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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잭스X소나 팬픽-가로등과 별 14화(전)

아이콘 강철안개
댓글: 7 개
조회: 2725
추천: 19
2016-08-09 10:46:03







#. 잭스

 희미한 빛과 함께, 소나는 사라졌다.

 [당신이 정말 미워요.]

 그녀가 사라지기 직전에 쥐어짜내듯 내뱉은 그 말이, 잭스의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맴돌았다. 기억하지 않으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소나의 목소리는 더욱 더 커져만 갔다. 그에 따라 그의 마음속에도 죄악감이 흙탕물처럼 번져나갔으나…그를 괴롭히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사실 소나에 대한 죄책감은 지금 그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 중 ‘아주 사소한’ 축에 속하는 편이었다.

 털썩

 “크…….”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멋대로 무릎이 꺾였다. 뒤이어 앞으로 엎어지려는 걸 잭스는 부러진 가로등을 부여잡으며 사력을 다해 버텨냈다. 그토록 가볍게 휘두르던 가로등이 묵직한 닻이라도 되는 것 마냥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전혀 신경 쓰지도 않았던 망토와 가죽 갑옷, 심지어 거의 몸에 일부나 다름없는 철가면마저도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그의 가면 사이로는 더 이상 푸른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전신이 불구덩이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아직 쓰러질 수 없다.

 잭스는 그 말을 마치 주문처럼, 수도 없이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그(또는 그녀, 아니 아무려면 어떤가)’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전쟁학회와 리그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위기에 직면해있음이 틀림없었다. 오직 이 위기감과 절박함만이 그가 서 있게 해주는 버팀목이었다.

 모든 것이 아련한 빛에 휩싸이고 있었다…챔피언들도, 그의 시계도. 원래 소환되었던 장소로 돌아가기 직전에 그의 눈에 쓰러져있는 쇼나 베인과 럭산나 크라운가드가 보였다. 그녀들 역시 쓰러진 채로 하얀 빛에 휘감기고 있었다. 다행이군, 잭스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소환해제의 마법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아직 숨은 붙어있다는 뜻이니까. 숨만 붙어있다면 베사리아를 비롯한 전쟁학회의 소환사들이 어찌어찌 원래대로 되돌려 줄 터였다. 먼 옛날처럼 느껴지지만, 저들의 처참한 모습은 불과 몇 시간 전에 일어난 참상의 결과물이었다.

 잭스는 눈을 감았다. 소환이 해제되어 전쟁학회로 돌아가기 전까진 아직 수분의 여유가 있었다. 조금만 휴식을 취하자, 아주 조금만. 전쟁학회에서 ‘해야할 일’을 하려면 조금이라도 체력을 비축해놓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그는 무릎을 꿇고, 마치 참회하는 성자처럼 가로등에 매달려서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그의 눈앞에서 몇 시간 전 새벽의 ‘전쟁’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


 “자, 그럼 한번 해 보자고.”

 잭스의 손에서, 불꽃의 창이 총탄을 방불케하는 속도로 내쏘아졌다.

 “!”

 그 내지르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럭스가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지다시피 뛰었을 땐 이미 잭스가 창을 거둬들인 후였다. 다섯 발자국 이상 거리가 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럭스는 얼굴에 뜨거운 열기가 확 끼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건 경고였다. 아님 위협이거나. 럭스는 이 일격으로 잭스가 붙기만 한다면 자신 따윈 상대도 안될 거란 걸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순간 그의 가로등에 머리가 두부처럼 으깨지던 마스터의 부하들에 자신의 모습이 겹쳐보였지만…럭스는 이를 악물고 그 환상을 애써 떨쳐냈다. 에밀리아 르블랑은 여기 없었고, 지금 마스터를 지킬 수 있는 전력은 자신과 베인이 전부였다. 침착해야 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어깨에 마스터의 안전과 소나의 확보라는 중대한 임무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럭스는 일단 마법봉을 휘둘러 반투명한 보호막을 생성했다. 그녀의 장기 중 하나이자 리그에서도 허락된 기술인 ‘프리즘 보호막’이었다.

