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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12없는 세상의 94 03+04화

아이콘 현신
조회: 1523
2020-07-26 09:16:42
"너는......."

움켜진 주먹을 내리며 안구사는 달리던 것을 멈추고 낯익은 얼굴에 당황했다. 잘생겼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인형. 항상 하얀 머리를 길게 땋아내렸던 그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풀어헤치고 나타났다. 안대를 쓴 눈으론 보이지 않는 방향이라 그런지 스타를 안아든 채로 몸을 돌려 그녀는 안구사를 마주했다.

"어. 초면은 아니지?"

덤덤한 인사. 창백한 인상에 유일한 채색은 앞머리 한 쪽의 주황색 브릿지와 어둠 속에서도 노랗게 빛나는 동공 뿐. M16A1. 한때 스타의 동료이자 언니였고, 적으로 돌아섰던 사이였지만, 지금의 안구사와는 안면이 있는 정도의 인형이었다.
적일 때도 동생들에게만큼은 총을 겨누는 걸 꺼리던 인형이었기 때문에, 적의를 느끼지 못한 안구사는 떨떠름하게 주먹을 내렸다.

"여긴 어쩐 일인가?"

"집에 가는 길. 여기 빌라 한 동에 전부 모여 살거든."

"오."

나만 동떨어진 건가. 안젤리아는 국가기관으로 돌아갔다고 했고, M16A1의 말대로라면 M4A1 또한 이 빌라에 살고 있다는 말이었다. 안구사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자신이 받은 곳은 한적한 곳에 동떨어진 저택. 그간의 공로와 실적을 인정받아 배당된 집이었지만 오히려 크지 않더라도 이렇게 알던 인형들과 옹기종기 이웃산다는 것이 부러웠다. AK12가 있었다면 나도 혼자가 아니었을 텐데.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안구사는 한차례 눈을 지긋이 깜박였다. 한참 뛰느라 거칠어질 법도 했던 호흡은 진정된지 오래였다. 춥다, 일단 들어가자. 턱짓으로 빌라를 가리킨 M16A1의 제안에 안구사는 그녀를 따라 묵묵히 걸었다.

"얜 근데 무슨 바람으로 이렇게 마셨대?"

"퇴역한 기념으로 한 잔 하자고 했다. 생각보다 스타는 술이 약하더군. 겨우 보드카 반 병에 뻗을 줄은."

"스타? 재밌네. 옛날엔 그 이름 굉장히 싫어했거든. 그렇구나. 우리 스타는 술을 잘 못 마시는구나."

보드카 반 병은 결코 만만한 주량이 아니었지만, 둘 모두 괴랄한 주량의 소유자였기에 스타는 얼떨결에 최약체가 되어버렸다. 다음엔 자신과도 마시자는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인 안구사는 M16A1과 자신이 친한지에 대해 고민했지만, 그러마 한 걸 물리는 것도 이상했기에 번복하지는 않았다.

"아. 너도 여기 살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산다. 걸어서 30분 쯤이면 도착할 거다."

"먼 거 맞는데. 오밤중에 다니기 위험할 거야. 자고 가."

"그래도 괜찮은가?"

"뭐 어때. 친구네 집에서 자고 가는 거야 흔한 일인데."

M16A1의 눈에도 스타와 자신이 친구로 보였나. 묘하게 기뻐하는 안구사의 모습에 M16A1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을 섞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늘상 차갑고 냉정하게 보이던 인형이 묘하게 수줍어 보인다. 흥국이의 옛날 모습이 이랬던 것 같은데. 유쾌한 기억에 소리없이 웃은 M16A1은 1층에 대기하고 있던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5층 버튼을 눌러주는 것은 손이 자유로운 안구사의 몫. 스타가 깰까 조심조심하는 모습에 안구사는 그녀가 스타를 꽤 아끼는 동생이라 생각한다는 것을 느꼈다.

