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으로 말해, 디아블로4는 결코 못 만든 게임이 아니다. 흔히 퍼져 있는 '디아블로4 똥겜설'에 익숙한 이들로서는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바라보는 시선의 각이 약간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잘 만든 것'은 디아블로4가 보여준 '틀'이다.
잘 만들어낸 오픈월드와 흔히 '애트모스(atmos)'라고 표현하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질감, 그리고 이를 받쳐주는 비주얼까지, 출시 당시의 '디아블로4'는 말 그대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게임이었다. 라이브 서비스 게임의 특성 상, '디아블로4'라는 그릇 안에 들어갈 내용물은 계속해서 바뀌어야 마땅했지만, 일단 무엇을 넣고 비벼도 충분히 맛깔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무엇을 어떻게 넣었느냐'를 생각하면 똥볼 차기가 따로 없었다. 그 수난의 역사를 일일이 짚어내면 너무 길어질 것이기에 짧게 정리하면, '게이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흔히 유저들이 말하는 속된 말로는 '감다뒤'. 공감대 형성이 되지 않았다는 거다.
그렇기에 '디아블로4'는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게이머가 원하지 않는 부분을 덜어내고, 원하는 것들을 만들어내며 '감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쳤다. 원래 좋았던 부분을 더 진화해가는 과정이라기보단, 불협화음을 줄이고 올바른 방향을 찾아가는 재조정의 과정, 즉 '수습의 시간'을 보냈다는 뜻이다.
이런 과거 때문에 '증오의 그릇'이 중요하다.
'디아블로4'는 이제 어느 정도 수습된 발판 위에서 첫 번째 갈래길 앞에 섰다. 프랜차이즈가 어디로 향할 것이며, 종래에는 어떤 게임을 게이머들의 기억에 남을 것인지가 '증오의 그릇'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 엠바고 조항에 따라 본 리뷰에서는 '증오의 그릇'의 스토리에 대해 다루지 않습니다. 다만, 점수에는 반영됩니다.
게임명: 디아블로4: 증오의 그릇 장르명: 액션RPG 출시일: 2024. 10. 8. 리뷰판: 사전 리뷰 빌드개발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서비스: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플랫폼: PC, PS, XBOX 플레이: PC
달라지고 더해지다 증오의 그릇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가?
'증오의 그릇'에는 많은 것이 더해지고, 바뀌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게 들어오는 변화는 레벨 시스템의 변화와 스펙의 압축. 수백, 수천만 단위로 치솟던 숫자가 잠잠해졌고, 만렙을 찍은 상태에서도 뭔가 소박한 숫자가 뜨는 걸 보면 기분이 요상할 정도. 방어도 캡 또한 9,200대의 애매한 숫자에서 1,000으로 맞추면 최대 감소율이 되게끔 조정되었고, 체력 수치도 크게 줄었다.
정복자 보드 시스템은 굉장히 크게 바뀌었는데, 보드 숫자가 5개로 제한되고 총 포인트는 324포인트(레벨업 300, 명망 24)가 되면서 원래 같으면 아쉬워도 그냥 지나쳐야 했을 희귀 노드를 팍팍 찍어도 여유로워졌다. 기존에는 쥐어짜가며 빌드 효율을 끌어올려야 했다면, 이제 빌드를 완성하고도 포인트가 한참 남아 보너스 투자가 가능해진데다, 정복자 레벨은 시즌 별로 계정 내에서 공유되기 때문에 부캐릭터의 육성이 굉장히 편해졌다.
용병 시스템은 다소 미묘. 용병 개개에 얽힌 서사 구조나 디자인 개성은 뛰어나지만, 용병이 전투 중 결정적인 무언가를 하진 않는다. 디아블로3 초기의 용병과 비슷한 느낌이며, 스킬 트리 또한 생각보다 단순하다. 디아블로3는 화합의 반지와 불사 장신구의 조합으로 50% 데미지 감소를 받아낼 수 있었던 걸 생각하면 그냥 없는 것보다는 나은 느낌. 용병을 오래 쓸 수록 친밀도가 늘면 장비 교환이 가능해져 제한적인 장비 파밍이 가능하다.
