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시대 온라인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고찰
런던 London
다들 아시다시피 영국의 수도이고,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또, 제가 소속되어 있는 길드인 "스핏파이어(Spitfire)"(아폴론 서버)의 소재지이기도 하므로, 런던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레스터 백작(Earl of Leicester, Robert Dudley)
런던의 왕궁 안에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탄도학을 가르치는데, 실은 탄도학 등 군사전술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인물이라 다소 의문입니다. 물론 의약품 거래와도 전혀 무관한 인물입니다.
본명은 로버트 더들리이며, 레스터 백작은 당연히 작위를 칭하는 것입니다.
더들리 가문은 헨리 7세 시절부터 부상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에드먼드 더들리가 헨리 7세 시절에 대신을 지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드먼드 더들리는 봉토세를 탈세하였을 때 내야 하는 벌금과 관련하여, 지방 귀족들과 첨예하게 대립하였습니다. 그렇기에 헨리 7세의 뒤를 이어 헨리 8세가 즉위하게 되자, 헨리 8세는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보려는 속셈에서 에드먼드 더들리를 반역죄로 기소하여 처형해 버렸습니다.
왕권의 강화와 통치의 안정을 위해서는 처형을 서슴지 않은 헨리 8세다운 면모입니다.
에드먼드 더들리가 반역죄로 처형되자 더들리 가문은 몰락했는데, 이 때 에드먼드 더들리의 아들 존 더들리는 불과 8세였습니다. 존 더들리는 성장하여 해군 제독이 되었는데, 칼레항에 대한(당시는 영국령이었음) 프랑스의 공세를 막아낸 공로로 라일 자작의 작위를 받아 다시 가문을 귀족 가문으로 일으켜 세우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어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에 대한 공세 작전에서 연이어 공을 세워 워릭 백작으로 승작되었는데, 자신의 아버지를 무참히 처형한 헨리 8세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증오의 감정을 함께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존 더들리는 헨리 8세의 재위 시절에는 한번도 왕권을 거스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특히 국교 개혁의 혼란 와중에서 영국 국교회(성공회)에 대한 단호한 지지자로 활동하며 수도원 해체를 진두지휘했습니다. 이 때 로마 카톨릭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많은 부분을 횡령하였다는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헨리 8세가 죽자, 워릭 백작 존 더들리는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병약한 에드워드 6세를 대신하여 국정의 전면에 나섰습니다. 스스로의 작위를 노섬벌랜드 공작으로 높이면서 정치적 반대파를 무참하게 탄압하는 한편, 병약한 에드워드 6세를 기망, 협박하여 왕권 탈취를 기도하였습니다. 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처형한 헨리 8세에 대한 증오심이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에 대한 감정으로 나타났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에드워드 6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 분명해지자,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는 자신의 아들 길버트 더들리를 왕실의 먼 친척(헨리 7세의 증손녀뻘에 해당)인 레이디 제인 그레이와 결혼시킨 후, 에드워드 6세를 협박하여 그의 사후, 왕위를 레이디 제인 그레이에게 계승하게 한다는 유언을 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에드워드 6세가 15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하자,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는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영국의 여왕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이로써, 그의 아들 길버트 더들리는 "여왕의 부군"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들이 영국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이러한 왕위 탈취를 용납하지 않은 런던 시민들은 추밀원 의원들의 지휘 하에 일제히 반란을 시작하여, 9일만에 노섬벌랜드 일파들은 백기 투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피의 메리"로 불리는 헨리 8세의 장녀 메리 튜더이며,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와 "9일의 여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된 레이디 제인 그레이, 그리고 그녀와 결혼한 길버트 더들리는 모두 반역죄로 처형되었습니다.
불과 세 명의 왕이 바뀌는 동안 가문이 이렇게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당주가 두 명이나 연이어 반역죄로 처형되었다면 집안이 그만 풍비박산이 날 법도 한데, 더들리 가문은 다시 살아납니다. 더들리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바로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입니다.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의 다섯째 아들인 로버트 더들리는 "9일의 여왕" 반역 사건 때 역시 연좌되어 런던 탑에 유폐되었으나, 이듬해 석방되었으며 프랑스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에서 복무할 것이 명령되었습니다.
