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임 1년 무렵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64%였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가운데 문재인 전 대통령 다음으로 높은 수치다.[2] 그로부터 다섯 달이 지난 10월 첫째 주, 지지율은 37%다.[1]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33.8%까지 내려갔고, 정당 지지도는 국민의힘에 역전당했다.[3]
이상한 것은 성과가 없지 않다는 점이다. 코스피는 정부 출범 8개월 만에 두 배 가까이 올랐고[6], 9월 반도체 수출은 전체 수출의 절반을 차지했다.[1] 상반기 산재 사망자는 통계 작성 이후 가장 적었다.[17] 외교는 지금도 긍정 평가 이유 1위다.[1] 그런데 왜 무너졌나.
필자는 그 답을 '키워드의 오염'에서 찾는다. 정권이 선점한 단어가 구체적인 기준 노릇을 하지 못한 채 현실과 어긋나고, 끝내 상대의 공격 언어가 되는 과정이다. 단어는 처음에는 신뢰를 모으는 자산이지만, 결과로 갚지 못하면 불신을 키우는 부채가 된다. 이 정부의 단어는 대부분 대통령이 직접 걸었다. 그래서 단어가 무너질 때마다 그 비용도 대통령에게 곧장 청구됐다.
6·3 지방선거 압승은 이 청구서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민주당은 광역단체장 16곳 중 12곳을 가져갔다.[4] 대통령과 국회 다수, 지방권력까지 쥔 여권에는 이제 탓할 상대가 없다. 지지율이 본격적으로 꺾인 것도 그 직후부터다. 단어가 어떻게 부채가 됐는지, 분야별로 분석해보았다.
올해 1월 31일, 대통령은 X에 "부동산 정상화는 5천피, 계곡 정비보다 훨씬 쉽고 더 중요한 일"이라고 썼다.[6] 경기지사 시절 최대 성과로 꼽히는 계곡 불법시설 정비, 그리고 코스피 5000. 대통령은 집값을 그 연장선에 놓았다. 한 달 뒤에는 다주택자뿐 아니라 투자용 1주택자도 집을 파는 편이 유리하게 만들겠다고 했다.[8] '실거주'는 이 정부 부동산 정책의 핵심 단어가 됐다. 8월 세제개편안은 집은 사는(buying) 것이 아니라 사는(living) 곳이라는 원칙 아래 비거주 1주택자의 공제를 줄였다.[9]
처음엔 통했다. 2월만 해도 부동산 정책은 긍정 평가 이유 2위였다.[44] 3월 갤럽 조사에서 정책을 잘한다는 응답은 51%였다. 그러나 7월에는 26%로 반 토막이 났다.[11] 서울 아파트값은 86주 연속 올라 역대 최장 기록을 세웠다.[12] 7월 넷째 주부터 부동산은 부정 평가 이유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1]
'실거주'는 너무 많은 것을 담은 단어였다. 불가피하게 집을 비운 1주택자의 세 부담, 전월세 시장으로 번질 부작용이 지적되자 당정은 8월 23일 실거주 인정 범위를 넓히며 물러섰다.[10] 기준이 아니라 구호였던 단어는 예외가 나올 때마다 후퇴할 수밖에 없다. 그 틈을 오세훈 서울시장이 파고들었다. 그는 정부 정책을 "실거주 맹신주의와 세금 만능주의"라고 불렀다.[13] 정부의 단어가 상대의 무기가 된 순간이다.
여기엔 역설이 하나 있다. 서울시장은 야당이다. 오 시장은 6·3 선거에서 약 1%포인트 차로 5선에 성공했다.[5] 주택 공급과 정비사업 인허가 권한은 서울시에 있다. 그런데도 집값의 책임은 고스란히 대통령에게 쏠렸다. 권한이 어떻게 나뉘어 있든, 단어를 가진 쪽이 책임을 진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작동 원리를 잘못 읽었다는 데 있다. 정부가 부동산의 금융적 성격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동산에 묶인 돈을 주식시장으로 옮기는 '머니 무브'가 전략의 중심이었다. 대통령은 이제 집 말고도 대체 투자 수단이 생겼다고 자신했다.[7] 그러나 한국에서 주식과 집은 서로를 대신하는 자산이 아니라 함께 부푸는 자산이었다. 2005년 코스피가 50% 넘게 오른 이듬해 서울 아파트값은 23.46% 뛰었고, 2020년에도 둘은 같이 올랐다. 2025년 서울 아파트값 상승률 8.71%는 19년 만의 최대치였다.[14] 주식으로 번 돈은 '똘똘한 한 채'로 돌아왔다.