"비밀번호는 아마 16412635일 거야."

M16A1이 말한대로 비밀번호를 눌러봤지만 삐빅거리며 틀렸다는 소리가 현관의 자물쇠에서 울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새 비밀번호를 바꿨으려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M16A1이 묘하게 웃으며 끝에 94를 붙여보라 했다. 그녀가 말한대로 숫자를 누르자 이번에는 매끄럽게 문이 열렸다.

"외부인에게 암호를 말해주다니, 보안의식이 너무 허술한 거 아닌가?"

"친구끼린데 뭐. 설마 여기 와서 뭐 털어갈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씻고 자라. 수건이나 잠옷은 스타 거 입고."

대충 스타를 잠옷으로 갈아입히기 시작하는 M16A1. 안구사는 단추를 풀며 슬쩍 그녀에게 물었다.

"도움이 필요한가?"

"됐어. 술에 취해서 정신도 못 차리는 동생은 언니가 간수해야지."

"알았다."

씻을 준비를 하고 욕실로 들어가자니 M16A1이 난 간다, 잘 자. 하며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간단히 씻고 머리를 말리며 나오니 M16A1이 놓고 간 곱게 접힌 동물잠옷이 있었다. 춥진 않겠군. 사이즈가 자신과 비슷한 걸 보면 스타의 것은 아닐 것이었고, 키가 비슷한 M16A1이 입던 옷일지도 몰랐다. 꽤 차가운 인상이었던 그녀였는데, 오늘 본 M16A1은 털털하기도 하고, 꽤 자상한 모습을 보였다. 첫인상과 다른 그 모습에 평가를 수정하며, 안구사는 스타의 언니가 친절한 성격이라는 것에 안도하고 스타의 옆에 누웠다. 잠이 드는 건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너, 너가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건데! 그 옷은 또 뭐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스타의 목소리에 안구사는 눈을 떴다. 그새 아침이군. 커튼 사이로 환하게 들어오는 햇빛이 방을 가로질렀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안구사는 하품을 참으며 대답했다.

"M16A1이 자고 가라고 했다. 걱정 마라, 간밤엔 아무 일도 없었다."

"그 자식을 만났어?"

"너에게 자상한 언니 같았다. 네 옷도 갈아입혀주고."

"뭐, 뭐?"

스타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부끄러울 일이었나. 아, 어쩌면 아직 M16A1과 화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 사정을 아는 것과 묵은 감정을 풀어내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였으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안구사는 전날 입고 온 옷으로 갈아입으며 말했다.

"어제 저녁은 잘 먹었다. 다음엔 내가 대접하도록 하지."

"어, 그, 그래. 놀러갈게."

"네 주량이 약한 것도 감안하겠다."

나름 배려한다고 했던 말인데 스타가 걱정스레 눈치를 살폈다.

"......주정 심했냐?"

"심하진 않았다. 다만 여기가 너희 집인데 갑자기 그만 집에 돌아가야겠다며 나가더군. M16A1이 아니었다면 너는 그대로 어디까지 갔을지 나는 모르겠다."

"넌 안말렸어?"

"네가 워낙 자연스러워서 여기가 내 집인 줄 알았다. 사실을 깨닫고 따라나갔을 때 너는 이미 M16A1에게 안겨 있었지."

"......."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덮으며 고개를 푹 숙이는 스타를 보던 안구사는 친구의 흑역사는 덮어주는 것이라는 격언을 떠올리고 슬그머니 뒷걸음질쳤다.

"그럼 가보겠다. 다음에 보자."

"...잘 가."

