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이었던가,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이었던가.
기억은 확실하지 않다.
그만큼 제법 시간이 오래 지난 일을 더듬어 쓰는 글이다.
당시 쐐기 던전은 별의 궁정.
참고로 별의 궁정이 쐐기에 등장했던 적은 한 번이 아니니까 글의 시점이 언제쯤이었는지는 읽는 이들의 즐거운 상상으로 남겨두겠다.
내 돌이었고, 나는 힐러였다.
높은 단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공략을 모른 상태에서 힘으로 밀기에는 또 쉽지 않은 단수였을 것이다.
새벽이었음에도 파티 구성은 금방 완료되었다.
전사(탱커), 회드(힐러/본인), 정술(미친년), 도적.
마지막 한 명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기서 전사와 정술이 같이 신청을 했었다.
여차여차 모두 입던 이후에 대충 각자의 종족과 전문기술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새벽이라 다들 피곤할 법 하지만 나름 산뜻한 출발.
돌이 박히고, 다섯 명은 선착장 끝에 서 있는 나이트본 NPC의 도움을 받아 배를 탑승해 별의 궁정으로 향했다.
도적이 먼저 가서 처음 보이는 로머를 절치고, 쇄포를 받은 파티원 전원이 힘차게 계단을 올라 첫 전투를 개시했다.
첫 전투가 끝나고 힐러인 나는 불길한 직감에 휩싸였다.
전투가 너무 길었다.
네발 달린 로봇 몹의 위험한 스킬을 차단했음에도, 나이트본 몹이 경고등을 울리는 것을 막았음에도, 마나지룡이 죽으며 남긴 바닥에 파티원이 죽지 않았음에도 전투가 너무 길었다.
내 눈이 미터기에 닿은 순간, 나는 이 파티의 미터기 구조가 일반적인 쐐기 파티와 극명하게 다른 것을 발견했다.
정술의 시퍼런 막대기는 전사의 막대기 아래에서 위태롭게 위를 받치고 있었다.
'손이 꼬였겠지.'
그러나 몇 번의 전투를 더 하고, 1넴을 잡을 때까지 정술의 미터기는 계속해서 그 위치였다.
심지어 초블을 받은 상태에서 내가 넴드에게 고양이로 변해 냥냥 펀치를 갈길 때는 심지어 내가 이길 뻔하기도 했다.
믿기 어려운 걸 넘어 믿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다른 두명의 딜러가 굉장히 훌륭했기에 어찌어찌 진행은 되어가는 와중, 내게 귓말이 도착했다.
[도적: 회드님이 석주시죠?]
[나: 네...]
[도적: 혹시 정술이랑 지인이신가요?]
[나: 모르는 사람입니다. 죄송합니다... 잘못 받은 것 같네요.]
[도적: 하... 일단 알겠습니다.]
나는 죄인이었다.
사람을 똑바로 보지 못해 이 늦은 새벽에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만 죄인.
정술은 공략도 잘 모르는지 안 잡기로 한 임프 무리를 애드내서 파티를 전멸로 이끌기도 했고, 2넴 바닥 유도를 잘못해서 힐 하다말고 이 악물고 뛰어가서 한 마리 튀어나온 임프를 태풍으로 밀어내기까지 해야했다.
그렇게 2넴을 잡고 첨탑 안으로 진입해 나이트본으로 변장해있는 악마를 찾는 기믹.
다시 한 번 쇄포를 받은 다른 파티원들이 정보 수집을 위해 사방으로 뛰쳐나갈 때, 나는 보고야 말았다.
술사가 가장 앞에 있는 나이트본을 클릭해서 바로 밖으로 튕겨나가는 것을.
팽팽하게 당겨져있던 내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나: 술사님 뭐 문제 있으세요?]
[술사:??]
[나:그 템으로 탱밑딜 하는 것도 말이 안되는데, 왜 애드 내고 사과 한마디가 없으세요? 방금 알고 클릭한 거 아니죠? 그냥 아무거나 누른거죠?]
[전사: 죄송합니다.]
[나: 술사님한테 말했는데 왜 전사님이 죄송해요. 술사님은 말 못해요?]
[술사: 저는 열심히 했는데 뭐라고 하시는 거 좀 그렇네요. 사과 안 하시면 저 안 해요.]
[전사: 제가 죄송합니다. 얼른 마무리 하시죠.]
중보와 막넴만 남은 상황.
술사는 이 상황을 인질로 잡고 오히려 내게 사과를 요구했다.
기가 차서 손끝이 달달 떨리던 찰나, 도적이 참전했다.
[도적: 같은 길드 두 명이 아주 지랄을 하네.]
도적다운 매서운 급습.
