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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마수사타구니님 보시길...

아이콘 안까꼬꾹
댓글: 6 개
조회: 682
추천: 1
2015-03-19 09:34:33
어디서 근거도없는 찌라시같은 내용퍼와서 사실을 매도하시네요...

같은 성인으로써 정말부끄럽습니다...

청소년들이 그런 글을 보고 선동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진심어린 마음에서...글드립니다


극우세력의 주장 (1) 5.18은 김대중 정권 때부터 민주화운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 5.18은 1988년에 가동된 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거치면서 노태우 정부로부터 처음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공식 인정받았다. 1988년 13대 국회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진상규명에 나섰다.

http://media.daum.net/breakingnews/newsview?newsid=19930416164800533



● 1993년 5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5.13 담화, 1995년 12월 5.18 특별법 제정, 1997년 4월 12.12 5.18 사건 대법원 유죄판결 확정, 1997년 5월 정부의 5·18민주화운동기념일 제정을 통해 민주화운동이란 평가가 점차 확고해졌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209892&categoryId=200000431



극우세력의 주장 (2)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판결이 존재하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를 수 없다?



●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2004년 1월 29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따라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1980년 판결은 취소가 되어 법적으로 무효다.


●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심을 맡은 재판부는 '내란음모'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이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음모했거나 회동한 사실이 없고, 단순 정치이념을 같이하는 지식인과 종교인들끼리 회동해 순수한 민주회복을 위한 의사표시의 방법으로서 학생운동을 통해 국민여론에 반영토록 시도한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행위는 방법이나 실력으로 보아 국헌을 문란하게 할 아무런 위험성이 없었고 내란음모죄의 구성요건인 국헌문란의 목적과 범죄주체가 되는 집단이 특정되지 아니하는 등 공소는 부적법하다고 판결문을 통해 판시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4176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0021816




극우세력의 주장 (3) 5.18 최초 사망자는 20일 밤에 사망한 경찰이다?



● 5.18 최초 사망자는 1980년 5월19일 오전 3시 구타후유증으로 사망한 청각장애인 김경철이다. 5.18의 두번째 사망자는 19일 밤 10시 사망한 김안부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망진단서, 사망자 검시 자료가 있다. 



●김경철의 사망자 검시 자료

http://i.imgur.com/7Iv8Wfm.jpg

http://i.imgur.com/sVLaaLU.png



●김안부의 사망자 검시 자료

http://i.imgur.com/DVO907u.png



● 5.18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주영복은 1996년 5월6일 열린 12.12 5.18 사건 7차공판에서 공수부대원이 시위 진압하다 김경철이 최초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19일 밤 들었다고 증언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094030 





극우세력의 주장 (4) 광주시민이 먼저 무장해서 계엄군에 발포했다?



●1995년 검찰,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계엄군이 선제발포했다. 계엄군은 1980년 5월 19일 오후 5시 광주고 부근, 5월 20일 밤 11시 광주역 일대,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발포하고, 금남로 주변 건물에 저격병을 배치해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 시민이 본격적으로 무장에 나선 시점은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뒤다.



●(1995년 7월 검찰발표) 광주에서의 최초 발포는 5월 19일 오후 5시께 광주고 부근에서 있었던 바 (중략) 20일 밤11시께 3공수여단이 광주역 일대에서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대대에 전달하고 대대장은 이를 장교 위주로 분배해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했으며 광주역으로 실탄을 전달하러 가던 특공지원조가 시위대와 마주쳐 진로가 막히자 위협사격을 하는 한편 (중략) 본격적으로 시위대가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 화순, 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당시 군수뇌부는 자위권 발동을 논의했다. 5월21일 수기로 작성된 문서에는 '전두환 각하: 초병에 대해 대해 난동시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돼있다.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가 계엄군을 향해 먼저 총격을 가했다는 주장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 같은 날 오후 1시경 계엄군의 발포 후 계엄군에 의한 조준사격이 있었다. 계엄군이 광주관광호텔 옥상 등 주변 건물로 올라가 조준경이 달린 소총으로 시위대 맨 앞에 주동자를 향해 조준사격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706007





극우세력의 주장 (5) 5.18 당시 시위대원이 장갑차를 조종했는데, 일반인이 어떻게 장갑차 조종을 할 수 있나?