계곡은 단속하면 정비된다. 시장은 기대와 유동성으로 움직인다. 정책은 투기와 실거주라는 도덕의 언어, 보유세라는 세금의 수단에 머물렀지만, 집값을 움직인 것은 금리와 유동성, 주식으로 불어난 자산이었다. 확신이 컸던 만큼 어긋났을 때의 대가도 컸다.
이 정부에서 가장 성공한 단어는 '코스피 5000'이었다. 대선 공약이던 이 숫자는 정권 초기에 현실이 됐고, 코스피는 출범 8개월 만에 두 배 가까이 올랐다.[6] 3월 갤럽은 집값 하락 전망이 우세해진 이유로 공약을 초과 달성한 증시와 대통령이 SNS로 밝힌 부동산 안정 의지를 꼽았다.[63] 증시의 성공이 부동산 정책의 신뢰까지 떠받치던 시기였다.
그 단어를 무너뜨린 것은 정부가 직접 문을 연 상품이었다. 1월 30일 금융당국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 같은 단일종목 주가를 2배로 추종하는 레버리지 ETF 도입에 착수했고,[51] 5월 27일 8개 운용사가 16개 상품을 한꺼번에 내놓았다.[52] 입법예고에서 상장까지 4개월이었다. 출시 두 달 만에 13조원이 넘는 돈이 몰렸다.[53] 6월 23일 코스피가 10% 가까이 폭락한 날, 이 상품들이 기계적으로 쏟아낸 매도 물량만 9조원이 넘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7월 초에는 삼성전자 레버리지 투자자의 82%, SK하이닉스 레버리지 투자자의 90% 이상이 손실 상태였다.[54] 7월 들어서는 일주일도 안 돼 수익률이 40% 넘게 떨어졌다.[55]
문제의 뿌리는 명분과 목적의 괴리였다. 겉으로 내건 명분은 자본시장 선진화와 투자자 선택권이었지만, 실제 목적에는 환율 안정, 즉 해외 주식으로 빠져나가는 돈을 국내로 돌리는 것이 들어 있었다.[54] 대통령 스스로 이 간극을 인정했다. 그는 7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이 상품이 외환 유출을 줄였다는 평가와 증시 불안을 키웠다는 평가가 엇갈린다고 하면서, "국민들이 그런 것까지 고려해야 할 상황은 아니다"라고 말했다.[57] 환율이라는 거시 목표를 위해 개인의 레버리지 투자를 정책 도구로 쓴 것이다. 계곡 정비의 사고방식이 시장에 적용된 또 하나의 장면이다.
상대는 단어를 뒤집었다. 안철수 의원은 "코스피가 카지노로 전락했다"고 했고,[60] 정점식 원내대표는 증시가 도박판이 됐다고 공격했다.[56] 블룸버그는 이 대통령의 증시 부흥 구상이 레버리지 ETF 때문에 역풍을 맞고 있다고 보도했다.[59] 국민의 64%는 이 상품의 도입이 잘못된 결정이라고 답했다.[58] '코스피 5000'은 '카지노 코스피'가 됐다.
책임의 향방도 눈여겨볼 만하다. 도입을 주도한 것은 김용범 정책실장이었다. 그는 미국에 있는 상품이 한국에 없다며 금융위원회에 검토를 지시했다고 밝힌 바 있다.[54] 정부는 7월 16일 기본예탁금을 3000만원으로 세 배 올리고 신규 상장을 멈췄지만, 손실이 커진 뒤의 뒷북 대책이라는 비판을 들었다.[56] 대통령은 그것으로 충분하겠느냐는 지적이 있다며 더 과감한 대응을 주문했고,[57] 김 실장은 2기 개각 직후 물러났다.[40] 그러나 책임은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야당은 "주연은 김용범, 감독은 이재명"이라고 했고,[61] 리얼미터는 7월 지지율 하락 요인으로 레버리지 ETF를 둘러싼 정책 갈등을 꼽았다.[62] 도구는 참모가 만들었어도, 그 도구를 덮은 단어가 대통령의 것이면 책임은 대통령에게 올라온다.
