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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놀테형에게 선물 ♥ 놀테형만 보기

아이콘 줄그은호박
댓글: 94 개
조회: 1609
2018-11-06 17:17:43


어차피 안읽을걸 알지만 이글을 통해 놀테형에게 바라는거

1.형이 알고 있는건 나도 안다.
2.형이 알고 있는건 좆도 아님
3.형이 신봉하는 어만은 좆도 아님(사본학을 알고 싶으면 메쯔거책을 읽고 오시라>
4.신학을 무시하지 마라.



<다니엘서 저작에 대하여>

- 글리슨L.아처(G. L. Archer)의 구약총론 中 557-588  발췌-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33654
저자 : 글리슨 아처
글리슨 아처
하버드 대학교 졸업(B.A.,M.A.,Ph.D.)
프린스턴 신학교 졸업(B.D.)
서퍼크 법과대학 졸업(L.L.B.)
플러 신학교 성경언어학 교수 역임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구약학 명예교수


질: 다니엘의 정경성립 과정에 문제가 있었나?
답:

 (1) 유대의 정경은 다니엘을 선지서에 두기보다 케투빔(혹은 성문서)에 둡니다. 이것은 이 책이 선지서를 포함한 모든 정경이 형성된 후에야 기록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포로 후 시대의 말라기와 "제3이사야" 후까지로 봅니다. 그러나 케투빔(히브리 성경의 세번째 구분) 있는 문서들 중에 어떤 것들은 상당히 오래된 것입니다.(욥기나 다윗의 시편이나 솔로몬의 글 등이 그렇다.) 그러므로 케투빔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후대의 것임을 증거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요세푸스([아피온 반박] 1:8)는 이미 제5장에서 본 바와 같이 a.d.1세기에 다니엘이 구약성경의 두 번째 부분에 있는 선지서에 포함되었음을 언급하였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후시대에 이르기까지 케투빔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이 점에 대한 멋진 토론이 레이드 헤리스의 책 The Inspiration and Canonicity of the Bible, pp.141-43, 184-85에 있다.). 맛소라 학자들이 이 책을 케투빔에 포함시킨 이유는 그들이 볼 때 다니엘은 선지자로 임명되거나 기름부음을 받은 적이 없다는 데 근거한 것입니다. 그는 평생토록 정부의 고위직에서 일했을 뿐입니다. 둘째로, 그의 대부분의 글이 예언의 성격을 띠지 않고 역사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1-6장) 이것은 정경 선지자들의 책이 나타난 것과는 다른 양상입니다(해리스는 그의 [구약서론], p.276에서 쿰란의 규율서에서 두 번(IQS 1:3; 8:13), 사독계 단편에서 두번(CDC5: 21:7:15) 모두 네 번이나 구약성경을 단순히 "율법과 선지자들"이라고만 부르고 정경의 제세번째 부분에 대한 언급은 없음을 지적한다. 신약성경에서도 구약성경을 부를 때, 누가복음 24:44에서 시편을 따로 언급하는 것 외에는 위와 같은 방식을 따르고 있다. 해리스는 그의 책[성경의 영감과 정경성] 재판에서 선버거(A. C. Sunberg)가 제언한 바 이 모든 경우들이 구약 정경 중 오직 2/3만 언급하는 것이라는 것을 반박하고 있다.). 다니엘이 쓴 것 중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그의 대변자의 입을 통하여 선포하는 형식의 메세지는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대부분이 저자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진 예언적 환상과 천사에 의해서 해석되는 것들로 구성되고 있습니다.(이와 유사한 것을 환상의 연속으로 나타나고 있는 스가랴서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스가랴서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메세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전달하는 데 더 많은 강조가 있다.) 이 책의 일부는 역사적인 설화요, 다른 부분은 예언적 환상이라고 하는 혼합적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후대의 유대 서기관들이 그것을 정경의 세번째 혹은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부분에 할당하게 되었습니다.

 (2) 예수 벤 시락([집회서]<Ecclesiasticus>)이 다른 모든 선지자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해도 다니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한 바가 없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b.c.170) 그러나 에스라와 같이 다른 중요한 저자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음을 이미 말한 그대로 욥이나 사무엘, 아사, 여호사밧, 모르드개 등을 제외한 사사들같이 성경 역사에서 중요하게 인정된 중심인물들에 대해서도 그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지도자들을 예수 벤 시락이 알지 못했다고 말할 만한 강한 이유가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ZPEB 2 19A(우가릿어로 된 아카트 이야기(Tale of Aqhat)에서 다넬(Dan'el)이 언급된 것에 대해 드레슬러(Dressler, "The Identification of Ugaritic Dan'el with the Daniel of Ezekiel." VT 29 <1979>, pp.152-61)는 이같이 동일시 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입증했다. 참조, E. B. C. 7, pp.5-6) 또한 비평가들은 예수 벤 시락에 따르면 요셉과 같은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다니엘의 경력은 상당히 요셉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셉의 구체적인 특징들이 다니엘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요셉과 같이 태어나서 그의 형제들의 통치자가 되고 그 백성들의 거처가 되며 그의 뼈가 주께 귀한 것으로 여겨진 사람이었다."(Ec' us49:15)


질:다니엘서에 여러 가지 역사적인 부정확성이 있는가?
답:

 (1) 다니엘서에 있는 여러 가지 역사적인 부정확성들로 인해 그 저자가 책에서 드러나는 시대보다 훨씬 이후에 살았음을 전해 준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 1:1에서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김 제 3년에 팔레스타인을 침략한 것으로 전술되어 있는데 반하여, 예레미야 46:2은 느부갓네살의 원년이 여호야김 4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갈대아의 정복자가 유다를 침노한 그 해, 그의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왕이 되었으므로 다니엘과 예레미야 사이에는 1년의 차이가 있는 셈입니다. 그렇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연대를 계산할 때 등극하기전 해의 첫 달로부터 왕의 통치연대를 잡습니다.(1년은 종교력에 따르면 제7월, 티시리 월에 시작함). 즉 b.c.605는 b.c.608년에 등극한 여호야김의 4년째 해입니다. 그렇지만 바벨론 사람들은 첫 통치연대를 다음에 오는 새해로부터 시작합니다. 즉,니산월 1일부터 시작합니다.(히브리 종교력에 따르면 첫 달임). 그러므로 605년은 갈대아 환산법에 따르면 여호야김 3년의 해입니다. 이와 같이 와이즈만(D. J. Wiseman)은 [갈대아  왕의 연대기](Chronicles of the Chaldean Kings, 1956)에서 느부갓네살이 605년 9월에 왕위에 올랐으나 그의 통치연대는 504년 4월에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2) 비평가들은 다니엘서에서 지혜로운 사람 혹은 점치는 사람의 한 계층이 "갈대아인"(kasdim)으로 언급되어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느부갓네살의 동족을 지칭하는 이 인종학적 용어가 훨씬 후대로 내려오기까지는 주술사 계층을 시사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느부갓네살 당시에는 그것이 단지 인종학적인 암시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즉. 다니엘의 저자는 신바벨론 제국이 완전히 몰락하여 거의 잊혀진 기록이 되었을 만큼 훨씬 후대에 썻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이론은 본문의 자료에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는 이 작품의 저자가 명백하게 카시딤을 느부갓네살의 종족을 지칭하는 인종학적 용어로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다니엘 5:30에서 벨사살은 "갈대아인의 왕"으로 언급되었습니다. 3:8에서도 사드락 메삭과 야벳느고에 대한 참소가 어떤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혈통으로는 갈대아 사람"인(Brwon, Driver, and Briggs, p.1098에서도 그렇게 본다) 것으로 보이는 고위정부관리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책에서 "갈대아 사람"이라는 말은 두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갈대아 사람이라는 말은 "예언자/제사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갈대아 혈통을 지적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용어는 지혜로운 사람들 중 그 어떤 계층을 지칭하지 않음이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이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이론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실을 바로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카시딤에 대한 이중의 용법을 다른 곳에서 찾아보아야합니다. 헤로도투스(제1권, 181-183단락)는 갈대아인에 대해서 언급할 때 그들이 수도를 장악하자마자 정치적으로 볼 때 바벨론의 중요한 직책들을 신속하게 다 잡았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갈대아인"은 벨 마르둑의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일찍부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윌슨(R. D. Wilson, [다니엘서 연구] 제1권)은 악카드어의 카스두(Kasdu), 혹은 칼두(Kaldu)가 수메르의 칭호인 갈두(Gal-du, "건축 전문가"를 뜻함)에서 나온 것으로서 점술사가 예언하는 천문학적인 도판을 만드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제시했습니다. 윌슨은 갈두를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바벨론의 샤마쉬 슈무킨(Shamash-Shumukin, b.c.668-648)의 제14년에 쓰여진 토판에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많은 수메르의 칭호들이 갈(Gal, "큰 자, 주인")이란 요소와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야콥센(Jacobsen)은 [코펜하겐 텍스트](Copenhagen Texts, p.3)에서 이 칭호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Gal-LU KUR, Gal-UKU, Gal-DAN-QAR, and Gal-SUKKAL. 이 갈두(Gal-du) 혹은 칼두(Kaldu)와 카스두(Kasdu)의 우회형태로 쓰여진 Kaldu라는 인종적 용어 사이에 있는 유사점은 순전히 우연일 수 있습니다(악카드어의 후대 바벨론 방언에서 치찰음, s, s, s는 치음 t와 d 앞에서 가끔 l로 바꾸어진다. 예로서 ac Xur(내가 썼다)는 al sur로 is tu(~으로부터)는 ul Tu로 나타난다. 따라서 Kasdu란 이름은 Kaldu로도 나타나며 이 형태가 후대 헬라어에서는 Khaldaioi(갈대아인들)로 되었다. 참조, W. von Soden. Grundiss der Akhadischen Grammatik (Rome, 1969)). 이와 같은 설명은 이용어가 다니엘 저자에 의해서 다양하게 사용되었음을 깨끗이 설명해 줍니다. 3:8에서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에 대한 참소는 아마도 고위 정부 관리로 보이는 어떤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3) 제5장에서 벨사살 왕이 나타나는 것을 초기의 비평가들은 비역사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나보니두스가 갈대아 제국의 마지막 왕으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설형문자 토판을 그 후에 발견함으로써 벨사살이 "그 왕의 그 아들"로 언급된 것을 우리가 알게 되어 이전의 비평들이 완전히 공신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나보니두스 제12년의 한 서판에 나보니두스와 벨사살<마르 샤리, mar sarri>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남겨 있다(4Q에서 발견된 "나보니두스의 기도" 단편은 1954년 밀릭(Milik)에 의해 출간되었으며, 벨사살에 대한 기록도 담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틑 EBC, 7:63-64를 참조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5장에서 벨사살이 느부갓네살의 아들로 언급된 것에 대해 계속 반박을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실제적으로 539년에 바벨론이 멸망할 때까지 다스린 나보니두스(Nabuna'id)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의 저자가 그 시대보다 훨씬 후대에 썻기 때문에 그를 느부갓네살의 아들로 추정하였다고 단언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논리는 옛날 사람들이 아들이란 단어를 혈연에 관계없이 동일한 직책을 계승하는 자를 가리켰음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애굽의 이야기 "키옵스(Cheops) 왕과 요술사들"에서(힉소스 시대의 것으로 Westcar 파피루스에 보존됨), 케프렌(Khephren) 왕자는 쿠프(Khufu=키옵스)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대왕에게 당신의 아버지 네브카(Neb-ka) 왕의 시대에 있었던 한 경이로운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네브카는 제 3왕조에 속한 왕으로서 제4왕조 사람인 쿠푸보다 완전히 1세기 앞선 사람입니다. 앗수르에서 이와 유사한 관습들이 살만에셀(Shalmaneser3)3세의 검은 오벨리스크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따르면 오므리 왕가를 완전히 전멸시킨 예후 왕을 "오므리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더구나 느부갓네살 왕과 벨사살 왕 사이에는 혈연적인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만약 나보니두스가 b.c.556에 왕권을 빼앗은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느부갓네살의 딸과 결혼하였다고 한다면 그녀에 의해 태어난 아들은 느부갓네살의 손자일 가능성이 짙어집니다(니토크리스(Nitocris)는 원래 느부갓네살의 아들 에윌므로닥의 아내였다. 그러나 그녀가 과부가 된 후에는 나보니두스가 그녀를 아내로 맞았을 수도 있다. 참조, Wood. CD, p.133. R. F. Dougherty. Nabonidus and Belchazzar(New Haven, 1929), pp.60-68). 아버지('ab or abba')라고 사용된 단어는 할아버지일 수도 있습니다.
 벨사살이 그의 아버지가 살아 있던 시기에는 제2인자(mar sarri, "왕의 아들")로 추대되었던 것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들이 있습니다.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 시대에 유대 왕국에서 차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대 세계에서는 평화로운 계승을 더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이런 관습이 일반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최근의 고고학적인 발굴에 따르면 벨사살은 그의 아버지 나보니두스가 북아라비아에 있는 테만에 군사기지를 유지하고 있는 동안 바벨론 왕국의 북부 변방을 지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르의 기지에서 발견된 것 중에 나보나이드의 비문(b.c.530년)이 있는데, 그것에 따르면 나보나이드 자신을 위한 기도를 올리고 그 다음에 그의 장남 벨사살(Bel-shar-usur)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이와 같은 기도는 오직 통치 중인 왕들을 위해서만이 관례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우르 지역에서의 발굴물들 중에는 b.c.543년의 나보니두스 명문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나보니두스와 벨사살(mar sarri, "왕의 아들")의 기도가 담겨져 있으며 그 첫아들(Bel-sar-usur)을 위한 두 번째 기도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들 기도문들은 통치중인 왕조를 위해서만 관습적으로 제공된 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설형문자의 문서들에 따르면 벨사살이 씨파르(Sippar)에 있는 성전에서 "왕의 제물로써" 양과 황소를 바쳤다고 합니다. 헤로도투스에게 정보를 제공한 자에게 관한 한 벨사살의 이름은 완전히 잊혀져 있었습니다.(b.c.450) 이 사실은 다니엘의 저자가 b.c.2세기에 살았다는 것보다 6세기 후반의 사건에 훨씬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시사해 줍니다.
 다니엘의 저작권을 후대로 돌리기에는 정말 어려운 또 하나의 부가적인 사건은 제5장에서 벨사살이 벽에 나타난 글씨를 해석하는 자에게는 나라의 세 번째 치리자로 삼겠다는 것입니다.(5:16) 왜 둘째가 아니고 세 번째로 약속합니까?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아버지 나보니두스가 살아 있는 동안은 벨사살 자신이 두 번째 통치자이기 때문입니다.