● 5.18에서 시민이 조종했던 장갑차는 KM900(CM6614)이다. KM900은 궤도 장갑차가 아니라 차륜식 장갑차이며, 핸들이 달려있어 일반인도 조종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당시 버스기사, 트럭기사도 시위에 많이 참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위대의 KM900 조종이 불가능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극우세력의 주장 (6) 5.18에서 광주교도소가 습격당했다고 하던데?



● 광주교도소는 광주-담양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사이에 있으며, 두 도로의 옆에 바로 붙어있어 통행이 빈번한 교통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 1980년 5월 21일 19시 30분 계엄사령부는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를 내렸다. 이때부터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의 모든 출입도로를 차단하는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다. 그중에 제3공수여단은 호남고속도로와 광주-담양 도로 사이에 위치한 광주교도소를 주둔지로 삼아 도로를 봉쇄했다. 제3공수여단은 교도소에서 500m~1km 떨어진 주변 도로 위에 바리케이드 설치하고, 무장여부와 관계없이 통행하는 차량에 무차별 발포했다. 따라서 시민은 도로통과는 물론 접근조차 제대로 못했다. 이런 상황을 군 측은 '교도소 습격'이라고 왜곡했던 것이다.



http://i.imgur.com/3TYpVaK.jpg (가운데 운동장이 보이는 건물이 광주교도소)



●(1980년 당시 한도희 광주교도소장의 증언) 시민군이 80년 당시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계엄사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다.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했다면 교도소 주변에 시체가 있어야지 어떻게 도로에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시 교도소에는 3공수여단 병력이 중무장하고 있어서 교도소 습격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고 계엄군이 시 인근 지역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무차별 발포한 것으로 알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64241



●(1995년 12월 검찰 현장조사 결과) 광주교도소는 광주~담양 간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사이에 위치, 시외곽으로 빠져나가려던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다수의 교전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와 무관한 시민들이 도로를 지나다 매복병사들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22900329101009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100페이지) 외곽도로 봉쇄작전 중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극우세력의 주장 (7) 어떻게 꼭꼭 숨겨져 있던 무기고 38개를 모조리 털어 무기를 탈취할 수 있었나?



● 1990년대 초 예비군 무기를 군부대로 이관하는 사업이 추진될 때까지 향방 무기는 경찰서,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보관하고 있었고, 직장 무기는 직장 예비군이 있는 기업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전라남도의 경찰서, 파출소에 설치됐던 예비군 무기고만 해도 적어도 269개 이상이었으며, 5.18 민주화운동 도중 시위대에 의해 탈취된 38개 무기고는 전체 무기고 수에 비하면 일부분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013822





극우세력의 주장 (8) 시위대가 쓰던 카빈에 맞은 사망자가 계엄군이 쓰던 M16에 맞은 사망자보다 많다?



● 제5공화국의 국방부는 1982년 펴낸 '계엄사'를 통해 총상에 의한 사망자 88명이 폭도 자신들의 난동으로 죽었다고 규정했다. '계엄사'에 실린 이 내용은 총격에 의한 사망자 69%가 카빈에 맞아 사망했다는 표현으로 전환돼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계엄사'는 뒷받침할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 현존하는 5.18 사망자에 대한 검시자료는 1980년 6월 초 민군 합동 조사를 통해 작성된 보안사의 '광주사태 검시참여보고', 광주지검의 '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 광주시청의 '광주소요사태 사망자 조서'가 있다. 이 중에서 카빈에 의한 총상에 의한 사망자 수는 보안사 검시 자료에서 카빈 사망자 21명, 광주지검의 검시 자료에서 26명, 광주시청 검시 자료에서 12명이다. 세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카빈에 의한 총상으로 분류된 사망자는 8명이다. 5.18 사망자 검시자료의 출처는 아래와 같다.



(1) 보안사 검시자료 -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중 참고자료 부분

(2) 광주시청 검시자료 - 국가기록원 광주사태사망자철

(3) 광주지검 검시자료 - 광주광역시 5.18 민주화운동자료총서 20권




극우세력의 주장 (9) 5.18에서 신원미상 시신이 12구이며, 신원미상 시신이 의심스럽다?



