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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죽은 나비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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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31
추천: 3
2018-10-26 00:20:40

1편 링크



죽은 나비

2




철혈제조공단을 빠져나간 군인들은 모두 인간이었다. 군인들은 흙을 밟듯 인형을 밟으며 퇴각했다. 강철 바닥이 인형의 기름과 피를 머금지 못했다. 한 군인이 기름을 밟고 미끄러졌다가 복도에 나뒹구는 인형의 눈깔을 밟았다. 눈알은 찌그러지면서 유리 깨지는 소리를 냈다. 에이 씨팔. 군인은 군화를 바닥에 몇 번 털고 나서 걸음을 재촉했다. 뒤따라오던 동료가 그 꼴을 보고 킬킬댔다. 철혈에서 생산된 베스피드 한 기가 복도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인형은 대가리를 위로 치켜뜬 채 죽었다. 깨진 헬멧 끝에서 기름과 뒤엉킨 선혈이 끈적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함몰된 왼쪽 눈에서 아직도 기름이 새고 있었다. 


군인들이 빠져나가자 섬광과 화약을 머금었던 실내는 빠른 속도로 식었다. 총성이 아직도 메아리쳐 들리는 듯 했지만, 지금 이 곳에 살아있는 것은 없으니 그것은 이명이거나 환청일 것이다. 엘리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무릎에 뉘인 리코리스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공장이 식어가는 만큼 리코리스의 피부도 식어가고 있었다. 춥겠다. 그나마 그의 몸을 덥히던 선혈이 점점 멎고 있었다.


“담요 가져 올게. 리코.”


검게 그을린 연구실 문에선 톡 쏘는 냄새가 났다. 화약 냄새는 콧속 깊숙이 파고들어서 그대로 머리까지 치달았다. 탄매가 느껴질 정도로 거칠고 투박한 냄새였는데, 그 사이 사이 끼어 있는 비릿하고 시큼한 냄새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엘리사는 냄새를 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좁은 그녀의 걸음걸이를 따라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서서히 굳어가던 피와 기름들은 진흙처럼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 뭉개졌다가 이내 녹아내렸다.


탁 트인 공장 내부는 어두웠다. 간신히 새어 들어온 빛을 검은 기름이 겨우 받아쳤는데, 그렇게 비친 공장의 모습은 더 희미하고 아리송했다. 엘리사는 처음으로 보는 공장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난간과, 계단과, 컨베이어 벨트와, 부품들과, 그 모든 곳에 잠들어 있는 인형들을 보았다. 담요는 어디에 있는 걸까. 리코가 많이 추울 텐데. 할 수 없지. 돌아가자. 오늘은 다들 피곤했던 모양이야. 이렇게 사이좋게 잠들어 있는걸 보니. 엘리사는 다시 컨베이어 벨트를 지나, 계단을 오르고, 난간을 넘어 연구실로 들어섰다. 바닥에 뉘인 리코리스의 등 너머로 선혈이 퍼지고 있었다.


“미안. 조금 찾아 봤는데 담요가 없어.”


엘리사는 리코리스의 곁에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콧구멍과 귓구멍, 입가에서 싯누런 진액이 흘렀다.


“다들 많이 피곤했나봐. 리코도 힘들어?”


리코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사가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엘리사가 움직이지 않으니 철혈제조공단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엘리사가 움직여 소리를 내면 그 곳에 철혈제조공단이 생겼고, 그녀가 행동을 멈추면 철혈제조공단은 사라졌다.


“……리코, 인형들이 전부 빨간 물 위에 누워 있어. 이게 죽는다는 거야?”


리코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리코도 죽은 거야?”


엘리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말소리를 따라 철혈은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유전학 가르쳐 주기로 했잖아. 역사랑 병법,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걸 알려 주기로 했잖아.”


엘리사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거짓말쟁이.”


