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시간 후에 공항으로 갑니다. 앞으로 바빠질 것 같아서 언제 다시 쓸 수 있게 될지 모르겠네요.
지난 외전 글에서 저는 어떻게 통합을 이룰 수 있는가 뿐만이 아니라 어떻게 세계를 통합하고자 하는 역사적 위인을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어떤 영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분의 부하가 될 수 있을 정도의 지성, 인덕, 의지를 갖추고 있어야만 하죠. 그러한 노력 없이 역사를 공부하는 경우 결국 큰 뜻을 가지고 있던 위인들을 자기가 소화할 수 있을 만큼의 레벨로 다운그레이드해서 단지 자기 만족을 위해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물론 이미 알고 있는 자기 내면 세계에 인류 역사를 끼워 맞추면 역사를 배울 의미가 없겠지요.
대항해시대 이베리아 나라들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거듭 체감했지만 당시의 지도자들은 우리가 현재 한국 역사 교과서를 통해서 배우는 보통 민족왕들을 공부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헤아려질 수 없습니다. 15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중엽까지 두 세기에 걸쳐 아프리카는 물론 아메리카 대륙 대부분의 원주민들에게 카톨릭을 비롯한 이베리아 문화를 보급하고 대서양 양안에 걸쳐 하나의 정치 문화 경제권을 확립시킴은 물론 지중해와 인도양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진격과 이슬람 확장을 저지시키고 동시에 범 카톨릭 연합을 결성해 신교도들과도 맞서 싸운 "전신갑주로 무장한 교황"의 역사입니다. 그 오랜 기간에 걸쳐 당시 카톨릭 연합의 핵심을 담당했던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플랑드르, 오스트리아, 헝가리, 바바리아, 폴란드 그리고 개척된 해외 식민지의 지도자들은 상이한 경제적 이권 차이에도 불구하고 단지 하나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 서로 반목하지 않고 힘을 합쳤고, 더더욱 놀랍게도 신하들과 뭇백성들도 그 지도자들의 파멸을 향한 투쟁에 자신들의 이익을 내팽겨치고 목숨을 다해 헌신합니다. 드라마에 빗대서 이야기하자면 그 많은 나라들과 백성들이 한 팀을 구성해서 이백년에 걸쳐 쉬지 않고 태왕사신기를 찍었다고 보면 됩니다. 두려울 정도의 집념과 광기의 서사시이지요. 그 원대한 꿈이 실패한 이후 중심국이었던 에스파니아가 국력를 완전히 소진해서 몰락한 것도 지극히 당연한 결말이었습니다. 지나치게 위대한 지도자들이 스스로 신의 대리자가 되어 세계의 부조리를 해결하겠다고 투쟁하면서 초래된 비극입니다. 하지만 그 터무니없는 시도가 이루어낸 성과는 현대 세계에까지 이어져서 또다른 형태의 가능성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토르데시아스 조약은 카스티야 계승 전쟁에 뒤이은 초창기의 이야기, 오랜만에 에스파니아가 아니라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글을 써 보게 되겠네요.
포르투갈은 12세기의 독립 이래로 계속 자신을 병합하려는 이웃의 대국 카스티야에 맞서 수세기를 싸워왔습니다. 카스티야의 모토는 이베리아 통일, 하지만 포르투갈과 카스티야가 통합하는 경우 과연 해양 문화의 포르투갈 사람들이 번영할 수 있도록 내륙 문화의 카스티야 사람들이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내륙 고원의 카스티야가 대서양권의 안달루시아를 무어인들의 지배에서 해방시킨 이후 이슬람 세력과의 교역을 금하면서 안달루시아에 남은 무슬림들은 물론 기독교인들도 해방 이전보다 훨씬 경제적 문화적으로 궁핍한 삶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바다 건너 여러 이민족들과의 교역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해안가 포르투갈의 입장에서 가톨릭 문화의 엄격한 유지를 추구하는 카스티야와의 통합은 안 좋은 결말을 초래할 것이 뻔합니다.
네 배 강한 카스티야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카스티야에 의한 이베리아 통일을 원치 않는 잉글랜드의 도움도 있었지만 역시 가장 큰 원인은 동쪽의 아라곤이 카스티야의 위협에 맞서 포르투갈과 지속적인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변동하는 국제 질서는 알 수 없는 법, 카스티야 계승 전쟁으로 에스파니아가 탄생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포르투갈은 살 길을 대서양 바깥에서 찾았습니다. 카스티아에 맞서 독립을 쟁취한 아비즈 왕조의 시조 후안 1세는 세번째 아들인 항해왕 엔리케를 포르투갈 남단 파루가 있는 알가르베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합니다. (절대로 고자왕 엔리케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곳을 기점으로 엔리케는 당시 아랍인들이 서아프리카의 금과 상아 등을 싣어오던 중계지 세우타를 점령하고 세우타를 통해서 아프리카 교역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됩니다. 서아프리카의 부귀를 얻음은 물론 앞으로 함께 동맹해서 이슬람권에 맞서 싸울 전설의 프레스터 조안 왕국(에티오피아)을 찾기 위한 항해를 준비하고자 파루에 조선소와 측량시설, 지도 공방소 등을 확충하는데 새로 등극한 자신의 형과 그 아들 알폰소 또한 동생과 숙부를 위해 자산과 인력을 아낌없이 지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게 있는데 이슬람에 맞서 싸운 엔리케 역시 당시 항해술과 지리학 등에서 오랜 경험과 정보를 축적한 이슬람 문명의 혜택을 거부하지는 않고 오히려 잘 활용하지요. 유럽에서 널리 활용하던 사각돛의 카락이 아니라 삼각돛에 훨씬 날씬해서 방향을 잘 바꿀 수 있고 그래서 처음 발견되는 얕은 해안가를 탐사하기 좋도록 엔리케가 개발한 카라벨도 원래 안달루시아에서 이슬람 교도들이 탐험에 사용하던 선박들이 그 시조였다고 합니다. 그 모든 노력이 결실을 얻어 엔리케 생전에 아조레스 섬, 마데이라 섬, 아르긴 섬, 카보베르데 섬이 발견되어 전부 포르투갈 이민자들에 의해 개척됩니다. 당시 포르투갈에서는 항해왕 엔리케의 업적을 본받아서 귀족가에서 장남이 아닌 어린 아들들이 좁은 본토에서 영지를 다투기보다 바다 건너 식민지들을 직접 개척하는 게 전통이 되었고 귀족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물론 포르투갈의 빠른 해외 확장에 큰 원동력이 되었지요. 기아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 개척한 섬들에 식량으로도 쓸수 있고 고가에 판매할 수 있는 설탕을 재배하도록 제안해서 큰 경제적 성공을 거둡니다. 