그래도 인사는 해주는 게 정신줄을 놓은 건 아닌 것 같았다. 부디 서로를 자매라 칭하는 인형들이 화해하기를. 스타의 집을 나서며 안구사는 심심히 기도했다.
다시 혼자. 시시때때로 공허해지는 마음에 안구사는 그저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는다는 마음으로 나아갔다. AK12, 난 네가 없어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너의 말대로 울지 않고, 남은 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하지만 텅 비어있을 저택을 떠올리고 다시금 우울해진 안구사는 그대로 걸음을 돌려 번화가로 향했다. 스타를 초대하기로 했으니, 집에 뭐라도 들여놓아야 마땅했다. 최소한 사람이 사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백화점에 들러야 했다. 혼자서 가구를 고르고 하는 것은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직원이 권하고 추천해주는 것을 구매하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거라면 가격대가 좀 세더라도 전문가들이 모여있는 백화점에 가는 것이 옳다.

프론트부터 직원들은 안구사를 깍듯이 마주했다. 캐쥬얼한 차림이었지만 생김새와 표정 때문에 기품이라도 느낀 듯 했다. 표지판을 보고 가구점이 있는 층수를 확인한 안구사는 자연스럽게 에스컬레이커를 탔다.

백화점이 처음은 아니었다. 테러 진압작전이나 Elid에게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방어작전을 펼치던 거점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던 곳이 백화점이었으니. 하지만 그런 어둡고 살벌한 분위기가 아닌, 밝은 조명에 사람들이 활발히 돌아다니는 광경은 확실 낯설었다.

"카탈로그를 보여주시겠습니까."

가구 층에 도착한 안구사가 딱딱하고 정중한 어조로 앞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에게 부탁했다. 돈 냄새를 맡은 직원이 안구사를 테이블로 안내하며 차를 내왔다.

"어떤 가구를 찾으시나요? 방 하나 전체를 꾸미시는 건가요?"

"방은......."

가본 적은 없는 2층 저택의 단면도를 떠올리며 안구사는 기억을 더듬었다. 1층에 7개, 2층에 5개였나. 별관도 딸려있었지. 설명하며 집 한 채에 들일 가구가 필요하다고 하니 직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어떤 스타일로......?"

안구사는 카탈로그를 넘기며 음악회에 갔을 때 AK12가 눈여겨보고, 이쁘다 평하던 스타일을 찾아냈다. 목재보다는 석조가 불이 붙어도 타지 않으니 괜찮겠지. 제 자신의 취향은 고려하지도 않고 그저 AK12가 좋아할 법한 것으로 정했다.

"아마 안쓰던 집을 배정받은 거라 청소도 필요할 겁니다."

"대행업체를 부르겠습니다."

국가유공자라도 되는 건가? 저택을 배정받을 정도라면 유명인사일 거라는 생각에 직원은 안구사의 얼굴을 살폈지만, 이쁘단 것만 알 뿐 유명해서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이라 군인인가 아닌가 긴가민가해하던 직원에게 블랙카드가 내밀어졌다.

"그리고 피아노도 하나 들이면 좋겠습니다만."

단순한 변덕이었다. 저택을 그저 받은 거니 구색만 맞추려고 했지만, 스타가 오보에에 손을 댈 거라며 눈을 빛내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치기에 하나정돈 들이고 싶었던 것. 직원이 허리가 90도로 굽혀지며 카드가 받아들어졌다.

"피아노는 어떤 것을 치십니까?"

"가구랑 비슷한 디자인이면 괜찮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직원은 일단 다른 층에 연락을 넣었다. 어쨌든 큰손이 왔으니 그녀가 피아니스트건, 취미로 사는 것이건 상관없었다. 이런 고객이면 VIP로 관리해야한다. 이 고객을 통해 다른 VIP들도 올 수 있으니 일회적인 바가지를 씌우기보단, 납득할만한 품질의 물건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옳았다.
빠르게 계산을 끝낸 직원에게 한 마디가 덧붙여졌다.

"아, 그리고."

"예, 고객님."

"비올라는 직접 보고 사고 싶습니다."