풀버블 급가를 처맞은 것처럼 아무 말 없던 술사가 한 마디 만을 남기고 오프라인이 됐다.
[술사: 저 안해요.]
[전사: 아.. 도적님 왜 말씀을 그렇게 하셔서..]
[도적: 이게 내탓임?ㅡㅡ]
[나: 4명이서 클리어 될 것 같으니까. 일단 클리어는 하죠.]
그렇게 던전은 마무리가 되고 다른 딜러 한 명은 바로 파탈을 했다.
[전사: 일이 이렇게 돼서 죄송합니다.]
[나: 딜 못하는 딜러가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건 처음보네요. 같은 길드던데 연락 안 되세요? 당사자 사과 없으면 지금 바로 사사게 올리겠습니다.]
[도적: ㅇㅇ]
[전사: 잠시만요...]
몇 분 뒤, 술사는 다시 접속했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 중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딜 못 하고 쿠사리 먹었다고 오프탄 건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제목에 미친년까지 박아가면서 글 쓰는 건 너무 어그로 아닌가?'
이어지는 대화에서 나는 이 술사가 미쳐도 제대로 미친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술사: 님들이 저 여자라서 못한다고 해서 화가 났어요. 미안합니다.]
절대 갈등, 혐오 조장을 위한 과장 왜곡이 덧붙여진 억지 글이 아니다.
정말 당시의 술사는 이렇게 사족을 붙이며 사과했었다.
당연히 나와 도적은 성별 관련 언급은 하지도 않았으며 애초에 저 술사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호모로맨스 에이섹슈얼 안드로진인지 알 방법조차 없었다.
대체 어떤 피해망상을 품고 사는 괴물인 건가.
또한 저런 괴물을 떠받들고 다니는 전사는 전생에 어떤 죄를 지었길래 이리도 무거운 과업을 지고 다닌단 말인가.
생각지도 못하게 튀어나온 술사의 말에 내가 당황한 사이, 똑같이 말이 없던 도적의 채팅이 불을 뿜었다.
[도적: 씨발아]
[도적: 딜러로 와서 딜을 못했으면 남자든 여자든 욕을 처먹어야지.]
[도적: 그리고 언제 여자라서 뭐라고 했어. 좆같이 못하니까 뭐라고 했지.]
[도적: 미쳐도 제대로 미친 년이네.]
그대로 뒀다가는 술사의 어머니 아버지마저 해체해버릴 기세의 도적.
제대로 딜러다웠지만 조금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나: 도적님. 조금 진정하세요.]
[나: 술사님, 채팅 로그 다 올려봤는데 어디에도 저랑 도적님이 여자 어쩌고 한 내역이 없거든요? 지금 무슨 소리 하세요? 제가 그랬다는 거 제시할 수 있으세요?]
[나: 성차별 발언 덮어씌워서 어떻게 하실 모양인데 기록 다 있습니다. 녹화도 해뒀어요. 좀 멍청하신 것 같은데 머리 굴리지 마세요.]
[나: 또 오프타시면 바로 사사게 올릴 거고, 그쪽 길마한테도 귓 넣겠습니다.]
[전사: 죄송합니다. 뭘 잘 모르는 친구가 실수했어요.]
[나: 님도 짜증나니까 좀 다무세요.]
[도적: 남자망신 다 시키는 새끼.]
결국 진심인지 억지인지 모르겠지만 술사는 미숙한 채로 쐐기에 와서 늦은 시간에 시간 낭비하게 만들어 죄송하다는 사과를 끝으로 파탈했다.
파탈 직전 도적의 [병신년 ㅉㅉ]는 덤.
[전사: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나: 또 얽히거나 어디가서 여자 어쩌구 소리 들리면 대화 로그랑 녹화 다 풀어버립니다. 님도 조심하세요.]
전사도 귀환하고 도적과 나만 남은 상황.
도적이 물었다.
[도적: 진짜로 녹화했어요?]
[나: 대화 기록만 있어요. 녹화 있다고 뻥카 쳐야 저 미친년이 수긍할 것 같더라고요.]
[도적: ㅋㅋㅋㅋㅋㅋ 새벽에 좆같은 일 겪었네여.]
[나: 글게요. 갑자기 여자 어쩌고 하니까 누가 망치로 머리 내려친 것 처럼 띵해졌다니까요.]
시간이 늦어 귓말은 여기서 끝이 났고, 상황 또한 마무리가 되었다.
혹시나 좆같은 일에 휘말릴까 싶어 당시의 채팅 로그도 스샷을 떠두었으나 컴퓨터를 몇 번 교체하고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에서 날아가버린 게 아쉬울 따름이다.
이후 와우를 하면서 레이드에서, 쐐기에서 다양한 빌런들을 만났지만 단언컨데 이 정도로 미친년은 아직까지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