 (4) “메대 사람 다리오"란 인물이 역사적인 문제를 야기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저자가 그를 고레스의 세 번째 후계자를 휘스타스페스(Hystaspes)의 아들 다리오로 착각하였다고 가정했습니다. 또한 그는 메대인이 아니라 바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본문 자체의 내정으로 비추어 볼 때 지지하기 어려운 해석입니다. 그가 고대 아키메니드 왕조(바사의 왕조)의 후손으로 알려졌음에도, 그를 메대사람 휘스타스페스의 아들 다리오라고 부른 것에 대해 설명할 도리가 전혀 없습니다. 저자는 메대 사람 다리오가 바멜론에서 통치를 시작할 때 62세였다고 주장하나. 다리오 대왕이 통치를 시작할 때는 상당히 젊은 사람이었음은 고대로부터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다니엘 9:1메데 사람 다리오가 갈대아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homalk)고 주장합니다. 이 용어는 그가 자신보다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에 의해 왕권을 부여받음을 시사합니다. 이 점은 그가 고레스에 의해서 바벨론을 다스리는 총독으로 세움을 받았다는 가정과 잘 일치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다니엘 5:31에서도 그 "왕국"(malkuta')을 "받았다"(quabbel)고 말합니다. 이와 연관하여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오 1세를 그의 아버지 휘스타스페스와 관련하여 왕이 되었다는 점을 주목해보십시요. 연대적인 계산에 따르면 그는 고레스의 권위 하에 있는 부왕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 사실은 고레스가 그의 지휘 하에서 통치하는 여러 군주들이 왕이란 칭호를 쓸 수 있도록 허락해준 정책을 지지해 줍니다.
 단순히 한 명의 부왕이 "온땅에"(단 6:25) 사는 거민에게 칙령을 내릴 수 있는지에 대해 반기가 제기되었습니다. 만약 땅이란 단어가 사람이 살고 있는 근동 아시아 전역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반박은 적절합니다(이는 메대 사람 다리오가 느부갓네살이 옛날 다스리던 그 지역에만 한정되고 소아시아와 북앗수르 메대 바사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람어 'ar'a는 그와 유사한 히브리어 'eres와 같이 아주 폭넓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기보다는 단지 땅 지역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연결시켜서 생각할 때 이 용어는 별로 큰 어려움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또한 함무라비시대부터 바벨론의 왕들은 "우주의 왕"("만인의 왕", sarkissati) 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음을 지적해야겠습니다. 따라서 메대의 다라오는 그의 칙령에서 우주적 통치란 용어를 쓰는 고대의 관습을 따르고 있을 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메대의 다리오가 누구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어떤 고대의 역사가도 그를 이렇게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바루(Gubaru)라고 이름하는 통치자로 확인할 만한 아주 강하고 직접적인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는 설형문자의 기록과 헬라의 역사가들에 의해 바벨론을 정복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그 후 그 땅을 다스린 자로 알려져 있다. 몇 십 년 전만 하여도 이 구바루(헬라어, "Gobryas")를 다니엘에 언급된 치리자와 동일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에 대한 고대의 기록들 사이에는 우리를 혼란케 하는 차이점들이 있었기 때문에 로울리와 같은 비평학자들은 구바루를 메대 사람 다리오와 동일시 하는 것이 전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일축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로울리의 논증은 윗콤(J. C. Whitcomb)의 저술 [메대인 다리오](Darius the Mede, 1959)에 의해 대치되었습니다 .윗콤은 욱바루(Ugbarur), 구바루(Gubaru) 그리고 가우바루바(Gaubaruva)에 관한 모든 고대의 비문들을 다 모아서 연구하였습니다. 그것들은 나보니두스 역대기와 콘테노 사본 포울 사본 트레마인 사본 그리고 베히스툰 비문들입니다. 조심스러운 비교와 제거과정을 통해 윗콤은 욱바루와 구바루가 동일한 이름에 대한 다른 철자라는 것은 아주 잘못된 가정이며 그것이 우리를 혼란케 하는 것이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욱바루는 구티움의 통치자로서 나이 많은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유프라테스 강물을 인공수로로 끌어내는 전략을 짜내어 바벨론을 정복하는데 기여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의 욱바루의 역할에 관해 설형문자로 된 문서가 발견된 적이 없다는 것과 강을 나눈 전략에 대한 최고대의 역사기록이 540년대의 헤로도투스(HistI, 107, 191)에서 유래된다는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이 기사가 그 자신의 자유로운 허구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바벨론이 자발적으로 그에게 항복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 같은 전략에 대한 언급을 삭제한 것이 고레스 정부의 공적인 선전의도에 기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형문자 기록에 따르면, 욱바루는 갑작스런 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러운 승리를 가져온 후 수주 내에 사망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구바루란 사람이 고레스에 의해 바벨론과 에비르나리(Ebirnari, 강건너편)의 치리자로 지명되었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는 고레스왕 제4년, 6년, 7년, 8년으로 추정되는 토판에 언급되었으며(즉 b.c.535, 533, 532, 531) 캄비세스 제2년, 3년, 4년, 5년(b.c.528, 527, 526, 525)에 언급되었습니다. 그는 위-스메르디스(Pseudo-Smerdis)와 다리오 1세의 반란 때 죽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b.c.520년 3월 21일에 바벨론의 새로운 치리자가 우쉬타니(Ushitani)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윗콤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바벨론과 강 저편의 통치자인 구바루는 다니엘서에서 메대 사람 다리오로 나타나는 것이 틀림없다. 그는 벨사살이 죽은 후 즉시 갈대아 왕국을 다스렸으며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이 방대한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는 돕는 여러 도백들과 방백들(다니엘을 포함하여)을 임명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를 이렇게 동일시 하는 것은 다니엘서와 그 당시의 설형문자 기록에 나타난 여러 증거들을 만족스럽게 풀어가는 가장 좋은 길이다."(John C. Whitcomb. Darius the Mede, p.24)
 윗콤은 올브라잇(W. F. Albright)의 "The Date and Personality of the Chronicler"(JBL, 40:2:11)를 인용합니다. "고브리야가 '다리오'란 이름으로 제왕의 위엄을 실제적으로 취하였던 것은 아주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다리오라는 이름은 옛날 이란에서 제왕의 칭호였을 것이다. 고레스가 유럽 원정을 떠나 자리를 비우고 있을 때 고브라이어스는 이 칭호를 가졌을 것이다. 설형문자 기록이 벨사살의 비밀이었던 바 그가 그의 아버지와 함께 다스리는 왕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므로 메대 사람 다리오를 역사적인 인물로 확정해 주기를 우리는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바벨론의 유대인 저자가 신바벨론 역사의 주요 사실들을 잘 알고 있었음을 기대하는 것이 안전한 듯하다." 올브라잇이 시사한 바같이 다리오라는 이름은(바사어로 darayabahush)는 마치 "시저", "아우구스투스" 같은 존칭이었습니다. 중세 바사시대(Zend) 다라(dara)라는 단어가 왕이란 뜻을 가진 것을 보게 됩니다. 아마 다라야바후쉬는 "왕직에 있는 사람"(royal one)을 의미했던 것 같습니다(다리오 1세의 이름은 실제로 위슈타스파<Wistaspa, 즉 휘스타스페스>의 아들이란 뜻을 가진 스판타다타<Spantadata>였다. 다리야우쉬<Darayawus>는 그의 왕명이었다. 참조, F. W. Konig, relief und Inschrift des Konigs Dareios 1 <Leiden, 1938>, p.1).
 이와 연관된 것으로서 다니엘 6장에 있는 바, 다리오 왕 자신을 제외하고는 30일 동안 그 어떤 것에도 예배를 금하는 칙령에 대해 언급해야겠습니다. 사실 그의 충실한 신하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로써 그 칙령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후회했던 점을 미루어 생각할 때 왜 그가 그 칙령을 승인했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의 태도를 지배하는 정치적 충성심과 종교적 충성심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생각해 볼 때 정치가로서 여러 이질적인 종족과 서로 다른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사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바사 제국의 우월성을 실제적으로 행사하기 위해 이와 같은 법령을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축복이나 은혜를 간구하는 뜻에서), 예배를 잠깐 동안 중지시킴으로써 다리오의 신하들은 메대와 바사가 갈대아인들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대 사람들의 심리를 생각해 볼 때 이와 같은 칙령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해 버리거나 혹은 많은 비평가들이 시도하는 것처럼 그것을 전혀 근거 없는 우화나 비역사적인 것으로 일축해버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질:다니엘서는 마카비 시대에 기록되었나?
답:

 (1) 다니엘서의 후대설을 지지하는 신학적인 논거들
 마카비설을 지지하는 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사상이 진화론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에 대해 강조합니다. 그들은 다니엘서에 있는 큰 주제들과 강조들이 중간사 시대에 있는 묵시문학의 특징과 닮았다고 주장합니다(예를 들자면 에녹서, 열두 족장의 유언, 그리고 토빗과 수산나 같은 묵시문학들). 그들은 이 책들이 천사들을 많이 소개하고 최후의 심판을 강조하고 죽은 자들이 부활하며 메시아가 이 세상의 최고 통치자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설립된다는 내용을 소개한다고 합니다. 물론 천사들과 심판에 대한 언급들과 하나님의 왕권과 메시야에 대한 것들이 가끔 구약성경의 초기 책들에 나타난다고 하지만, 이와 같은 가르침들은 에스겔서나 스가랴서보다 다니엘에 훨씬 더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천사론은 에녹서를 닮았다고 합니다(b.c.1세기).
 그러나 이것은 증명하기 아주 어려운 주장입니다. 스가랴서는 b.c.519년에서 470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것 역시 몇 곳에서 메시야와 천사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을 누구든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2:3; 3:1; 6:12; 9:9; 13:1; 14:5) 더구나 스가랴서에 나타나는 천사들은 다니엘서에 있는 천사들과 아주 유사한 역할을 합니다. 그들은 선지자에게 주어진 환상의 의미를 해석해 줍니다. 따라서 스가랴가 다니엘에게 영향을 주었든지, 혹은 다니엘이 스가랴에게 영향을 주었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따라서 b.c.200년 이전에 있었던 히브리어 문학에는 다니엘서의 영향이 없었다고 주장한 코닐과 파라의 주장은 정당하지 않다. 참조, R. D. Wilson, "The Influence of Daniel." in Princeton Theological Review, 21(1923)) 말라기에도 메시야에 대한 중요한 두 가지 언급이 있고(3:1; 4:2) 3장에는 최후의 심판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와 반면에 2세기의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작품들 중 마카비1서나 다니엘에 대한 헬라어 증보판, 다니엘, 바룩, 유딧 등은 이 시대를 특징지어 주는 것으로 주장되는 네 가지 요소들(천사론, 부활, 최후심판, 메시야)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예언서가 다니엘의 2세기 설을 드러낸다고 주장했습니다. a.d.1세기에 나온 유대 묵시문학들까지도 오직 16개 중 2개의 작품만이 이 4개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데 그것들은 "이사야의 환상"과 "이사야의 승천"입니다.
 이 네 요소들이 구약성경의 초기 작품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습니다. 천사들의 계급에 관해서 창세기는 케루빔(한글성경에서는 그룹)을, 여호수아에서는 천사들의 대장을 언급합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과 기타 여러 선지자들, 즉 이사야, 스가랴, 에스겔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토라에 있어서 이미 우리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아 주며 적군을 무찌르는 일을 하는 것을 봅니다. 부활에 관해서도 욥기 19:25-26에 있는 욥의 유명한 선언을 볼 수 있습니다.(물론 이 구절을 달리 해석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사야는 26:29에서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에스겔은 마른 뼈들의 계곡에서 부활하는 환상을 보았고 죽었던 엘리야와 엘리사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이와 반면에 정경된 후의 많은 책들 중에서(외경) "열두 족장의 유언"만이 다니엘 12:2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의로운 자와 악한 자의 부활을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이사야서, 스바냐서, 학개서, 스가랴서, 말라기, 그리고 많은 시편에서 말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 심판은 열국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내용들입니다. 이미 출애굽기32:32-33; 이사야 4:3(참조, 사 65:6; 시 69:28; 말 3:16)에서 생명의 책과 기억의 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메시야 개념은 창세기 3:15과 49:10과 같은 초기 작품에서까지 나타납니다.(참조, 민 24:17; 신 18:15; 사 9:6-7; 11:1; 렘 23:5-6; 33:11-17; 겔 34:23-31; 미 5:2)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를 계시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와 같은 교리들은 여러 모양으로 발전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니엘은 문제시 되고 있는 네 영역에서 급진적으로 어떤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더구나 이 값진 교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에 큰 위로와 결려가 되었으므로 그 시대에 너무나 알맞는 가르침이었습니다.

