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래그마타의 이야기는 꽤 심플해 보입니다. 블레이드 러너 등 유명 SF 고전과 일맥상통하는 주제를 풀어낸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 주제는 바로 누군가에게 필요 없는 존재로 태어난 생명이, 스스로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인 휴는 자신의 출생을 모르는 고아였지만, 그를 입양해 받아들여준 부모 덕분에 비로소 한 사람의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필요로 해준 가족의 존재가 휴에게 삶의 의미를 준 셈이죠.
"나는 D-I-0336-7. 크레이들에서 만들어진 최첨단 고성능 프래그마타야."
프래그마타로 태어난 다이애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이애나는 히긴스 박사의 딸 데이지의 불치병을 치료할 방법으로 만들어졌지만 적합도가 맞지 않아 태어난 후 폐기 판정을 받습니다. 고아 출신인 휴처럼 다이애나는 실패작으로 버려진 존재입니다.
그리고 휴가 그녀에게 해주는 첫 번째 일은 이름을 주는 것입니다.
D-I-03367, 프래그마타 7번은 그 순간부터 '다이애나'가 됩니다.
번호가 기능을 위한 식별이라면, 이름은 존재를 위한 승인입니다. 과거 자신이 가족에게 받아들여졌듯, 휴는 다이애나 역시 누군가의 딸이 될 수 있도록 손을 내밉니다.
"살인 병기가 된 에이트, 바다의 꿈을 꾸는 다이애나"
이 지점에서 작중 최종 빌런인 프래그마타 8호, '에이트'와 대비가 생깁니다.
에이트는 아버지 히긴스 박사의 유언을 받아 달 기지의 인간들을 학살하는 AI입니다. 그녀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지만, 왜 존재하는지는 스스로 정하지 못합니다. 박사의 유지를 글자 그대로 해석해 지구에 고통을 주려는 목표 뿐이죠. 그녀는 끝까지 타인의 목적 속에 머무는 도구로 남습니다.
반면 다이애나는 휴와 함께하며 스스로의 소망을 품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꿈은 지구로 내려가 바다를 보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단순하지만 중요합니다.
바다를 보는 일은 임무와도, 생존과도 상관없는 순수한 개인의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다이애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쓰이기 위한 기계가 아니라, 스스로 보고 싶고 살아가고 싶은 생명이 됩니다.
결국 두 AI를 가른 것은 성능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받았는가, 필요하다고 인정받았는가, 자기만의 내일을 꿈꿀 수 있었는가의 차이죠.
그리고 휴도 이 관계 안에 있습니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엔지니어로 참여해 처음에는 생존하기 위해서 묵묵히 달 기지를 돌파하지만, 그의 목적은 점차 다이애나를 보호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과거 입양된 아이였던 휴는 이제는 또 다른 버려진 존재를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는 어른이 된 것이죠.
결국 프래그마타의 감동은 단순히 AI 소녀를 구해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실패작이라 버려진 존재가 이름을 얻고,
바다를 보고 싶다는 가장 인간적인 꿈을 품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기능을 수행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만의 풍경을 바라보고 싶어지는 일.
이것이 프래그마타가 차가운 SF의 외피 아래에서 끝내 따뜻한 인간찬가처럼 남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