엔리케는 물론 라스팔마스가 있는 카나리아 제도 또한 반드시 포르투갈의 영토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프리카에 가까이 붙어 있고 또한 다른 섬들보다 훨씬 큰 카나리아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정복과 식민이 쉽지 않았고 분쟁 끝에 결국 군사적으로 더 강한 카스티야의 지배 아래로 떨어집니다. 포르투갈 해안가를 습격해서 사람들을 납치해 아프리카 노예 시장으로 팔던 모로코 해적을 소탕하고 그들을 통해 잡혀간 포르투갈인들을 구하는 과정에서 역으로 아프리카 노예 무역에 발을 담그게 되는데 당시 기독교 사회에서 공식적으로는 허용되지 않던 노예제도를 시작한 것이 대해 사람들이 비판하니까 "나는 저 이교도들을 잘 교육시켜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기 위해서 노예로 삼은 것이다" 라고 변명했다고 합니다. (...) 당시 교황이 포르투갈하고 무언가 커넥션이 있었는지 모든 이교도들을 노예로 삼을 수 있는 권한을 포르투갈에게 허락하는 교황령의 칙령이 공표되고 이래서 포르투갈의 오랜 아프리카 노예 무역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훗날 유럽이 전세계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할때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야만족들을 개화시키기 위해서 백인들이 책임을 지고 그들 모두를 다스려야 한다" 고 주장했던 백인의 짐 이론을 가장 먼저 고안했던 것도 엔리케인 것을 보면 역시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자군요. 그렇다고 엔리케 자신이 특별히 부귀를 탐내서 직접 노예를 매매하던 악덕 노예상이었거나 플랜테이션에서 혹사시키던 농장주였던 것은 아니고 당대 사람들의 평에 따르면 정직하고 검소하고 부드러우며 베풀기 좋아하는 좋은 인물이었다는데, 노예든 뭐든 합법적으로 거래해서 이윤을 남길 수 있다면 그 돈으로 포르투갈 식민지도 더 개척하고 카톨릭 교세도 확장시키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는 전형적인 포르투갈 상인 사고방식을 지녔던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항해제국의 지속적인 번영을 가능토록 하기 위해서 언어, 논리, 웅변, 수학, 음악, 천문학 등에 정통한 학자들을 초빙해서 리스본 대학을 설립했으며, 어쨋든 이 모든 활약의 결실로 엔리케가 1460년에 사망할 즈음에는 포르투갈의 제해권이 베르데 곶 아래 시에라리온에까지 이르러 서아프리카의 금이 직접 포르투갈로 유입되고 포르투갈 역사 최초로 금화를 주조해서 발행하게 됩니다. 엔리케 사후 적절한 해외 개척 책임자를 찾지 못했던 알폰소 왕은 특별히 더 이상의 탐사와 개척을 지원하지는 않지만 이미 새로운 해외 개척과 무역에 눈을 뜨게 된 포르투갈 귀족들과 상인들의 개인적인 탐사가 계속 이어져서 1470 년에 기니만 깊숙히 적도선에 위치한 상투메 섬이 발견됩니다. 또한 같은 해 한 탐험가가 아조레스 서쪽에 위치한 대구가 많이 나는 섬을 발견한 공로로 아조레스 제도 내 한 섬의 통치권을 부여받는데 많은 학자들이 이 때 포르투갈이 북아메리카 동쪽 끝에 위치한 뉴펀들랜드를 알게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포르투갈에서 전해 내려오기로 사라센인의 침공을 피해 서쪽으로 항해한 수도사들이 피라미드가 많은 도시를 발견했다는 전설도 있는데 포르투갈 또한 사실 스페인 못지 않게 기독교 전통이 강한 나라였으니 뉴펀들랜드가 발견된 시점에서 포르투갈이 코 앞에 있는 아메리카 대륙을 더 탐사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카스티야와의 심화되는 해양 주도권 경쟁 때문에 아메리카 발견은 공표되지 않고 비밀에 붙여져서 상세한 실상은 현재 확인할 길이 없지요.
곧 이어 지난 글에서 설명한 카스티야 계승 전쟁이 일어나고 그 후유증으로 포르투갈의 알폰소 왕이 서거, 황태자 후안이 왕위에 오릅니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주변 귀족들로부터 "저 놈은 폭군이 될 상이다" 라는 평을 들으며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후안, 위키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특히 대항해시대 3를 플레이하면 엄청 똑똑하고 또 그만큼 성깔 있어 보이는 면상을 확인할 수 있지요. 감정이라곤 없는 듯하며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압력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가 믿는 바 그대로 추진하는 지도자였다는데 취임하면서 한 말이 "나는 왕 중의 왕이지 종복 중의 종복이 아니다" 였다고 합니다. 귀족들이 쿠데타를 논의하는데 대항해시대 2에서도 나오는 악명높은 반골 브라간사 가문의 당주가 그 중심이 되어 마찬가지로 후안 왕을 싫어하고 경계하던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함께 음모를 꾸밉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상황을 지켜만 보다가 밀정에 의해서 이사벨 여왕과 나눈 서신이 입수되자 바로 브라간사 공작을 잡아들이는 후안 왕, 자기의 육촌이면서 처제의 남편이고 또한 선왕의 총애를 받아 북아프리카 정복과 카스티야 계승 전쟁에 동행했다는 수많은 공적들 다 무시하고 참수시켜버리죠. 삼대에 걸쳐 대대로 왕가에 충성해 온 브라간사 가문의 토지를 몰수하고 그 일족을 모두 카스티야로 추방시킵니다. 이제 귀족들 대표는 비사우 가문의 당주가 맡게 되었는데 왕의 사촌이고 처남이니까 설마 어쩌겠냐 했지만 두 번의 암살 시도를 넘기며 분노가 절정에 달한 왕이 비사우 공작을 만찬에 초대한 후 다른 귀족들을 향한 본보기로 자기 손으로 직접 찔러 죽입니다. 하지만 후안 왕의 무서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 게 비사우 공작을 처형한 직후 그 동생 마누엘(후대의 마누엘 1세)을 궁궐로 불러들여서 형의 시신을 보여주면서 "내가 너를 내 친아들처럼 보살피겠다"는 선언과 함께 차기 비사우 가문 당주로 임명하지요. 그리고 처형된 비사우 공작의 어머니이고 자신의 오촌 고모이고 숙모이자 장모인 베아트리스를 중용해서 그녀가 포르투갈 문학을 지원하고 포르투갈 카톨릭 교회를 번영시키도록 돕는 한편 그녀의 조카인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의 외교에 특사로 활용합니다. "당신들의 형과 아들을 반역죄로 처형했어도 내가 귀공들만은 아끼고 있으니 개인적인 원한을 넘어서 위대한 나의 계획에 동참해주리라 믿는다" 라는, 보통의 군주는 품을 수 없는 절대적인 자신감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반란의 수괴들이 아닌 그 친족들은 충성심과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살려주고 중용할 수 있다는 후안 왕의 이같은 조치들은 후일 신하들이 두려움 속에서도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멈추고 왕의 계획에 협조하도록 유도합니다.