 (2) 다니엘의 후대설에 대한 주석적 논거들
 다니엘서가 마카비 시대에 쓰여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대표적인 사람들은 6세기의 저자가 앞으로 다가올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 다니엘서에서 예언을 다루는 장만큼 그렇게 구체적으로 잘 예언할 수 없었다고 가정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확한 예언들이 오직 안티오쿠스 4세(Antiochus 4)의 통치(b.c.175-164)까지만 다루어지고 그 후 시대에 관해서 다루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의심을 갖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 책이 안티오쿠스 4세의 통치 하에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서 편집되었다는 결론을 단호하게 내리게 되며, 그 저자는 유대의 애국자들이 마카비들과 연합하고 수리아의 멍에를 벗어나는 것을 격려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가정의 작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모든 성취된 예언들은 사건 후의 예언(vaticinia ex eventu)으로 설명해 버립니다.
 다니엘서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신플라톤주의자이며 논쟁가인 포르퓌리(Porphyry, a.d.303 사망)의 주장을 따라 b.c.165년 이후에는 정확하게 성취될 예언이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전제가 신빙성이 있어야만 이 주장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본문의 내증과 우리에게 알려진 고대의 역사적 사실들을 살펴볼 때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안티오쿠스 시대에 도래할 사건들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할애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에스더 시대에 하만의 음모가 있긴 했지만 이 시대가 이스라엘의 신앙과 그 생존에 있어서 가장 큰 위기였습니다. 이와 같은 예언들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졌고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의 백성들을 보전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을 가정할 때, 다니엘서에 있는 계시는 하나님께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가져올 전멸의 위기를 미리 내다보셨을 뿐 아니라 대책을 준비하고 계셨음을 가르쳐 줍니다.
 더구나 이 예언은 안티오쿠스와 그의 박해가 종말에 올 최종적인 적그리스도와 대환난의 모형을 제시해 주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마태복음24장과 마가복음 13장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감람산 교훈). 바로 이것 때문에 헬라와 황제 안티오쿠스의 모습이 다니엘 11:40에서부터 갑자기 변하여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모양이 됩니다. 드라이버(S. R. Driver)까지도 이 마지막 절에 소개된 안티오쿠스의 모습이 실제적으로 안티오쿠스의 모습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안티오쿠스는 엘람에 있는 엘리메이스(Elymais)의 성전에 있는 보물을 약탈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바사의 테베(Tabat)에서 그의 최후를 마쳤습니다.
 마카비 이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은 다니엘 2장에 언급된 제 4왕국의 정체에서 드러납니다. 다니엘의 후대설을 주장하는 이론가들은 그들의 입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네번째 왕국이 알렉산더 대제가 b.c.330년에 세운 마게도냐 왕국, 혹은 헬라 왕국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세 번째 왕국이 고레스(Cyrus) 대제가 세운 바사 왕국을 말하며 두 번째 왕국은 전설적인 인물인 메대 사람 다리오가 잠깐 세운 메대 왕국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2장에 있는 금 머리는 갈대아 왕국을 가리키고, 은 가슴은 메대 왕국을,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는 바사 왕국을, 철로 된 다리는 헬라 왕국을 가리키는 격이 됩니다. 비록 네 왕국을 이렇게 연결시키는 것이 종종 거론되지만 성경 자체의 내적 증거들을 비추어 볼 때 전혀 신빙성이 없는 이론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다니엘 본문은 메대와 바사 왕국을 하나의 동일한 제국으로 다루고 있으며 다리오 왕을 메대인 이라고 명명하면서도 저자는 바사 제국 이전에 메대 왕국이 분리되고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다니엘 7장에 있는 상징을 살펴볼 때 둘째 왕국을 메대로, 셋째 왕국을 바사로 연결시킬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 장에서 첫째 왕국은 사자로 소개되었습니다(모든 학자들은 이것이 갈대아, 바벨론 왕국이라는 점에 있어서 일치한다.). 두 번째 왕국도 세 갈빗대를 먹고 있는 곰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메대, 바사 왕국이 이루었던 주된 정복사업을 잘 드러냅니다. 즉,리디아, 바벨론, 그리고 애굽(고레스 대제와 캄비세스 시대에)이 이 나라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바사 제국의 계속적인 발전: b.c.550년 메대가 바사에 합병, b.c.546년 루디아 침공, b.c.539년 바벨론 흡수, b.c.525년 캄비세스에 의한 애굽(프삼티크<Psamtik> 3세, 526-525) 침공.) 세 번째 왕국은 네 날개와 네 머리르 가진 표범으로 소개됩니다. 바사 왕국이 네 개로 나누어진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알렉산더 대제의 왕국이 바로 그의 죽음 이후에 네 개로 나누어져서, 마게도냐(그리스), 트라키아(소아시아), 셀류키드(수리아, 바벨론, 바사 포함) 그리고 애굽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따라서 그 표범이 헬라 왕국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네 번째 왕국은 열 개의 뿔을 가진 무서운 짐승으로 나타나는데 그 짐승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강하고 온 세상을 삼키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열 뿔은 2장에 소개된 신상의 열 발가락을 제시하며 2장의 이 열 발가락이 철로 된 두 개의 다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두 다리는 로마 제국과 쉽게 일치됩니다. 즉, 로마 제국은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황제 때 동로마와 서로마 제국으로 구분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ㅇ들이 알렉산더 대제의 죽음 이후에 나타난 헬라 왕국의 역사와는 아무런 일치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니엘 8장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왕국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더 구체적인 상징을 제시해 줍니다. 거기에 두 뿔 달린 수양이 나타나는데 한 뿔은 다른 뿔보다 높습니다. 즉, 바사가 고레스 제국에 있어서 메대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 수양이 수염소에 의해 무너지는데 그 수염소는 처음에 한 뿔만 가지고 있으며(우리는 쉽게 알렉산더 대제와 일치시킬 수 있다). 그 후에 바로 네 뿔이 솟아나게 됩니다(즉 마게도냐, 소아시아, 수리아, 애굽). 여기에서 최종적으로 조그만 뿔이 솟아나는데 그것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입니다.
 따라서 2, 7, 8장에 나타난 상징들을 살펴볼 때 네 왕국을 우리는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로 일치시키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이와 반면에 마카비설은 전혀 해결이 불가능한 모순을 내포하게 됩니다.