"물론이죠!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은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윗층으로 안구사를 모셨다. 이때까지 대략적으로 계산한 금액을 다른 직원이 따라와 안구사에게 보여주었고, 안구사는 무심히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탈로그에서 보았던 가격보다 저렴한 가격. 대량구매에 안전국에서 퇴역할 때 준 카드 자체에서 할인되는 폭이 컸고, 애당초 월급을 받기만 했지 쓸 일은 거의 없던 전술인형이었기에 쌓인 돈에 비해서 지출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 없는 표정변화에 직원들은 더욱 표정이 밝아졌다. 오늘은 보너스를 받고 회식을 하겠구나.

"진짜 국가유공자인가?"

한편 계산을 맡은 직원만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혼자 납득했다. 신소련은 나라를 위해 일하는 자들에게 매우 관대하다.

악기 전문점들을 들러본 안구사는 자신의 부족한 식견에 실망했다. 눈으로 보고 뭐가 좋은지 판별하기엔 악기의 가격이 천차만별이었고, 직원들의 평도 제각각이었다. 결국 안구사는 한 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비올라는 알아보고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스타라도 데려와서 봐야 알 것 같았다. 이제 구매가 끝난 것 같았기에 직원들은 장신구를 보고 가는 게 어떻겠냐며 권했지만, 안구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쪽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군인이었구나. 딱딱한 분위기와 말투, 그리고 처음보는 할인폭의 카드에 직원들은 저마다 깨달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보석 중에 분홍색이 있습니까? 붉은 기가 감도는 걸로."

AK12의 눈동자를 떠올린 안구사의 물음에 직원들은 환호를 삼키며 제각기 떠오르는 보석들을 말했다. 그리고 직접 가서 보시겠냐는 안내를 하기 직전, 안구사는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부질없는 말이었습니다."






부산스러운 이사가 끝났다. 원래 짐도 거의 없었을 뿐더러, 새로 들인 가구와 가전제품들을 나르는 것은 인부들이 와서 청소까지 다 해놓고 갔으니 안구사가 힘을 들일 것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 황량했던 저택이 어느정도 가구가 들어찬 모습은 그래도 봐줄만했다. 이제 그 안에 또 채워넣을 것들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안구사의 마음은 또 공허해져버렸다. 이 모든 게 의미없는 소비라고 생각되어지니.

하릴없이 의자 하나를 끌어 앉았다가 어느새 어두워진 주변에 불을 켰다. 딱히 할 게 있어서도, 어둠이 싫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어두우면 불을 킨다는 관습, 혹은 젖어버린 타성에 의한 것. 어디에도 안구사 본인의 의지는 없었다.

한참 그러고 있자니 잡초뿐인 정원을 가로지르는 엔진소리가 들렸다. 올 사람이 없는데. 안구사는 슬그머니 일어나 마당을 확인하러 나갔다. 매끄럽게 정차하며 시동을 끄고 나오는 것은 한때 그녀의 직장상사였던 안젤리아였다. 대충 자른 더벅머리였던 푸석푸석한 회색머리는 여전했고, 의수와 의족도 쓰던 것을 쓰고 있었다. 피부 곳곳에 났던 흉터는 조금 나아져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있었지만 피로에 찌들었으면서도 자신감넘치는 미소는 그대로였다.

"야, 그새 근사하게 꾸며놨네. 집은 어때?"

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은 차는 새 것인 듯 삐까번쩍했지만, 차량엔 관심이 없어 기종을 모르는 안구사는 이내 차엔 흥미를 잃고 안젤리아에게 대답했다.

"넓습니다."

"응? 그야 넓은 게 당연하지. 너 혼자 살 게 아닌데. 나도 종종 와서 쉴 거고."

"안젤리아는 계속 국가조직에서 일할 생각입니까?"

"뭐....... 아직 내가 젊기도 하고. 나 없으면 똑바로 안굴러가기도 하고."

