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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12없는 세상의 94 01 + 02화

아이콘 현신
댓글: 1 개
조회: 1706
2020-07-24 06:58:30
지긋지긋하던 화약냄새도 이제 맡을 일이 없겠지. 항상 함께하던 소총, AN94를 반납하며, 백금발머리의 소녀는 후련하면서도 꽤나 착잡함을 느꼈다. 함께 구르고, 부서지고, 달아오르고, 정비를 받던 모든 순간이 스쳐지나가고, 그동안 일했던 보수와 퇴직금이 담긴 계좌를 받아 로비로 나온 그녀는 멍하니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전술인형들과 전술인형이었던 민간인형들을 구경했다. 모두 자신과 같은 처지. 더이상 총을 잡지 않게 되어 개운한 듯 새로운 일상을 즐기러 나가는 인형들도 있었고, 이제 뭘 해야할까 AN94처럼 갈 곳을 잃고 잠시 어딘가에 기대거나 앉은 인형들도 보였다. 그래도 이 모든 게 평화로워 보였고, AN94에겐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저이 이제 문 다다요."

언어회로에 문제가 있는 인형 하나가 AN94에게 다가왔다. 넋놓고 있던 게 몇 시간 째였는지, 접수대에서 열심히 인형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새 출발을 응원하던 직원들은 피로에 쩌든 얼굴로, 하지만 퇴근의 기쁨이 번져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AN94는 선선히 인형의 손짓에 이끌려 일어났다.

"실례했다."

"안녀이 가새오."

보통은 저런 하자있는 인형들은 인간이었다면 고용되기 힘들겠지만, 이곳의 모두는 신경쓰지 않았다. 인간들의 니즈에 의해 디폴트값이 변경되어 출시되는 인형들이 많다. 정상적인 인형, 똑똑한 인형, 조금 모자란 인형, 외눈, 외팔이, 짝다리, 등등. 태어남에 본인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았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성격 차이로 다투는 게 아니라면 대부분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는 편이었다. 말이 안통하는 부류는 아니니까.

"AK12."

AN94는 한 이름을 읊조려보았다. 총기 이름. 그리고, 그녀가 몸담았던 곳에서 함께 일하던 인형의 이름. 별명으로 친한 이들은 마일리라고들 부르기도 했지만, 그녀를 선망하고 동경하며 AK12의 신도처럼 살아왔던 AN94는 끝끝내 그 이름을 고집했다.

그녀도 오늘 같이 퇴역수속을 받았다면, 마일리라는 이름을 택해 신분증을 발급받지 않았을까. 힘없이 손에 들고있던 자신의 신분증을 물끄러미 내려다본 AN94는 안구사, 라고 적힌 이름과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증명사진을 훑었다. 별 의미없는 이름. 총기명을 민간인형이 되어 쓸 순 없으니, 많이 불리던 이름을 그저 기록한 것 뿐이다. 그렇지만 그 이름에 의미가 있다면, AK12가 장난칠 때 부르곤 하던 이름이라는 것.

앙다문 입술 근처 턱근육이 수축했다. 경직된 얼굴은 잠시 후에 풀어지고 힘없는 발걸음이 낙엽 굴러다니는 도로를 걸었다. 몇 발자국 걷지 않아 도로 멈춘 그녀는 묵묵히 앞을 바라보았다.

"웬 궁상이냐 이게."

고개를 돌려보니 늘어뜨린 분홍색 머리에 하늘색 브릿지를 한 인형이 퉁명스레 말을 걸어왔다. 언제나 방탄복에, 펑퍼짐한 슈트에 중무장을 했던 모습만 봐왔던 터라 원피스에 코트를 가볍게 걸친 가냘픈 모습이 낯설었다. 안구사는 물끄러미 그녀를 보다가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은가?"

"...뭐가."

짐짓 모른체하며 되물어오는 자기보다 키 작은 그녀에게 안구사는 더 묻지 않았다. 그저 손목이 잡힌 대로 따라갈 뿐이었다.

"AR15."

"스타라고 불러도 돼. 아니면 15나. 편한대로, 아무렇게나."

그녀에게 이름은 그저 부르는 호칭인가보다. 얼핏 후련해보이는 얼굴이기도 하다. 한때 파트너로 일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지켜봤던 스타의 성격은, 정말 전투에 탁월하다는 것과 별개로 싸움을 즐기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기야 좋아서 총을 쏘고 남을 죽이는 걸 하던 인형은 그리 많지 않겠지.

"갈 곳은 있어?"

"......."

스타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인구가 확 줄어버린 세상에 빈 집이 워낙 많아 퇴역한 인형에게 지급되는 집이 있긴 했지만, 그저 돌아가기 싫을 뿐이었다. 아직 가구도 없고 휑하기만 할 집에 혼자? 늘 팀과 함께 쓰던 숙소에서 대화가 오가건 조용하건 혼자는 아니었던 그런 분위기를 집이라 떠올려서 그런가, 썩 집에 가고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 그런가. 외로웠던 건가. 이 퉁명스러운 인형의 손이라도 붙잡고 뭐라도 같이하자며 매달리고 싶었지만, 안구사는 스스로의 절망스러운 사교성을 절감할 뿐이었다. 우물거리며 좀처럼 입술을 떼지 못하던 찰나.