로버트 더들리는 영국의 새로운 여왕으로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면서 갑자기 앞길이 열리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에드워드 6세 시절 존 더들리의 당당한 위세 아래 왕실을 무시로 출입하던 로버트 더들리와 당시 왕의 여동생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가 연인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즉위하자마자 로버트 더들리를 거마 관리관으로 임명하여 궁정으로 불러들였으며, 이듬해에는 추밀원 고문에 임명하고 기사 작위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로버트 더들리는 여왕의 총애를 믿고 궁정에서 거만함으로 일관하여 사람들을 턱으로 부렸으므로 궁정과 귀족들 사이에서의 평판은 최악이었습니다. 게다가 추밀원 고문으로 임명된 그 이듬해에는 부인과 사별했는데, 이 때 여왕과 결혼하기 위하여 자기 부인을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온 런던에 퍼졌으므로 평민들 사이에서도 그 평판은 최악으로 내려앉게 되었습니다.
런던의 상인 퀘스트로 이와 관련된 정보 수집 퀘스트가 등장하기도 하니, 흥미 있는 분들은 한 번 수행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그 퀘스트에서 로버트 더들리가 보여주는 자세와는 달리, 실제 역사에서 로버트 더들리는 마치 부인이 죽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부인이 죽자마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적극적으로 구혼하면서, 사람들에게는 마치 결혼이 확정되기라도 했다는 듯이 떠들고 다녀 그 자신의 평판을 더욱 나쁘게 만들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사려 깊은 통치자였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개인적인 사랑 문제야 어찌되었건간에 궁정, 귀족, 평민을 할 것 없이 평판이 최악인 로버트 더들리와 결혼했다가는 여왕 자신의 평판까지 동반 하락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로버트 더들리에게 당시 영국으로 망명해 온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와 결혼할 것을 제안하면서 격을 맞춰주기 위하여 1564년 로버트 더들리를 레스터 백작(겸 덴비 남작)으로 봉합니다. 더들리 가문은 다시 한번 귀족 가문으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 것이니, 참으로 놀라운 생명력이라 아니 말할 수 없습니다.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는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신과 결혼하지 않을 생각임이 분명해지자, "여왕의 부군"이라는 자리가 무산된 것에 실망하여 이후로는 방탕한 생활을 하고 돌아다닙니다. 셰필드 경의 미망인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가 하면, 에식스 백작의 미망인과 "비밀 결혼"을 단행하여 세상을 놀라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도 어처구니 없게도 "청교도"를 자처했던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는 에스파니아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국내 카톨릭교도 탄압을 진두지휘하며 상당한 권력을 휘둘렀는데 이 때문에 1584년에는 "레스터의 공화국"이라는, 그를 비판하는 익명의 소책자까지 출간되기까지 했습니다.
1585년 네덜란드의 반란이 파르네세 공작의 압살 정책에 의하여 위기에 처하자, 엘리자베스 1세는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6,000 명의 지원군을 보내면서 자신의 총신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기 위하여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군사적으로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그의 아버지 존 더들리와는 달리 군사적으로도 무능했을 뿐더러, 그에게 기대되는 정치적 역할을 해내지도 못했습니다.
레스터 백작은 네덜란드에 도착해서도, 마치 런던 궁정에서와 같은 자세로 네덜란드인들을 거만하게 대하였으므로 영국은 네덜란드에 지원군을 보냈으면서도 오히려 네덜란드의 반감을 사게 되는 사태까지 초래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1587년 엘리자베스 1세는 결국 레스터 백작을 본국으로 소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신 레스터 백작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했던 엘리자베스 1세는 1588년 에스파니아와의 운명적 전쟁이 눈앞으로 다가온 시기에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를 무적함대에 대항하는 영국 함대의 부사령관으로 임명했으나, 그는 임지로 부임하기 전에 집에서 급사하였습니다.