 ‘괴물 같으니라고.’

 럭스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열기도 열기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푸른 불꽃의 정체도 문제였다. 도대체 잭스가 무슨 조화를 부려서 온 몸에 불꽃을 두르고도 멀쩡한지 알 방법이 없었지만, 적어도 저 불꽃 덕에 그의 공격력이 배 이상으로 증가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럭스가 검은 남자를 보호하고, 베인이 그 틈을 타서 소나를 포획한다는 양동작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단 한 번의 공격만 허용해도 럭스는 물론이거니와 그녀들이 그토록 숭배해 마지않는 검은 남자까지 꿰인 꼬치구이 꼴이 되고 말 테니. 검은 남자를 지키며 소나를 데려가는 방법은 단 하나, 잭스를 쓰러뜨리는 것뿐이었다.

 “마스터, 죄송하지만 저 혼자서는 마스터를 지킬 수 없어요. 베인을 공격에 가담시켜야 합니다.”
 “큭, 쓸모없는……. 쇼나, 소나를 데려오라는 명령은 취소다! 럭산나와 힘을 합쳐서 저 놈을 죽엿!”
 “분부대로.”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한 듯, 어느새 베인은 잭스의 등 뒤에서 석궁을 겨누고 있었다. 순식간에 앞뒤로 포위당한 잭스였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자세를 낮출 뿐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도약하기 직전의 맹수 그 자체였다. 왜일까, 분명 수적으로도 위치적으로도 우위를 점하고 있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럭스는 마음 한 구석에서 질 것 같다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내색은 안하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베인 역시 그녀와 같은 마음이었다.

 먼저 움직인 쪽은 베인이었다.

 희미하게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다고 생각한 순간, 어느새 은화살 두 발이 하얀 궤적을 그리며 잭스를 향해 짓쳐들고 있었다. 뱀의 송곳니를 연상케하는 위협적인 일격이었으나 그 실상은 맞으면 좋고 안 맞아도 그만인 허초에 불과했다. 진짜 공격은 도약하듯 굴러서 아래쪽에서 쳐올리는 듯한 베인의 발차기였다.

 “……!”

 구른 뒤의 탄력과 유연성을 겸비한 베인의 올려차기는 실로 사람의 턱뼈 정도는 젤리 으깨듯 박살낼 수 있는 파괴력이 담겨있었다. 보통의 상대라면 은화살을 피하거나 막는 동작을 취하는 사이에 베인의 올려차기에 당했을 것이다. 그래……보통 상대라면. 유감스럽게도 잭스는 그 ‘보통의 상대’가 되기엔 지나치게 노련했고,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했다. 잭스의 전신에서 푸른 불꽃이 갑자기 확 하고 타올랐다.

 티잉-!

 은화살은 마치 단단한 성벽에 맞고 튕겨져 나오기라도 하는 듯 잭스의 불꽃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경악할 틈도 없이 잭스의 불붙은 가로등대가 베인을 향해 벼락처럼 꽂혔다. 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행해진 그 공격은, 간발의 차로 럭스가 건 프리즘 보호막에 가로막혔다. 허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카가각