"그럼....... 쉬러 오실 때까지 정리는 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어? 어 그렇게 되나? 그냥 편하게 살아. 여럿이 사니까 집도 이런 데 준 거야, 관공서에서. 아, 피아노도 들여놨네? 그러고보니 음악회 때 너 피아노 쳤었지?"

불필요한 사치라 생각했건만 안젤리아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잘 샀다는 생각을 하며 안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씩 웃은 안젤리아는 트렁크에서 맥주 한 박스를 꺼내 냉장고를 찾았다.

"쉴 때마다 와서 마셔야지. 너도 마셔도 돼.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

"...저는 이제 뭘 해야 합니까?"

언제나 시키는 것을 따라 의문을 가지지 않고 살아왔다. 총을 쏘라면 쏘고, 누구를 구하라면 구하고, 죽이라면 죽였다. 안젤리아와 AK12가 원하는 것이라면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누구의 명령도 없이 스스로 하고 싶은 걸 하라니, 안구사는 말 그대로 인형이었다. 가뜩이나 반신과 다름없던 총기도 반납한 상황이라 공중에 붕 뜬 기분이었다.
하지만 안젤리아는 그런 불안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응? 굳이 뭘 해야 해? 왜, 쉬라고 할 땐 잘 쉬고 그랬잖아. 쉬다가 하고 싶은 게 생기면 하고, 뭐 누구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아, 복귀해야돼. 또 올게."

"......예."

바람처럼 왔다 가는 안젤리아를 배웅하고, 안구사는 다시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휴식이란 것. 그것은 안구사에게 있어서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한 유예기간이었다. 총기를 정비하고, 사용하는 소체의 자그마한 이상이라도 있나 점검하고, 의복을 정비하고. 그 모든 게 휴식의 일환이었다. 하는 일이 없어진 지금 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AK12가 없는데 하고 싶은 게 있을 리가.

자정이 되었다는 괘종시계의 종소리에 안구사는 정해둔 패턴에 따라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누가 시켜서도, 스스로 정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습관이었다. 작전에 나가있지 않으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자정엔 눕는다. AK12가 침대를 넘어와 장난을 치던 날도 있었고, 스타가 그 소란에 짜증을 내며 베개를 집어던지는 날도 있었다. 그런 소음 속에서도 M4A1은 잘만 잤지. 안구사는 몇번 그렇게 천장을 보며 눈을 깜박이다 잠에 들었다.

이튿날 잠에서 깬 안구사는 여전히 몸에 밴 습관대로 몸을 씻고,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한바퀴 돌았다. 몸에 밴 습관은 금방 사라지지 않아서, 총기를 멨던 멜빵끈을 조이려던 손은 어색하게 허공을 갈랐다. 보는 사람이 없음에도 머쓱했던 안구사는 애꿎은 옷매무새만 가다듬었다. 그래봐야 가운이었지만.

하고 싶을 일이 뭐가 있을까. 피아노를 사다둔 것도 그저 스타를 따라 사버린 것이지, 치고 싶어서 구매한 것은 아니었다. 아, 그래. 비올라. AK12는 없지만 그녀를 떠올릴만한 물건은, 그녀와 연관된 물건이라곤 그런 것 뿐이었다. 총기와 장비는 반출하면 안되고, 흔한 사진한장조차 기밀유지라는 조건 때문에 찍을 수 없었으니까.
그럼, 비올라를 사고 그 다음엔?

"어,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부스스한 몰골의 스타가 눈을 비비며 문을 열었다. 의문에 답해줄 친구를 보러 내친김에 곧바로 방문해버린 것. 집에서나 입는 가운 차림으로 온 안구사의 모습에 잠이 확 깬 스타는 안구사의 손목을 잡아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넌 애가 왜 자각이 없냐! 춥지도 않아?"

"신 소련에서 이정도 날씨는 추운 축에도 들지 않는다."

"말이나 못 하면......."

