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은 휴대폰 화면을 한참 동안 내려다봤다.
1시간 43분.
숫자가 이상할 정도로 크게 보였다.
평소라면 영화 한 편보다도 짧은 시간이었다. 친구와 카페에 앉아 이야기하다 보면 금세 지나갈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지은에게 그 숫자는 거의 형벌처럼 느껴졌다.
‘한 시간 사십삼 분을… 이 상태로?’
머릿속으로 계산하려고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10분만 버티면 1시간 33분.
또 10분이면 1시간 23분.
그렇게 줄여 생각해 보려고 해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은은 휴대폰을 뒤집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시간을 보면 더 급해지는 것 같았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 아니었다.
몸이었다.
잠잠해진 것처럼 보이던 아랫배 안쪽에서 다시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아주 천천히.
꾸르륵.
지은은 즉시 허리를 세웠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방금 전까지 등받이에 기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엉덩이를 좌석 깊숙이 붙이고 양다리를 바짝 모은 자세가 되어 있었다.
‘또 온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심장이 먼저 빨라졌다.
아직 강한 신호도 오지 않았는데 겁부터 났다.
이제는 패턴을 알 것 같았다.
배가 울린다.
잠깐 잠잠해진다.
그리고 몇십 초 뒤 아래쪽으로 강한 압박감이 내려온다.
그 압박을 버티고 나면 다시 잠잠해진다.
문제는 그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은은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힐끗 봤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입술도 말라 있었다.
누가 보면 멀미라도 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지.’
갑자기 억울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냥 점심만 조금 덜 먹었어도.
아이스커피만 안 마셨어도.
출발 전에 화장실을 한 번만 갔어도.
그런 생각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버스는 고속도로 한가운데였다.
지은은 앞쪽을 바라봤다.
운전석은 아주 멀게 느껴졌다.
사실 몇 걸음밖에 되지 않았다.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서 앞으로 가면 됐다.
“기사님, 죄송한데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요.”
말 한마디면 됐다.
그런데 그 간단한 행동이 이상할 정도로 어려웠다.
다른 승객들이 쳐다볼 것 같았다.
특히 옆자리 여자가 잠에서 깨서 자신을 보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기사님이 이렇게 말하면 어떡하지.
“조금만 참으세요. 다음 휴게소까지 멀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절망할 것 같았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지은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조금만 더 버티고 말하자.’
또 미뤘다.
5분만.
진짜 5분만.
그런데 그때였다.
배 안쪽이 갑자기 세게 비틀렸다.
“읏….”
지은의 손이 즉시 배로 갔다.
숨을 들이마시려다가 멈췄다.
이번에는 시작부터 달랐다.
아랫배 전체가 무겁게 조여 오더니, 곧바로 아래쪽으로 강한 압력이 밀려왔다.
지은은 엉덩이를 좌석에 더 단단히 붙였다.
허벅지에도 힘을 줬다.
발끝까지 굳었다.
‘안 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한 단어뿐이었다.
‘안 돼.’
몇 초 동안 지은의 머릿속에서 버스도, 사람들도, 목적지도 전부 사라졌다.
몸 하나만 남았다.
지금 힘을 풀면 안 된다는 본능적인 공포만 남았다.
그 상태가 길게 이어졌다.
10초.
아니, 20초였을지도 몰랐다.
지은에게는 훨씬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압박감이 조금씩 약해졌다.
지은은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손바닥도 축축했다.
이번에는 쉽게 안도할 수 없었다.
방금 신호가 이전보다 확실히 강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달랐다.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끝까지 못 참을 수도 있겠다.’
그 생각을 인정하는 순간 공포가 확 커졌다.
지은은 급히 휴대폰을 들었다.
검색창에 아까 치다 만 문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고속버스 화장실 급할 때.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검색했다.
휴게소.
기사 요청.
비상 정차.
여러 글이 눈에 들어왔지만 내용이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손이 떨렸다.
결국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하나였다.
기사님께 말하는 것.
지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말해야 돼.’
이번에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번 신호 오기 전에.’
그녀는 천천히 가방을 무릎에서 내려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런데 버스가 완만한 커브를 돌았다.
몸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아랫배가 다시 내려앉았다.
지은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
아주 작은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이번 신호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지은은 자리에서 일어나기는커녕 다시 등을 좌석에 붙였다.
양 무릎을 바짝 붙였다.
손은 가방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지금은 못 움직여.’
움직이는 순간 위험할 것 같았다.