신규 콘텐츠인 '암흑 성채'와 '지하 도시'는 양 쪽 모두 뚜렷한 용처가 있다. '암흑 성채'는 2-4인으로 플레이하는 협동 콘텐츠인데, 아이템의 파밍보다 소모품을 구매할 수 있는 암흑 성채 주화가 주요 포인트다. 이 소모품 중 무려 '담금질 횟수 초기화' 아이템이 있기 때문이다. 짱짱한 3어픽 졸업 아이템도 담금질이 망해 버리면 결국 버리는 아이템이 되기 일쑤였는데, 이제 그럴 일이 없다. 빌드 완성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대폭 줄인 셈이다.
문제는, 솔로 플레이가 원천 봉쇄되어 있다는 것. 클리어 직전 무조건 두 명 이상 있어야 통과할 수 있는 기믹의 문이 존재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진행 자체가 안 된다. 그렇기에, 혼자 플레이해야 했던 리뷰 빌드로는 끝을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지하 도시'는 시간 제한이 걸린 일종의 타겟 룻 던전. 공물과 협상을 통해 고유 아이템 드랍을 확정으로 만들 수 있어 '신화 고유'만 아니라면 굳이 우버 보스를 잡지 않아도 지하 도시에서 파밍이 가능하며, 경험치와 일반 장비 파밍 효율도 괜찮기에 공물 확보만 되면 지옥불 군세에 이은 새로운 꿀통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 밖에도 소소한 부분에서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신성' 등급 아이템이 삭제되고, 아이템 레벨이 1~750, 800으로 이원화된 점이라든지, 최대 레벨이 60이 되면서 늘어난 스킬 포인트 조정을 위해 각 직업별로 하나의 액티브 스킬과 몇 개의 패시브 노드가 더해진 것, 생각보다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래도 구색은 갖춘 룬워드 시스템 등이 그렇다.
전체적인 방향성을 보면 새로움을 주면서도 기존 시스템에서 복잡함을 줄이며, 동시에 콘텐츠 선택이 고정되는 일을 막고자 하는 의도가 보이는 변화다.
'디아블로식 파밍 철학'이란 '이론 상' 이상적으로 꾸며진 콘텐츠 디자인
디아블로4의 콘텐츠는 꾸준히 줄어드는 형태로 변화해왔다. 정확히 말하면 콘텐츠를 없애는 게 아닌, '안 해도 되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수많은 서브 퀘스트는 명망 작업용 일회용이 되었고, 필드 이벤트는 시즌 초 여정을 제외하면 '피해가는 것'이 마땅해진 콘텐츠가 되었다. 명품화를 위해 싫어도 가야 했던 '명공의 나락'은 바로 다음 시즌 '지옥불 군세'가 오면서 뻘쭘해졌고, 망자의 속삭임은 '지옥 물결'에 얽히면서 굳이 다른 지역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되도록 정리됐다.
디아블로4를 즐기는 플레이어가 원하는 방향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쿼터뷰 핵앤슬래시 팬들이 원하는 건 명확하다.
- 더 많은 적과 쉬지 않는 전투
- 더 많은 전리품과 눈에 보이는 스펙업
- 이 과정에서 루즈하거나 귀찮은 과정이 없을 것
실은 더 복잡하지만, 간추리면 이렇다. 게이머들은 쏟아지는 적들을 때려부수면서 강해지고, 또 강해지는 내 캐릭터를 보고 싶어하지, 성역의 세계가 어떻고 이 NPC에게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이 퍼즐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고 이 혼란과 죽음이 가득한 세상이 어떻게 구원받는지 등은 그냥 지나가는 요소로 볼 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당길 때는 그냥 너티 독 게임을 하러 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초기 디아블로4가 혹평받은 이유도, 굳이 게이머들이 원하지 않는 걸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일 거다.
결국, 핵앤슬래시 게임의 디자인에서 중요한 건 이 '게이머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것. 즉, '파밍 구조'의 구성이다.
'디아블로4'의 경우, 이 파밍 구조가 다소 난잡하다. 기존 시스템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파악한 후 급격한 드리프트를 시도했기 때문인데, 최초 기획이었던 '악몽 던전'이 답답한 진행과 귀찮은 기믹 등으로 혹평받자 악몽 던전을 '버렸다'. 문양 업그레이드라는 시스템 자체는 바꿀 수 없었기에 여전히 수요는 있지만, 업그레이드가 끝나면 아무도 악몽 던전을 가지 않는다. 필요가 없으니까. 파밍 시스템이라기보단 육성 과정에서 거쳐 가는 마일스톤이 되어 버린 셈이다.