그의 군사적 무능을 감안해 볼 때, 그가 집에서 죽은 것은 영국에게는 축복으로, 만일 그가 임지로 갔더라면 무적함대에 패배했을지도 모른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정도로 레스터 백작은 끝까지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서식스 백작(3rd Earl of Sussex, Thomas Radcliffe)
역시 런던의 왕궁 안에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런던에서의 투자를 관장하고 있습니다. 아폴론 서버의 영국인들이 더욱 분발하여, 이 분을 자주 만나서 이제 아폴론 서버에서도 프류트 좀 보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본명은 토머스 래드클리프이며, 서식스 백작 가문은 유서 깊은 귀족 가문으로 그는 서식스 백작 2세 헨리의 맏아들으로서, 백작의 장자가 관례상 받게 되는 피츠월터 자작 작위를 거친 후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하여 서식스 백작 3세가 되었습니다.
그가 정부에 봉직하면서 세운 공로는 주로 아일랜드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는 아일랜드 총독으로 근무하면서 더블린 지역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을 확고하게 하였습니다.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더블린이 영국의 동맹항으로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서식스 백작에게 감사하여야 합니다.
아일랜드 총독에서 물러난 후에는 궁정으로 복귀하여, 엘리자베스 1세의 총신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에 대항하여 귀족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즉, 대항해시대 온라인상에서 언제나 사이좋게 나란히 서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레스터 백작과 서식스 백작은 실은 정적 사이가 됩니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대항해시대 온라인상에서는 에스파니아어와 겔트어를 가르치기 때문에, 북대서양 입항허가서를 얻게 된 후의 영국인들이 꼭 한번은 들러서 가르침을 사사받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인도와 바꾸지 않는다"라는 공언까지 들은 영국의 대문호로서, 유감스럽게도 1564년에 출생하였습니다. 이것이 왜 유감스러운가 하면, 1564년은 위에서 언급하였다시피 로버트 더들리가 레스터 백작으로 봉해진 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의 배경 연도는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서식스 백작 3세 토머스가 아일랜드 총독에서 물러나 궁정으로 복귀한 1566년을 배경 연도로 생각한다면, 영국 제독들은 두 살의 아이에게 에스파니아어를 배우는 셈이 됩니다.
1592년경에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극작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는데, 그 급격한 인기를 시기하여 원로 극작가 로버트 그린이 죽음의 병석에서 쓴 소책자에서 명백히 그를 가리키며 비방하는 구절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소책자가 출간되면서 그 서문에서 출판인이 셰익스피어에 대한 사과를 덧붙이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셰익스피어의 명망이 이미 평생을 극작계에서 보낸 그린을 능가하고 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후 평생을 극작계에서 보내며 매년 2편씩을 꾸준히 써나갔는데, 그 일생은 극작만을 위해 헌신한 일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작품 말고는 특별히 살필만한 것이 없습니다. 작품에 대하여 논하는 것은 이 글에서 다룰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날 뿐더러, 감히 짧은 글에서 다룰만한 성격의 것도 아니므로 생략합니다.
존 디(John Dee)
상인 퀘스트에서는 학자로 지칭되지만, 실은 무어라 직업을 칭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묘한 인물입니다. 그에 관하여 서술한 대개의 책자에서는 존 디를 연금술사, 마술사, 점성술사, 수학자 등 다양한 직업으로 소개합니다.
일찌기 젊은 시절에 대륙에 유학하고 돌아와서 점성술사를 칭하며 당시 미신에 깊이 빠져 있던 "피의 메리" 메리 1세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궁정의 어용 점성술사가 된 후, 정권교체기에 어용 마법사라는 이유로 구금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하였으나, 새로운 여왕 엘리자베스 1세 역시 미신에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화려하게 재기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별자리를 보는데 정통해 있었으므로 실제에 있어서도, 원양항해에 나서는 항해사들에게 많은 교육과 충고를 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후에는 수학에 관심을 가져 맨체스터 단과대학의 학장으로 임명되기도 하였습니다.
