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 전만 하더라도 게임 시장의 모습은 지금과 달랐다. 과거 E3가 대표하던 여름 게임쇼를 돌아보자. 국제 게임쇼라는 이름의 행사는 대형 게임사들의 쇼케이스장에 가까웠다. 막대한 홍보비를 태워 게임을 알리고, 그렇게 홍보해도 그 이상의 수익을 거둬들일 게임들이 수없이 쏟아졌다.
E3의 존망의 기로에서 버텨내지 못했고 그자리를 이어받은 서머 게임 페스트(SGF) 역시 비슷했다. 오프닝 쇼 이벤트 한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억 원의 마케팅비를 태웠다. 그런데 올해 SGF에서는 이런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 이벤트 시작을 위해 가장 먼저 무대에 오른 호스트 제프 케일리는 2025년 상반기 스팀 판매량 상위 10개 게임을 소개하며 달라진 분위기를 직접 언급했다.
특히 몬스터헌터 와일즈, 엘더스크롤 오블리비언 리마스터, 킹덤컴 2 등의 대작이 포진해있었음에도 협동 호러 'R.E.P.O', 마약 딜러 시뮬레이터 '스케쥴 원', '클레르 옵스퀴르: 33원정대' 등이 높은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규모에서는 여타 AAA와 비교할 수 없는 게임들이지만, 압도적인 판매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흥행은 근 수년 사이 꾸준히 이어져왔고, 최근만 해도 '피크(PEAK)'나 '리매치' 등 스팀 동접 상위권에 수백만 장씩 게임이 팔리는 작품들이 그 흥행 바통을 이어받았다.

물론 인디 게임의 흥행 신화는 시초 쯤으로 꼽히는 '케이브 스토리'를 시작으로 '브레이드', '슈퍼 미트 보이', '림보', '테라리아', '아이작의 번제', '언더테일', '스타듀 밸리' 등 수없이 많다.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게임이 흥행했던 과거와 달리 근래에 스팀 상위권을 휩쓰는 인디 게임에는 명확한 공식이 있다. 바로 협동 게임. 그리고 그 협동 속에 있는 유머라는 핵심 가치다. 이런 인디 게임 흥행은 단순히 유행의 변화 이전에, 업계의 흐름이 요동치고 있다는 증거기도 하다.
플랫폼이 만든 기회의 평등
1 스팀과 디지털 유통의 게임 체인지
우선 제프 케일리가 말했던 인디 게임의 극적인 흥행 이유에 대해 먼저 짚어보자. 게임은 잘 만든다고 전부가 아니었다. 잘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걸 알리고, 또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하는 홍보 역시 중요했다.
노출 대비 실 게임 구매 전환이라는 기본적인 세일즈는 게임 업계라고 다르지 않았다. 잘 만들어도, 그런 게임의 존재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면 구매할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그렇기에 소규모 개발사, 혹은 인디 개발사는 퍼블리셔를 구해 게임을 홍보하는 방식을 택한다. 특히 게임 개발에 경험이 적은 게임사일수록 게임 마케팅이나 미디어 대응 방식에 대한 이해도 부족해 홍보 대행보다는 출시까지 책임져주는 퍼블리셔의 든든한 존재가 중요했다.
하지만 퍼블리셔 입장에서는 판매량이 보장된 게임에 투자를 집중하기 마련이다. 마케팅 비용 역시 투자인 만큼,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 많은 판매가 예상된, 혹은 필요한 타이틀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인디 게임은 출발선 한참 뒤에서 출발했다.

나아가 인디 게임 서비스에 강점을 둔 전문 퍼블리셔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는 디지털 유통 플랫폼의 역할 변화를 통해 달라지기 시작했다. 게임 ESD의 대표 플랫폼인 스팀은 단순히 입점된 게임을 판매하는 창구를 넘어, 인기 게임을 페이지 앞에 걸어두고, 이용자가 원할 만한 게임을 맞춰 소개하는 큐레이터의 기능까지 하고 있다. 그것도 이미 엄청난 실 유저를 보유한 플랫폼이 말이다. 인디 개발사들이 막대한 자금 지원 없이도 얼마든지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가능성이 생겼다.
이러한 분위기는 근래 게임사 자체적인 유통 분위기만 봐도 확인할 수 있다. 과거에도 퍼블리셔 없이 자체적으로 게임을 출시하는 인디 게임은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인디 게임 서비스 역량을 갖춘 퍼블리셔와의 협업 출시로 시작한 게임 역시 많다. 하지만 근래에는 R.E.P.O, 스케쥴 원, 리썰 컴퍼니, 피크 등 근래 자체 유통의 성과를 낸 게임들을 곧잘 확인할 수 있다.
마케팅보다는 플랫폼 안에서의 순수 노출, 그리고 커뮤니티나 SNS를 통해 입소문 마케팅만으로도 오랜 역사를 가진 프랜차이즈 AAA에 준하는, 혹은 그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렸다.