 쇠를 긁어내리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푸른 불꽃이 보호막 위에서 날름거렸다. 잭스가 불꽃의 창을 내려찍었다. 쾅, 럭스는 주위가 진동하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쾅, 하고 잭스가 불꽃의 창을 내려찍는 순간 프리즘 보호막은 산산조각이 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단 두 방에, 럭스의 유일한 보호 마법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불꽃처럼 보이는 잭스의 모습은…가히 죽음을 몰고 다니는 전쟁터의 화염 그 자체였다. 뒤이어 뭔가 푸른 섬광이 보였다고 생각한 순간, 이번에야말로 불꽃의 창날은 베인의 허벅지를 관통하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목이 찢어져라 지르는 베인의 비명소리에도, 지직거리며 살이 타는 소리는 저주스러울 정도로 똑똑히 럭스의 귀에 들려왔다. 잭스가 마치 고깃덩어리에서 작살 빼내는 것만큼이나 무정하게 가로등대를 쑥 빼자 다시 한 번 베인의 고통스런 비명이 울려퍼졌다. 후벼파진 허벅지 사이로 허연 뼈가 고개를 디밀 정도의 끔찍한 상처였음에도 불구하고 피 따윈 흐르지 않았다. 채 흐르기도 전에 불꽃의 열기에 상처가 타버렸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잭스는 기계처럼 다시 불꽃의 창을 들어올렸다. 설마, 럭스의 낯빛이 새파래짐과 동시에 이번엔 창날이 베인의 반대쪽 정강이에 쑤셔박혔다. 베인의 목 안쪽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비명소리가 다시 협곡을 메웠다. 그러나 잭스는 그 짓을 그녀의 양 팔목에 두 번이나 더 하고나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양 팔목을 찌를 땐 더 이상 베인의 비명은 없었다. 끔찍한 고통에 기절해버린 것이리라. 그러나 몸은 고통을 느끼는지 잭스의 창날이 사지를 후빌 때마다 전기 오른 개구리 시체마냥 덜덜 떨렸다.

 베인의 사지를 몇 번이나 불로 지진 뒤에야, 잭스는 그제서야 만족이라도 한 듯 공격을 멈췄다. 그리고 베인을 쓰레기 걷어차듯 걷어찼다. 몇 번 바닥을 구른 베인은 주위에 널려있는 시체처럼 널브러졌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아, 아아…….”

 그는 압도적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이제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잭스는 럭스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럭스에겐 흡사 화염으로 뒤덮힌 성벽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으, 으아아아악!”

 그녀를 깨운건 검은 남자의 비명소리였다. 다리에 힘이 풀리기라도 한 듯 비척거리다가 기다시피 넥서스를 향해 도망치는 남자의 모습은 꼴사납기 그지없었으나 세뇌된 럭스의 마음엔 오히려 그것이 정신을 차리게 해주는 자극제가 되었다. 럭스는 이를 악물고 몸속의 마력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마스터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 마스터가 르블랑에게 도착할 때까지 팔이 찢어지더라도 저놈을 붙들고 놔주지 말아야 한다…그게 럭스의 머릴 가득 메운 유일한 생각이었다.

 “이쯤하면 이토록 세뇌를 강력하게 걸어준 저놈에게 감사해야겠군. 저놈의 강력한 세뇌 덕에 네 녀석들의 움직임이나 사고방식을 읽기가 아주 쉬웠어. 네 최우선은 역시 저놈의 안전이겠지?”
 “다, 당연합니다. 마스터의 안전이야말로 우리들이 여기 있는 목적이니까요.”
 “포기하는게 어떤가? 여기서 비켜주기만 한다면 기절 정도로 끝내줄 수도 있는데.”
 “거절합니다!”

 럭스는 이를 갈며 대답했다. 잭스는 한 걸음 다가왔고, 럭스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마법봉을 쥔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잭스의 가면이 약간 수그려지며 들썩였다. 럭스의 귀에 희미하게 큭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럭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그는…웃고 있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몽롱하게 들렸다. “그럼 이제 네 차례다.”

 럭스는 자신의 다리가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잭스가 내뿜는 패기에 눌려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잭스가 내뿜는 패기도 패기였지만, 럭스는 자신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몸을 혹사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콰앙, 하고 잭스가 전차 돌진하듯 앞으로 발을 굴렀다. 그의 불붙은 가로등이 땅을 기는 뱀처럼 아래에서부터 럭스를 향해 짓쳐들고 있었다. 남은 마력이 거의 없었지만, 럭스는 이를 악물고 ‘빛의 속박’을 시전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틈을 만들면 최소 승리는 거두지 못할지라도 잭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지지직!

 그녀의 마법봉에서 나간 속박의 빛은 잭스의 불꽃에 닿자마자 허무하리만치 녹아 스러졌다. 그녀의 일격은 실패했다. 그리고 그 말은 잭스의 접근을 허용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잭스가 이제 불꽃으로 이뤄진 창 같은 가로등을 치켜올리는 모습이, 럭스에겐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뭐……?’