리스본 Lisbon
브라간사 공작 Duke of Braganca
포르투갈의 국왕이었던 주앙 1세의 서자 알퐁소가 브라간사 공작으로 봉하여짐으로써 브라간사 공작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브라간사 공작가의 세력은 막강하게 성장하여 한때는 왕권을 공공연히 위협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2세는 즉위한 후, 브라간사 공작가와의 전면전에 나서 마침내 브라간사 공작을 반역죄로 몰아 처형하고 그 영지도 모두 몰수하여 브라간사 공작가는 완전히 몰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 이벤트의 진행상(도중에 바스코 다 가마 제독이 인도에서 후추를 싣고 돌아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1498~1499년경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영국의 배경 스토리와 서로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결국 대항해시대 온라인의 배경 연도는 나라마다 다르다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생각되는 마누엘 1세가 즉위하자, 브라간사 공작가는 복권되어 브라간사 공작은 화려하게 국정의 전면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브라간사 공작이 당당하게 리스본의 궁정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1580년에 이르면 포르투갈의 왕가가 단절되는데, 에스파니아의 국왕 펠리페 2세는 이 때를 기회삼아 어처구니 없는 이유를 내세우면서(그 자신은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포르투갈의 왕위 계승을 주장하여 포르투갈이 에스파니아와 합병되기에 이릅니다(대항해시대4 중 이 이벤트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1640년에는 에스파니아와 신성로마제국의 지배자 합스부르크 가문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포르투갈은 다시 독립하게 되는데, 이 때 단절된 전 왕가를 대신하여 브라간사 공작 8세 주앙이 포르투갈 국왕 주앙 4세로서 즉위하게 됩니다. 결국 브라간사 공작가는 포르투갈의 왕가가 되는 것입니다.
디아스(Bartolomeu Dias)
바르톨로뮤 디아스, 포르투갈의 대항해사이며 탐험가이고 모험가입니다.
희망봉을 최초로 발견한 유럽인으로서 15세기 포르투갈의 대서양 탐험의 성과를 집대성한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5세기 포르투갈의 대서양 탐험은 질 아이네스 제독의 보자도르 곶 돌파(수많은 암초가 깔려 있어 아이네스 제독 이전에는 아무도 이 곶을 통과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섬에서는 반드시 배가 난파한다는 선원들 사이의 미신까지 형성되어 있어 지극히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아이네스 제독이 돌파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디니스 디아스 제독의 카보베르데 개척 등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이후 1481년 주앙 2세가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하자, 디오고 캉이 등장하여 화려한 시대를 이끕니다. 캉 제독은 콩고만에 도착하여 그곳이 포르투갈 왕국령임을 선언하는 "디오고의 석주"를 세웠으며, 이후 두 차례 더 이 지역을 남하하여 항해하면서 남위 22도 지점인 크로스 곶까지 항해하였습니다.
캉이 이 지역까지 항해한 것은 그가 세운 석주로서 확인되고 있지만, 이후 그는 연락이 끊겨 그와 그의 후원자였던 주앙 2세의 소망이던 인도양 도달을 이뤄내는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대항해시대 온라인의 제독들은 최소한 항해에 나섰다가 이처럼 소식도 전해지지 않은채 영영 사라져 버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하여야 하겠습니다(리가에 들어갔다가 완전히 봉쇄되어 캐릭터를 다시 키우는 수밖에 없었다는 어떤 분은 예외).
어찌되었건 디오고 캉의 생사가 불분명해지자 주앙 2세는 바르톨로뮤 디아스에게 인도양 항로 개척의 임무를 맡겼습니다. 때마침 콩고 왕국의 국왕으로부터 사절이 도착하여, 프레스터 존 왕국에 대한 전언을 하여 유럽을 흥분시키는 일까지 발생하여 인도양 항로 개척은 캉의 생사를 확인할 때까지 한가롭게 미룰 수 있는 일이 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프레스터 존 왕국에 관하여는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김호동 교수님께서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이라는 제목으로 이에 관한 책을 한 권 내셨을 정도로, 단순한 헛소문이 아니라 그 내막이 상당히 복잡하니 이 글에서 다룰 수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프레스터 존 왕국은 지금 대항해시대 온라인을 함께 플레이하시는 "10년을 기다려 온" 수많은 올드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불후의 명작 대항해시대2 의 전편을 관통하는 메인 테마인만큼 관심이 있으신 분은 위에 소개한 책을 한 번 일독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주앙 2세의 명을 받은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기함 "상크리스토방"호(일전에 보니 자신의 배에 이 이름을 붙여신 분이 있더군요. 참으로 역사적 교양이 풍부하신 분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외 2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항해에 나섰습니다. 그가 항해에 나선 일자에 관해서는 기록이 엇갈리고 있는데 16세기의 전기작가이며 역사가인 주앙 데 바루스는 1486년 8월을 출항일로, 그가 16개월 17일 동안 포르투갈을 떠나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당대의 다른 항해사인 두아르테 파체코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등은 1488년 12월을 디아스 제독의 귀환 일자로 기록하고 있어 서로 계산이 맞지 않습니다.