메인페이지에 게임이 소개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홍보 효과를 누린다
함께하는 것 자체가 콘텐츠인 시대
2 소셜 역동성이 키운 유머의 가치
이러한 인디 게임의 가능성이 열린 시장에서도 유독 주목받는 키워드는 협동이다. R.E.P.O나 리썰 컴퍼니는 어디까지나 공포 게임을 중심으로 확장된 게임이지만, 재미의 근본은 협동에서 나온다. 축구 대전인 리매치도 근간은 협동이며, 등반 게임 피크 역시 앞에서 끌고, 낙오하면 업어주는 협동이 핵심이다.
이는 근래 이어지는 협동, PvE 콘텐츠에 대한 개발사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콘솔 시장에 뛰어든 여러 PC 게임 개발사는 물론, 전통적인 콘솔 지향 게임사들 역시 이러한 협동 게임 개발에 뛰어들고 있다. 다만, 대개 성공한 협동 게임의 핵심에는 유머, 코미디라는 기본 요소가 담겨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특히 2024년 이후로 압도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는 인디 게임의 증가도 이 협동과 유머를 동시에 챙긴 게임들 위주로 변화한 모습은 이러한 흐름을 짐작케 한다. 게임에서 어떤 부분에 재미를 느끼는지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가 변화하는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 이전까지의 게임의 핵심 재미는 승리를 통한 성취감, 노력에 대한 보상 등이다. 이는 게임 디자이너들이 게임에서 제공해야 할 전통적인 재미 가치기도 했다. 하지만 Z세대는 다르다. 게임은 단순히 자신의 성취감을 느끼는 자기 만족의 수단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릴 수단으로 변화했다.
뉴주가 2021년 밝힌 Z세대 게임 이용률은 80%로 베이비붐 세대의 42%에 비해 거의 두 배 높은 수치다. 하지만 게임은 핵심이 아니다. Z세대의 40%, 밀레니엄 세대의 37%가 커뮤니티 중심의 게임 활동에 참여한다. 심지어 Z세대 게이머의 절반은 메인 게임플레이를 진행하지 않으면서 게임에서 시간을 보낸다. 게임이 주는 재미의 가치가 플레이에서 소셜로의 역할로 옮겨간 셈이다.
구글 컨슈머 인사이트는 2025년 Z세대가 게임을 즐기는 이유 중 34%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역시 게임의 역할 변화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모바일 배틀그라운드나 마인크래프트 등이 원래 게임의 목표와 다른 소셜 가치를 중요하게 추가하는 이유이며, 또 Z세대 게이머들이 즐기는 이유가 된다.

결국, 근래 성공하는 협동 게임의 흥행 기반은 협동을 통해 거창한 목적 달성이나, 고된 협동에서의 감정적 성취가 아니다. 소셜 역동성, 즉 함께하는 것만으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며, 그걸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 가능한 유머가 핵심 흥행 근거가 된다.
우발적 상황이 만든 새로운 재미의 공식
3 감정 전달이 완성하는 집단적 재미
사회 내에서 상호작용의 변화를 뜻하는 소셜 역동성은 꼭 유머가 아니라도 발생 가능한 요소다. 갈등이나 개인과 집단의 갈등 역시 새로운 소셜 에너지를 발생하는 근본이 된다.
하지만 게임의 근간 목적은 재미에 있다. 특히 같은 콘텐츠를 즐기며 소통하는 소셜 개념으로 게임에 접근하는 세대는 갈등에서 유발되는 2차적 재미보다는 재미 자체에 더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다고 의도적인 재미를 게임에 담기란 감동적인 게임을 만드는 것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어렵다. 그래서 선택하는 게 플레이어 스스로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시스템 마련이다.
협동 인디 게임의 재미 발현은 개발진이 의도한 구간이 아니라 플레이 도중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우발적 상황에서 나온다. 이를 위해 기술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나오는 정교한 물리 엔진이 핵심으로 떠오른다. 단순히 미리 준비된 대사나 액션을 수행하는 사실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제멋대로인 상황 자체가 물리 엔진을 통해 발생하고, 거기서 나오는 원초적 재미가 전달된다.