특별히 후안 왕이 지혜로워서였을까요?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 그게 당시 유럽에서 현명한 군주라면 상식으로 지키는 불문률이었던 것 같습니다. 중국 황제처럼 처첩을 수천명 거느리지 않으니 굳이 신하들의 땅과 가솔들을 노려서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가족들을 하루아침에 노비로 만들 동기가 없고, 왕이 자신의 재산과 가족을 노릴 동기가 없다는 것을 알다보니 신하들도 정말로 폭정이 아닌 이상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며, 서로 상대의 가문에 그렇게 큰 욕심이 없다보니 설령 반란이 일어나도 승자가 보복의 두려움 때문에 패자의 가족들까지 멸문지화를 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신하가 만약 쿠테타에 성공을 해도 선왕의 가족들을 전부 노비로 삼는 게 아니라 차라리 선왕의 후손하고 결혼해서 구세력으로부터 왕권을 인정받고 옛 왕가의 인재들을 활용하는 게 더 나은 상황이 되는 것이죠. 물론 생명을 소중히 해서 누구나 신에게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니 서로를 용서하라고 가르친 기독교의 윤리 또한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로 심지어는 모두에게서 조롱받던 고자왕 엔리케조차도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이복 동생 이사벨을 살려두고 교육까지 시켜주고, 이사벨은 정권을 잡은 후에도 조카 후아나가 수녀원에서나마 원하는 모든 사람들하고 서신을 교환하면서 천수를 누릴 수 있도록 내버려두며, 후안 왕은 마누엘의 가족들을 중용해서 마누엘이 자신의 사후 포르투갈을 더더욱 번영시키는 훌륭한 왕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하며, 마누엘은 즉위 이후 선왕 후안이 영지를 몰수했었지만 결코 학살하지 않고 단지 추방하기만 했던 브라간사 일족을 국내로 다시 불러들여 요직을 맡기고, 그 브라간사 일족의 후손이었던 후안은 훗날 이베리아 연합이 몰락해갈 때 에스파니아로부터 독립 항쟁을 벌여 승리해서 네덜란드에게 빼았겼던 식민지들을 되찾고 포르투갈의 새로운 전성기를 이룩합니다. 이에 비해서 당시의 한국을 비교하면 어땠을까요? 조선 최고의 성군이었다는 세종대왕도 자기 장인이 단지 선왕을 모욕주었다고 해서 그 집안 전체가 관노비가 되어 부인과 혼인을 깨야 할 위기 속에에 살았고 단지 신분 때문에 천한 장영실과 함께 일할 수 없다는 졸렬한 신하들의 몽니에 속을 끓여야 했으며 지금까지도 조롱거리의 대명사로 남은 역사왜곡 용비어천가를 편찬하는데 기력을 낭비해야 했습니다. 세종 사후 현실을 무시한 불합리한 위계의 엄격한 강요 때문에 수양대군이 쿠데타로 왕위에 오르면서 어린 조카는 물론 수많은 인재들을 도륙내고 한글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게 몰아갔고요. 대체 조선의 공신들 가문 중에서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고 오래 살아남은 가문이 얼마나 있었을 거고 어째서 그렇게 잔혹한 형벌로 공포심을 심어 줬어도 언제나 신하들이 목숨을 걸고 계속 왕위 전복을 꾀했던 걸까요? 조선에서 왕의 형제는 양녕대군처럼 왕의 권위를 위협하지 않기 위해서 놀고 먹으며 근신해야 하는 처지였고 자랑할 수 있는 여성을 꼽자면 고작해야 신사임당 정도였으니 남여 구분없이 왕족 모두를 항해왕 엔리케나 베아트리스처럼 행정 군사 외교 문화 종교 등 전분야에 걸쳐 최대한 활용했던 당시 이베리아 나라들에 비해서 인재 규모에서 도저히 비교가 안 되지요. 아무리 군주가 위대하다고 해도 나라 전체가 찌질한 반동 사상에 찌들어 있으면 뭐 방법이 없어요. 어느 분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필자가 굳이 기독교인이어서 자신의 믿음을 편애하는 게 아니라 기독교가 유교에 비해서 얼마나 정치 사회적으로 우월한지를 시인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시 조선이 수백년간 중국의 속국으로 발전없이 지내오던 사이에 이베리아 나라들이 전 세계를 누비며 수백년간 세계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그 원동력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느 문화가 특별히 더 우월하다는 전제의식을 가지고 출발한게 아니라 단지 어째서 당시 포르투갈과 에스파니아가 그렇게 번영할 수 있었는지 그 원인을 저 혼자 한달간 사료들을 읽고 계속 연구하면서 거듭 확인할 수 밖에 없었던 결론입니다.
[사진: 위에서부터 후안 1세, 랭카스터의 필리파 (잉글랜드의 왕녀이자 후안 1세의 아내로서 포르투갈 독립을 위해 모국의 지원을 받아내고 훗날 포르투갈의 경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세우타 공략을 기획함), 두알테 현자왕 (후안 1세의 아들로서 엔리케의 형), 항해왕 엔리케, 브라간사 공작 알폰소 (후안 1세의 사생아로서 브라간사 가문의 시조), 알폰소 왕, 비사우 공작 페르난도 (알폰소의 동생이자 마누엘의 아버지), 비사우의 베아트리스, 후안 2세, 후아나 (카톨릭 교회에서 성녀로 인정받은 후안의 누나), 레오놀 (후안의 아내이자 마누엘의 누나), 그리고 마누엘 왕입니다. 다들 면상 봐서 바로 감이 잡히는 걸 보면 당시 인물화 기풍이 괜찮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John_I_of_Portugalhttp://en.wikipedia.org/wiki/Philippa_of_Lancasterhttp://en.wikipedia.org/wiki/Edward_of_Portugalhttp://en.wikipedia.org/wiki/Henry_the_Navigatorhttp://en.wikipedia.org/wiki/Afonso,_1st_Duke_of_Braganza
http://en.wikipedia.org/wiki/Afonso_V_of_Portugalhttp://en.wikipedia.org/wiki/Infante_Fernando,_Duke_of_Viseu
http://en.wikipedia.org/wiki/Beatriz_of_Portugal_(1430-1506)
http://en.wikipedia.org/wiki/John_II_of_Portugalhttp://en.wikipedia.org/wiki/Saint_Joan_of_Portugalhttp://en.wikipedia.org/wiki/Leonor_of_Viseuhttp://en.wikipedia.org/wiki/Manuel_I_of_Portugal다시 후안 왕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사실 동아시아의 기준에서 보자면 이런 성군도 드물테지만 당시 포르투갈과 주변 나라들에서는 인덕에 대한 기대수준이 훨씬 높았는지 당대에는 폭군이라 불리고 후세에서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빗대어 "완벽한 군주"라는 반어법으로 통칭되었다고 합니다. 르네상스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럽의 군주들이 실제로는 마키아벨리가 주장했던 것처럼 행동했어도 표면적으로는 군주론에 나온 이론들을 비도덕하고 비합리적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했었던 것을 보면 역시 그다지 좋은 별명은 아니겠지요. 필자또한 도덕적 뿐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야비한 군주는 전혀 고려할 만한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사실 후안 왕이 그런 군주도 아니었다고 판단하지만 어쨋든 후안 왕의 조치들은 분명 쓸데없이 피를 흘리는 과도했던 면들이 많았습니다. 후안 1세 이래로 전임 포르투갈 왕들은 어느 누구도 숙청하지 않았는데 혼인 정책을 써서 신하들이 다 서로 가족들이고 그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며 논공행상을 공정하게 해서 불만이 없었거든요. 