● 2001년 광주광역시에서 실종자, 장기 가출자, 행방불명자 가족 282명의 유전자 대조작업을 벌여 신원미상 시신 11구 중에 6구의 신원을 확인했다. 그 결과 권호영(당시 16세)·김기운(17세)·김남석(18세)·김준동(16세)·양민석(20세)·최숙일(21세)씨 등 6명의 시신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1949099


● 나머지 5구의 시신 중에서도 40세 가량의 남자, 4세 가량의 남자아이, 목포에서 비무장 상태로 차량 위에서 시위하다 추락해서 사망한 남성 등 적어도 3구는 불순세력과 연관짓기 어렵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523084304765


http://i.imgur.com/cIM7D4E.png (40세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검시자료)

http://i.imgur.com/2U0atGT.png (목포에서 차량 시위 도중 추락사한 23세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검시자료)

http://i.imgur.com/9xTOsfg.png (효덕동 뒷산에서 사망한 4살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아이의 검시자료)


● 사망자, 실종자가 수백명이 되는 대형참사에서 모든 시신의 신원을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삼풍백화점 사건에서 신원미상 시신이 30구, 대구지하철 참사에서 신원미상 시신이 6구인채로 아직도 남아있다는 점을 비추어 보면, 5.18 민주화운동의 신원미상자는 다른 사건에 비해 전혀 많은 편이 아니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204080211729

http://media.daum.net/society/people/newsview?newsid=20121103031007344




극우세력의 주장 (10) 1991년 윤기권의 월북은 북한이 배후조종했다는 근거다?



● 윤기권은 1962년 전북 정읍 출신으로, 1980년에는 광주 대동고등학교 학생이었다. 5.18의 충격과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다가 1991년 3월 영국의 북한 대사관을 통해 월북했다.



● 윤기권은 5.18 당시 신원이 확실한 고등학생이었으므로 북한이 파견한 간첩이라고 보기 어렵다. 5.18 주역들의 집단 월북도 아니고, 단 한명이 월북했다고 5.18에 참여한 시민 20만여명 전부를 북한과 관련지어 매도할 수 없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986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987





극우세력의 주장 (11) 북한이 5.18을 광주인민봉기라고 부르고, 매년 5.18 기념식을 여는게 의심스럽다?



● 북한은 5.18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혁명(남조선인민봉기), 6.3항쟁(남조선청년학생봉기), 6월항쟁(6월 인민항쟁), 부마항쟁(10월 민주항쟁) 등 남한의 주요 민주화운동을 모두 기념한다. 괄호 안은 북한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8&aid=000206500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23274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48039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0165622



● 북한은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이라고 왜곡하여 북한 주민에 대한 선전수단으로 삼는다. 북한에 있을 때 5.18 등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야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http://www.rfa.org/korean/in_focus/nk_518-05182009134816.html





극우세력의 주장 (12) 5.18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설을 주장하는 임천용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의 증언이 있다?



● 북한 특수부대가 5.18에 개입했다는 임천용의 증언은 북한군의 침투인원, 침투경로, 퇴각경로, 귀환인원이 매번 달라지고 일관성이 없다. 또한 임천용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물증은 전혀 없다. 

http://i.imgur.com/5c7Kyt0.png



●임천용은 2006년 8월 한국논단과 인터뷰에서 서해안 쪽으로 북한군 450명이 침투하고, 3분의 1이 귀환했다고 말했다. 특히 절반은 군복을 입고 계엄군 쪽에 침투하고, 절반은 시민군 쪽에서 활동했다고 말했다. 2006년 12월 기자회견에서는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침투해서, 3분의 2가 귀환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2007년 임천용은 뉴스한국과 인터뷰에서 북한군 특수부대가 서해안과 동해안으로 각각 1개 대대씩 침투해서 절반이 귀환했다고 말했다.(참고: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는 300명으로 구성됨)



임천용은 2006년 한국논단의 인터뷰에서는 계엄령 중이라 육지가 봉쇄되어 북한군이 전부 서해안으로 들어왔다고 주장했으나, 2013년 TV조선 인터뷰에서는 북한군이 땅굴로 내려와서 육로로 이동하여 광주까지 내려왔다면서 자신의 예전 주장을 완전히 번복했다. 2007년 뉴스한국 인터뷰에서도 철수 과정에서 침투가 불가능하다고 한 육지를 통해 이동하여 북한군 60~70명이 강원도 중부전선을 타고 넘어갔다고 말한 바 있다.



침투 방법도 각각 다르다. 2006년에는 오직 배를 타고 침투했다고 했지만, 2007년부터는 잠수함 침투를 언급했고, 특히 2013년 TV조선의 남침땅굴 특집방송 때부터 땅굴 침투도 언급하기 시작했다.



