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전역한 지 얼마 안됐던 때였을 겁니다.
복학한 저는 자연스럽게 복학생 냄새를 풍기며 학과에서 겉도는 존재가 되었고,
그 전에 알고 있던 과 선배들과 술이나 마시며 적당적당히 게임하는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주로 하던 게임으로는 과 선후배들과 같이 할만한 롤이나, 제 취향이 꽤 반영된 히오스가 있었습니다.
히오스는 그 특유의 시스템 때문에 지원가가 롤의 서폿과는 다르게 존재감이 상당했고, 저는 그게 맘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숙사 룸메형과 함께 피시방을 가서 그 형은 테라를 하고 저는 히오스를 하는,
상당히 마이너한 사람끼리 시간을 죽이곤 했죠.
그렇게 하던 히오스도 어느 정도 하다보니 물리기 시작했습니다.
랭크보다는 빠른 대전을 선호했었고, 그래서인지 목적 의식이 없었던 탓이었을까요.
나름 게임 MMR이 오르는 것을 기록하고는 했지만, 이건 자기 만족이었죠.
그렇게 이제 히오스가 물려서 영웅 선택창을 띄워놓고 멍때리고 있자니 옆의 형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할 게임 없냐?"
"요새 옵치도 재미없고 롤도 재미없고 히오스는 제일 재미 없네요."
"와우 클래식인가 뭔가 하는게 나왔다던데 그거 한번 해봐."
와우는 피시방에서 무료였습니다.
꽤 솔깃했던 저는 한번 와우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원래 롤에서 노틸러스가 주챔이었고, 옵치에서는 라인과 디바가 주캐였고, 히오스에선 요한나, 바리안, 아서스가 주영웅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당연히 탱으로 입문해볼 생각이었지만, 초보자는 탱이 아주 안 좋다고 하더군요.
차선책으로 귀족이라는 힐러를 골라보기로 했습니다.
호드는 너무 취향이 아니었고 얼라이언스에서 인간 사제를 골랐습니다.
그 땐 나무위키에서 본 인간 종특 급장이 클래식에도 있는 줄 알았거든요.
대충 애드온이란 것도 설치해보고 게임을 무작정 했습니다.
흰 긴머리 때문에 닉네임은 자라나라머리머리를 하려다가 중복된 닉이라길래(이분은 나중에 만났습니다.)
자라나라모발모발로 했습니다.
워낙에 게임이 불친절했던지라 항상 크롬을 켜놓고 한 탭에는 인벤 오리지널 퀘스트를, 한 탭에는 와우헤드 클래식을 틀어놓고 게임을 했습니다.
만렙을 찍으면서 했던 것은 거의 본인한테 보호막 걸고 마법봉 평타질 했던 기억밖에 없네요.
던전 빼고 필드 사냥을 할 때는 마나가 부족해서 성스러운 일격도 못쳤습니다.
렙업하다보니 불편한 것이 있으면 일단 애드온부터 검색했습니다.
내가 불편하면 다른 사람도 불편할 것이다=고로 애드온이 있겠지? 싶었던 사고의 흐름이었습니다.
점점 애드온은 쌓여가고 제 캐릭터 경험치도 쌓여가고, PC방비도 쌓여갔습니다.
PC방비가 아까워 결국엔 월 정액제를 결제하고 제 컴퓨터로 했습니다.
제가 게이밍 노트북을 계속 쓰고 있는데 그게 사양이 괜찮다보니
룸메 형이 제 노트북으로 테라를 하고 제가 사양 구린 룸메형 노트북으로 와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게임을 즐기다보니 나중 가서는 길드도 가입하게 되고 라그도 잡아봤습니다.
축지도 만들었었네요.
처음엔 잡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경험이었지만 이후에 로그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롤이나 히오스나 옵치를 하면서 익숙한 개념이었습니다.
길드가 점점 커지고 길드원+외부 인원으로 정공을 만들게 되었을 때부터 이 로그 올리기에 혈안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화산심장부에서 내면의 집중력 키고 치유의 기원 최고레벨 캐스팅을 성공했을 때 쾌감이 아직도 기억나네요.
로그는 아마 80점대로 마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인벤 와클 게시판이나 클래식 사제 게시판 보면 좀 그때 썼던 글이 남아있을 거 같네요.
그리고 두번째 레이드인 검은날개 둥지가 열리고 저희 공대는 첫주에 네파킬까지 성공합니다.
비록 7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렸지만, 충분히 마음에 들었던 진도였죠.
크로마구스에서 필수적인 아이템인 '시간의 모래'가 거의 다 떨어져서 마지막 트라이를 선언했을 때 잡은 느낌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로그도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같은 공대의 신기님과 힐량을 경쟁하고 있었지만, 근소한 차이로 제가 이기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다른 힐러님들은 로그에 크게 연연하지 않으셨으니 자연스럽게 로그는 높게 나왔습니다.
이 때부터 뭔가 신성사제에 대한 묘한 애착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첫 캐릭이라 그런걸까요?
신기 부캐를 키워볼까 하다가도 신성사제라는 그 -흰-에 매료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안퀴라즈까지 로그작을 하면서 열심히 했었습니다.
열심히 했었다는 말은 점점 의욕이 떨어졌다는 말이죠.
가장 큰 원인은 아이템 정찰제였던 공대가 골드 경매 규칙을 바꾼 것에 있었습니다.
그때 다니던 공대는 아이템 부위마다 최대 가격을 매기고 경매가 최대 가격에 도달하면 포인트를 따져 아이템을 받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퀴라즈부터는 최대가격을 제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제 하나만 키우던 저에겐 큰 타격이었습니다.
사제는 앵벌 능력이 최하위였기 때문이죠.