알폰소 왕이 국고를 소진하고 카스티야 전쟁에서 패해서 돌아와서 수도원에 몸져 누웠지만 다들 단지 왕의 불운을 슬퍼했을 뿐 그 틈을 타서 왕위를 찬탈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대체 후안 왕은 무엇을 하고 싶었기에 그렇게 없던 불씨를 자기가 스스로 자초했던 것일까요? 우선은 국가 주도로 경제를 개발하면서 귀족들한테도 세금을 매겼다는 것이 한 변화입니다. 선임 왕들은 필요할 때만 귀족들을 불러서 함께 일하고 평소에는 특별한 변화 없이 각자 자기 봉토 관리하면서 지낸다는 정책을 폈지요. 실업이 는다던가 기근이 든다던가 하면 세금을 매기는 게 아니라 국가를 수호하는 카톨릭 교회가 앞장서서 귀족들을 설득해서 지원받고 교회를 통해서 빈민들을 구하는 식의 원조 보수 이론을 통해 위기가 해결되었죠. 귀족들이 별로 왕한테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고 또한 법령으로 모든 시민들 기본권이 보장되어서 평민들 또한 폭동을 일으킬 생각이 없으며 다들 가톨릭이라는 한 교회 아래서 종교적으로 단결한 안정된 국정입니다. 다만 이러한 국정은 교육받은 귀족들을 중심으로만 일이 해결되고 또한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중산층을 육성하는 게 불가능하며 또한 너무 급격하고 국민 정서에 반하는 정책을 추진할 수 없다는 단점들이 있고, 후안 왕이 구상하던 원대한 계획은 군화발로 차서라도 이 모든 단점들을 해결하겠다는 개발독재를 필요로 했거든요. 당시 국제정세는 숨가쁘게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이나 프랑스가 내전을 끝냈던 것은 물론이고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연합해서 포르투갈 여섯 배 이상 국력의 에스파니아 왕국이 세워져 포르투갈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지난 전쟁의 여파로 포르투갈과 에스파니아 사이는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유럽 강대국들에 맞서 자주 독립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아프리카 남단을 넘어 인도에 도달해 향신료 무역을 통해 유럽 최고의 부국이 되는 한편에 인도항로까지의 모든 핵심 항구들과 그 주변을 포르투갈령으로 점령 개발해서 대서양과 인도양에 걸친 범 포르투갈 문화권을 형성해야 한다고 후안 왕은 그렇게 판단합니다. 당시까지 육십 여년에 걸친 포르투갈 해외 개척 역사를 통해서 발견한 지역은 상투메까지고 개척한 땅은 카보베르데 까지밖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자면 자신이 재임하리라 예상되는 앞으로의 이십여년간 그 모든 목표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좀 돈이 많이 들어가겠죠. 왕이 국고를 통해 직접 운영하는 대양 개척 전략 본부를 설립해서 이제까지 항해에 참여했던 귀족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계층 모든 민족을 초월해서 인재들을 뽑아 양성하고 지식과 기술을 축적하며 그 광대한 항로 전체 전체에 걸쳐 어느 나라도 감히 포르투갈 개척지들을 탐내지 못하도록 대함대를 조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계획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인재 확충은 단지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유태인들과 무슬림들도 받아들여야 하는 게 이슬람권의 지리와 문화에 해박한 그들의 도움이 없이는 동아프리카와 인도에까지 이르며 포르투갈 식민지를 개척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거든요. 그렇게 광대한 세계에 걸쳐서 현지인들의 지지를 얻고 포르투갈의 헤게모니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포르투갈 문화 자체가 여러 이민족들의 문화를 받아들여 세계화되어야 한다고 후안은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전을 추진하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던 게 당시 포르투갈을 포함한 기독교 유럽권에서 다양한 계층의 참여는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이교도들을 국정에 참여시키는 것은 특히 레콘키스타의 이베리아에서는 나라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용납못할 일이었거든요. 후안은 거의 무신론자에 가까운 실리주의자였지만 나라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그렇지 않았으니 일부러 귀족들을 도발한 후에 반역죄를 잡아내서 유력 가문의 수장 두어명 정도는 본보기로 처형해서 훗날 자신이 어떤 정책을 펴던 감히 토씨를 달지 못하도록 미리 윽박지를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천재였고 폭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와 비슷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면에서는 의외로 태왕사신기의 담덕왕을 닮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력 가문의 수장이었던 왕족을 처형했으면서도 그 친족이 자신의 인덕과 카리스마에 매료되어 충성을 바치기를 바란 것도 그렇고 무의미한 전쟁으로 적국에게 복수할 생각 없이 신하들과 백성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세계 다민족 경제 공동체를 계획해서 실현시킴은 물론 유력 귀족들도 모르는 비밀 전략실에서 거물촌 도사들 만큼이나 수상한 친구들하고 그 혁신적인 비전을 논의하고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는 것까지도 말입니다. (웃음)
당대의 유명한 역사학자, 지리학자, 천문학자, 신학자, 건축가, 농수산 전문가, 유태인 은행가와 무슬림 항해사들이 모두 초빙되어 후세에 현자 학당이라고 불리우게 되는 후안의 친위 연구소는 왕이 원하던 목적들을 빠른 시간 내에 하나하나 달성해 나갑니다. 서아프리카 쪽으로는 산호르헤(세인트 조지스)와 상투메는 물론 남아프리카 르완다에까지 성채를 쌓고 콩고 왕을 초대해서 세례를 베푼 후 우호국으로 삼습니다. 동쪽으로는 알퐁소 데 파이바와 페드로 코비야를 밀사로 파견해서 알렉산드리아와 수에즈, 아덴을 거쳐 인도까지 탐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무슬림 인도양 무역로를 이용해서 동아프리카 최남단 소팔라에까지 이르지만 홍해에서 프레스터 조안국의 전설이 유래가 된 에티오피아에 들러서는 에티오피아 왕에 의해 억류되어 국외로 나갈 수 없는 귀빈이 되어 나중에 포르투갈이 홍해까지 세력을 넓힐 때까지 수십년을 그렇게 살아갔다고 합니다. 인도와 동아프리카의 정보는 에티오피아를 들르기 직전에 만난 포르투갈 출신 유태 랍비 아브라함 데 베자에 의해 전달되어 리스본으로 무사히 들어가지요. 전설적인 군인이자 탐험가였던 두알테 페레이아는 기니만 내륙을 더 탐사해서 침팬지들이 연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 최초의 인류학자가 됩니다. 서아프리카 중계항들이 모두 세워지고 동아프리카 대부분의 정보가 입수된 1487년에 바르톨로메유 디아스가 드디어 함대를 인솔해서 인도로 향하지만 희망봉을 넘을 때 태양이 반대 방향에서 떠서 지는 것을 목격한 선원들이 무슬림 영토로 들어가니 이제 하늘도 뒤집히고 죽는구나 하면서 공포에 질려서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리스본으로 회항합니다. 