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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십수 년 만에 돌아온 어느 늙은 와우저의 이야기

큐찡
댓글: 9 개
조회: 466
추천: 12
2026-10-25 23:27:25

에겐스러운 글이니 테토남이나 젊은이들은 그냥 꼰대 글이라 생각하고 지금 바로 뒤로 가기를 누를 것!


젊은 시절, 화심 공대장을 하던 때가 있었어.

벨라를 잡던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던 기억이 나.


그 시절의 공대는 딱 두 종류였어 벨라를 잡는 공대, 벨라를 못 잡는 공대

내 공대는 못 잡는 공대로서 2주만 더 해보고 해산하기로 했었지.. 거기까지 가도록 얼마나 많은 해딩을 했겠어.

해산하던 마지막 주에 잡았을 때 눈물이 나더라고 (그리고는 해산 안하고 잘나가는 공대가 되었답니다.)


불의 원소를 먹겠다고 하루 종일 불의 정령만 잡던 시간도 기억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회사 일에, 삶에 치여 와우를 점점 멀리하게 됐지.


퇴근하고 돌아와 접속하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콘텐츠는 넘쳐나는데 정작 함께 레이드 갈 사람은 없더라고.

그렇게 접속해서 의미 없이 점프 몇 번 뛰고, 공창에 올라오는 글이나 좀 읽다가 조용히 접속을 종료하던 시간들.

그러다 결국 구독을 끊었어.


클래식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단순했어.

'이미 할 만큼 했던 그걸 굳이 다시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세상에는 재미있는 게임이 이렇게나 많고, 그 게임들조차 다 해보지 못하는데 말이야.

게다가 이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어.


아내의 눈치를 보며 어떻게든 확보한 소중한 몇 시간의 자유시간.

그 시간을 어디에 쓸 것인가?

이건 지금의 내 입장에서는 정말 중요한 문제거든.


포에버도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어.

'아, 또 클래식인가? 별 의미 없겠네.'

그런데 알고 보니 일종의 리마스터에 가까운 개념이더라고. 스킬과 특성도 달라지고, 새로운 콘텐츠도 추가된다고 하니 조금씩 관심이 생겼지.

그래서 베타를 해봤어.


그런데 웃기게도, 클래식과 다르다는데 내 눈에는 그냥 내가 알던 와우더라.

불성까지 해본 입장에서는 얼음창 같은 기술도 원래 쓰던 거니까. 새롭게 추가된 기술이라는 사실조차 잘 체감되지 않았어.

그래픽은 또 어떻고.

도대체 내 기억 속에서 얼마나 미화됐던 건지, 개선됐다는 그래픽이 그냥 내가 기억하던 와우 그래픽 같더라고. ㅋㅋㅋ

와우를 쭉 해왔던 사람들은 차이를 느끼겠지만 말이야.


자, 여기서 PvP와 PvE의 고민이 생기지.

어디로 갈 것인가?

나이 먹고 여성호르몬이 많아지는 것 같은 이 시점에서 쟁섭은 솔직히 좀 거시기해.


왜냐면 쪼랩 학살 시체 지키기나,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해하기 싫은 악의 가득한 길목 지키기 같은 것들.

베타에서 다시 당해보니 영 불쾌하더라고.

젊은 시절에도 불쾌했지만, 나이를 먹으니 더 불쾌해. ㅋㅋㅋ

게다가 이젠 늙고 병들어서 피지컬도, 반응속도도, 상황을 인지하는 능력도 예전 같지 않아.

뒤치기당하면 '어? 어어어?' 하다가 그냥 죽어버리는 늙은이가 된 거지.


그런데 여기서 정말 웃긴 경험을 했어.

20년 만에 듣는 도적의 그 '뽀각!' 하는 소리.

머릿속은 '???' 상태인데 손가락이 먼저 점멸을 누르더라고.


뇌는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손가락은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심지어 15~20년 전에 사용하던 단축키들이 하나씩 기억나기 시작했어.

아직 배우지도 않은 스킬이 어느 키에 있었는지 기억이 나.

이건 좀 충격적이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기기도 하더라. ㅎㅎㅎ


어쨌거나 그렇게 플레이하다 보니 내가 왜 이 게임을 그렇게 좋아했었는지 다시 기억이 났어.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그저 재미였을 저렙 학살이나 시체 지키기가, 당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불쾌한 경험이었는지도 다시 기억났지.


그래서 고민했어.


십수 년 만에 돌아와서, 내게 허락된 얼마 안 되는 자유시간을 누군가의 일방적인 즐거움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걸까?


PvE 서버로 가면 너무나 쉽게 해결되는 문제야.

그래서 엄청난 유혹이지.

하지만 PvE 서버에는 또 다른 걱정이 있어.


바로 인구수야.

함께할 사람이 충분하지 않다면, 결국 그게 더 나쁜 선택이 될 수도 있거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더라고.


나 같은 에겐 직장인, 애 아빠가 이제 한둘이 아닐 것 같다는 거야.

20년이라는 세월이 나한테만 흐른 건 아니잖아?

그때 와우를 하던 젊은 친구들도 이제 다들 나이를 먹었을 테니까.

그래서 내 생각에는 이번 PvE 서버에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 않을까 싶어.


그럼에도 결론은, 난 PvP 서버로 가기로 했어.

예전에 듀로탄 서버에서 플레이했었는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시체 지키기만 아니라면 뒤치기 정도는 '이 XX놈이?' 하고 웃어넘길 수 있겠더라고.


그 불쾌함까지 포함해서 내가 좋아했던 와우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PvE 서버를 선택하는 게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 선택도 충분히 이해해.


요즘 게시판을 보면 다들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 눈에 보여.

오랜만에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거겠지.

한 줌밖에 안 되는 갈라파고스 같은 세계에 새로운 사람들이 유입될 기회가 생겼는데, 어찌 이 기회를 놓치고 싶겠어.

기존에 계속 플레이하던 사람들보다는 나처럼 오랜만에 돌아온 복귀 유저들이 이번 포에버의 중요한 대상일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이제 어리지 않아.

다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 가정도 생겼을 테고, 각자의 사정과 생각이 있을 거야.

어떤 사람에게는 필드 PvP가 와우의 핵심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하루 두세 시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모험이 더 소중할 수도 있지.

그러니 서로의 선택을 너무 쉽게 평가하지 않았으면 해.


너무 강한 말은 하지 마.

약해 보이잖아.


그냥, 오랜만에 우리에게 돌아온 이 축제를 즐겨보도록 해.

Lv23 큐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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