 이것과 연관된 것으로서 다니엘의 네 왕국을 알렉산더와 그의 후계자로 일치시키는 가장 큰 근거가 7장과 8장에 있는 작은 뿔의 현현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7장에서 작은 뿔은 네 번째 왕국에서 나온 것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즉, 그것은 네 날개를 가진 표범을 멸망시킨 그 무서운 열 뿔 짐승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8장에서는 그 작은 뿔이 수염소의 머리에서 나왔습니다. 즉, 헬라 왕국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이 염소는 한 뿔(알렉산더대제)로서 시작되어 네 개로 대치되었습니다. 8장에 있는 작은 뿔이 헬라 제국의 통치자, 즉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참조, 8:9)를 가리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비평가들은 여기에 동일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7장의 네 뿔달린 표범(7:24)이 8장의 네 뿔 달린 수염소를 가리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즉, 둘 다 알렉산더 대제 이후에 넷으로 나누어진 헬라 왕국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다니엘의 상징적 환상에는 두 개의 작은 뿔이 소새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추론해 내어야 합니다. 그 중에 하나는 세 번째 왕국에서 나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네 번째 왕국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관계를 우리는 모형(제3왕국의 안티오쿠스 4세)과 원형(제4왕국에 나타날 마지막 날의 적그리스도)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11:40-45에 제시되고 있는 모든 자료들을 가장 만족스럽게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따르면 역사적 안티오쿠스가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모양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저자가 메대와 바사 왕국을 하나와 동일한 왕국으로 여겼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 6장에서 다리오는 메대와 바사의 율법에 제약을 받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그는 다니엘을 사자의 굴에 집어넣는 칙령을 철회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저자가 다리오를 바사가 있기 이전에 초기 메대 왕국의 독자적인 통치자로 여겼다고 한다면 그가 바사의 율법에 구애를 받아야 할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또 우리는 다니엘 5:28에 해석된 벽에 나타난 글씨에서 증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다니엘은 첫 왕국인 갈대아 왕국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에게 그 글씨를 해석해 주는 자로 나타납니다. 그는 세 번째 단어인 페레스<peres>를 해석 할 때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명백한 언어의 유희가 있습니다. 즉, 파르신<parsin> 혹은 단수형태인 페레스<peres>는 동사 프라스<peras>에서 나왔는데 그 뜻은 '나누다 혹은 분리하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파라스<paras> 혹은 "바사"를 가리키는 것으로도 설명될 수 있습니다. 즉, 이 책의 저자는 갈대아 왕국이 첫 왕국의 마지막 대표자인 벨사살로부터 옮겨져서 두 번째 왕국을 구성하게 되는 메대인과 바사인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통치권이 처음엔 메대인에게 주어지고 그 후에 바사인에게 주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벽에 나타난 손 글씨가 구체적으로 바사라는 단어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순서는 명백합니다. 그 왕권이 갈대아인의 손에서부터 바사인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저자가 두번째 왕국을 다스리는 주인이 바사인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습니다. q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네 번째 왕국이 로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랑게의 [주석]에 언급되 있는 죄클러의 제언은 추천할 만하지는 않아도 언급할 만하다. 그는 세번째 왕국은 알렉산더 대제의 것이며, 네 번째 왕국은 셀류키드 왕조라고 한다. 이것은 알렉산더 제국이 무너진 후 셀류쿠스 1세가 약 b.c.311년에 세운 나라이다. 죄클러는 이 나라가 다네엘의 구조 속에서 마지막 왕국으로 연결된다고 하였다. 즉, 세 번째 왕국은 334년으로부터 알렉산더가 죽던 해인 323년 까지 계속되며 그 후 약 12년 이상의 전환기를 포함하게 된다. 따라서 이 네 번째 왕국 혹은 셀류키드 왕조에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b.c.175년에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네 번째 왕국을 이렇게 일치시키는 것은 다니엘서 저자가 말하는 바 네 번째 왕국이 세 번째보다 더 크고 강하고 방대하다는(7:7) 진술과 상치된다. 알렉산더의 제국 중 오직 일부만을 가지고 전투에서 가끔 패배를 맛본 이 왕국이, 유고슬라비아에서 인도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그의 전 생애에서 한 번도 군사적 패배를 맛보지 않은 불가항력적인 알렉산더보다 더 무섭고 강하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는 일이다. 후대의 역사를 생각해 볼 때 네 번째 왕국의 모습은 오직 로마와만 일치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만약 2장에 있는 네번째 왕국이 7장에 있는 다른 상징들과 함께 명백히 로마를 가리킨다고 하면 우리는 여기서 사건 후의 예언이 아닌 진정한 예언을 보게 되는데 마카비설에 따르면 다니엘서는 b.c.165년 사이에 작성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로마 제국은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습니다.(최소한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폼페이 대제가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근동 아시아를 사로잡았던 해인 b.c.63년 까지는) 그렇지만 사실 한니발은 이미 b.c.202년 자마(Zama)에서 스키피오(Scipio) 대장에게 패배하였고 안티오쿠스 3세는 190년에 마그네시아(Magnesia)에서 완패하였고 로마인들은 소아시아에 속국을 세우고 애굽에 호민관을 두긴 했지만 b.c.165년까지 유럽의 경계를 벗어나 진군하진 않았습니다. b.c.165년의 상황을 살펴 볼 때 그 어느 누구도 근동 아시아의 헬라 군주가 서방에서 일어난 새로운 세력에 의해 삼켜진다는 것을 예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탈리아 제국이 그동안 존재했던 어떤 제국보다 더 무자비하고 폭넓게 그 힘을 뻗쳐 갈 것에 대해서는 예견치 못하였습니다. 다니엘이 로마 제국에 대해 예언을 했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을 살펴보아도 마카비 시대설 전체를 뒤집어 엎는 데 충분합니다.(사실 이 설은 예언과 성취에 대한 초자연적 요소를 배제하기 위해서 제시된 이론이다.)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이 책에는 또 다른 놀라운 예언들이 담겨 있는데, 이것들은 이 책이 마카비 시대에 쓰여진 역사적인 공상소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임을 드러내어 줍니다.
 마카비 시대설은 다니엘서가 어떻게 후대의 유대인들에게 의해 성경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합니다. 신명기 18:22에는 하나의 원칙이 명백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즉, 하나님의 참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예언을 하였는데 그것이 후시대에 성취되지 않았다면 그는 추방되어야 합니다. 다니엘 11:40-45에 나타난 바와 같이, 작은 뿔의 마지막 단계에 대한 묘사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그의 임종을 맞이했던 것과 잘 일치되지 않습니다. 11:40 초반부에 있는 예언적 계시에는 하나의 명백한 전환이 있습니다. 이 전환은 "마지막 때에"라는 뜻을 시사합니다.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자는 다니엘을 쓴 저자가 안티오쿠스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실패했다고 단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저자가 최선을 다했지만 그러나 실제적으로 사건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서 유대인들이 이 책을 거짓 예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경적인 것 권위 있는 것으로 계속 수락했는지에 대해서 납득할 수 없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 책이 역사적인 다니엘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하면 이 작품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떻게 보전되었는지 쉽게 이해됩니다. 후대의 역사에 나타난 수많은 사건들이 역사적 다니엘에 의해 6세기에 정확하게 예언되었기 때문에 그 책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그 신빙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3) 다니엘서의 후대설에 대한 문학적 언어학적 논증