(1) 한국논단 인터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8300

(2) 2006년 기자회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19&aid=0000017557

(3) 뉴스한국 인터뷰

http://www.newshankuk.com/news/news_view.asp?articleno=k2007021120301185542

(4)TV조선 인터뷰

http://vod.tv.chosun.com/vod/index_vod_detail.cstv?prog_id=C201200117&epis_sub_cnt=233 



● 2006년 임천용이 "북한군 사망자가 민주화 투사로 둔갑된 사례가 있다면서 한 사망자의 시체 사진을 제시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1980년 5월 22일 총에 맞아 쓰러진 외삼촌 손광식을 구하러 갔다가 화정동 국군통합병원 앞에서 사망한 임정식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0125614



극우세력의 주장 (13) 탈북자 단체의 5.18 증언집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는 신빙성이 있나?



● 자유북한군인연합 소속 탈북자들이 북한에 있을 때 5.18 당시 상황을 TV에서 생중계로 지켜봤다는 증언이 이 책의 포인트다.



● 이 책에서는 몇몇 탈북자가 북한에서 5.18 당시 광주 상황을 TV를 통해 생중계로 지켜봤다고 주장하는데, 1980년 당시 기술로 송신소, 중계소 하나없이 광주에서 수백km 떨어진 평양에 생중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이 책에서는 몇몇 탈북자가 북한 TV에서 여자만 골라 도끼, 칼로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고 주장하는데, 5.18 민주화운동에서 사망한 여자는 11명에 불과하며, 모두 M16에 맞아 사망했다.



● 자유북한군인연합 소속 몇몇 탈북자는 북한 TV에서 전기톱으로 머리를 갈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면서 한 시신의 사진을 제시했는데, 5.18 사망자 검시자료에 머리가 전기톱에 갈려 죽은 사람에 대한 기록은 없다. 머리에 총상을 입어 사망한 시신 사진을 가지고 왜곡한 것이다.

http://asegaew.egloos.com/3406357


●2013년 5월 15일 서울중앙지법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 김일성 주석과 짜고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 시민을 학살했다는 글을 작성한 보수논객에게 사자명예훼손 유죄를 선고하면서 "탈북자의 수기(화려한 사기극의 실체)내용은 출처나 증언자들이 불분명하고 내용이 검증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근거도 없다"고 판시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6&aid=0002155661

http://www.allinkorea.net/sub_read.html?uid=27680





극우세력의 주장 (14) 5.18 당시 북한군이 활동했다는 것은 북한 사람, 탈북자 사이에서 상식이다?



● 인민군 출신 탈북자 단체인 탈북군인협회 회장은 5.18 북한군 침투설을 제기하는 자유북한군인연합에 대해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주장은 현실과 맞지 않다."고 비판한 바 있다.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북한군 특수부대에서 사관장 계급으로 복무했던 한 탈북자는 “특수부대 병력이 600명이나 내려왔다면 그것은 게릴라 작전이 아니라 전면전에 해당된다”며 “한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에 특수부대 군인들을 대거 보내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고 잘라말했다. 그는 “소문에 불과한 얘기를 증거나 확인 없이 그대로 전달하면서 거짓이 진실이 됐다”고 평가했다. 20년간 국가보위부와 정찰국 장교로 복무한 한 탈북자는 “북한군이 만약 5·18 당시 개입했다가 북한에 돌아왔다 하더라도 해당 군인들이 전역할 때는 작전에 대해 비밀에 부치는 서약서를 쓴다”며 “더구나 대대급 규모의 작전이었다면 처음부터 극비리에 진행되기 때문에 소문이 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북한재향군인협회는 “상당수 회원들이 북한개입설을 허황된 발언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더 이상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2117551





극우세력의 주장 (15) 5.18에 침투했다 사망한 북한군을 기리는 비석이 북한에 있다?



● 뉴데일리는 함경남도 청진시의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라는 비석 사진을 게재하면서 5.18과 관련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비석 사진에는 5.18과 관련된 어떠한 문구도 없지만, 뉴데일리는 김주호 박사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해 비석이 5.18과 관련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사진 속의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라는 비석은 우리나라의 현충탑처럼 북한에서 시군마다 하나씩은 있는 흔한 비석이다.