이후로도 시스템이 등장하고, 뒤틀리면서 현재 '디아블로4'의 파밍 시스템은 유기적으로 흘러가지 않고 파편화되어 있다. 딱히 구조라 할 만한 짜임새 없이 그냥 이것 저것 다 되는 식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지옥불 군세와 지옥 물결로 대부분의 파밍이 가능하기 때문에 유의미하게 차별화되어 있는 건 고유 아이템을 얻기 위한 우버 보스 파밍 정도다. 좋은 아이템을 얻기 위해 같은 보스를 반복해서 도는 것. 25년 전부터 시작된 '디아블로2'의 파밍 방식이다.
반면, '디아블로3'의 콘텐츠 순환 구조는 상당히 모범적인 구성인데, 엔드 단계를 구성하는 콘텐츠는 단 셋 뿐이지만, 이 세 콘텐츠가 유기적으로 맞물린다. 재료와 도면, 특정 고유 장비 파밍을 위한 '현상금 임무', 레벨업과 대균열석, 로우 스펙 캐릭터의 파밍을 위한 '일반 균열', 그리고 최종 파밍과 전설 보석 업그레이드를 위한 '대균열'이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맞물리는 식이다.
왜 굳이 묻지도 않은 '디아블로3'의 시스템을 설명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이유가 있다. '증오의 그릇'의 콘텐츠 구조가 상당 부분 이와 비슷하게 조정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핵앤슬래시 게임도 마찬가지지만, 디아블로4의 육성 과정을 임의로 정리하면 총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레벨 업 - 빌드 구성 - 스펙업 - 최종 조율
레벨을 올리면서 빌드 구성에 필요한 핵심 재료들, 필요한 위상들과 문양 등을 갖추고, 어느 정도 갖춰졌다면 담금질과 옵션 조정, 어픽스 장비 등을 파밍하면서 스펙 업을 진행한다. 이후, 우버 보스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스펙업이 이뤄졌다면 '샤코'나 '티리엘'등의 신화 고유 장비를 파밍해 최종 형태를 갖추는 게 한 캐릭터의 육성 과정이다. 이 과정에 대입하면, '디아블로4'는 최종 조율 이전의 모든 과정이 그냥 지옥 물결과 지옥불 군세로 충분하다
'증오의 그릇'은 달라졌다.
지옥불 군세와 지옥 물결은 더 이상 만능키가 아니다. 전리품의 양도 조절되었을뿐더러, 다른 수단들의 필요도와 효율도 못지 않게 높기 때문이다. 위치가 애매했던 '명공의 나락'은 악몽 던전의 문양 업그레이드 시스템을 가져오며 디아블로3의 '대균열'과 완벽하게 같아졌다. 졸지에 필요도를 잃은 '악몽 던전'은 대신 지하 도시 공물을 비교적 높은 확률로 드랍하며, 명품화 재료인 '옵두사이트'의 파밍처이기도 하다.
'지하 도시'는 일반 상태에서는 다른 콘텐츠와 효율이 비슷하지만, 공물이 있을 시 '타겟 룻'이 가능해지며 굉장히 높은 효율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중얼거리는 은화'를 소모해 도박 말고는 딱히 쓸모도 없이 쌓이던 은화를 소모하게끔 만들었다. '암흑 성채'는 최종 단계에서 담금질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콘텐츠이며, 우버 보스 파밍도 여전히 유효하다.
'악몽 던전', '명공의 나락', '지옥 물결', '지옥불 군세', '지하 도시', '암흑 성채', 그리고 '우버 파밍'에 이르기까지. 모든 콘텐츠가 저마다의 쓸모를 부여받았다. 캐릭터를 최종 단계까지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이 모든 콘텐츠 중 무엇도 딱히 '버릴 만큼' 쓸모없지 않다. 이론 상 이상적인 구조를 짜 둔 것이다.
하지만, 이상이 말 그대로 이상인 이유는 그만큼 달성이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이 이상이 제대로 게이머에게 와 닿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상'은 왜 '이상'인가? 개발자님의 의도가 잘 전해진 것 같지 않습니다.
최근 이슈가 되는 한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심사 위원은 늘 요리를 맛보며 이렇게 말한다.