 1. 외래의 차용어들이 다니엘서의 아람어 본문에서 발견된다.
 다니엘의 아람어 부분에 있는 수많은 외래어들(물론 히브리어 부분에 있는 것보다는 적지만)은 6세기에 쓰여진 것보다 훨씬 후대에 쓰여졌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는 가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바사계통의 언어가 15개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물론 그것들은 지금까지 알려진 그 어떤 바사 문서에서도 실제적으로 발견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들이 다니엘 안에 있으므로 느부갓네살과 벨사살을 다루는 그런 장들 역시 갈대아 시대에 작성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증명해주는 격이 되었습니다. 이 주장이 자유로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잘 모르나 보수주의 학자들은 다니엘서가 최종적인 형태에 있어서 바사가 바벨론을 다스리기까지에 형성되었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다니엘 자체가 다니엘이 수년 동안 바사의 통치 밑에서 일을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바사의 용어를 쓰지 않을 특별한 이유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가 사용하는 바사의 용어들은 대부분 정치와 행정에 관한 것으로서 그것들은 b.c530년에 바벨론에서 아람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것입니다.
 다니엘 3장에는 최소한 3개의 헬라어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다니엘서가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 근동 아시아가 정복당한 후에 쓰여졌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주장들을 합니다. 이 세 단어는(3:5) qayteros(헬라어, kitharis), psanterin(헬라어, psalterion), sumponyah(헬라어, symphonia) 입니다. 이 세 단어들은 플라톤 시대까지(약 b.c.370) 악기의 뜻으로는 현존하는 헬라의 어떤 작품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쉼포니아(심포니야)의 참된 뜻은 확실치 않다. 어떤 학자들은 다니엘 3:5에서까지도 그것이 어떤 구체적인 악기를 가리키기보다는 "음악적 앙상블"이라고 한다. 야마우치는(Greece and Babylon<Grana Rapids: Baker, 1967>, p.19) 이 단어가 여기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모호하지만 이와 연관된 형용사 symphonos가 핀다르의 송시 Pythian Ode 1:70(약 b.c.460)에서 "화음"으로 나타난다고 지적하였다. 미첼과 조이스는 쉼포니야가 여기에서는 여러 타악기들과 함께 열거되었기 때문에 동부 헬라어 방언 팀파논(탐부림. 드럼)에서 빌려온 것일 거라고 제언하였다. 참조, Some Problems in the Book of Daniel, ed. D. J. Wiseman(London: Tyndale, 1965), p.26) 이것을 통해 이 단어 자체가 헬라에서 사용된 것을 b.c.약 4세기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중요한 헬라어 문학작품들은 옛날 사람들이 사용하던 십분의 일도 되지 않으므로 각 단어들이 구체적으로 언제 만들어졌는지, 헬라어 어휘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우리는 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이 세 단어가 모두 악기의 이름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이름들은 그 악기들이 외국 시장에서 팔림으로 인해 국외까지 알려졌습니다. 이 세 단어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헬라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그 헬라어 이름들이 근동 아시아의 시장에 널리 유포되었습니다. 이탈리아어 piano와 viola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처럼 이 외국의 음악용어는 그 당시 국제 사회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르곤 시대(b.c.722-715)에 이미 앗수르의 기록을 통해 헬라의 포로들이 구브로, 이오니아, 리비아, 갈리기아 등을 통해서 노예로 팔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헬라의 시인 레스보스의 알케우스(Alcaeus of lesbos, b.c.600)는 그의 형제 안티메니다스가 바벨론 군대에서 일하였음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헬라의 용병들과 노예와 그리고 악기들이 다니엘보다 훨씬 이전에 셈계의 근동 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바이드너(E. F. Weidner)가 출판한 신바벨론의 배급표에 따르면, 이오니아의 목수들과 선박 기술자들이 느부갓네살의 병참부로부터 배급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아스글론과 다른 곳에서 온 음악가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참조, "Jojachin Konig von, Juda" in Melanges Syriens, vol. 2. 1939, pp.923-35).
 어떤 학자들은 두서너 개의 도 다른 단어들을 헬라어에서 온 것이라고 말했으나 최근에 와서는 이것이 전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일축되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ksroz("연락자")인데 이것은 헬라어 keryx(Brown-Driver-Briggs, Lexicon)로부터 온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최근에 만들어진 Koehler-Baumgartner의 [히브리어 사전]에서는 이 단어가 옛날 바사어 크라우사(Khrausa)에서 온 것으로 "부르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키친은 그 단어가 궁극적으로 후리아어인 키렌제(Kirenze) 혹은 키렛지(Kirezzi)에서 온 것으로써 선포를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K. A. Kitchen, AOOT, p.144). 토리(C. C. Torrey)와 코울리(A. Cowley)는 파트감(pathgam)이 헬라어에서 온 것이라고 하였으나, 쿠쳐(Kutscher)는 케뎀(2:74)에서 b.c.41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르사메스(Arsames)의 가죽 두루마리가 만들어졌는데 거기에 보면 이 용어가 한 번 이상 나타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말할 여지 없이 이것은 헬라어에서 나왔다는 가설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거의 틀림없이 고 바사어 프라티가마(pratigama)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 원래 뜻은 "전달" 혹은 "명령"(참조, W. F. Albright, The Biblical Period from Abraham to Ezra(New York:Harper, Torchbooks, 1963), p.65)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다니엘에 있는 헬라어들을 다니엘이 후대 헬라 시대에 만들어질 수 없었음을 오히려 강력하게 증거해 줍니다. 170년이 되었을 때 팔레스타인은 이미 헬라어를 사용하는 정부에 의해 약 160년 간이나 통치를 받고 있었으므로 헬라의 정치적이고 행정적인 용어들이 지배를 받는 백성들의 언어에 나타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마카비서는 헬라의 문화와 헬라의 관습들이 제2세기 초반 대도시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생활 속에 방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증거해 줍니다. 더구나 다니엘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을 살펴볼 때 그것은 유다 마카비가 지나간 지 65년이 지난 약 b.c100년대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국가의 관리들에 대한 아람어 전문 술어들이 정확하지 않고 단지 추측한 것으로 번역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다니엘 3:2에 있는 바 "재판관들"('adargazerayya)은 "대신"(hypatous)으로 번역되었고, "재무관들"(gedobrayya')은  "행정관리들"(dioiketes)로 그리고 "율법사" 혹은 "판사들"(tiptayye, 혹은 detaberayya)은 일반적인 관용구인 "권위를 가진 자"(tous' ep' exouson)로 번역되었습니다. 방금 언급된 두 관리들을 말할 때 hegoumenous와 tyrannous로 번역되었다.) 만약 마카비 시대에 다니엘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가정한다면 그것이 쓰여진 후 10-60년 내에 쓰여진 책이 이 용어들의 의미를 전혀 잊혀진 채로 전달할 수가 있겠습니까? 애굽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헬라어뿐만 아니라 아람어에 익숙해 있었다는 사실들을 생각해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참조, Wiseman. Some Problems in the Book of Daniel, p.43).
 다니엘의 아람어가 외국 언어들을 쉽게 흡수해 버린 언어적인 매개체였다는 사실은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이 정부와 정치에 관계된 15개의 바사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헬라어가 약 160년 동아니나 정부의 행정 용어로 사용되었는데, 단 하나의 헬라어 단어도 팔레스타인에서 사용되던 정치나 행정분야의 아람어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다니엘에 있는 이 히브리어 부분을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바사 용어인 궁전(11:45에 있는 appeden은 apadana에서 유래됨), 귀족(partemin은 1:3에 있는 fratama에서 유래됨), 왕의 진미(patabag은 1:5에 있는 patibaga에서 유래됨)는 있지만 헬라어에서 유래된 단어는 하나도 없습니다(어떤 비평가들에 따르면 다니엘서의 히브리어는 그 아람어 부분보다 더 후대의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전에는 다니엘의 아람어가 서부 방언이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바벨론에서 쓰여질 수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6세기의 다니엘이 진정한 저자였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최근에 5세기의 아람어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에 따르면 다니엘은 에스라와 같이 궁중 아람어(ReichsaramUaisch)로 쓰여진 것으로, 그것은 그 당시에 근동 아시아 전역에서 통용되고 있던 공식적인 혹은 문학적인 글이었음이 상당히 확정적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따라서 남부 애굽에서 발견된 아람어로 된 엘레판틴 파피루스(Elephantine papyri)는 상당히 가까이 있게 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궁중 아람어로 기록되었습니다.(우연히도 이 엘레판틴 파피루스에는 아벳느고(Abednego)라는 이름이 담겨 있다. 이것은 이전에 b.c.2세기의 사람이 느보의 종을 잘못 쓴 형태일 것이라고 해석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5세기에 사용되던 "아벳느고"로 알려지게 되었다. 참조, E. Sachau, Aramaic Papyri and Ostraca, 1911, 또한 E. Yamauchi, "Slave of God" in Bulletin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Winter, 1969), p.33)
 쿠쳐(E. Y. Kutscher)는 드라이버의 글 [제5세기의 아람어 문서](Aramaic Doucuments of the Fifth Century B.C., 1954)를 검토하면서 동부 아람어권에 있던 바벨론과 수사에서 온 이 편지들의 언어학적인 특징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성경의 아람어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 어순이나 다른 특징들이 동부타입(즉, 어순에 있어서 좀더 자유롭고 융통성이 많음)이며 전혀 서부의 특징을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것이 동쪽에서 유래되었음을 결론짓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결정적인 판단은 쿰란에서 발견된 아람어 사본들 모두를 출판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JBL(1957), p.338에 있는 쿠쳐의 글을 보라.)(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절의 마지막 부분에 동사를 두어 문체를 통일시키려는 경향이다.)