밤에 왔을 때와는 다른 모습에 안구사는 집을 둘러보았다. 술냄새가 물씬 풍겨왔고, 술병들과 빈 캔, 그리고 AR소대의 일원들이 이리저리 널부러져 있었다.

"용케 제일 먼저 일어났군."

간밤에 술잔치를 했다는 것을 눈치챈 안구사는 의외라는 듯 스타를 돌아보았다. 함께 술을 마셔본 결과, 스타는 결코 술이 강한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큰 숙취없이 가장 먼저 일어나 안구사의 노크에 반응해 일어났으니.
안구사의 착각을 스타가 바로잡아주었다.

"M16이 날 먼저 재우더라고."

"음."

"뭐야, 그 납득한다는 표정은."

"M16은 역시 자상하다는 뜻이었다."

"그렇지?....... 아니,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저 주정뱅이가 자상할 리가 없잖아. 그보다,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8시도 안됐는데."

"보통 하루일과는 6시에 시작하지 않나? 충분히 여유있게 왔다고 생각하는데."

"우린 이제 백수고....... 너도 여유있게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스타는 미심쩍게 안구사의 상태를 살폈다. 가운에 슬리퍼 차림으로 어디 편지라도 가져오는 듯한 차림새. 최소한 남을 만나러 가는 복장은 아니었다. 전선에 나가는 인형들고 꾸미는 게 적더라도 최소한 옷은 제대로 입으니까.

"안젤리아가 어제 다녀갔다."

"...뭐야, 우리 설마 복귀해야 돼?"

스타의 표정이 순식간에 떨떠름해졌다. 이제야 평화를 얻었는데 다시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 지옥으로 돌아가야 하냐는 표정. 다행히 안구사는 고개를 저었다.

"안구사는 계속 국가조직에서 일한다고 했지만, 우리의 복귀를 원하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다만 나보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했다."

"......?"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로상담인가? 갸웃거리며 스타가 물었다.

"뭐 하고 싶은 건 없어?"

"나는....... 이제껏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AK12의 의지를 행하는 손일 뿐이었다. 내가 잘하는 것은 전투고, 퇴역한 지금은 그것은 내세울 수도 없는 특기다. 그 외엔 내가 잘하는 것도, 자신있는 것도 없어. 평생 총을 쏘며 살아왔다. 그런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자신감이 결여된 주눅든 말에 스타는 꽤 난감함을 느꼈다. 상담사의 자질은 로나 M16에게 있었지, 자신은 그쪽엔 딱히 소질도 흥미도 없던 것. 하지만 곧 안젤리아가 했다던 말을 떠올리고 안구사에게 말했다.

"꼭 잘하는 일을 해야 해? 어차피 너 연금 나오잖냐. 안젤리아가 말한 건 취미생활 아니야?"

"취미?"

"뭐 게임이라던가, 책이라던가, tv를 본다던가, 뭘 수집한다던가, 동물이나 식물을 기른다던가......."

과연 그런 의미인가. 안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밖에 남지 않은 친구를 정말 잘 뒀다고 생각했다. 스타의 손을 덥썩 잡고 안구사가 말했다.

"고맙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응? 어, 뭐. 그래."

작전중엔 항상 엄격 근엄 진지하던 애가 갑자기 10대 소녀처럼 보였다. 그래, 전투 외엔 원래 서툴던 애였지. 해변에 간다고 하면 수중작전이라도 하는 줄 알고 잠수복을 챙겨오던 친구. 음악회에서도 AK12가 곯려준답시고 자신은 가지 않는다 했더니 몰래 가방에 AK12의 더미를 챙겨가던 녀석이었다. 그게 더미가 아니라 본체였다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지만.......