이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힘이 풀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 번의 고비가 지나갔다.
지은은 눈을 감았다.
눈앞이 어질했다.
‘미쳤어.’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진짜 못 움직이겠는데.’
기사님께 가야 하는데, 기사님께 가려면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일어나는 것 자체가 무서웠다.
그제야 지은은 자신이 이상한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더 일찍 말했어야 했다.
처음 급하다고 느꼈을 때.
아니, 두 번째 신호가 왔을 때라도.
그때는 걸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지은은 아주 조심스럽게 자세를 바꿨다.
허리를 약간 앞으로 숙였다.
조금 나았다.
다시 뒤로 기대봤다.
압박이 더 심해지는 느낌이 들어 바로 몸을 세웠다.
다리를 꼬아 봤다.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다시 풀고 두 발을 붙였다.
어떤 자세도 오래 편하지 않았다.
자세를 바꿀 때마다 몸이 새로운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결국 지은은 가장 덜 불편한 자세를 찾아 그대로 굳어 있었다.
옆자리 여자가 움직였다.
지은은 순간 움찔했다.
여자가 눈을 뜨더니 목을 한 번 돌리고 창밖을 봤다.
“많이 막히네요.”
갑작스러운 말에 지은은 당황했다.
“아… 네.”
목소리가 이상하게 떨렸다.
여자는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하지만 지은의 머릿속에는 단어 하나가 꽂혔다.
막힌다.
‘설마.’
지은은 급히 창밖을 봤다.
정말이었다.
아까까지 빠르게 달리던 버스가 느려지고 있었다.
앞쪽으로 자동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브레이크등이 줄줄이 붉게 빛났다.
지은의 얼굴이 굳었다.
‘안 돼.’
버스 속도가 더 떨어졌다.
80.
81.
82.
결국 거의 기어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앞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남은 시간이 1시간대였는데.
정체까지 생기면?
도착시간이 늘어나면?
그 생각은 차마 끝까지 하지 못했다.
지은은 휴대폰을 켰다.
도착 예정 시간이 새로 계산되고 있었다.
잠시 뒤 숫자가 바뀌었다.
남은 시간.
2시간 06분.
지은은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뭐?”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아까보다 시간이 늘었다.
오히려 출발점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은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두 시간?’
이 상태로?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창피해서 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너무 막막했다.
지은은 이제 더 이상 “조금만 참으면 된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몸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신호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배 안쪽이 묵직해졌다.
지은은 눈을 감았다.
‘제발.’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빌었다.
‘이번엔 약하게 와.’
하지만 이번 신호는 지금까지와 달랐다.
배를 아프게 만드는 느낌보다 훨씬 직접적이었다.
아래쪽에 무거운 압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지은은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등줄기로 소름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건 이전처럼 쉽게 지나가지 않을 것 같았다.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허벅지를 바짝 붙였다.
손가락은 가방 손잡이를 하얗게 될 만큼 움켜쥐었다.
‘안 돼.’
압박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더 강해졌다.
‘안 돼.’
지은의 호흡이 가빠졌다.
옆자리 여자가 다시 한번 지은 쪽을 힐끗 보았다.
지은은 아무렇지 않은 척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나 얼굴에는 이미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버스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익—
몸이 앞으로 쏠렸다.
지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
순간적으로 몸 안의 힘이 흔들렸다.
정말 아주 잠깐이었다.
하지만 지은은 그 찰나를 너무 선명하게 느꼈다.
방금 전까지 완벽하게 막고 있다고 생각했던 마지막 힘이,
처음으로 살짝 무너진 느낌.
지은은 그대로 굳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방금… 뭐였지?’
숨도 쉬지 못한 채 꼼짝하지 않았다.
다시 힘을 줬다.
다행히 아직 사고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은은 알았다.
아까와는 상황이 달랐다.
이제 몸이 자신의 말을 완전히 듣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고 버스는 여전히 정체 속에 갇혀 있었다.
남은 시간.
2시간 04분.
지은은 그 숫자를 보다가 천천히 화면을 껐다.
이제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앞으로 몇 시간이 남았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지은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였다.
다음번 신호가 왔을 때,
자신이 그걸 또 막아낼 수 있느냐.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앞좌석 손잡이를 잡았다.
이제는 정말 기사님께 말해야 했다.
창피한 건 문제가 아니었다.
지은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배 안쪽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지은의 몸이 그대로 멈췄다.
“…설마.”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압박이 전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