 2. 다니엘서의 아람어 초기설에 대한 문법적인 증거들.
 다니엘의 아람어가 오래된 것임을 증거해 주는 괄목할 만한 특징은 수동태가 나타낼 때 안에 있는 모음을 가끔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즉, 수동태를 나타낼 때 가장 표준된 방법(접두어 hit- 혹은 'et-) 대신에 성경의 아람어는 호팔(hophal)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예를 들자면, nehat에서 나온 honha, seliq에서 나온 hussaq, 'abad에서 나온 hubad와 'alal에서 나온 hu'al이다.). b.c.420년경의 엘레판틴 파피루스(CAP #20. 7행)의 "그들의 위임받았다"를 비롯하여 심심치 않게 호팔형이 나타나는 것에 주목하십시요. 호팔 형식을 이렇게 사용한 예가 사해 사본에서 발견된 아람어 문서 가운데는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 중 어떤 것들(예를 들자면, 창세기 외전<Genesis Apocryphon>과 같은 것은 마카비 전쟁보다 1세기 이후 것일 수가 없다.), 어떤 형태들은 다니엘을 쓴 히브리 저자가 채택한 히브리풍으로 일축해 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탈굼을 쓴 유대의 서기관들도 그와 같은 형태를 사용하지 않고 'et-타입의 수동태를 사용할 뿐입니다. 만약 히브리어가 수동태에 있어서 안에 있는 모음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면 그것이 탈굼에 있어서도 나타났어야만 될 것입니다.
 성경의 아람어가 엘레판틴 파피루스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약 b.c.5-4세기 것으로 추정됨), 많은 학자들은 다니엘 2장에서 7장 부분을 3세기 이전의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로울리까지도 성경의 아람어가 엘레판틴의 파피루스와 나바티안과 팔미레네 비문에 있는 아람어 사이에 있을 것이라는 결정적인 결론에 대해 수락하고 있습니다. 사샤우(Sachau)는 엘레판틴 파피루스 언어가 본질적인 특성에 있어서 성경 아람어와 동일하다고 진술했습니다.
 C. C. 토리와 몽고메리는 다니엘 1-6장이 b.c.245-225년 사이에 기록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후대의 편집자가 제1장을 히브리어로 약 b.c.165년에 번역했다고 말합니다.(Rowley, The Aramamic of the Old Testament(London: Oxford, 1929), p.9) 아이스펠트(Eissfeldt, Einleitung, 1934)는 이와 같이 첫 6장이 b.c.3세기에 나오게 되었으며 나머지 6장은 마카비 시대에 옛날 작품과의 연속성을 위해 쓰여졌다고 시사했습니다. 구스타브 휠셔(Gustav Hoelscher)는 그의 책 [다니엘서의 기원](Die Einstehung des Buches Daniel, 1919)에서 에른스트 젤린(Ernst Sellin)의 견해를 따릅니다. 젤린에 따르면 옛날의 아람어로 된 다니엘 묵시록 혹은 전기는 1-7장까지를 구성한다고 말했습니다(제1장은 후대 히브리어로 번역되어 2장과 7장 사에서 마카비 시대에 삽입되었다고 한다). 이에 반해 8-12장은 그 연대에 있어서 참으로 마카비 시대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횔셔는 전설을 모은 저자가(2-6장) 그것들을 구전으로 직접 받았거나 혹은 옜날에 기록된 형태를 통하여 가져왔을 것이라고 진술합니다. 그렇지만 다니엘 전체가 그 문체와 필투에 있어서 어떤 동질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한 명의 저자가 이것을 쓴 것에 대해 부인할 수 없다고 지적하였습니다. 휠셔와 노트(Martin Noth, [다니엘의 구성에 대하여]<Zur Komposition des Buches Daniel>, 1922)(하지만 이 위치를 고집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된 부분이 아람어 본문보다 후대에 만들어 졌다고 하더라도(분명한 자기모순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다니엘에 있는 어떤 요소들과 주제들의 기원이 우리에게 알려진 바 헬라의 역사 속에 담겨 있는 그 당시의 사건과 연결함으로써 연대를 추정하려고 하였습니다.
 다니엘 2-7장이 아람어로 쓰여졌고 나머지가 히브리어로 쓰여졌다는 이 단순한 사실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 문서가 후대에 쓰여진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들은 유대 역사를 볼 때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거룩한 히브리어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전락해 버리고, 랍비들을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잊혀질 언어가 된 훨씬 후대에 와서야 비로소 아람어가 사용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히브리어가 거룩하게 여겨졌다는 것에 대한 논증들은 너무나 약한 기초 위에 있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에스라의 책에 있어서도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팔레스타인의 지방정부와 바사의 왕궁 사이에 있었던 b.c.520-46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들을 복사한 것입니다. 에스라에 있는 아람어를 살펴볼 때도 그것들을 만약 5세기 중엽의 문서로 확실히 받아들인다고 하면 다니엘에 있는 6장의 아람어가 그것보다 2세기나 늦게 쓰여진 것으로 꼭 주장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다니엘이 살고 있었던 6세기 후반의 바벨론에서는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여러 종족의 백성들은 대부분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도시의 어떤 사람이 그의 비망록을 작성할 때 아람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다니엘이 반은 아람어로, 반은 히브리어로 쓰여진 것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본다면 대답은 명백해집니다. 다니엘의 예언 가운데 이방인을 다루는 부분(느부갓네살의 꿈에 나오는 네 왕국과,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이야기 중의 왕의 바하와, 그리고 7년간 미쳐 버린 사건과, 벨사살과 메대의 다리오 등)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간에 모두 알아들어야 되기 때문에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써 쓰여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유대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쓰여진 부분(1, 8-12장)은 유대인들만이 알 수 있도록 히브리어로 쓰여졌습니다. 12장에는 이 후대의 예언들이 성취될 때까지 비밀에 붙이고, 봉인을 하라는 명령이 내려짐으로써 그렇게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12:9)
 이미 우리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다니엘의 히브리어에는 바사의 정부 용어가 많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바사가 다스리던 때에 쓰여졌음을 시사합니다. 헬라어의 영향이라고 할 만한 언어는 전혀 흔적도 없습니다. 집회서(마카비 시대 바로 직전인 b.c.200-180의 것으로 추정됨)의 히브리어 본문을 살펴볼 때, 만약 다니엘이 그 당시에 쓰여진 것이라고 비평학자들과 함께 생각한다고 하면 다니엘의 히브리어와 유사한 것을 많이 제공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집회서는 지혜문학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니엘의 뒷부분에 있는 내용과 그 문체에 있어서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회서는 랍비 문학의 언어적인 특징을 지닌 것으로서 다니엘보다 후대의 현상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 레비(Israel Levi)는 [집회서 히브리어 사본 서론](Introduction to the Hebrew Text of Ecclesiasticus, 1904)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a) 새로운 동사형태는 주로 아람어에서 빌려왔다. (b) 히필과 힛파엘을 과도하게 사용하며 (c) 마쉬나 히브리어를 말해 주는 여러 가지 특징들이 있다.
 쿰란의 자료들을 살펴볼 때 히브리어로 쓰여진 작품들 가운데서("제자의 규범", "빛의 아들과 어둠의 아들의 전쟁", "감사 시편")그 어느 것도 다니엘에 있는 히브리어와 같은 특징을 제시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참조, J. H. Skilton, ed., The Law and the Prophets <Nutley, N. J.: Presbyterian & Reformed>, Chap. 41: "The Hebrew of Daniel Compared With the Qumran Sectarian Doucuments," by G. L. Archer, pp.470-481). 또한 아람어로 쓰여진 창세기 외전과 다니엘의 아람어 부분 사이에서도 어떤 유사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 외전의 이 필사본은 b.c.1세기의 것으로서 최소한 읽을 수 있는 다섯 개의 아람어 칼럼을 보여줍니다. 만약 다니엘이 마카비 시대에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거의 동시대에 쓰여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외전은 다니엘 2-7장에 있는 아람어 부분과 비교해 볼 때 문법과 문체와 어휘에 있어서 수많은 유사점들을 마땅히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더구나 아비가드(N. Avigad)와 야딘(Y. Yadin)은 그것이 b.c.3세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쿠쳐(Kutscher, "The Language of the Genesis-Apocrypon" in scipta Hierosolymita<Jerusalem, 1958>, p.3)는 창세기 외전의 언어가 일반적으로 궁중 아람어도 아니고 특히 성경 아람어도 아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다니엘에는 동방 방언의 특징이 있는 반면 창세기 외전은 서방의 특징을 지닙니다. 예를 들자면, 한 절에 있어서 동사를 앞에 둔다든지 "얼마입니까? 얼마나 크십니까?"를 뜻하는 케마(kemah) 대신에 카만(kaman)을 쓰고 있으며 "거기에"를 뜻하는 타마흐(tammah) 대신 타만(taman)을 사용합니다. 또한 peal부정사에 미팔(mif'al) 대신에 미폴(mif'ol)을 쓰며 지금까지 팔레스타인 탈굼과 미드라쉬 방언으로 분류되었던 형식인 성경의 미스바크(misbaq) 대신에 미스보크(misb'oq, "떠난다")를 쓰고 있습니다. 만약 다니엘이 동방 아람어로 쓰여졌다고 한다면 결코 그것은 마카비 시대 이론이 요구하는 것처럼 2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쓰여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로울리와 몽고메리(J. A. Montgomery),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다니엘서의 후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제시했던 다니엘서의 아람어가 가진 음성학적인 특징에 대해 언급해야겠습니다. 