"요리사의 의도가 잘 전해졌는지가 중요하거든요"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의도의 전달'만 잘 이뤄져도 매우 훌륭한 결과물이 나올 거다. 모두 기본 이상의 실력을 지니고 있고, 당연히 맛도 훌륭할 테니까. '게임'에서는 조금 다르다. 의도가 잘 전달되었는지를 묻기 전에, 그 의도의 방향이 과연 '상대가 원하는 것'인지를 먼저 가늠해야 한다.
'디아블로4'의 의도는 명백히 틀렸었다. 작년 초, 개발진은 드넓게 완성된 성역의 세계와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게이머에게 닿기를 바랐지만, 게이머들이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우당탕탕 구르며 몇 번 똥볼을 차고, 방향을 수정한 끝에 겨우 가닥을 잡았지만, '증오의 그릇'에 이르러 다시 변주를 주려고 한다.
'증오의 그릇'을 플레이하면서 계속 느낀 바가 있다. 고차원적인 분석과 고찰 이전에, 기저심리처럼 깔려 있는 이 감각의 정체는 바로 '답답함'이었다. 파밍 루트의 다변화는 좋다. 무엇을 해도 결과물은 비슷한 수준이니까. 하지만 이 '비슷함'이 전부 다 만족스럽다는 뜻이 아니다. 도리어, 전부 다 부족하게 느껴졌다.
일단, 드랍 양 부터가 상당히 줄었다. 고행1 기준으로 지옥 물결의 잉걸불 상자는 1개의 전설 장비만 뱉는 경우도 적지 않으며, 지옥 물결의 보상 상자도 예전만큼 풍족하다 싶은 느낌이 없다. 지하 도시도, 명공의 나락도 다 비슷비슷하다. 그러다 보니 앞서 설명한 네 단계 중 '빌드 구성'이 더뎌진다. 못 참을 만큼 느린 건 아니지만, 기존에 비하면 상당히 느리다.
그 이후 과정인 '스펙업'은 난관이 따로 없다. '증오의 그릇'의 난이도 체계는 각각 4단계의 '일반'과 '고행'으로 이어지는데, 일반과 고행의 차이는 '선조 아이템'의 드랍 유무에 있다. 일반에서는 750이 아이템 레벨의 한계지만, 고행1부터는 800레벨의 선조 아이템이 나오는 식이다.
고행2부터는 방어도와 저항 페널티가 점점 커지기에, 지속적인 스펙업이 필요하다. 담금질과 명품화, 정복자 보드를 통해 방어도와 저항 캡을 맞춰가며 하나씩 난이도를 올리는게 증오의 그릇 내 스펙업의 주요 골자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진행하게 되는 위상 각인과 담금질, 명품화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재료 소모량'이 문제인데, 양손 무기의 위상 각인 시 '강철 덩어리'가 450개, 미지의 수정은 300개가 필요하다. 디아블로4에서, 똑같은 선조 등급 양손 무기에 필요한 재료의 수는 각각 50개, 32개다. 무려 10배에 가까운 재료를 요구하는 셈이다.
소모량 뿐만 아니라 수급량도 문제다. 재미는 없어도 자원은 잘 주던 '군단' 이벤트도 몇십 개 주는 수준이고, 지옥불 군세도 몇 개 안 주며, 인벤토리 한 칸을 전부 갈아도 10개가 채 안 나온다. 실제 리뷰 빌드 플레이 중에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장비 업그레이드와 각인이 너무 오래 걸려 기간 내내 틈틈히 플레이했음에도 최고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물론, 이 문제는 간단한 핫픽스로도 조정이 되는 사안이며, 사전에 진행된 AMA에서도 아직 조정 가능성이 있다고 밝힌 부분이기에 어느 정도 감안해야 겠지만, 충분한 조정 없이는 아마 굉장히 큰 허들이 될 것이다.
이 답답함 속에서, 블리자드가 의도한 게 정말 이게 맞을까 싶은 의문이 들었다. 다양한 콘텐츠를 플레이하게끔 설계한 것은 이상적이고 좋지만, 이 다양한 콘텐츠 중 딱히 '아 이게 킬러 콘텐츠구나'싶은 건 없었다. 리뷰 빌드의 제한으로 플레이하지 못했던 '암흑 성채'가 그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해볼 수가 없었으니 논외다.