어쨋든 디아스 제독은 과거 디오고 캉이 세웠던 석주들을 확인하며 남행 항해를 계속하였으나, 1488년 1월 6일에는 폭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대항해시대 온라인과 달리 폭풍을 만나면 돛을 내리고 가만히 서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어서, 폭풍에 육지로 밀려 가게 되면 바로 좌초, 난파하게 되는 것이므로 디아스 제독은 부득불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며칠동안 육지를 보지 못하고 남쪽으로 항해한 결과, 육지가 나타나지 않아 선원들은 불안해 하게 되었습니다. 디아스 제독도 이틀 후에는 뱃머리를 서쪽으로 돌렸으나 그래도 육지가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다시 뱃머리를 북쪽으로 돌린 후인 2월 3일에야 비로소 육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즉, 디아스 제독은 "희망봉"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 내려간 후, 돌아와서야 비로소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희망봉"이라는 이름을 누가 명명했는가에 관해서도 기록이 엇갈리고 있는데, 역사가 주앙 데 바루스는 당초 디아스 제독은 폭풍 끝에 이 곶을 발견하였다 하여 "폭풍의 곶"이라 명명하였으나, 국왕 주앙 2세가 항해사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희망봉"으로 고쳐 이름 붙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견해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동료 항해사 두아르테 파첸코는 디아스 자신이 "희망봉"이라고 명명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어느 쪽이 진실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디아스 제독이 돌아온 후, 그 항해에 관한 보고를 들은 주앙 2세는 인도양으로 돌아나갈 수 있는 계기를 발견한 것에 대한 기쁨보다는 오히려 실망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프리카가 생각보다 훨씬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너무 가는 길이 험난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아프리카가 그렇게 클 줄이야... 그 큰 아프리카를 언제 돌아서 인도로 간단 말이냐..."라는 말에서 주앙 2세의 심중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당초 포르투갈에서는 아프리카의 남쪽 끝이 지금의 콩고 정도라면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한 후, 오히려 항해에 대한 의욕은 시들해져서 인도양 항로는 무려 9년 후인 1497년 마누엘 1세가 바스코 다 가마 제독의 항해를 허락할 때까지 침체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가마 제독이 인도에서 후추를 싣고 돌아오자, 포르투갈은 흥분에 휩싸였으며 인도에 대하여 강한 인상을 심어주어 아랍인을 몰아내고 통상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12척의 대함대가 구성되기에 이릅니다. 이 때 디아스 제독도 1척의 함선을 지휘하게 됩니다. 카브랄이 총지휘를 맡은 이 함대는 애초에 아프리카를 해안을 따라 돌아갈 것이 아니라, 서아프리카에서 희망봉 부근까지 직행하기 위한 대담한 시도를 하였는데 이것이 잘못되어 지금의 브라질 부근까지 가게 됩니다. 이 때 카브랄이 리우데자네이로를 발견한 것은 유명한데, 이 함대에 디아스도 속해 있었으므로 디아스 또한 브라질의 발견에 참여한 셈이 됩니다.
카브랄의 함대가 항로를 바로잡아 희망봉 부근을 통과할 때에 디아스가 지휘하는 함선은 실종되고 맙니다. 호사가들은 디아스가 애초에 희망봉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그 해상 부근에서 결국 사망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빌리아 Sevilla
대항해시대2 에서는 세빌리아라고 번역되었으며, 그 이후의 작품에서는 세비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외국지명 표기 조례에 따르면 세비야 쪽이 옳은 표기라고 합니다.