 럭스는 이 절박한 와중에도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저건 마법을 ‘막은’ 것이 아니었다. 마법을 태워 없애버린 것이었다. 완성된 마법을 엮고 있는 마력을 태워 없애는 불이라니? 럭스는 그런 해괴망측한 기술 따윈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럭스의 경악과 의문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잭스가 그녀를 향해 불꽃의 창을 마치 철퇴처럼 휘둘렀던 것이다. 휭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에서 짓쳐드는 푸른 호선(弧線)……. 럭스는 움찔 몸을 떨며 본능적으로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빠각
 뚜두둑

 “카, 학……!”

 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럭스는 들어 올린 오른팔이 부러지는 감각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잭스의 공격은 겨우 오른팔 하나를 취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파고들어온 가로등은 오른팔을 박살내고, 그녀의 어깨뼈를 박살내고, 그녀를 돌바닥에 거칠게 내동댕이친 후해야 비로소 그 흉폭한 움직임을 멈췄다. 나가떨어진 럭스의 팔은 기이한 방향으로 틀어져 있는 것도 모자라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앞을 가로막던 두 명의 적을 쓰러뜨리고서, 잭스의 주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승리의 함성 따윈 없었다. 승리를 축하해 줄 동료 따위도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그 흔한 벌레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완전한 침묵, 완전한 어둠……. 피와 시체들로 가득한 참상 가운데서 잭스 한 명만이 홀로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럭스를 날려버린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아니, 정확히 그 실상을 파고들자면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럭스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가로등을 으스러지듯 움켜잡은 그의 손은 마치 발작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견디고 있었다.


***


 온 몸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목과 코가 타오르는 듯 고통스러웠다. 뇌가 산소를 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탓에 머릿속이 몽롱하기 그지없었다.

 죽여야 한다…….

 잭스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에게 겁도 없이 달려들었다가 처참하게 나가떨어졌던 베인과 럭스를 떠올리자 악랄한 쾌감이 마약처럼 그의 온 몸에 퍼져나갔다. 살을 후벼파내던 그 감각은 얼마만인가, 고통의 한계를 넘어선 그 추악한 비명은 또 얼마만인가! 주변을 꽉 메우고 있는 농밀한 피냄새는 전쟁터의 향수요, 비명과 공포에 질린 울부짖음은 전쟁터의 관현악이었다. 도대체 얼마 만에 느끼는 전쟁의 내음인가, 도대체 얼마 만에!

 죽여야 한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아직 턱없이 부족했다. 이따위 허수아비 같은 마법사 놈들, 꼭두각시에 불과한 챔피언들 따위론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는 더 강한 상대와 싸우고 싶었다. 압도적으로 그를 밀어붙일 수 있는, 그에게 전사다운 죽음을 선사할 수 있는 상대와. 그러나 그런 상대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 여기선 한 놈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 무료함을 어떻게 달래야 할까.

 럭스와 베인을 가지고 다시 놀아야 하나……? 아니지, 아냐. 잭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겨우 숨만 간당간당하게 붙어 있는 놈들을 가지고 뭘 하겠는가? 아아, 그래……. 잭스는 문득 생각난 듯 중얼거렸다. 아직 그 검은 남자와 르블랑이 남아 있었다. 벌레만도 못한 비열한 놈 같으니라고. 생각해보면 그 빌어먹을 놈 때문에 자신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지 않는가. 잭스는 불길처럼 타오르는 살의를 모조리 그쪽으로 돌렸다. 그의 분노에 감응이라도 하듯 그의 온 몸을 불태우고 있는 푸른 불꽃이 더욱 거세어졌다.

 세상이 불타고 있었다. 하늘도, 땅도, 시체도 모두 피를 연상하게 하는 붉은 화염으로 뒤덮혀 있었다. 그 가운데서 자신만이 새파랗게 불타고 있었다. 이질적인 것처럼, 마치 자신은 다른 것들과는 섞일 수 없는 불순물 같은 존재인 것처럼.

