

폐가 타들어 가는듯한 엄청난 고통 속에 몸부림 쳐야만 했어.

 

공포를 이기지 못한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총도 내팽겨 치고

참호 밖으로 뛰어 나와 무작정 후방으로 달리기 시작했어.

랑스 병사들이 연막탄이라고 생각했던 노란 안개는 바로 염소 가스였던 거야.

 

그리고 이 날, 최소한 5천명의 프랑스 병사들이 이 가스에 중독되어 질식사 하고 말았지.

참호 속에서 달아났던 많은 병사들도 운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어.

일단 염소 가스를 마시면 질식되어 서서히 죽어 갔는데,

어떤 경우는 죽음에 이르는데 몇일이 걸리기도 했어.

 

더욱 끔찍한 것은 숨이 끊어지기 몇 분 전까지 대부분의 병사들은

의식이 또렷해서 자신에게 한 걸음씩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는 거야...

독일군의 염소 가스 공격은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어.

염소가스의 위력은 그것을 사용한 독일군도 깜짝 놀라게 했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지.

 

당시 화학 공장의 생산 공정에서 대규모로 발생하던 산업폐기물이던 염소가스를

무기로 쓰려는 생각은 독일의 유태계 화학자 ‘프리츠 하버’ (Fritz Haber)의 발상으로부터 시작됬어.

유태인이었지만 철저한 독일민족주의자이며 주전론자였던 그는

전쟁이 터지자 자발적으로 독일 국방부에 협조 의사를 밝히지.

 

이미 암모니아 합성으로 세계적인 화학자로 명성을 날렸던

자신의 이름을 딴 ‘하버 연구소’에서 그가 주도했던 일은 바로 전쟁용 독가스의 개발이었어.

그는 염소가스를 액체의 형태로 압력 용기에 담아 전선으로 보냈어.

 

약 6천개의 압력 용기가 참호 속에 배치되었고,

가스 용기에 연결한 송풍기를 통해 퍼져 나온 염소 가스는

바람을 타고 프랑스 군의 진지를 유린했던 거야.

 

‘하버식 취주법’이라고 불린 이 가스 살포로부터 잔인한 가스전(戰)의 역사가 시작되었지.

 
[좌측에서 두 번째가 '프리츠 하버']
 

최초의 염소가스 공격이 성공을 거두자 ‘프리츠 하버’는 독일에서 영웅으로 대접을 받았고,

빌헬름 황제는 직접 그를 장교로 임명했어.

 

성공에 고무된 ‘하버’는 더욱 효과적인 독가스 개발에 박차를 가했어.

‘하버’는 자신이 개발한 독가스가 얼마나 위험하고 반인륜적인가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권은

자신이 신뢰하고 충성하던 독일 정부 지도자의 몫이라고 선언했지.

 

한편, 역시 유능한 화학자였던 부인 ‘클라라 하버’ (Clara Haber, Chemikerin)에게

독가스를 만드는 남편의 행위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어.

 

그녀는 여러 차례 남편에게 독가스 개발에서 손을 뗄 것을 간절하게 부탁했지만,

독일제국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재능을 바치기로

결심한 ‘하버’에겐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말이었을 뿐이었지.

 

자신이 도저히 남편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클라라’는 1915년 5월 2일, 권총 자살로 생을 마치지...

 

하지만 아내의 자살에도 하버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어.

아내의 죽음 직후 그는 러시아 전선으로 떠났고,

다시 6천명의 러시아 병사들이 염소 가스에 목숨을 잃었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클라라 하버']

 

이후 ‘프리츠 하버’가 세상에 내놓은 독가스는 포스겐과 겨자 가스였어.

포스겐은 처음에는 눈과 기관지에 가벼운 자극만을 주기 때문에 대수롭잖게 여기기 쉽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호흡기 조직의 수분과 결합하여 염산으로 변환되어

폐조직을 녹여버려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가스였지.

 

겨자 가스도 중독된 지 12시간까지는 분명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지만,

그 때부터 살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어.

피부에는 물집이 잡혔고, 눈에는 엄청난 통증이 왔지.

기관지에 침투한 독가스는 점막을 벗겨내었고,

결국 군의관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환자들을 침대에 묶어 놓아야 했어.

이렇게 죽음을 맞기까지는 보통 4~5주가 걸렸지....

 겨자 가스에 노출된 환자의 상태를 관찰한 한 간호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

[가스 공격으로 실명한 영국군 병사들이 응급 구호소 앞에 줄을 서 있는 모습]

 

“그 가엾은 병사들은 온몸에 화상을 입었고,

겨자 색깔로 곪아터진 물집 투성이다.

눈은 멀었고 진물 투성이에 보는 것만도 끔찍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숨을 쉬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다.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말을 하면 목구멍이 막혀서

질식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독일군에 의해 처음 살포된 독가스는 곧 일차대전에서 양측이 모두 사용하게 되었고,

전쟁기간동안 독일은 6만8천 톤을, 프랑스는 3만6천 톤, 영국은 2만5천 톤의 독가스를 사용해.

독가스로 목숨을 잃은 병사는 양측에서 10만 명에 이르고,

그 열배가 넘는 수의 병사들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끔찍한 고통 속에 살아야만 했지.


['프리츠 하버' (1868.12.9 ~ 1934.1.29)]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후,

독일 독가스 개발 프로그램의 총책임자였던 ‘프리츠 하버’는 전범으로 지목됬어.

처벌을 피하기 위해 중립국 스위스로 피신한 ‘하버’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스웨덴 노벨위원회는 1918년 노벨화학상을 수여했어.

수상 이유는 원소를 이용한 암모니아 합성에 성공했기 때문 이었지.

 

수많은 젊은이들을 끔찍한 죽음에 이르게 했던 비정한 과학자 ‘프리츠 하버’는

그러나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어.

 

오히려 그는

 

“전쟁기술의 역사는 1915년 4월 22일을 기억할 것이다.

이날은 가스 무기의 사용을 통하여 확실한 군사적 승리를 거둔 최초의 날이다."

 

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였으니까...

 

1919년 독일로 돌아온 그는 바닷물에서 금을 채취하는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했어.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하게 된 조국 독일에 도움이 되고자 해서였지.

하지만 6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이 연구는 실패로 돌아갔고, 하버는 다시 독가스 연구에 매달리게 돼.

[염소 가스를 중화시키기 위해 오줌에 적신 탈지면 마스크를 하고 있는 영국 병사들]

 

유태인이었지만 스스로를 자랑스러운 독일인으로 여겼고,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서가지 독일 제국에 충성을 다한 ‘하버’였지만,

히틀러의 집권은 그에게는 몰락을 의미했어.

 

 하버는 히틀러가 집권하던 1933년 재직하고 있던

‘카이저빌헬름’ 연구소 소장직 에서 물러나 런던으로 가.

 

그러나 그는 과거의 경력 때문에 냉대를 받게 되지.

영국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스위스로 옮겨온 ‘하버’는

1934년 1월 29일 바젤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쓸쓸히 눈을 감았어.

공교롭게도 그 날은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한지 꼭 일년째되는 날이었지.

 

그리고 영원한 독일인이고자 했던

유태인 ‘프리츠 하버’가 최후로 발명한 독가스 ‘사이클론 B'

2차대전 내내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그의 동족들을 죽이는데 사용돼...

 

그나마 자신의 마지막 연구 성과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

그가 보지 못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

Lv79 간달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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