십년 후 바스코 다 가마가 오랜 준비 끝에 인도를 향해 다시 출항할 때는 명망있는 아랍 탐험가 아흐메드 이븐 마지드와 나코다 이스마엘이 함께 하는데 배를 모는 선원들이 포르투갈의 기독교인이었는지, 무슬림들이었는지 인도 구자라트 출신이었는지 목격한 사람들마다 증언이 달라서 뭐가 사실인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만약 아랍이나 인도 출신이었다면 선원들이 포르투갈 말을 알아들었던 건지 아니면 제독이 선원들 언어를 알고 있었던 건지 신기한 일입니다. 그리고 가마 제독은 인도 항해 때 리스본에서 단 한번도 육지에 들르지 않고 베르데 곶 아래로 남하해서 남위 30도에서 동쪽으로 꺾어 90일만에 희망봉에 바로 상륙한다는 당시로서는 거의 기적적인 항해술을 성공시키는데, 카나리아 제도에서 쭉 남서쪽으로 해류 타고 35일만에 소가 뒷걸음질 치면서 쥐 잡듯이 쿠바를 발견한 콜론의 항해와는 완전히 그 질이 다른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입니다. 남대서양 해류는 카나니아 해류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복잡하고 거친데 이전에 남대서양 항해 경험 없이 죽기 딱 좋은 그런 모험을 쉽게 감행했을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1488년부터 1498년까지 십년간 포르투갈에서는 공식적으로 원양 항해를 내 보낸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리스본 빵집들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 기간 동안 백 번이 넘는 원양 항해용 주문이 들어왔었다고 하지요. 이쯤되면 뭐가 사실인지 헷갈리는데, 워낙 포르투갈이 카스티야를 향해서 진실은 감추고 거짓 정보들만 많이 흘려서 연구하는 학자들도 두 손 들었다고 합니다. 역시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후안의 숙적 이사벨을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죠.
대항해시대 역사를 이야기할 때마다 언제나 빠질 수 없는 유일무이의 히로인 이사벨 사마께서 다시 오셨습니다. 어째서 이리도 인기가 많은 걸까요? 똑똑하고, 착하고, 열정적이고, 강하고, 무엇보다도 여왕이니까 그렇다고 답할 수 있겠지만 무언가 이 퍼센트 빠졌습니다. 아무리 여러 재능이 뛰어나도 상식적인 여자는 결코 그 모에함에서 광년이 포스를 따라갈 수 없지요. (...) 그리고 지난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이사벨 여왕님은 '존재하지 않는 대륙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자기 손으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진성 광년이입니다. 그녀에게는 삶 전체에 걸쳐서 신의 대리자가 되고 싶어할 동기들이 충분했지요.
다른 누군가와 비교해서 표현하자면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측천만큼 똑똑하지는 않았고, 그 만큼 잔인하지도 않았고, 어려운 역경을 덜 겪었고, 권력을 그 만큼 욕망하지 않았으며, 그만큼 복잡하지는 않은 여자였다." (...) 물론 이 모든 면에서 무측천보다 더한 여자는 이 세상에 아마 아무도 없을 테지만 뭐 그만큼 이사벨 또한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한쪽은 악의 대명사처럼 보이고 다른 쪽은 반대로 보입니다만 과연 그럴까요? 당 태종이 어느 날 후궁들 앞에서 자신의 남성다움을 과시하려고 아주 사나운 말 한 마리를 가져와서 "누가 이 말을 길들일 수 있겠냐" 며 장난조로 묻습니다. 물론 후궁들이 "아아, 무서워요~" 하면서 애교를 부리면 그 때 자기가 여자들을 위험에서 구하는 기사가 되어 뽐내겠다는 각본이었죠. 그 때 측천이 앞에 나서서 말하기로 "저에게 쇠채찍과 철퇴·비수만 주시면 됩니다. 먼저 저 말이 말을 순순히 듣지 않으면 채찍으로 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철퇴로 머리를 후려치고, 그래도 계속 난동을 피우면 비수로 저놈의 목을 따 버리겠습니다" 라고 하니 뻘쭘해진 왕이 얼굴을 찡그렸다지요. 왕위계승을 위해서 형제들을 몰살시킨 전쟁영웅 태종은 측천을 싫어했지만 반대로 심약했던 황태자 고종은 자기보다 네 살 많은 강인한 그녀에게 사랑을 느껴서 선황제의 죽음 이후 사찰로 출가를 강요당했던 그녀를 궁궐로 다시 불러들여 다른 이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후궁으로 삼습니다. 후궁에서 황후로 오르는 과정이 순탄치 않아서 그 과정에서 전임 황후와 후궁 한 명이 참살에 처해지는데 현재 광범이하게 유포된 야사에 따르면 일부러 자기의 갓난아기를 목졸라 죽이고 그 죄를 황후한테 뒤집어 씌웠다고 하지만 당시 사료를 살펴보면 무측천 사후에 그녀를 깎아내리던 왕실 내의 정적들과 사가들도 그와 같은 죄목을 이야기하고 기록한 적은 없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서 후대에 그녀의 악명을 과장하기 위해서 지어낸 루머일 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을 가능성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쨋든 무측천 또한 황후 폐위 과정에서 전혀 죄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고 그녀가 실권을 잡은 이후 그 권력과 위협을 느껴서 뒤늦게 그녀를 제지하려고 한 황제도 곧 죽는데 아마도 독살되었을 거라고 하지요. 단지 황후나 태후로 지내는 데 만족할 수 없었던 그녀는 새로 나라를 건국해서 황제에 오르니 여자를 황제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반동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나라에서 또 다시 피바람이 몰아칩니다. 그녀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이라면 아들들이나 손자손녀라도 용서하지 않고 가차없이 처형했습니다. 하지만 폭군이었다고만 말할 수도 없는게 힘없는 백성들이 고통받지 않도록 각종 산업 제도들을 정비하고 재난이 있을 때 구제해 주며 공정한 법률을 시행하는 한편 재능이 있는 인물이라면 민족이나 신분, 성별을 가리지 않고 중용해서 그 많은 숙청에도 불구하고 조정에는 언제나 인재들이 넘쳤다고 합니다. 특히 여자로서 살아오면서 자신이 겪어야 했던 굴욕을 다른 이들이 반복하면 안 된다는 결심이 확고해서 여성 또한 남성과 동등하다고 선포하고 나라 내 모든 여성들이 부모나 남편에 의해 학대받지 않도록 보호하며 그들이 교육받고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해 주었다고 하지요. 그녀로서는 이렇게 큰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자신의 가능성이 단지 황제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후궁이라는 굴레에 묶여 단 한 번도 당당하게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그렇게 살다 그냥 죽을 거라는 운명을 참을 수가 없었던 거였겠죠. 자신만이라도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올라서 여성도 남성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서 다른 뭇 여성들에게 희망을 줘야 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궁궐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고자 발버둥치는 마찬가지 비참한 처지의 다른 뭇 여자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모순에 빠집니다. 황제가 된 측천은 권력을 쥐기 위해서 자신이 저질러야 했던 모든 죄악 때문에 사후 세계에서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속죄의 의미로 전국에 수많은 불교 사찰을 짓도록 해서 중국 불교를 크게 중흥시킵니다. 