 잭스는 몽롱한 와중에도 어렴풋이 이 광경이 환각과 비슷한 것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제약’을 푸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잭스는 여기서 조금이라도 빨리 불꽃을 거둬들이지 않는다면 자멸해버릴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던 불꽃이 마치 안락한 비단 이불처럼 느껴지기 시작하자 잭스는 그 안락함이란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실상 잭스는 자멸 직전의 상태였다. 이성이 붕괴한 그의 정신은 평소와는 다르게 너무나 잔인하고 흉폭하기 그지없었다. 육체적으로도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건 이미 통각까지 마비되었다는 뜻으로, 몸 구석구석이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한 줌의 재로 화할 수도 있었다. 뭔가 계기가 필요했다. 정신을 붙잡을 수 있는, 뭔가의 계기가…….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어디선가에서 맑은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부드럽고도 아름다운 소리였다. 잭스는 환각에 이어 환청까지 들린다고 생각했지만, 굳어버린 이성을 간신히 굴려 생각해보니 그럴 리가 없었다. 이 상태에서 그에게 보이고 들려오는 환각과 환청은 모두 전쟁터와 관련이 있는 것들이었다. 이런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환청으로 들릴 리가 없었다.

 노랫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비록 그 소리가 희미할지라도, 불볕더위 한가운데에서 잠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산들바람만큼이나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어떤 악기의 소리인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누군가의 노랫소리인 것인가. 잭스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는 그 찰나의 순간, 잭스는 독주를 한 수레 들이부은 듯 멍하기 그지없던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잭스가 제정신을 차리는 데에는 그 한 순간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커, 커허억!”

 정신을 다시 부여잡자마자 괜히 정신 차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잭스를 유린했다. 온몸을 뒤덮은 불꽃이 몸을 태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주변의 공기까지 태우고 있었다. 폐가 산소를 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입 속은 빳빳한 가죽처럼 메말라버린지 오래였고 눈은 뻑뻑한 것을 넘어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나마 이 빌어먹을 고통 때문에 오히려 이성이 더욱 또렷해진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정신을 차린 잭스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온 몸에 중구난방으로 퍼져있는 마력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날뛰는 마력은 그야말로 야생마 같아서 통제가 끔찍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잭스는 쌓아온 노련미를 몽땅 쏟아부어서 겨우 마력을 다잡을 수 있었다. 점차 그를 감싸고 있던 푸른 불꽃이 꺼져가기 시작하더니…마침내 처음 가로등을 부술 때 나타났던 조그마한 불꽃 빼곤 모든 불꽃이 사라졌다. 하지만 불꽃은 원래대로 돌아갔을지라도, 그의 모습마저 온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잭스의 모습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온 몸 구석구석 그을리지 않고 연기가 피어나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럭스의 마법을 막는 데에 썼던 왼팔의 상처는 손가락 하나 조차 움직이는게 힘들 지경으로 악화되어 있었다.

 그의 ‘푸른 불꽃’은 양날의 검이나 마찬가지였다. 공격력과 마법 방어력, 물리 방어력을 압도적으로 높혀주긴 하지만 그 대가로 바쳐야하는 것은 자신의 육신이었으니까. 자신을 태워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막아낸다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힘이 아닐 수 없었다. 잭스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이 힘을 아주 중요한 순간에 적절히 사용해왔지만 그렇다고 이 힘을 남발하진 않았다. 오히려 잭스는 이 힘을 경계했다. 아니, 애초에 이 ‘푸른 불꽃’은 잭스가 원해서 얻은 힘도 아니었다. 힘이라기보다는…오히려 저주에 가까웠다.

 그는 천천히 엎드렸던 몸을 일으켰다.

 주위는 훨씬 더 어두워져 있었다. 기지 이곳저곳에 세워져 있는 횃불들마저 삼켜버릴 수 있을 정도로, 주변은 깊디깊은 어둠과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어스름한 빛 아래로 펼쳐진 시체 더미와 끈적거리는 피웅덩이들은 실로 흉물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잭스는 그런 것들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지금 해야 할 일이 더 중요했다.