타베라 추기경
타베라 추기경은 에스파니아의 유명한 인문주의자이자 에스파니아의 르네상스 후원자이기도 합니다. 펠리페 2세의 궁정에서 유일하게 치열한 당파싸움과 거리를 두고 있었던 타베라 추기경은 에스파니아의 르네상스기 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는 조각가 알롱소 베루게테를 후원했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지금도 에스파니아의 톨레도에는 그가 설립을 지시하여 그의 직함을 따서 설립된 타베라 병원이 있습니다. 그가 죽은 후, 조각가 알롱소 베루게테는 그의 묘비를 만들던 중 슬픔으로 함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엘 그레코(El Greco)
국내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매우 유명한 에스파니아 미술의 거장 중의 거장입니다.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입니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그리이스인은 그는 크레타 섬의 간디아(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도 등장하는 항구)에서 태어나 자동적으로 베네치아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었으며(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도 베네치아의 동맹항), 이후 베네치아로 유학하여 미술을 배웠습니다.
당시 베네치아는 쇠퇴하고 있었으므로, 베네치아에서 당대 가장 위대한 화가였던 티치아노는 이 전도유명한 청년 화가를 위하여 에스파니아의 파르네세 공작에게 편지를 보내어 후원을 부탁하였습니다.
이런 경로로 에스파니아에 오게 된 그는 곧 '엘 그레코'(에스파니아어로 '그리이스인'이라는 뜻)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엘 그레코는 남은 평생을 톨레도에서 활동하며 당대 르네상스기의 다른 위대한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성당의 그림에서 위대한 업적들을 남겼습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기 화가들(예를 들면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이 당대 이탈리아 최고의 권력자 교황과 삐꺽거리면서도 끊임없이 관계를 유지한데 반하여, 이 에스파니아의 위대한 인문주의 화가와 펠리페 2세 궁정과의 관계는 순식간에 파탄으로 귀결되었습니다.
파르네세 공작의 추천으로 "펠리페 2세의 꿈"이라는 그림을 그리게 된 엘 그레코는 강렬한 원색으로 중심인물인 펠리페 2세를 부각시키는 기법을 사용했는데, 펠리페 2세를 부각시키는 이 눈부신 노란색은 오히려 이 국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펠리페 2세는 같은 주제로 다른 그림을 그릴 것을 명하였고, 화가에게 모욕적인 이 지시를 따를 것을 엘 그레코가 거부함으로써 엘 그레코와 궁정과의 관계는 끝장났습니다.
파르네세 공작(Alessandro Farnese, Duca di Parma e Piacenza)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와는 달리, 본명이 알렉산드로 파르네세이며 작위인 공작은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임을 나타냅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인물 중에서 아마도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이지만, 이 영지가 있는 이탈리아에 돌아갈 여유는 없었으며, 일생을 에스파니아에서 펠리페 2세에게 봉직하다가 마감했습니다.
파르네세 가문은 이탈리아의 유명한 가문으로, 1534년에는 급기야 교황 파울루스 3세를 배출하기에 이릅니다. 교황 파울루스 3세는 자신의 가문에 영지를 부여하기 위하여 교황령이었던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공작령으로 분리한 후, 이 곳에 파르네세 가문의 당주 오타비오 파르네세를 봉하였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는 명목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 공작이 된 오타비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동시에 에스파니아의 국왕 카를로스 1세)와 사사건건 대립하였으므로 오타비오의 아들인 알렉산드로 파르네세는 황제에 대한 볼모로서 마드리드로 가게 되었습니다.
마드리드에서 펠리페 2세의 궁정에 봉직하게 된 파르네세 공작은, 그 때까지만 해도 한가한 궁정귀족이었을 뿐 이렇다하게 할 일이 없었으나 1571년 뜻밖에도 레판토 해전에 출전하게 되어 한가한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습니다.
레판토 해전은 키프로스의 파마구스타를 포위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베네치아를 타도하고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오스만 제국의 해군이 아드리아해와 이오니아해까지 노리고 서진해 오자, 압살의 위협을 느낀 베네치아 공화국이 교황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교황은 다시 에스파니아의 국왕 펠리페 2세에게 호소하여 결성된 카톨릭 해군과 오스만 해군의 정면 격돌이었습니다.