말년에는 자신이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지만 정통성 문제 때문에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었던 옛 황후의 가족들을 사면하고 잘 돌보아주라고 아들 중종한테 부탁하지요. 임종시에는 자신의 모든 업적과 죄악을 담은 복잡다난한 삶을 당대의 사람들이 공론을 모아 평가하고 적는 게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묘비에 어떤 글자도 새기지 말라고 유언을 남깁니다. 무시받던 과거를 거쳐 권좌에 오른 후 조정의 구세력들과 쉽게 결탁해서 지위를 보전하지 않고 옛날 자신의 고통받던 나날을 기억해서 천대받는 백성들을 지키고자 싸워나가는 올곧은 지도자는 드물고 동시에 혁명의 희생물로 처형해야 했던 옛 세력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가능한 한 도와주려고 하는 인덕 있는 지도자는 더더욱 드뭅니다. 측천 특유의 괴랄한 인덕을 잘 나타내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지요. 고종이 살아있었을 때 측천을 두려워해서 재상 상관의와 모의해서 그녀를 암살하려고 했는데 황궁 곳곳에 심어놓은 측천의 밀정들에게 발각되어서 격노한 측천이 황제 앞에서 이게 대체 누구 죄냐고 따집니다. 겁에 질린 황제가 모든 일은 상관의의 간계일 뿐 자기는 모른다고 잡아뗐고, 상관의와 그 가족 전체가 몰살되었는데 단지 당시 아직 젖도 떼지 않았던 여자 갓난아기만은 살려서 궁궐에서 키우라고 명합니다. 측천의 보호와 교육 속에서 어여쁘고 재능이 넘치는 소녀로 자라난 열세살의 상관완아, 어느 날 측천이 완아를 대전으로 불러서 "너는 너의 가족들을 전부 몰살시킨 나를 증오하느냐"라고 물어봅니다. "미워하면 불충이고 미워하지 않으면 불효가 됩니다" 라고 완아가 답했다지요. 반항하면 볼기라도 좀 때릴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상했던 이상의 현명하고 사려깊은 답을 듣고 대만족한 측천, "황제의 정의를 의심하는 죄는 묵과할 수 없다" 라고 말하면서 완아의 한 쪽 뺨에 죄를 지었다는 표시로 아주 작은 연꽃 하나를 문신으로 그려 넣도록 형벌을 내리는 데 부끄러움에 얼굴을 빨갛게 하고 고개를 숙이며 걷는 완아가 얼마나 어여뻤는지 도성 여인들 사이에서 한 쪽 뺨에 연꽃 문신을 새겨 넣는 게 크게 유행했다고 합니다. 측천에게 있어서 자기 딸인 태평공주와 함께 상관완아는 자신의 심중을 가장 잘 헤아리는 최측근이자 자신의 성취를 대변하는 자랑거리였지요. 당나라 시대를 그리는 중국 드라마들을 보자면 다들 하나같이 "무측천 만세! 상관완아 만만세!! 태평공주 만만만세!!!" 일색이라는데 장점만 부각하고 단점은 변명하는 심한 역사왜곡을 보여준다고 하지만 어쨋든 흥미있는 인물들이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으음, 써놓고 보니 의외로 포르투갈 후안 왕 또한 무측천하고 비슷한 면모가 많은 듯 보이네요. 이사벨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서 그녀는 아무리 궁궐 밖에서 평민들과 함께 지냈어도 어쨋든 호칭부터가 왕녀였고 후계자였으니 무측천처럼 마음에 맺힌 게 상대적으로 적어서 훨씬 더 고지식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과거 어려움을 잊지않고 공명 정대한 정치를 펴는 한편에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경쟁자들 또한 기억한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사벨의 어머니하고 딸 후아나가 정신병에 걸린 이유이기도 한데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인정받고 활용하지 못하면 거의 미쳐버리는 성격이라는 면도 비슷하고요. 카스티야 전쟁을 끝으로 왕권은 확고해졌지만 이사벨의 마음 속에는 계속 의문이 남았습니다. 비슷한 처지였던 조카 후아나를 수녀원에 유폐시키고 대신 자신이 권좌에 올라야 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째서 자신은 주변 나라들까지 개입한 내전을 통해 카스티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수많은 인명의 죽음을 명령해야만 했는가. 졸렬한 군주였다면 불륜을 통한 사생아는 인정할 수 없으니 당연한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해서 싸웠을 뿐이고 이제 목표를 달성했다 정도로 끝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스스로에게 너무 정직한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재임 중에 꼭 달성해야 할 역사적 사명을 생각합니다. 그래야만이 이 모든 희생을 통해서 자신을 여왕으로 선택해 주신 하나님한테 떳떳하게 고개를 들수 있을 테니까요. 어째서 카스티야 사람들은 마음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이렇게 지방 영주들끼리 서로 불신하며 반목하는 것인가? 다 같이 기독교를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고 함께하지 못한다면 이상한 일이 아닌가? 아니 겉으로는 다들 기독교인들이라고 해도 각 나라들 안에 있는 이슬람 교도들을 경제적 이유 때문에 허용하고 활용하면서 우리들 또한 그들의 악한 생각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백오십년이 넘는 긴 역사에 걸쳐 조공을 받기 위해서 내버려 둔 무슬림의 그라나다야 말로 신이 타락한 카스티야를 징벌하신 그 죄악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난 내전으로 피폐해진 재정을 무시하고 카스티야 정신의 정화를 위해 십년 간에 걸친 그라나다 정복을 시작합니다. 여왕이 전국을 돌면서 지방 영주들의 협조를 받아 군수품들을 수송하고 전장에 방문해서 황야에서 무릎 꿇고 병사들의 축복을 기도하는 성전입니다. 민족의 고유 영토라는 신화는 물론이고 통일이라는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인들은 이사벨에 대해 평가하면서 그라나다를 함락시켜서 에스파니아 통일을 이루어낸 업적을 널리 칭송하면서도 이단 재판소 설치나 신대륙에서의 원주민 문화 파괴에 대해서는 잘못된 정책이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필자 관점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게 그 세가지 과제는 에스파니아 영토에서 이교도들과 이단들을 개종 내지는 추방시키거나 처형했다는 면에서 똑같거든요. 무어인들이 스페인으로 와서 살게 된 지가 칠백년인데 그들을 정복해서 개종을 강요하거나 해외로 모조리 추방시킨다는 것을 통일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겁니다. 당시 그라나다에서 카스티야와의 '통일' 을 반긴 사람은 아마 거의 없었겠죠. 그렇다고 이사벨이 침략과 지배를 통일로 미화한 것이냐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세계 만민을 그릇된 악습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참된 믿음을 전파해서 그들이 진정한 카톨릭 제국 에스파니아의 일원으로서 행복하게 살도록 보장해 주겠다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으니까요. 선교사들의 인도를 통해서 개종하면 피부색이나 출신 등에 상관없이 에스파니아 영토 내에서 재산 인정되고 보호받으며 살 수 있으니까 문제가 없다는 거죠. 분열된 국가에서 내전을 거치면서 살아온 그녀에게는 종교가 다른 연합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거짓이고 야합일 뿐입니다. 그녀는 민족이나 경제 이권을 초월해서 단지 하나의 신앙과 위대한 지도자의 영도력만으로 제국 만민이 단결할 수 있다는 신화를 믿었습니다. 어떻게 보자면 이사벨도 의외로 담덕왕스러운 측면이 없지 않지요.