그녀의 마지막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안전관리국은 나비작전 이후 1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60여명 규모의 파견단을 꾸렸다. 파견단이 출범하기 이틀 전 안전관리국이 성명을 발표했다. 철혈제조공단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전 직원과 인형이 사망했으며, 운영권을 가진 어떠한 인형이나 사람도 남지 않았으므로 철혈의 재산은 국가에 귀속된다는 내용이었다. 일각에서는 음모론을 제기했고, 일각에서는 철혈이 남긴 자본의 흐름을 쫓았으며, 일각에서는 군비 증강에 따른 군사력 강화를 반겼다. 60명 중 20명을 추려 선발대를 꾸렸다. 인형의 시체를 치우고 장비를 손봐야 했다. 추가금을 준다는 단장의 말에 좀 더 가난한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철혈제조공단은 넓은 공지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솟아 있었다. 공장은 왼편에 흐르는 하천으로 검은 폐수를 토해냈고 머리 위로는 회색 매연을 뿜어댔다. 선발대 스무 명 중 그 누구도 이런 것들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장을 욕했고, 루크사트 주의를 욕했고, 3차 세계대전을 욕했다. 욕지거리는 모두에게 향해 있었으나 그 어느 곳에도 닿지 않았다. 인간들의 행렬 뒤에서 다섯 기의 인형이 묵묵히 따라 걷고 있었다. 인형들은 땅바닥을 보고 걸었다. 가난한 스무 명은 자신들보다 더 가난한 인형이 고개를 올리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공단 입구를 지나쳐 한참을 걷던 중 한 여자가 중얼거렸다. 오늘 청소 일정이 어떻게 돼요? 그녀 앞에서 걷던 남자가 대답했다. 각자 짐 풀 방부터 잡고 생각하자구. 남자의 옆에 있던 남자가 말꼬리를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깨끗한 곳 어디를 청소하라고 우리를 보내는 걸까요? 그 남자의 곁에 있던 여자가 대답했다. 돈 많은 놈들은 깨끗한 것도 깨끗하게 청소하라고 하잖아. 행렬의 맨 앞에서 걷던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우리 놀러 온 거 아닙니다. 빨리 일 끝내고 쉬자구요……남자는 말을 끝마치자마자 관자놀이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퍽 하고 두개골 깨어지는 소리가 났고, 그 다음으로 탄두가 바람을 갈라낸 소리와 대물 저격총이 뿜어낸 총성이 따라붙었다.


19명의 사람들이 쓰러진 남자를 눈으로 쫓을 때 두 번째 사람이 피탄당했다. 두 번째 사람은 목을 관통당해 즉사했다. 살아있던 두 사람이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그들은 각각 왼쪽 가슴과 이마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흙먼지가 일었다. 17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정리된 철혈제조공단 흙마당은 쉽게 피를 빨아들였고, 인간들은 그 흙 위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흙먼지 너머로 수십 발의 총성이 마구잡이로 울렸다. 그 총성의 너머에서 인형 한 기가 걸어오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양 옆으로 동그랗게 묶었고, 긴 치마 밑으로 두꺼운 총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가까스로 사격을 피한 마지막 인간이 자신의 뒤에 있던 인형을 움켜쥐고 사선(射線)을 향해 내밀었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인형이 살짝 손을 들어 사격을 멈췄다. 인형은 입을 열어 난생 처음 목소리를 내었다. 느리고 강약이 확실한 말투는 상대방을 위에서 아래로 짓누르는 힘이 있었다.


“가거라. 가서 네놈이 본 것을 전하거라. 철혈공조는 인간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엘더브레인’님의 이름과 나, 에이전트의 이름을 똑똑히 전하거라.”




합동 장례식은 3일 동안 치러졌다. 장례식 첫 날에 안전관리국의 성명과 추도문이 동시에 발표됐고, 그것을 들으러 온 추모객은 모두 합쳐 쉰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장례식에 참여한 노인들은 흙이 덮이는 관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관을 생각했다. 생각 속의 관에는 3차 세계대전의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묻어 있었다. 노인들은 말을 하지 않았다. 살아 돌아온 한 명의 인간은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돌아온 다섯 기의 인형이 열아홉 개의 관을 묻었다.


장례식이 끝난 날, 안전관리국 내부에는 빠르게 임시지휘체계가 형성됐다. 반나절 만에 120명 규모의 특설 중대가 꾸려졌다. 특설 중대는 철혈공조를 치기 전, 가상 작전도 위에서 체스말처럼 움직였고 간부들은 그것을 보면서 작전을 짰다. 작전은 이튿날 속행되었다. 군인들은 서른 명씩, 총 4대의 수송 차량을 타고 철혈공조 지척까지 이동했다.


간단한 작전이었다. 2개 중대가 철혈공조의 앞을 치는 사이, 나머지 2개 중대가 산을 타고 우회해 공단의 옆구리를 파고 들어야 했다. 정면을 맡은 2개 중대는 30분을 채 버티지 못했다. 브라보 중대의 마지막 병사가 피탄당한 어깨를 감싸고 절규하듯 무전했다. 찰리, 델타를 찾는 무전에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열흘 만에 철혈공조는 견고한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동서남북으로 나 있는 입구를 지휘관급 인형이 담당했고, 그 밑에 방패병과 소총병, 저격수가 배치됐다. 방패병은 죽을 때도 방패를 땅바닥에 박아 넣고 죽었고, 소총병은 대응사격과 제압사격, 조준사격을 구분할 줄 알았다. 방패병과 소총병이 전선을 유지하면 저격병이 적군의 머리를 쏘았다. 특설 중대는 철혈을 뚫지 못했다. 운 좋게 살아남아 퇴각한 특설 중대원은 열 명도 되지 않았다. 그들은 작전 개시 1시간 만에 작전 실패를 선언했다.


“생각보다 대단한 걸 만들었나 보군요. 그 남자.”