공정하게 말하면 도입에도 논리가 있었다. 한국 투자자들은 이미 홍콩에 상장된 삼성전자·SK하이닉스 2배 상품을 사고 있었고, 이 상품들은 올해 전 세계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자금 유입 1위와 3위를 기록했다.[64] 해외로 나가던 수요를 국내로 들이고 보호장치를 붙이겠다는 취지였다. 손실의 근본 원인이 반도체 주가 자체의 하락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문제는 상품의 존재가 아니라 속도와 명분이었다.
'머니 무브'는 이렇게 두 번 오염됐다. 부동산에 묶인 돈을 주식으로 옮기겠다던 전략은 주식으로 번 돈이 집으로 돌아가며 한 번, 주식시장이 카지노라는 비판을 받으며 또 한 번 흔들렸다.
거시 지표만 보면 지금은 호황이다. 9월 반도체 수출은 603억 달러로 전체 수출의 49.9%를 차지했다.[1] 그런데 갤럽의 경제 정책 평가는 처음으로 부정이 긍정을 앞섰다.[1] 숫자와 체감이 반대로 움직인다.
8월 고용동향이 그 이유를 보여준다. 전체 취업자는 1년 전보다 18만4000명 늘었지만, 청년층(15~29세) 취업자는 14만3000명 줄었다. 청년 고용률은 44.1%로 1%포인트 떨어졌고, 40대 취업자도 1만7000명 줄었다. 늘어난 것은 60세 이상(19만1000명)이다. 제조업과 건설업 일자리는 각각 3만8000명, 3만2000명 사라졌다.[15]
세대별로 읽으면 더 선명하다. 2030은 첫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4050은 이른 퇴직 뒤 다른 일을 찾아 나서야 하며, 5060은 연금이 나오기 전까지의 공백을 낮은 임금의 일자리로 메운다. 반도체는 자본이 일하는 산업이다. 수출이 늘어도 사람을 그만큼 뽑지 않는다. 대기업의 호황이 국민의 일자리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가 끊겨 있다.
공정하게 말하면, 청년 일자리 감소는 이 정부가 만든 것이 아니다. 청년 취업자는 3월 기준 41개월째 줄고 있었고, 기업들이 신입 대신 경력직 수시채용을 선호하게 된 변화도 크다.[16] 문제는 그 흐름을 뒤집을 수단을 내놓지 못한 채 '호황'이라는 단어만 앞섰다는 데 있다.
이 정부에는 분명한 성과도 있다. 상반기 산재 사고사망자는 253명으로 1년 전보다 11.8% 줄어 통계 작성 이후 가장 적었다.[17] 정부 발표 기준으로 보이스피싱 피해도 연초까지 넉 달 연속 줄었다.[18] 그러나 이런 성과는 체감되지 않는다. 사고가 나지 않은 것,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통계로만 존재한다. 같은 기간 대전 공장 화재와 방산업체 폭발로 제조업 사망자는 오히려 25명 늘었고[45], 사람들은 그 장면을 기억한다. 통계는 성공했고, 체감은 실패했다.