그리고 이사벨 마음 속에서 포르투갈은 그라나다만큼이나 큰 문제였습니다. 단지 지난 내전에서 맞섰다거나 해외 식민지 경쟁의 이권이 걸렸다거나 하는 민족 대립이 아니라 이제까지의 포르투갈의 정책, 특히 새로 집권한 후안 왕의 계획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념문제입니다. 훗날 거짓으로 기독교도인 것 처럼 가장하며 계속 카스티야에서 살아 온 유태인이나 이슬람 교도들 입 속에 돼지고기를 쑤셔 넣도록 명령한 그녀였으니 유태인학자들과 아랍인 항해사들을 초빙해서 함께 상의한다는 불경은 그녀 입장에서는 상상도 못할 죄악입니다. (그래서 유태인들을 경멸하는 뜻으로 돼지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돼지니까 같은 동족을 잡아 먹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어찌 노예 무역을 '개종'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할 수 있는지, 이렇게 카톨릭의 이름을 모욕하는 포르투갈이 인도까지 이르고 세계를 지배하도록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구경만 하면 그녀의 자존심이 상처받습니다. 브라간사 공작을 통해서 보수적인 포르투갈 귀족들을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또 거의 바닥난 금고로 그라나다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막강한 후안 왕을 더이상 어찌하지는 못하고 때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죠. 마음 같아서는 바로 그라나다 성채까지 진격을 명해서 전쟁을 끝낸 후에 함대를 보내 해외에서 포르투갈의 잘못된 통치를 종결짓고 싶지만 전국민들의 사기가 걸린 중요한 성전인 만큼 조바심 내지 말고 외곽의 마을 하나 성채 하나씩 야금야금 점령하고 피로한 병사들도 충분히 쉴 수 있게 해서 사상자나 군비지출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그 동안 그라나다 내 여러 이슬람 세력들을 이간시키고 각자 고립되도록 유도해서 천천히 틈을 노려야 합니다. 근데 그라나다 함락 때까지만 참자고 그렇게 마음 먹었지만 과연 이사벨이 그라나다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어도 원양 개척에서 포르투갈을 이길 수 있었을까요? 이단의 포르투갈이 아니라 좀더 순수한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한 아라곤의 해군력을 이사벨은 원해서 선택했지만 잔잔한 지중해 안쪽만을 돌아다녔던 아라곤의 함대가 카스티야 해군력하고 힘을 합쳐도 지난 카스티야 계승 전쟁에서 거친 대서양을 누빈 포르투갈의 함대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게다가 후안 왕 대에 이르러 포르투갈 함대는 그 규묘와 정보력에 있어서 수 배로 강화되어서 도대체 그 역량이 어느 정도나 되는 지 카스티야에서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격차가 벌어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포르투갈 사람들도 자각하게 된 것이지만 애초에 유태인들하고 무슬림들 도움 없이 인도까지 가겠다는 생각 자체가 당시로서는 억지죠. 근데 그 억지를 가능하게 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바로 콜론입니다. 이사벨 입장에서는 콜론이 스스로를 일컬었던 것처럼 혹시 자신의 열망에 화답해서 하나님이 새 기독교의 시대를 열 사자를 보내신 게 아닌가 가슴이 두근거렸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악마의 하수인과도 같은 녀석이 신의 사자 대접을 받게 되어 버렸던 거죠.