5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엘레판틴의 파피루스뿐 아니라 초기의 아람어 비문들은 성경의 아람어가 항상 d를 사용해 주는 곳에서 z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만약 다니엘이 b.c.5세기에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면(b.c.6세기는 말할 것도 없이) z를 포함한 옛날의 활자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에 대한 답변을 하자면 아직까지 6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람어 문서를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지 못했고, 더구나 동부 아람어나 바벨론 지역에서 쓰던 아람어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와 같은 문서들이 발견되기까지는 z가 d로 바뀐 것이 정말 그때였다는 것으로 단언하는 것은 너무나 시기상조입니다. 이러한 전환은 에스라서의 아람어 부분에서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에스라가 살았던 바사의 아람어 발음을 반영해 주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z가 d로 바뀌어진 것은 서쪽에서보다 동쪽에서 먼저 일어난 현상인 듯합니다. 엘레판틴의 파피루스에서는 이 전환에 대해 4-5개의 예를 제시해 줄 뿐입니다. "붙잡다"는 뜻을 가진 'h-z 대신에 '-,h-d를 쓰고, "당신의 것"이란 뜻을 가진 z-y l-k-y 대신에 d-y l-k-y를 쓰고 있습니다. 코울리(A. Cowley)의 Aramaic Papyri of the Fifth Century B.C(London: Oxford, 1923-다음부터는 CAP로 표기하겠음)의 13:7, 11, 16에서는 "청소하다"를 뜻하는 z-k-' 대신에 d-k-'를 쓰고 있으며(CAP 14:6, 9), "저것"을 뜻하는 z-k-y 대신에 d-k-y를 사용하며(CAP 21:6; 27:12) "이것"의 뜻을 가진 z-n-h 대신에 d-n-h를 씁니다.(CAP 16:9). CAP 30에서 m-z-b-h와 z-b-h-n 대신에 m-d-b-h-'("제단")과 d-b-h-n("희생")이 사용된 것을 보십시요. 우리는 여기에서 이 모든 자음의 변화가 근동 아시의 전 영역에서 아람어를 사용하는 곳마다 동시에 일어났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H. G. 아스무센(Asmussen)은 다니엘서의 아람어부분은 악카드어 기록에서 번역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Daniel, Prophet ode Folscher Heide, 1981<Wat is er Gebeurth? in Telos, 1982, Stichting Evangelische Hogeschool에서 인용>).)(예를 들자면, 중세 독일어의 역사를 살펴볼 때 독일의 어떤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더 이전에 일어났음을 문서로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창세기 외전의 수많은 문법적인 특징들은 다니엘, 에스라서, 엘레판틴 파피루스보다 몇 세기 후대의 것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예를 들자면, 여성 3인칭 단수 소유격 대명사에 있어서 -ah대신에 -ha'를 사용하며, "이것"을 뜻하는 denah 대신에 den을 쓰며, lamed-aleph 동사의 3인칭 단수 완료를 뜻할 때 -at 대신에 -iyat를 사용합니다. 그 외에도 예들은 많습니다. 어휘들을 고찰할 때도 창세기 외전에 있는 상당수의 단어들이 탈굼과 탈무드 이전에 있던 아람어 문서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것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문법과 단어와 이 특징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New Perspective on the Old Testament, ed., B. Payne<Waco, Tex: Word, 1969>의 11장에 있는 아처(G. L. Archer)의 논문을 참조하라). 단어의 기본 단자구조와 구문구조, 표현의 문체에 있어서 쿰란파의 문서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가지고 다니엘을 비교해 볼 때 전혀 그 특징들이 맞지 않습니다. 마카비 시대의 이론에 따르면 다니엘의 문체가 b.c.2세기 유대에서는 이미 편집이 완료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것은 쿰란 문서가 형성되기 2,30년 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새로 발견된 언어학적인 증거들을 비추어 볼 때 다니엘을 2세기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질:다니엘서의 저작권에 대한 기타 증거들이 있는가?
답: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감람산에서 말씀하신 주 예수님 자신의 증거를 들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15에서 그는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해 언급합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다니엘에 세 번 나타납니다(9:27; 11:31; 12:11). 만약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들이 제대로 기록되었다고 할 때 그가 이 구절에 관한 예언을 한 저자가 역사적 다니엘이었음을 믿었다고 결론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전치사 dia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다르게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증한 것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단순히 마카비 시대로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안티오쿠스가 성전에 세운 제우스 신상을 가리키기보다 미래의 시대에 나타나게 될 어떤 것을 가리켰다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둘째로 다니엘 저자는 2세기의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6세기의 사건들을 아주 정확하게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8:2에서 도시 수산이 갈대아 시대까지도 엘람의 한 지방에 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헬라와 로마의 역사가들은 바사 시대 수산 혹은 수사인 원래의 이름을 따라 수시아나(Susiana)라는 새로운 지방으로 구분되고 옛날에 방대했던 엘람의 율레우스 강(Eulaeus River) 서쪽 지역으로 제한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참조. Strabo 15:3,12, 16:1, 17. Pliny, Natural History, 6:37.). 따라서 수사를 엘람의 한 지역으로 간주하는 것을 살펴볼 때 저자는 아주 옛날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다니엘 9장에서 일련의 예언을 보는데, 그것들은 그리스도가 강림하고 a.d.30년에 십자가형을 받으며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예루살렘성이 멸망할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다르게는 해석할 수 없습니다. 다니엘 9:25-26에서 69이레(즉 483년)가 예루살렘의 중건의 명으로부터 메시야 왕이 끊어지는 기간을 포함한다고 진술합니다. 9:25-26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이어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이 69이레(혹은 483년)를 계산할 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아닥사스다가 느헤미야에게 b.c.445년(참조, 느 2:4,8) 영을 내린 것으로 시작하여 음력을 따라 1년을 360일로 잡고 483을 계산하는 것입니다(제롬은 그의 [다니엘서 주석] 제 683항에서 아프리카누스가 그의 책 [템포라]에서 이 전통을 말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와 반면 아닥사스다 제20년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때까지는 히브리인들의 음력법을 따라 계산할 때 70이레가 된다. 그들은 태양의 흐름을 따라 숫자를 계산치 않고 달을 따라 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계산법에 따르면 이 횟수는 한 달을 29일 반으로 계산하는 것을 따라 이루어졌다.") 그것은 양력으로 471년이 되며 메시야가 나타나서 "끊어지는 것"(십자가형)(존 데이비스는 그의 [성경사전]에서 음력으로 1년을 358일 8과 5/6시간으로 계산하여 483년이 음력으로는 465년이 되어 a.d.24년이 된다. 아직은 예수께서 메시야로 나타나시기 2-3년 전이다.)이 a.d.26년이 됩니다. 혹은 시작되는 해를 아닥사스다의 제7년으로 잡고 에스라가 은혜를 받았던 b.c.457년으로 고려할 수 있습니다. 그때 에스라가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새로 세우라는 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에스라 7:6-7; 9:9에서 우리는 이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그 복역하는 중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바사 열왕 앞에서 우리로 긍휼히 여김을 입고 소성하여 우리 하나님의 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꿀을 주셨나이다"(ASV에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벽을 주었다고 한다). 비록 에스라가 성을 재건하는 일에 있어서 11-12년 후에 느헤미야가 돌아올 때까지 완성하지 못했다고 해도 다니엘 9:25에 예언된 칙령의 시작점을 b.c.457년으로 보는 것이 논리적입니다. 이것은 태양력으로 계산할 때 b.c.457년으로부터 483년이 지난 해가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역하던 a.d.26년이 됩니다. 혹은 b.c.1년에서 a.d.1년으로 건너갈 때 1년이 남기 때문에 a.d.27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26절에 있는 바 "메시야가 끊겨질 것이다"를 주의해서 살펴볼 때 483년이 실제적으로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을 지적하여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메시야가 나타난 후에 끊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 1:3-4에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성벽과 성문이 최근에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고 낙담하였다는 것을 주목해야 하겠습니다(아마도 같은 잔혹한 이웃 나라들이 후에 느헤미야 자신을 좌절시키려 했었던 것 같다-느 2:19-20, 4:1-3, 7-23). 이는 에스라 자신이 일전에 재건하려 했으나. 이들 잔혹한 침략자들에 의해 좌절되었던 것을 강하게 회상시켜 줍니다(446년에...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성벽이 바로 방금전 587년, 즉 140년 전에 무너졌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질문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아닌가!).

글리슨L.아처(G. L. Archer)의 구약총론 中 557-588 페이지를 편집

Lv44 줄그은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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