검찰개혁은 이 정부의 가장 오래된 단어다. 그런데 여권 안에서 이 단어는 두 개의 뜻으로 갈라졌다. 당의 강경파에게 검찰개혁은 '완성'이었다. 보완수사권까지 남김없이 없애는 완전한 수사·기소 분리다. 대통령의 검찰개혁은 '과잉 경계'였다. 그는 1월 기자회견에서 보완수사는 원칙적으로 안 하는 게 맞지만 예외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있다고 했다.[20] 3월에는 SNS에서 "과도한 선명성 경쟁"이 개혁 기회를 망칠 수 있다며 강경파를 직접 겨냥했다.[19]
같은 단어가 두 뜻으로 갈라지자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신중론은 여권 강성 지지층에 영향력이 큰 김어준 씨의 방송에서 '공소취소 거래설'로 번졌다.[19] 결국 이긴 것은 당의 단어였다. 7월 31일 보완수사권을 전면 폐지하는 형사소송법이 범여권 주도로 통과됐고[21], 대통령은 8월 4일 국무회의에서 거부권을 쓰지 않았다. 논란은 있지만 국회 입법권을 부정할 만큼 심각하지는 않다는 이유였다.[22] 10월 1일 대통령은 "불가역적 검찰개혁"을 말하며 당의 어휘를 흡수했다.[23]
갈라진 단어의 빈자리는 상대가 채웠다. 개정안에 공소기각 사유가 추가되자 정점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 법을 "탈옥법"이라 불렀다.[21] 여권 안에서 '완성'과 '과잉 경계'가 다투는 사이, 바깥에서는 '방탄'이라는 세 번째 뜻이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키워드 정치의 가혹한 규칙이 드러난다. 단어를 양보하면 소유권은 넘어가지 않고 책임만 넘어온다. 대통령은 자신이 선호하지 않은 설계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10월 2일 출범한 새 형사사법체계에서 첫 대형 사건이 꼬이면, 그 책임은 법안을 밀어붙인 의원이 아니라 대통령에게 돌아갈 것이다.
더 아쉬운 것은 이 논쟁에서 사라진 단어다. 수사와 기소를 나누는 것은 권한이 한곳에 몰리는 문제를 다룰 뿐, 권력자를 기소하지 않는 문제는 다루지 못한다. 공소청은 법무부, 중수청은 행안부 소속이다.[46] 분리는 행정부 안에서만 일어났다. 김건희 씨의 도이치모터스 사건은 검찰이 불기소했고, 특검이 기소한 뒤에야 2심에서 유죄가 나왔다.[26] 교정은 제도가 아니라 특검이라는 일회성 장치로 이뤄졌다.
이 빈틈을 메울 장치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정부 출범 직후 국정기획위원회는 시민이 기소 여부를 정하는 '시민기소위원회'를 검토했고[24], 6월 발의된 범여권 개정안에는 시민이 검사의 처분을 뒤집을 수 있는 '공소심의회'가 담겼다.[25] 그러나 공개 논쟁은 보완수사권과 공소기각 조항에 모두 빨려 들어갔다. 이 정부는 스스로를 '국민주권정부'라 부른다.[23] 그런데 국민에게 기소의 권한과 책임을 나누는 가장 국민주권적인 장치는 끝내 키워드가 되지 못했다.
검찰의 권한이 경찰로 넘어가는 사이, 경찰은 신뢰를 잃고 있었다. 광주 장윤기 사건에서는 경찰의 수사 무마와 증거 인멸 의혹이 불거졌고, 제주에서는 실종 신고를 허위로 종결 처리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부는 경찰의 부실수사가 보완수사권 폐지와는 무관한 조직의 구조적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30] 그러나 대통령 스스로 8월 25일 국무회의에서 경찰이 앞으로 국가기구 중 가장 큰 권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며 "권한의 크기만큼 책임도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다.[27]
그다음 벌어진 일은 '개혁'이라는 단어의 범람이었다. 경찰청의 수사개혁위원회, 총리실의 경찰개혁위원회와 추진단, 민주당의 경찰개혁추진단이 잇따라 꾸려졌다. 비슷한 기구가 난립하는 사이 경찰청장 자리는 21개월째 비어 있었다.[28] 경찰청 차장 출신 임호선 의원은 혁신, 쇄신, 개혁이라는 말을 이미 다 써버려 '새경찰추진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털어놓았다.[29]
이것이 단어의 공동화다. 단어는 늘어나는데 책임질 주체는 비어 있다. 모든 것을 담으려는 단어는 결국 아무것도 담지 못한다. 국민이 묻는 것은 기구의 이름이 아니라, 장윤기 사건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났을 때 누가 책임지느냐다.
9월 21일, 서부전선 비무장지대에서 수색로를 내던 육군 25사단 간부 3명이 지뢰 폭발로 다쳤다. 2명은 중상이었다.[31] 이틀 뒤 대통령은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평화공존 구상을 밝혔다.[32] 정부가 지키려던 단어는 '평화공존'이었다.