모든 콘텐츠의 효율이 비슷한 상황인데, 어느 콘텐츠도 '만족할 만큼'의 성과를 주지 않았고, 플레이 시간에 비해 성장이 더디다 보니 나중에 이르러선 어떤 콘텐츠를 해도 만족보다는 지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증오의 그릇'이 최종적인 모습은 아닐 거라 믿겠지만, 변화 없이 이 빌드가 그대로 출시된다면 초반 반응이 영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모든 콘텐츠를 즐겨주셨으면 좋겠다는 뷔페 오너식 마인드지만, 모든 메뉴가 공평하게 그냥 그런 맛이다. 메뉴 간 맛의 격차가 줄어든 건 좋지만, 다 같이 맛있으면 더 좋을텐데. 그리고 그것이 크게 어려워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다.
방향은 이 정도면 얼추 맞다 공감으로 향하는 완행열차의 첫 정거장
종합적으로, '증오의 그릇'의 인상은 이전 '디아블로4'를 처음 보았을 때와 비슷하다. '증오의 그릇'의 콘텐츠 짜임새나 시스템 구조는 '디아블로4'가 가진 월등한 프레임처럼 높은 잠재력을 보여준다. 아예 답도 없는 수준이면 모르겠다만, '이것만 이렇게 바꾸고 조금만 틀면 훨씬 괜찮아질텐데'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든다는 뜻이다.
보상 조정이나 수치 변경은 큰 개발 코스트를 요구하진 않으니 별 문제 없는 것이 아닐까 싶으면서도, 내심 걱정된다. 나는 디아블로 시리즈의 팬이고, 디아블로4의 비상을 매우 원하는 게이머이지만, 개발진이 진정으로 게이머들이 원하는 것을 파악했고, 공감대를 구성한 것 같지는 않다. 1년 반에 걸친 변화의 과정 또한, 딱히 파격적이거나 기민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냥 하도 욕을 먹으니 요리조리 바꾸다 얻어걸린 느낌이랄까.
때문에, 내가 느낀 이 답답함과 지침이 정식 오픈 시점에서 완전히 해소될 수 있을지, 나아가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모든 콘텐츠를 균형있게 재미있는 것으로 가꿔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믿음은 옅다. 근거 없는 불신이 아니라, 지난 과정이 증명하고 있다.
한가지 더 첨언하면, 수습과 재편을 위해 모든 힘을 쓴 까닭인지 '인상적인 한 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쉽다. 많은 부분에서 더 좋아지고자 하는 모습은 보였지만,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할 만한 한 방은 보이지 않는다. 좀 더 볼륨이 큰 시즌 정도의 느낌일까.
하지만, 둔중하고 느릴지언정, '증오의 그릇'이 바라보는 방향 자체는 옳다. 계속해서 편해지고, 간결해지는 방향. 특정 난이도 이상부터는 장비를 자동으로 분해해 준다거나, 소켓용 아이템의 인벤토리 분리 등등 미처 언급하지 않는 자잘한 변화들은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재료 수요와 공급을 못 맞추는 똥볼을 차긴 했지만, 이 정도야 뭐 늘 그렇듯 평소의 블리자드다.
'증오의 그릇'은 디아블로4의 방향을 급격하게 꺾어주지 않는다. "지금껏 이 방향으로 가서 망했으니, 이제 이 방향으로 가시오"와 같은 급격한 드리프트 없이, 지금 가는 방향으로 더 잘 나아갈 수 있도록 튼튼한 편자와 수통을 달아 둔 느낌에 가깝다. 급하게 이어진 드리프트와 구조 변경 속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들을 치우고 지친 게임, 그리고 게이머가 한 번 숨을 고른 후 다시 정면을 바라볼 힘을 주는 확장팩이라는 뜻이다.
아마 그 길의 끝에, '게이머들과의 공감'이라는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 장사를 함에 있어 상대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 만큼 사기적인 능력이 어디 있을까. 우리가 기억하는 '그 시절'의 블리자드가 대단했던 것 또한 게이머들과의 공감을 바탕으로 훌륭한 게임을 만들어와서가 아니었던가. 많은 일들을 겪으며 다 잃어버린 것 처럼 보였지만, 실수를 하면서도 다시 조금씩 가까워지곤 있으니까. 언젠가 닿을 날이 올 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