북한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북한의 노동신문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베트남전쟁에서 희생된 비행사들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다가 이국땅에 묻혀있는 그들을 조국에 데려다 인민군영웅 렬사묘에 안치하도록 하신데 대해 뜨겁게 회고했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인민군영웅 렬사묘는 6.25 전쟁에서 전사한 청진시 출신 북한군을 추모하는 비석이거나,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북한군과 관련된 비석일 가능성도 높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2355393



● 김주호는 어떤 문건과 비석의 명단에 있는 사망자 명단을 비교해서 5.18에 침투했다 사망한 북한군 158명을 확인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김주호는 자신이 본 문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비석과 5.18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입증하기 위해서 김주호는 자신이 본 문건을 공개하고 검증받아야 한다.


●국정원은 이 비석과 5.18과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북한 정보원을 통해 현장조사를 했지만 묘비 속 이름들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연결 지을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특수부대원의 이름을 나열하고 특수임무를 공개하는 것도 상식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30523220310255



극우세력의 주장 (16) 황장엽이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고 쓴 메모가 있다?



●2013년 4월 김용삼 전 월간조선 기자는 월간조선, TV조선을 통해 황장엽이 남긴 메모에 '광주학생문제는 북의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전가한 일이다'는 구절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용삼은 해당 구절이 있는 메모를 공개하지 않았고, 언론보도에서도 그 구절을 부각시킨 사진은 없었다. 확실한 물증도 없으며, 제3자를 거친 전언인 이상 황장엽의 메모에서 5.18을 언급하는 구절이 정말 존재하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황장엽은2007년 10월 15일 자유북한방송에서 김일성은 5.18에 편승하여 북한 정권에 유리하게 만들자는 의견을 거부했다고 직접 증언했다. 황장엽은 "지금까지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못 일으켰습니다. 김일성도 늘 그랬습니다. '지금은 안돼'라고 말입니다. 유리할 때가 광주 폭동 때였는데도 자꾸 이야기 해도 그것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더라도 실패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만약 북한이 사전에 북한군을 투입할 계획을 세웠거나 사건 발생후 긴급하게 광주로 북한군을 보냈다면 김일성이 저런 식의 반응을 보였을 리가 없다.

http://www.fnkradio.com/board.php?board=fnkradiob201&page=4&command=body&no=119





극우세력의 주장 (17) 5.18에 직접침투한 북한군인의 증언이 있다?



● 김명국이라는 가명을 쓰는 한 탈북자에 따르면 김명국은 1980년 5월 19일 오후 평양 부근에서 출발해 배를 타고 21일 새벽에 광주 인근 바닷가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광주 시민군 행세를 했으며 27일 오전 9시 상부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고 후퇴하면서 남한 특전사 3명을 직접 공격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0년 5월 27일 당시 국군 내부 기록을 살펴보면 사실과 전혀 달랐다. 진압부대로 투입된 육군 보병 제20사단 및 이에 배속된 공수여단의 진압작전기록에는 27일 새벽 계엄군이 광주 재진입 작전을 실시해 새벽 5시 20분 전남도청을, 새벽 6시 20분 YMCA 건물을 점령하고 무장 시위대를 체포하면서 5·18 민주화운동 진압을 완료했다. 27일 국군 사망자는 2명이었으며, 새벽 6시 30분 이후에는 전투 기록이 전혀 없다.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30518164205737



● 김명국에 따르면, 북한 특수부대는 5월 27일 전라남도에서 출발해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문경을 거쳐 태백 산맥을 따라 5월 30일에 강원도에 위치한 휴전선에 도착했다고 한다. 계엄령이 내려져 검문, 경계가 심한 상황에서 북한 특수부대가 지리도 제대로 모르는 한반도 남쪽을 전라남도-경상남도-경상북도(문경 세재)-강원도 순으로 돌아서 단 3일 안에 휴전선까지 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http://mirror.enha.kr/wiki/5.18%20%EC%97%AD%EC%82%AC%EC%99%9C%EA%B3%A1/%EC%B1%84%EB%84%90A




극우세력의 주장 (18) 북한군 사망자가 수백명 단위이다?


● 임천용은 2006년 인터뷰에서 북한군 450명이 침투해서 3분의 1이 귀환했고, 2008년 인터뷰에서 북한군 600명이 침투해서 절반이 귀환했다고 주장했다. 임천용의 주장에 따르면 5.18에서 북한군 300여명이 사망했다는 말이 된다. 뉴데일리 기사의 김주호는 북한군 사망자 158명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 신군부가 5.18 이후 북한으로 돌아가는 북한군과 대규모 교전사실 및 북한군 사망자를 발표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수백명 단위의 북한군이 사망했다는 주장의 신빙성은 매우 떨어진다.

Lv51 안까꼬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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