그 단어를 지키기 위해 정부는 다른 단어들을 피했다. 군은 북한군의 지뢰 매설 가능성을 '지형변화'라는 말로 설명했다.[33] 현장조사 착수까지는 엿새가 걸렸다.[36] 국방부 장관이 북한군 지뢰가 확실하다고 밝힌 날에도 청와대의 메시지에는 '북한'이 없었다.[32] 민주당은 처음에 야당의 공세를 음모론이라고 반박했다.[37] 10월 1일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도 대통령은 북한 지뢰를 언급하지 않은 채 장병들이 '불의의 사고'로 다쳤다고만 말했다.[48]
피한 단어의 자리는 상대가 채웠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이 사안을 외환죄로 규정하며 탄핵까지 입에 올렸다.[34] 가장 날카로운 공격은 대통령 자신의 말에서 나왔다. 정점식 원내대표는 대통령이 과거에 했던 "부를 땐 나라의 아들, 다치면 느그 아들"이라는 말을 꺼내 들었다.[35] 상대는 단어를 새로 정의할 필요조차 없었다. 단어의 주인이 예전에 내린 정의가 그대로 잣대가 됐다.
군이 북한의 매설을 공식화하자 민주당은 초기의 유보를 거두고 "명백한 도발"이라며 대북 규탄 결의안까지 제안했다.[36] 10월 5일 합참은 북한이 약 1년 전 군사분계선 남쪽 10m 지점에 고의로 매설한 지뢰라고 최종 결론을 냈다.[38] 당은 먼저 강경한 단어로 갈아탔고, 신중한 언어는 대통령 혼자 들고 있게 됐다. 3주 사이 '국방·안보·대북'을 부정 평가 이유로 꼽은 비율은 3%에서 15%로 뛰었다.[1]
공정하게 말하면 신중함에는 이유가 있었다. 여당의 설명대로 사고 지점은 기존 수색로를 벗어난 새 진입 지역이었고[33], 2015년 목함지뢰 사건 때는 확성기 방송 재개가 북한의 포격으로 이어졌다. 대통령은 9월 29일 국무회의에서 유엔사와 협조해 진상을 투명하게 밝히라고 지시했고[49], 다음 날 부상 장병들을 찾아 충분한 예우를 약속했다. 그 자리에서 장병 가족들은 부상 장병을 이용해 음모론을 펴는 사람이 너무 많아 힘들다고 호소했다.[50] 문제는 신중함이 아니라 신중함을 표현한 방식이었다. 처음부터 "북한 소행 가능성을 포함해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면 신중함과 단호함을 함께 지킬 수 있었다.
대북 정책에는 구조적인 약점도 있다. 외교는 지금도 긍정 평가 이유 1위지만, 대북 정책 평가는 긍정 24%, 부정 55%다.[1] 외교의 결과는 정부가 만들 수 있지만, '평화공존'의 결과는 북한이 쥐고 있다. 결과를 상대가 통제하는 단어일수록 오염에 취약하다.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그 순간의 언어뿐이었는데, 그 언어를 회피로 관리했다.
대통령은 통합과 실용을 내걸고 취임했다. 이 단어들을 흔든 것은 정책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인사부터 그랬다. 1기 내각에서 이진숙·강선우 후보자가 낙마하자 정부는 인사수석실을 새로 만들었다.[40] 그러나 8월 30일 2기 개각에서 김승원 법무부·용혜인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또 낙마했고, 강훈식 비서실장은 9월 21일 인사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39] 야권은 그 배후로 '성남라인 비선'을 지목했다.[41] 인사를 부정 평가 이유로 꼽은 비율은 9월 16%까지 올랐다가 청문회 정국이 끝나자 3%로 떨어졌다.[1] 인사는 단어의 오염이라기보다 검증 시스템의 실패였다. 그러나 실용과 능력을 말한 정부가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자 그 단어도 함께 닳았다.