드디어 그라나다가 함락되고 그 해 바로 함선들을 얻은 콜론은 카리브 제도를 발견한 후 세비야로 오는 길에 포르투갈 함대의 정선 명령을 받고 리스본에 들러 후안 왕을 다시 회견합니다. 그 회견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후안 왕은 콜론이 세비야로 돌아가서 이사벨을 접견하기도 전에 카스티야를 향해 서찰을 써서 인디아는 포르투갈 땅이니까 함대를 보낼테니 저항하지 말고 그냥 포기하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물론 후안은 당시 콜론이 발견한 땅이 인디아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데 단지 협상 테이블에서 더 좋은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서 공갈을 쳤던 거죠. 아라곤 출신의 매독돼지 교황 율리우스가 인디아는 스페인의 땅이라고 선포했지만 물론 후안이 그 말을 귀담아 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도 터키도 전혀 두렵지 않다던 측천 이사벨 또한 평생 숙적이었던 담덕 후안의 공갈에는 정말로 움찔합니다. 콜론이 세비야에 도착해서 여왕한테 약속했던 금은 내 놓지 못하고 자기가 잡아 온 '인디안' 원주민들을 보여주는데 콜론은 유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힘없는 원주민들을 보면서 "이거 노예 장사로 한 몫 잡을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이사벨은 어리숙한 표정으로 화려한 궁전을 큰 눈 뜨고 둘러보는 원주민들을 보면서 "오 주여! 사악한 이단에 때묻지 않은 이 순수한 양들을 제게 맡기셨나이까!" 라고 환호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동상이몽이었죠. 그리고 신대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단지 텅빈 재정을 메꾸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던 카스티야의 관료들은 "어째서 황금의 땅 지팡그에 도달했는데 약속한 금을 가지고 오지 못했냐?" 라고 콜론을 추궁합니다. 이렇게 세계를 모르고 서로를 잘 몰랐으니 당시 카스티야가 원양 식민지 경쟁에서 포르투갈의 밥이 될 수 밖에 없죠. 여담인데 사실은 콜론이 후안한테서 퇴짜 맞은 게 아니라 후안의 밀정으로 고용되어 포르투갈이 경쟁 없이 인도 항로 개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카스티야의 관심을 신대륙으로 돌리는 역할을 맡았다는 학설을 최근 어떤 학자가 제기해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자기 최고에 욕심이 끝없는 콜론의 성격에 그게 가능했을까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이 학설 또한 당시 포르투갈이 원양 개척 정보에 있어서 카스티야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우월했고 또한 카스티야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포르투갈의 대양 헤게모니를 위협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어쨋든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설령 신대륙의 아스텍이나 잉카를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자국의 군사력으로 도저히 정복 통치가 불가능했으니 제발 콜론이 카스티야로 가서 카스티야의 관심을 인도에 비해서 교역 가치가 별로 없었던 신대륙 쪽으로 돌렸으면 싶었을텐데 그 바램은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후안 왕이 편지를 통해 함대를 보내겠다고 공갈 쳐서 카스티야 사람들이 정말로 신대륙에 인디아스가 있다고 착각하도록 하면 되는데 이 또한 쉽게 낚였습니다. 그리고 그게 더더욱 쉬웠던 게 이사벨의 입장에서는 수백년간 고집스럽게 이슬람과 힌도교를 믿어 온 이단 잡신들의 소굴 인디아스보다는 차라리 주민들 문명 발전의 정도가 낮은 신대륙이 꿈에 그리던 선교 제국을 위해서 오히려 더 바람직했으니까요. 그리고 에스파니아 입장에서는 신대륙이 인디아스라고 착각하고 있어야 지방 귀족들의 벤처 자금이 해양으로 몰려서 항해술이 발달할 수 있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속아줘야 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서아프리카 맞은 편의 브라질하고 북아메리카 세인트로렌스 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뉴펀들랜드만 얻어내면 대만족이었는데 에스파니아가 카리브 제도를 인디아스의 일부라고 착각하는 상황에서 원하는 땅까지의 경선을 양보받는 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진실이 밝혀지기 전에 빨리 합의를 이뤄야 할 양쪽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콜론의 회항 직후 채결된 1494년의 토르데시아스 조약입니다.
토르데시아스 조약 채결을 전후로 해서 포르투갈에서는 많은 정치적 재앙이 있었습니다. 카스티야 계승 전쟁을 종결지으면서 체결했던 옛 조약에 따르자면 포르투갈의 황태자와 카스티야-아라곤 통합 왕국의 황태녀가 결혼해서 훗날 범 이베리아 연합왕국을 이룬다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훗날 새로운 왕 후안이 폭군 통치와 함께 이교도들을 국정에 참여시키는 꼴을 보니까 포르투갈하고 통일하면 그 악행에 에스파니아 또한 함께 휘말려들어서 신의 진노를 사지 않을까 두렵다고 이사벨은 몸을 부르르 떱니다. 온갖 외교적 방법을 통해서 이 약혼을 파기하려고 하는데 포르투갈의 장남 알폰소하고 에스파니아의 장녀 이사벨이 처음 만나자마자 한눈에 반해서 도저히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던 중 둘 사이의 결혼을 앞두고 1491 년에 알폰소가 포르투갈하고 에스파니아 국경의 강가에서 말을 타다가 낙마해서 죽게 되지요. 왕자가 어릴 적부터 승마에 뛰어났던 점이라던가 사망 직후 카스티야 출신의 경호원 한 명이 사라졌다던가하는 정황을 미루어보자면 역시 살인이 아직 유력한데 증거가 없습니다. 후안 왕은 알폰소 외에 부인하고 사이에서 다른 소생이 없었고 단지 수도원에 유폐되어 있던 후아나 공주의 시녀하고 사이에서 호르헤라는 사생아가 있었을 뿐, 호르헤를 다음 후계자로 올리려고 노력했지만 "우리들도 다 왕족인데 어째서 당신 사생아가 다음 왕에 오르냐"는 귀족들의 항의에 결국 희망을 접고 곧 자기 사촌이자 처남이었던 마누엘을 불러서 다음 왕위에 앉힙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495년에 후안 왕이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는데 일각에서는 독살되었다고 하지요. 새로 등극한 마누엘 왕은 이웃의 강대국인 에스파니아와의 화친을 위해서 죽은 알폰소가 결혼하고자 했던 이사벨을 내어달라고 그 어머니 이사벨한테 부탁하지만 이사벨 여왕은 포르투갈이 유태인들을 추방시키기 전에는 절대로 두 나라 사이에 혼인은 없을 거라고 못을 박습니다.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 베아트리스와 누나 레오놀 아래에서 자라난 마누엘, 이베리아의 종교를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 대의에는 동감하지만 그래도 유태인 인재들은 아깝더라는 거죠. 두 나라 사이의 혼인과 유태인 추방을 발표하는 마누엘, 하지만 전국의 유태인들은 리스본에 와서 왕이 지정하는 배를 타야 한다고 그렇게 명을 내립니다. 리스본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는 유태인들에게 군인들과 선교사들이 와서 설득과 강제를 병행하며 우격다짐으로 세례를 줘서 결국 한명도 배를 타지 못하고 말지요. '개종된' 유태인들에게는 기독교 문화를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삼십년 기한으로 이들의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심문당하지 않을 유예기한이 주어졌는데 이 날 이후로 포르투갈에는 '공식적으로' 단 한명의 유태인도 남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마누엘다운 지혜입니다.
에스파니아와의 화친으로 이제 무서워질 게 없어진 포르투갈,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서 돌아오는 1488년에 '공식적으로' 뉴펀들랜드를 탐사하고 그 다음 해 두번째 인도 항해에서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이 '해류를 잘못 타서 우연히' 브라질 해안에 상륙하지요. 1497년에 영국 왕실이 존 캐벗을 후원해서 '처음으로' 뉴펀들랜드를 발견하고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물론 무시하고 1500년에 뉴펀들랜드에 식민지를 세우지요. 아메리카 대륙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섬이고 또한 아조레스에 아주 가까워서 교역이나 방어 모든 면에서 포르투갈에 유익하다고 생각되었지만 래브라도 한류가 내려오는 뉴펀들랜드는 잉글랜드보다도 더 추워서 농사가 안되고 생선 밖에 얻을 수 없었기에 따뜻한 기후에서 살던 포르투갈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고 "에이, 이 섬은 하루종일 물고기만 먹는 잉글 해적들한테나 어울리겠다!" 라면서 GG 칩니다. 브라질은 인도 항로 개척 때문에 거의 방기되어 있었는데 1530년대에 프랑스 신교도들이 리우에 가서 식민지를 세우고 포르투갈의 아성에 도전합니다. 리우의 프랑스 식민지를 궤멸시키고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어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포르투갈어 사용자들이 브라질에 살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