 “…확실히, 럭스와 베인을 잃어버린 그 녀석이 갈 곳이라곤 아무리 생각해도 넥서스밖에 없군.”

 거기엔 르블랑도 있을테니까, 잭스는 그 뒷말을 삼켰다. 잭스는 이를 으스러뜨릴 듯이 갈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망하다시피 했지만, 어쨌든 이 작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속전속결이었다. 쉬고 있을 틈이 없었다. 최악의 경우, 아까 그 빌어먹을 검은 보자기같은 녀석이 뭔 수를 써서 지원군을 부를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기에 잭스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소나와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널브러져 죽어가고 있는 챔피언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럭스도 베인도 치명상을 입긴 했었지만 일단 목숨이 붙어있기는 했었다. 잭스는 그들의 목숨을 살릴 의무가 있었다.

 ‘알량한 책임감이야.’

 넌 저들을 배려할 가치도 없는 놈이다, 라고 잭스는 속으로 자조했다.

 넥서스를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게 아니었다. 일단 크기도 크기거니와 나 여기 있소 광고라도 하는 듯 검붉은 빛을 사방팔방으로 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넥서스를 지키는 속칭 ‘쌍둥이 타워’들도 그 영향을 받기라도 한 듯, 이전까지 봤던 타워들과는 다르게 훨씬 더 흉폭한 마력을 뿜어내며 웅웅거리고 있었다.

 넥서스가 눈에 잡히자 잭스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선, ‘푸른 불꽃’을 일으키기 위해 몸속의 마력을 돌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번엔 최대한 출력을 낮춰서 창날 모양의 불꽃만 피워내는 정도로. 물론 그것만으로도 지금 잭스의 몸 상태로 봐선 위험한 도박이 아닐 수 없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역시나 잭스가 예상했던 대로 그 검은 남자는 쌍둥이 타워 앞에 있었다. 솔직히 이 정도로 저 남자가 예상대로만 움직여주니 잭스는 남자의 멍청한 두뇌에 감사할 지경이었다. 잭스 경험상으로는, 조금만 생각이 있는 놈이라면 저렇게 일선에 당당하게 서 있다는 것은 뭔가 꾸밈수가 있다는 것이었지만……. 잭스는 검은 남자가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발작하듯 외치자 그 생각을 깨끗하게 접었다. 저놈은 작전이 있는게 아니라 그냥 아무 생각도 없는 놈이 분명했다.

 “제, 젠장! 개만도 못한 쓰레기들 같으니라고! 나를 지킨다고 했으면 그 목숨을 바쳐서라도 저놈을 죽여야 할 거 아냐! 쓸모없는 년들, 소나도 못 데려오고 저 빌어먹을 용병 놈도 못 막고, 쓸모없는, 정말 쓸모없는 년들이야! 내가 누군 줄 알고! 내가, 나를, 이토록 비참할 지경까지 몰고 오다니!”

 “…추하군.”
 “히이익! 르블랑, 르블랑! 어디 있는거냐! 나, 나를 지켜라! 여길 지켜! 저놈을 죽여! 목숨을 바쳐 저놈을 죽이란 말이다!”

 자기를 지키란 것인지 싸우란 것인지 영문을 모르겠는 명령을 하며 검은 남자는 완전히 패닉에 빠져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잭스에게 뭔지 모를 위화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까야 전투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었다면 공포에 질릴만한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마지막 패까지 다 까뒤집은 상황에서 잭스가 불리했으면 불리했지 결코 유리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저 검은 남자는 아까보다 더 심하게 공포에 질려 덜덜 떨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왜……?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만 르블랑이 환영처럼 스르르 나타나자 잭스는 생각을 접었다. 그녀는 잡생각에 빠진 채로 싸워도 될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검붉은 수정 조각의 파편이 온 몸에 다닥다닥 박힌 그녀의 모습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 수정의 탓인지 그녀에게선 흉폭한 마력의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르블랑이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에 감응하기라도 하는 듯, 두 개의 넥서스 타워들도 수정을 시뻘겋게 빛내며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