당과의 관계는 더 깊은 흔적을 남겼다. 8·17 전당대회를 앞두고 대통령과 친명계 인사들이 김민석 당시 총리의 당권 도전에 힘을 싣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42] 반대편에서는 김어준, 유시민 같은 친여 스피커들이 대통령을 공격했고, 지지층 사이에는 멸칭이 오갔다.[42] 대통령은 3월에도 SNS로 당내 강경파를 직접 반박한 바 있다.[19] 실제 개입이 어디까지였든, 국민의 눈에 대통령은 통합의 조정자가 아니라 한 진영의 지도자로 비쳤다. 리얼미터는 9월 하락의 원인으로 진보층과 20대의 이탈을 꼽았다.[3]
말과 말의 충돌은 해명으로 수습할 수 있다. 말과 행동의 충돌은 그렇지 않다. '통합'은 상대의 공격이 아니라 대통령 자신의 행동이 흔든 단어다.
이 분야들을 겹쳐 놓으면 하나의 무늬가 보인다. 대통령의 결단은 집행형 문제에서는 통했다. 산재 사망과 보이스피싱처럼 정부가 감독과 단속으로 직접 바꿀 수 있는 문제였다. 노동부는 산재 감소의 요인으로 대통령의 메시지와 정부의 감독을 꼽았다.[17] 경기지사 시절의 계곡 정비도 같은 종류의 성공이었다.
그러나 집값과 청년 일자리는 다르다. 수많은 개인과 기업의 기대와 선택이 결과를 만드는 시장형 문제다. 여기에 단속형 결단을 들이대면 시장은 정부의 의도와 다르게 반응한다. 대통령이 부동산 정상화를 계곡 정비와 나란히 놓은 순간, 두 종류의 문제를 같은 것으로 보는 사고방식이 드러났다. 환율을 잡겠다며 개인의 레버리지 투자를 정책 도구로 삼은 단일종목 ETF도 같은 사고방식의 산물이었다.[54] 계곡은 정비할 수 있어도 시장은 정비할 수 없다.
경제학자 하이에크는 사회에 흩어진 지식을 어느 한 사람이 다 가질 수 없다고 했다. 대통령이 모든 분야를 직접 알고 결단하는 구조에서는 그 한계가 곧 국정의 한계가 된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정책 현안의 전면에 나서는 방식은 지지율 하락기에 부담이 된다는 분석도 이미 나왔다.[43] 경찰청장과 검찰총장 자리가 오래 비어 있는 동안 결정과 책임은 모두 대통령에게 몰렸다.[28][47] 모든 단어를 대통령이 직접 소유하는 구조다. 그래서 정책 하나가 빗나갈 때마다 그것은 정책의 수정으로 끝나지 않고 대통령 개인의 신뢰 붕괴로 번졌다.
이것은 민주적 대통령이 가진 한계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에서는 빗나간 계획을 힘으로 덮을 수 없다. 그 대가는 지지율과 오염된 단어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진단은 이 정부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전 정부의 '법과 원칙', '공정과 상식'은 "법적으로 문제없다"가 책임의 상한선이 되면서 '법기술'이라는 말로 오염됐다. 단어는 정권을 가리지 않는다.
처방은 단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단어를 소유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첫째, 단어마다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을 붙여야 한다. '실거주'를 말한다면 예외의 기준을 먼저 내놓아야 예외가 후퇴가 아닌 적용이 된다. 둘째, 불리한 단어를 먼저 말해야 한다. 피한 단어의 자리는 언제나 상대가 채운다. 셋째, 결단할 문제와 위임할 문제를 구분해야 한다. 집행형 문제는 결단으로, 시장형 문제는 위임과 실험으로 풀어야 한다. 위임은 약함이 아니라 흩어진 지식으로 오류를 바로잡는 장치다.
국민은 이 대통령의 이상에 공감했다. 취임 1년의 64%가 그 증거다.[2] 이상은 틀리지 않았다. 빗나간 것은 이상을 현실로 옮기는 작동 원리였고, 단어는 그 틈을 가장 먼저 드러냈다. 단어는 약속이 아니라 담보다. 결과로 갚지 못한 담보는 상대가 가져간다.
참고 자료 (본문의 [숫자]는 아래 목록 번호)
촛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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