교황령-에스파니아-베네치아-몰타 기사단이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과 대결한 이 역사적 해전에서 파르네세 공작은 혁혁한 전과를 세웠습니다. 아울러 전쟁 자체도 카톨릭 진영의 대승리로 끝나 유럽 세계를 흥분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파르네세 공작이 세운 공로를 시기한 총지휘관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 공은 그에게 아무런 역할을 맡기지 않음으로써 파르네세 공작은 불만과 원한을 품은 채 마드리드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1577년 네덜란드의 반란이 격화되어 에스파니아의 지배가 위기에 처하게 되자, 반란을 진압하는 총지휘관이었던 돈 후안 공은 새삼 파르네세의 군사적 재능을 기억해 내고 파르네세 공작의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파르네세 공작은 네덜란드에 부임하여 장블루 전투에서 네덜란드군을 완전히 격파하기에 이릅니다.
펠리페 2세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높은 지위를 전전하였으나 공을 세우는데는 실패한 돈 후안 공이 끝까지 파르네세 공작의 재능을 시기하며 1578년 10월 사망하자, 파르네세 공작이 후임 네덜란드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파르네세 공작은 "분리하여 대응하라"는 통치 원리에 입각하여, 카톨릭 세력이 아직도 왕성하던 남부 10주에 대해서는 유화책을 쓰고, 청교도 세력이 압도하고 있던 북부 7주에 대해서는 강경책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이 전략은 큰 성공을 거두어 남부 10주에서는 반란 세력들 사이에서 사분오열이 일어나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북부 7주 또한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북부 7주의 세력권에 있던 마스트리히트가 파르네세 공작의 오랜 포위 끝에 함락되자, 북부에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총지휘하던 빌렘의 명성은 크게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남부 10주는 에스파니아가 승세를 잡았다고 생각하게 되어 아라스 조약을 통하여 다시 에스파니아의 종주권 하에 들어가기에 이릅니다.
해양으로부터 들어오는 국외 청교도의 지원이 네덜란드의 반란을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파르네세 공작은 지역 최대의 항구인 앙트워프(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앤트워프로 표기되고 있습니다)를 함락시키는 것이 반란군을 굴복시키는 길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1582년에서 84년까지 일련의 군사작전을 통하여 앙트워프와 외부를 연결하는 모든 주요 교통로를 차단하고, 앙트워프를 바다를 제외한 삼면에서 포위하였습니다. 앙트워프는 13개월간의 포위전 끝에 1585년 항복하여, 북부 반란군에 대한 지원에서 에스파니아의 종주권 하에 있는 남부 10주에 대한 지원을 하는 항구로 그 역할을 바꾸게 됩니다.
이 전쟁은 역사적으로 남부 10주의 단결을 더욱 공고히 하여, 지금의 벨기에 왕국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국에서 펠리페 2세가 갑자기 영국을 공격하기로 하는 미친 마음을 품지 않았더라면 북부 7주의 운명도 어떻게 되었을런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펠리페 2세가 영국을 공격하기로 결정을 내렸으므로 파르네세 공작도 휘하 병력을 모두 항구에 모아 영국에의 상륙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588년 상륙에 앞서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영국으로 파견된 에스파니아 무적함대는 영국에 의하여 철저히 격멸되었고, 그 때문에 영국 상륙의 꿈은 한낱 망상으로 끝나고 맙니다.
이러한 재난으로 펠리페 2세의 왕권까지 흔들릴 위기에 처하였을 때, 하필이면 해외의 희생양으로 파르네세 공작이 선택된 것은 공작의 불운이었습니다. 평생 동안 에스파니아를 위하여 네덜란드 지역에서 반란 토벌에 공헌해 온 파르네세 공작은 본국에서 패배의 원인으로 자신을 지목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파르네세 공작만큼의 역량을 가진 에스파니아의 네덜란드 통치자는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다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북부 7주는 결국 네덜란드로서 독립하여 에스파니아의 통치로부터 분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남부 10주가 한동안 에스파니아의 종주권 하에 놓이게 된 것은 전적으로 파르네세 공작의 에스파니아에 대한 봉사의 결과입니다.