“예. 멍청한 인형이 쏘지만 않았어도, 이 기술을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을 겁니다.”

“출혈이 조금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 기술의 가치는 확실히 알게 됐으니 그걸로 만족합시다.”


안전관리국 간부들은 선 채로 회의했다. 퇴각하는 특설 중대원의 무전이 그들의 대화 바깥에서 겉돌고 있었다. 카터가 통신병에게 무전을 끄라고 지시했다. 스무 평 남짓한 회의실이 고요에 잠겼고, 간부들은 각자 자리에 앉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직 좀 더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만족시킬만한 전력이 될지, 아니면 고작 이 정도가 끝인지 모르잖습니까.”

“열흘입니다. 열흘 만에 저런 방어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고작 한 인형이 말예요.”

“그러니까 제 말은, 저게 전부인지, 아니면 더 큰 가능성이 있는지 시간을 길게 두고 지속적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겁니다.”


대화가 꼬리를 문 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카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어떤 방법이 좋겠습니까, 레퍼트 박사.”

“요지는 저 인공지능이 적을 마주쳤을 때 얼만큼 스스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가 아니겠습니까.”

“그럼 알맞은 적을 만들어 줘야겠군요.”

“아직 규모가 그리 크지 않으니, 적당한 놈들이 있으면 좋은데……이봐, 카터 준장.”


사내가 몸을 돌려 카터를 바라보았다. 카터는 대답하지 않고 그런 사내의 눈길을 천천히 받아냈다.


“괜찮은 방법 없겠는가.”

“……크루거가 있지 않습니까.”

“크루거? 그 친구가 어쨌다는 말인가?”

“그리폰 정도면 적당할 거라고 봅니다만.”


카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말했다. 느리게 옥죄는 듯한 말투였다.




UMP45는 UMP40의 머리를 쏜 이후 쉬지 않고 걸었다. 그녀는 그녀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 어디를 걷고 있는 것인지 몰랐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발걸음을 멈출 때 마다 UMP40의 목소리가 뇌리 속으로 끼어들었다. UMP40의 목소리는 채찍질이었고 UMP45는 그 채찍질에 괴로워하며 비틀거렸다.


휴식을 취하지 못한 마인드맵은 뜨겁게 달궈져 메모리를 어지럽혔다. 기억 저편에 웅크리고 있던 데이터들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날뛰는 기억들은 대부분 그녀가 ‘어디론가’ 출고되기 전의 것들이었는데, 그 날뛰는 기억들의 안쪽을 UMP45는 들여다 볼 수 없었다.


UMP40이 했던 말은 수시로 그녀의 마인드맵을 채찍질했고 UMP45는 눈을 감은 채 걸었다. 검은색 스타킹은 군데군데 올이 나갔고 드러난 인조 피부가 빨간 피를 머금었다. 발바닥에서 전해져 오는 감각이 희미했다. 허벅지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작은 움직임에도 빠르게 지쳤고, 호흡은 차분하지 못하고 가팔랐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려 고개를 들었지만 눈이 금세 떠지지 않았다. 눈에 힘을 줘 겨우 열린 눈꺼풀 사이로 빛이 들이쳤다. 고개를 들자 소리와 냄새가 감각기관을 타고 들이쳤다. 자작나무가 우거진 숲 한가운데였다. 방사능에 노출된 나무들은 수분이 없었다. 쌓인 눈은 뭉치지 않고 부스러졌고, 얼기 전에 빠르게 녹았다.


- 앞으로도 살아남으려면, 이런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해.


UMP40은 웃고 있었다. 빌어먹을 기억은 잠시만 발걸음을 멈추면 계속해서 떠올랐다. 될 대로 되라지. 지친 몸이 마인드맵보다 앞서 자리를 잡자 UMP40의 목소리는 더 선명하게 들렸다.


- 인형인 우리도 살아갈 이유는 있잖아.

‘40, 그 인형들은 왜 우리를 공격했을까?’


호흡이 잦아들고 있었다. UMP45의 입과 코에서 뿜어지던 입김이 한결 느리게 흘렀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송이가 크고 천천히 내리는 눈이었다. 눈송이는 UMP45의 머리카락에 닿아도 녹지 않고 제 모습을 유지했다.


‘40, 너는 왜 죽어야 했을까?’


빽빽한 자작나무 너머로 희멀겋게 건물들이 보였다. 도시 끝자락에서 차량 몇 대가 오가고 있었다. 사방에서 내리는 눈은 도시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40, 나는 왜 널 죽여야 했을까?’


UMP45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메마른 눈이 발걸음을 따라 힘없이 부서졌다. UMP45가 이를 악물고 도시를 노려봤다. 마저 지워지지 않은 왼뺨의 핏자국에는 녹지 않은 눈이 달라붙어 얼어가고 있었다.






* 이 팬픽은 <소녀전선> 스토리를 바탕으로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Lv44 X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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