하루종일 앵벌해도 법사가 1시간 앵벌하는 것보다 못하니 골드 격차는 점점 났고,
현질 할 수 있는 직장인도 아닌 학생이다보니 점점 템이 뒤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쑨 둔기가 제 전재산의 5배에 팔리는 것을 보고 저는 와클을 접었습니다.
사실 와우를 통해서 아는 형이 격아로 오라고 꼬시고 있었고 조금씩 조금씩 하고는 있었습니다.
호드로 하는 것이 좋다고는 들었지만, 와클을 하면서 7시간 동안 시체지키기를 당한 아픈 기억 때문에 호드의 'ㅎ'자만 보여도 경기를 일으키는 수준이었고 멍멍이도 좋아해서 늑인 사제를 키우기로 했습니다.
닉네임은 자라나라모발모발을 이은 자라나라터럭터럭...
처음엔 렙업하면서 대충대충 하는 수준이었지만, 와클을 접자마자 빠르게 렙업을 하고 템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세기말에 합류해서 별로 하지도 못하고 소둠땅이 열려버렸고
나이알로사도 제대로 못한채 4신으로 마감했습니다.
이 땐 아마 수사를 하다가 아는 형의 신사 잘한다는 말에 신사로 갈아탔던 걸로 기억합니다.
신사를 잘한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수사 말고 신사나 하라는 말이 아니었을까요?
그래도 40인을 힐하던 노하우 덕분에 채우는 힐은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필드에서는 수사로 다니고 던전에선 신사로 스왑하는 이상한 방법으로
하루만에 만렙을 찍고 재봉도 만숙 찍고 워낙 바쁘게 돌아다녔던 기억이 있네요.
그땐 와우 같이 하던 형도 있었고 동생도 있어서 셋이 우르르 돌아다니며 빠르게 템렙을 올렸습니다.
쐐기 나오기도 전 주에 184인가 찍었었는데, 다음 주 쐐기를 꼭 열심히 돌자고 했었죠.
확팩초에 엄청 달리고 나니 나스리아 성채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일반이 나오자마자 꽤 높게 만들어둔 템렙으로 신사였음에도 얼라에선 나쁘지 않은 넴드까지 갔었죠.
그런데... 나스리아는 좀 기억이 삭제된거 같아요.
엄청 열심히 하다가 어느 순간부턴가 다른 게임 하러 갔었거든요.
그래서 매주 쐐기 한판만 주차하며 근근히 하다가 진도를 열심히 빼보려는 생각에 9.0.5때 풀악셀을 밟았습니다.
그 때 올신 공대에도 한번 가보고
(암신 스왑이었는데 하필 힙스터 키리안이라서 딜이 안나와서 다른분으로 교체되고 업적을 못땀)
정공을 구해서 결국 6신까지 갔었습니다.
절규날개 99점 찍고 여기다 자랑도 했었죠 허허.
수사로 바꿀까 생각도 많이 했지만 왠지는 모르는 그 이상한 신사의 매력때문에 계속 했던거 같아요.
아마 힙스터 기질이 아니었을까요?
나는 이 개똥쓰레기 전문화로 너의 힐을 이겼다! 이런 느낌으로....
9.1때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같이 하던 형이랑 동생이 모두 접은 것이었습니다.
정확히는 9.1때 부죽하던 동생은 특화 롤백 안해주면 도저히 못하겠다고 그러다가 진짜 접어버렸고
형은 9.0때도 고신화는 잘 안가던 라이트 유저였던 데다가 취업준비 때문에 바빠졌거든요.
그래도 혼자였지만 9.1때 첫날에 코르시아 기록관 3단계도 찍고 별걸 다했었네요.
그냥 와우 자체랑 신사라는 전문화에 매력을 느끼고 했던 거 같아요.
와우가 망겜망겜이라고 해도 제대로 한 확팩이 오리와 어둠땅뿐인 저에겐 대체 불가능한 소중한 게임입니다.
신1사도...아마 대체 불가능한 소중한 전문화가 아닐까요?
하지만 9.1때 디아블로라는 핵폭탄 땜에 인원이 다 터져나갔죠.
저도 길드 레이드로 공대장을 잡다가 길드원들이 전부 호드가서 길드 자체가 거의 터졌습니다.
그래서 길마도 전 길마한테 돌려주고 길탈까지 해버렸고요.
그 때 와생에서 제일 방황했던 거 같아요.
I눌러서 대충 보다가 끄고...그랬다가 지금 다니는 공대를 만났습니다.
이 공대도 힐러가 우르르 나가서 신1사라도 데려가려고 구인하더라구요.
열심히 해보겠다는 생각에 공대에 정착했고, 나름 재밌게 하고 있습니다.
켈투도 이번에 잡았고, 투기장 1800도 찍었고, 쐐기는 2300에서 딱히 올릴 생각은 없고....
20단 올시클은 해보고 싶지만 얼라 글로벌로는 조금 힘들거 같긴 하네용.
그냥저냥 적당적당한 양민 신사라고 생각을 해요(시간 갈아넣는 거에 비해서)
왜 신사를 계속 하는지에 대한 제 물음표는 아직도 남아있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오락하는 데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냥 재밌으니 하는 거지.
전 이 신사라는 흰 똥에 매료되었나봐요.
사제 게시판 분들도 사제, 와우 욕하지만
"그래도 사랑하시죠?"
네, 저는 매우 사랑합니다.
곧 학교를 졸업해서 아마 와우를 쉴 것 같지만 돌아오면 이 게임에 제 자리가 있으면 좋겠어요.
신1사로 계속 레이드를 다니고 싶네요.
긴 글 출근시간에 천천히 읽으시라고 아침에 센치한 감정으로 대충 썼습니다.
다들 좋은 하루 되십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