 잭스는 이를 악물며 자세를 취했다. 아까처럼 온 몸에 불꽃을 두른 상태라면 아무리 르블랑이 넥서스 타워들의 호위를 받고 있다고 해도 싸워볼만 할 텐데……. 죽음을 각오하고 다시 한 번 ‘제약’을 해제한다면야 아까와 같은 압도적인 힘을 낼 순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장담컨대, 잭스는 자신이 반드시 죽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 빠져나가려는 것인데 그래서야 완전히 본말전도였다. 게다가 만에 하나 패하기라도 한다면 소나가 위험해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고, 그것은 그녀와의 계약도 지키지 못한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다. 가면 사이로 그의 침음성이 옅게 흘러나왔다.

 르블랑이 텅 빈 눈동자를 한 채 잭스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잭스는 결국 ‘제약’을 다시 한 번 풀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죽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목숨이 다하기 전에 르블랑과 저 검은 보자기를 때려눕히고 넥서스를 부수리라, 그게 지금 잭스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선제공격은 타워 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콰콰광!

 폭약 터지는 소리와 함께 마력탄이 마치 산탄처럼 쏘아졌다. 이걸로 그를 죽이겠다기보다는 움직임을 봉쇄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공격이었다. 움직임만 봉쇄당해도 치명적이었다. 체내에 마력을 강제로 주입시켜 터뜨리는 르블랑 특유의 마법을 고려한다면, 이 상태로 그녀의 마법을 단 한 대라도 맞았다가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터진 술자루 꼴이 될게 뻔했다. 잭스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 번 마력을-

 “살고 싶으면 움직이지 마세요.”
 ‘뭐……?’

 소음을 뚫고 비수처럼 날아온 르블랑의 한마디가 그를 멈추게 했다. 그 찰나의 순간, 그는 르블랑의 얼굴을 봤다. 그녀의 입가엔 예의 그 오만한 미소가 아닌, 잭스가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리운 지인을 만난 듯한, 또 어떻게 보면 살려고 발버둥치는 미물을 보며 즐기는 듯한 미소였다. 잭스는 아까부터 신경쓰였던 기묘한 위화감이 등골을 타고 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시간은 잭스의 사정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휙 하고 흘러갔고, 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마력의 산탄은 잭스를 향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콰과과과과과광!

 “으헤헥! 그래, 잘 했다 르블랑! 죽었겠지, 이 괴물 같은 놈! 드디어 죽었어! 저런 폭발에서 살아남을 리가 없어! 역시 난 최고야, 역시…나야말로 여왕폐하의 옆자리에 설 자격이 되는 인물이야! 크하하, 크하하하하!”

 우박처럼 쏟아진 마력의 산탄은 잭스가 방금 전까지 서있던 곳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피어오른 흙먼지 때문에 잭스가 어떻게 되었는지 육안으로 확인할 방도는 없었지만, 남자는 잭스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믿었다. 어찌나 그의 표정에 확신이 가득 차 있던지 확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골백번은 죽이고도 남을 만한 표정이었다. 그는 피어오른 흙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죽어라, 제발 이번 일격으로 죽어라, 제발 죽어다오!

 그러나.

 잭스는 여전히 서 있었다. 처음 그 자세 그대로,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달라진 점이라곤 흙과 돌조각을 잔뜩 뒤집어썼다는 것뿐이었다.

 “뭐, 어…………?”

 남자는 뒤통수라도 한 대 거하게 후려 맞은 듯한 표정으로 잭스를 바라봤다. 산탄은 정확히, 잭스를 중심으로 도넛처럼 펼쳐져서 떨어진 듯 애꿎은 잭스의 주변만 잔뜩 파괴했을 뿐이었다. 낌새로 봐선 막은 것도 아니었다. 그 괴상한 불꽃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 정면에서 타워의 마력 포탄을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르블랑이 잭스를 일부러 죽이지 않은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자신의 지배하에 있을 터였다. 명령의 불복종 따위는 없을 터였다. 럭스나 베인만 봐도 그렇지 않는가. 검은 남자는 눈을 부릅뜨고선 르블랑을 향해 돌아서기 시작했다. 두건 아래 어두운 그늘 속에서 그의 눈동자만이 분노와 당혹감으로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푹

 살덩어리에 날붙이를 박아 넣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퍼졌다. 배 부근에서 전해져오는 화끈한 통증-검은 남자는 멍하니 시선을 내렸다.