알바 공(3er duque de Alba, Fernando Alvarez de Toledo y Pimentel)
알바 공은 영국, 포르투갈, 에스파니아의 이벤트 모두에 등장하는 인물으로서 사실상 이벤트 전반의 흐름에 개입하고 있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비록 세비야에서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편의상 여기에서 다루기로 합니다.
알바 공은 에스파니아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군사적 재능은 뛰어났지만 그에 따라 얻게 된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서는 그 지위에서 요구되는만큼의 역할을 해내는데는 실패한 인물입니다.
펠리페 2세의 선왕인 에스파니아 국왕 카를로스 1세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궁정에서 봉직을 시작한 알바 공은 하프스 왕국과 맞서 싸운 튀니스 원정(1535), 신성로마제국 내의 루터파 제후들의 동맹이었던 슈말칼덴 동맹과 맞서 싸운 뮐베르크 전투(1547), 프랑스의 기즈 공작(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도 등장합니다)과 맞서 싸운 이탈리아 전쟁(1557)에서 연이어 승리함으로써 군사적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 때문에 알바 공은 카를 5세의 최측근의 지위에 올랐으나, 카를 5세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남긴 비밀 유언장에서 "군사와 관련된 모든 국사에 있어서는 알바 공의 자문을 구하라. 그러나 그 외에서는 절대로 알바 공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는 야심이 지나치게 큰 인물이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으나, 부왕의 유언에는 충실히 따라서 군사에 관한 모든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알바 공을 최측근으로 두어 조언을 구하였습니다.
1566년 네덜란드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을 네덜란드 총독으로 임명하여 현지로 파견하였습니다. 정치 문제 또한 전쟁에서 피아를 가르듯 명확히 해결하고자 한 알바 공은 그저 현지에서의 명망 때문에 반란군의 지도자로 추대되었을 뿐, 오히려 중재 역할을 하고자 한 에그몬트 백작 라모랄(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도 등장할 듯 합니다)을 가차없이 체포하여 처형하고, 그 외 12,000명을 반역죄로 기소하여 모두 유죄로 판결하였는데 여기에는 당대 네덜란드의 유명 인사는 사실상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모두 영국으로 도망가거나 오히려 반란군에 가담하는 등으로 인하여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알바 공은 이러한 사태 악화를 진압하기 위한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세금을 인상하려고 하자 다시 많은 시민들이 반란에 가담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게다가 알바 공은 영국이 네덜란드의 반란을 조장하고 있다고 의심하였는데, 이 의심은 적절한 것이었지만 그 대처 방법이 옳지 못했습니다. 그는 일방적으로 영국에 대한 무역 봉쇄를 선언함으로써 영국-네덜란드 사이에서의 양모-모직물 교역에 의존하고 있던 수많은 양국의 상인들을 파탄시켰습니다. 이 결과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반란에 동조하기 시작했으며, 영국은 알바 공에 대한 감정이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1572년 반란이 격화되었으나, 알바 공은 군사적 재능에 있어서만은 여전히 탁월하여 네덜란드의 반란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군사비를 조달할 재주가 없었던 알바 공은 승리한 후 승전지에서의 약탈에 상당부분 의존함으로서 결과적으로 끔찍한 잔학 행위를 저지르게 되었으며, 알바 공의 군대가 다른 곳으로 진격한 후 그 지역이 다시 반란에 가담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펠리페 2세가 1573년 알바 공을 에스파니아로 소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알바 공의 이런 끔찍한 정치적 실패의 결과 때문입니다. 한동안 국왕의 신임을 잃고 근신하고 있던 알바 공은 1580년의 펠리페 2세의 포르투갈 왕위 계승 시도에서 에스파니아의 군대를 이끌고 단숨에 리스본으로 진격하여 포르투갈을 병합함으로서 다시 한번 전공을 세우게 되지만, 국왕의 총애를 되찾는데는 여전히 부족하여, 2년 후 이렇다할 직위를 맡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