괜찮은 건가. 단둘이 작전을 할 때도 AK12를 계속 찾던 녀석이었다. 걔가 없는 지금, 94는 괜찮은 척을 하는 걸까. 아니면 나아지기 위해 애를 쓰는 걸까.
끝나서 평화로운 우리와는 달리 안구사는 정말 세상이 끝난 느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스타는 막연히 했다. 혼자두면 좀 위태로워보이는 그런 애. 그래, 지휘부에 처음 왔던 썬더를 보던 불안감. 맞아, 걱정.

"아침은 먹었냐?"

친구니까 잘못될까 걱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나름 스스로 의리있는 인형이라 생각하던 스타의 물음에 안구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물어볼 것이 하나가 더 있다. 이쪽이 원래 목적이긴 했다만."

"같이 먹자. 뭔데."

"비올라를 사려고 하는데, 같이 가줄 수 있나?"

"그정도야 뭐."

스타는 능숙하게 다시 인덕션에 불을 올렸다. 안구사는 말하지 않아도 스타의 집 여기저기 널려있는 AR소대의 머릿수를 세어, 그 수만큼 수저를 챙겼다.

"식탁이 좁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냥 저기 반상에 놓고 먹을 거야."

"아."

식탁보다는 좀 크지만 그래도 6명이 먹긴 좁지 않나 고개를 갸웃한 안구사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에 상을 차렸다. 딸각거리는 소리에 앉은 채로 잠이 들었던 M16이 가장 먼저 눈을 떴다.

"어, 어쩐 일이냐."

"스타를 빌려가려고 왔다."

"야야, 내가 물건이야?"

"엉. 데려가. 반납은 잘 해야돼."

"야!"

"걱정마라. 잘 쓰고 무사히 반납하겠다."

"너네 진짜......!"

소란에 나머지도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소파 팔걸이에 걸쳐 늘어져있던 흰 브릿지의 까만머리 인형은 허리를 부여잡으며 낑낑대고, 바닥에 누워있던 금발에 붉은 브릿지를 넣은 인형은 그녀를 로라고 부르며 스트레칭을 도왔다. 괴상한 비명과 웃음소리가 교차했다.

"욥, 구사 하이."

"반갑다. SOP2."

로의 팔을 쭉쭉 잡아당며 인사하던 SOP2에게 안구사는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였다. 피차 이름은 알고 있던 사이라 어색하진 않았다. 도란도란 아침인사를 나누는 그들 사이를 비집고 스타가 냄비를 내려놨다.

"라면 맛있겠다."

"K2가 불닭볶음면이 최고랬는데."

"그건 김치건들이나 먹는 거야."

로, SOP2, M16이 제각각 한마디씩 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반면 막 깨서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있는 초록 브릿지의 소녀는 반상 앞에 오지도 않은 채였다.

"엠포? 안 먹을 거야?"

의아해하는 스타에게 투정이 들려왔다.

"또 라면인가요?"

"아니, 왜 또....... 당장 집에 있는 먹을 게 이것밖에 없었단 말야."

"많이 컸네요. 스타 주제에 변명도 하고."

찔끔하는 스타의 팔을 툭툭 두드린 엠포도 앞접시를 들었다.

"농담이에요. 잘 끓였네요."

"아, 소프. 그건 또 왜 가져오는 거야."

"어제 마시다 남은 건데? 로는 해장술을 모르는 거야?"

"해장술 좋지."

"아니, 너네 그러다 잭처럼 주정뱅이될 거야?"

"잭?"

낯선 이름에 안구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개의 그리폰 인형이 퇴역하고 별명이나 총기명을 택하는 것을 생각하면 정상적인 이름이란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 거기다 잭은 보통 남자 이름이아. 그 의문에 소프가 M16을 가리켰다.

"잭 다니엘!"

"......."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술 이름이야."

어쩐지 혼자 옆에 양주병을 들고 있다 싶었다. M16이 남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병에 붙은 라벨을 본 안구사는 그러려니하며 라면을 덜어먹었다. 소녀가장 스타의 손맛이 흡족스러웠다.

Lv89 현신

태양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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