 익숙한 단검이 그의 배를 뚫고 들어가 있었다.

 “이게, 왜, 내, 배에……?”

 카타리나의 단검이었다.

 그리고.

 “넥서스 타워 앞에서 르블랑을 이용해 결사적인 저항을 벌이다가 카타리나의 암습으로 사망하다니, 이런이런……. 정말로 안타까운 일로 귀한 인재를 잃었습니다.”

 그의 배에 칼을 쑤셔 넣고 있는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르블랑이었다. 지팡이를 들고 있지 않았던 나머지 손에 환영으로 감춰뒀던 것일까, 아니면 마법으로 끌어당긴 것일까. 살짝만 손가락을 대도 피가 맺힐 정도로 날카로운 카타리나의 단검은, 르블랑의 연약한 팔 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의 배에 제 몸뚱아릴 집어넣고 있었다.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르블랑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목에서 나는 소리는 그저 컥컥거리며 바람 빠지는 소리뿐이었다. 르블랑은 그런 남자를 향해 잭스에게 지었던 미소와 똑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천한 것을 내려다보는 자의 미소 바로 그것이었다.

 “비록 비열한 암살자의 일격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당신의 고결한 희생으로 우리들은, 아니 나의 ‘제국’은, 귀한 첫 걸음을 무사히 내딛었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군요.”

 그녀는 연극의 배우처럼 과장스럽게, 왕족처럼 우아하게 그를 조롱했다.

 “그럼 이제 그만…죽어주세요. 당신의 할 일은 모두 끝났으니까, 이제 퇴장해주실 차례에요.”

 쑤걱

 “카, 카학! 끄르르르르…….”

 단검이 그의 뱃속을 휘젓자 검은 남자는 입가에 피거품을 일으키며 눈을 까뒤집었다. 그리고 끝까지 ‘왜……?’라고 물어보는 듯한 눈빛으로 천천히 르블랑에게 엎어지듯 쓰러졌다. 그녀는 파리 쳐내듯 남자를 쳐냈고, 남자는 자신이 만들어낸 피웅덩이 위로 쓰레기 덩어리 떨어지듯 철푸덕 쓰러졌다. 그리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지독한 침묵이, 또 다시 내려앉았다.

 지금 여기서 가장 영문을 모르겠는 쪽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잭스였다. 르블랑이 왜 갑자기 자신의 마스터를 죽인 것인지도 알 수 없었고, 마치 자신을 딴 사람 취급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 또한 이해가 안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잭스의 그런 혼란스러운 마음엔 안중도 없다는 듯 르블랑은 느긋하게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바로 잭스를 향해서. 방금 전 일을 전혀 신경 쓰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의 표정은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잭스의 지척까지 와서 그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미소가 더더욱 짙어졌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군요, 잭스. 역시 역전의 용사답다고나 해야 할까요? 아니면 흉악한 학살자답다고 해야 할까요. 이렇게까지 발버둥을 쳐주시다니……. 역시 당신을 그냥 여기서 죽이긴 너무 아까워요.”

 잭스는 혼란스러웠지만,

 “살려는 드릴께요, 지금은 말이죠.”

 이거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당신은 더 깊고 어두운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어야하니까요.”

 눈앞에 있는 이 자는, 절대로 르블랑이 아니었다. 


















잡담

0. 옵치팬픽은 대충 써도 조회수 무지막지한데 이건 왜...

1. 몇 배나 공을 들이는데...

2. 이래서 옵치팬픽이 쓰기가 싫어

Lv74 강철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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