여기에 협동이라는 시스템은 그런 상황을 관찰자 입장에서 체험하도록 만든다. 같이 플레이하는 친구가 예상하지 못한 조작이나 플레이로 만들어낸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지켜보는 것. 이건 플레이 안에서 자연스러운 코미디 상황을 만들기도 하지만, 플레이 영상 클립이나 편집 영상을 통해 온라인에 공유되며 게임 바깥으로 재미를 확장한다. 이건 게임에 대한 관심이 되고, 다시 게임 안으로 플레이어를 불러오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음성 채팅의 대중화 역시 이런 재미 위주의 게임 플레이 확장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디스코드, 스팀 채팅, 인게임 보이스 기능 등 근래 협동, 경쟁 게임들이 기술의 제한이 줄어들며 음성 채팅 기능을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음성 채팅 대중화를 통해 플레이어는 서로 이야기하며 게임을 즐기는 데 거리낌이 없다.
서로 대화를 하는 플레이의 가장 큰 특징은 플레이어간의 감정 전달 효과다. 웃음, 비명, 놀람 등이 소리가 전파되면 이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채팅으로 즐기는 것 이상으로 감정적 동질감과 집단적인 웃음 상황을 유발한다. 이는 재미와 몰입도, 게임 흥행에 필요한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여기에 짧은 콘텐츠 공유와 소비 주기에 모두 익숙해져있는 만큼, 그런 상황을 공유하는 것에도 제약을 느끼지 않는다. 당연히 이런 콘텐츠 소비 문화에 어울리는 게임 플레이 시간 역시 중요해진 셈이다. Z세대가 짧은 콘텐츠에 대한 과도한 노출로 길고 어려운 게임을 꺼려하는 것도 맞는 분석이지만, 동시에 짧은 콘텐츠여야 소비하고, 재생산하기 용이하기에 선택되고 있는 셈이다.

재미와 협동의 조화는 어떻게
4 기술력이 만들고 소셜이 키우는 새로운 성공 공식
위에서 봤듯 물리 엔진 등의 기술적 효과가 재미 자체를 발생시키는 요소라면, 관찰자로서의 재미나 음성 채팅 등의 협동 요소는 재미를 증폭시키기 위한 요소다.
즉, 근래 성공하는 협동 게임의 재미는 공포냐, 시뮬레이션이냐 하는 장르적 특성에서 발생한 것도 아니고, 고전적인 협동 게임의 가치에서 나온 것만도 아니다. 협동 안에서 재미를 주는 기술력, 또 그 재미를 다시 확장시키는 협동. 재미와 협동은 상호 보완적으로 선택되고 발전되는 요소다. 이 흥행 요인을 어느 한 쪽에만 집중해 오판한다면, 지금 스팀 차트 상위에 있는 게임의 인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오늘날 게임 시장의 핵심 타깃인 80~00년대 게이머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게임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반대로 Z세대를 중심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게임 가치 역시 분명히 변화하고 있다.

어설픈 현상 파악과 뒤따르기보단 잘 하는 걸 하는 게 나을 수 있다
이 변화하는 가치를 위해 Z세대 타깃의 게임은 패배의 의미를 흩으려 진입 장벽을 낮추고 있다. 특히 인앱 결제 시스템으로 진입 비용 자체는 무료인 모바일 게임에 익숙한 세대이기에 대형 게임보다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인디 게임에 더 쉽게 지갑을 연다. 인디 게임은 상대적으로 간단한 게임 시스템으로 플레이 자체의 접근성이 높아 유저들을 끌어들이기도 용이하다. 아예 실패에서 재미를 발생시키는 실패 중심 게임 디자인을 고민하고 있다.
전통적인 게임 가치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오히려 같은 세대 안에서도 게임을 즐기는 이용 비율이 높아지면서, 플레이어들도 이전보다 더 다양한 게임 가치를 찾고, 즐기고 있다. 하지만 소셜 중심, 스트리밍 콘텐츠에 익숙한 세대가 늘어날수록 성공하는 게임의 새로운 가치를 우선하는 플레이어 역시 더 빠르게 늘어날 것이다. 새로운 팬층을 타깃으로 하면서도 기존 방식과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수치만 분석해 협동 게임을 만든다면 성공 보장 역시 쉬이 할 수 없는 시기인 셈이다. 그렇기에 보다 폭넓은 장르와 이야기에서 재미와 웃음, 그 가치의 중요성은 오늘보다 내일, 더 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