"없으면 우리 집에라도 오던가."

홱 뒤돌며 옷소매를 잡아끄는 스타의 팔을, 안구사는 거절하지 않고 따라 걸었다. 문득 그녀의 등이 좁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듬직해보이는 게, 문득 AK12의 뒷모습과 겹쳐보여 눈을 깜박였다. 다시 보면 가느다란 선이 단호하게 앞으로 걸어나가는 것 뿐이었다.

늘 그랬듯, 별다른 잡담 없이 길을 가고, 어느덧 스파스마트라는 이름의 소형 마트에 도착했다. 붐비지는 않아도, 적당히 손님들이 오가는.

"여기가 너의 집인가?"

"...농담이지? 저녁시간대에 고기랑 이것저것 좀 싸게 해줘서."

"농담이었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겠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착각했던 것이었지만, 곧이곧대로 말했다면 스타가 화낼 것 정도는 어렴풋이 알았다.

"기분 나쁠 것 까지야....... 그러고보니 너랑 농담따먹기나 하게 될 날이 올 줄은."

화염과 총성, 피를 닮은 윤활액과 진짜 피가 난무하기도 하는 전장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만 했던 사이. 그런 둘이 이렇게 평화롭게 장바구니를 들고 있자니 스타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물끄러미 그녀의 웃음을 보던 안구사는 따라웃어야 할 타이밍이란 걸 알았지만, 좀처럼 웃어지지가 않았다.

"빨리 골라서 가자. 춥다."

말과는 다르게 스타는 손에 든 물건들의 가격과 양, 품질을 까다롭게 분석하고 엄선된 식재료만 장바구니에 담았다. 분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안구사가 보기엔 모두 비슷해보이는 것이라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저것은 그녀의 선택이니까, 내버려 두었다.

키 작은 분홍머리 소녀의 장바구니는 점점 차곡차곡 쌓아져가고, 훤칠한 백금발 여성의 장바구니는 빈 채 따라다니는 걸 본 주변 사람들은 조금씩들 의아해했지만, 저런 장면은 간혹 볼 수 있던 것들이라 다들 흐뭇하게 웃고 넘겼다. 대학생쯤 되는 언니와 함께 장을 보러 나온 똑부러진 동생. 혹은 후배. 썩 닮진 않았던지라 후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좀 더 많았다.

"이런 거에 익숙한 것처럼 보인다."

"생활력 없는 AR소대를 먹여살리려면 나라도 했어야지. 주정뱅이에, 사이코에, 소심한 녀석까지....... 그나마 로한테 배워서 인스턴트를 먹는 거에서 탈출할 수 있었어."

"나도 배울 수 있나?"

"당연하지. 장보러 갈 때면 언제든 불러."

언제든. 그 단어에 다시 안구사는 AK12가 자신만만해하며 언제든! 하고 굳건히 서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져있자니 어느새 스타가 뒤돌아서 걱정스레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냐?"

"...아니다. 난 울지 않는다. AK12가 울지 말라고 했다."

"됐어. 넌 뭐 살 거 없냐? 돈 많잖아."

"......."

"술이나 한 잔 할까 하는데."

"보드카."

"응?"

"보드카."

난데없이 한 가지 술에 집착하는 모습에 스타는 갸우뚱했지만 이내 주류 코너로 가서 보드카를 한 병 집어들었다. 그러곤 몸을 돌려 계산대로 향하는 스타의 뒤에서 안구사는 보드카를 한 병 더 집었다.

"인당 한 병이다."

"...너 술 안마셔봤지."

"아니다. AK12와 종종 마셨다."

"의외네."

조금 걱정스러워하던 스타는 내키지 않다는 표정으로 일단 거절하지는 않았다. 계산을 하면서도 안구사의 눈치를 살피는 게 정말 얘가 이거 마시고 괜찮을까?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봉투 하나씩 나눠 든 그들은 다시 말없이 스타의 집으로 향했다. 구름낀 하늘 사이로 달빛이 희미했다.

"저기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얼마를 걸어 도착한 스타의 집도 휑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냉장고, 소파, 침대, 책걸상 정도의 기본적인 가구와 생활용품들이 있어 사람이 사는 곳이긴 하구나 정도. 스타가 가리킨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있다가 인덕션을 키는 스타의 모습을 보곤 슬그머니 일어난 안구사는 식탁에 기대어 섰다.

"내가 도와줄 건 없나?"

"요리해본 적은 있어?"

"없다."

"그럼....... 수저나 놔 줘. 찬장에 보면 있을 거야."

거창한 걸 만드는 건 아니라서, 갓 사온 고기를 굽고 후추나 소금, 그리고 안구사는 처음 보는 어두운 초록색 야채조각을 뿌리는 것만 볼 수 있었다. 식탁 유리커버에 따각따각 놓이는 포크와 젓가락 소리와 기름 두른 후라이팬에 고기가 올려져 치이익하는 소리가 섞였다. 안구사가 찾는 술잔은 보이지 않아서, 머그컵 두 개를 꺼내고 보드카를 따랐다. 강아지 캐릭터가 그려져 있어 안구사는 잠깐 스타를 의외라는 듯 쳐다보았다.

"샐러드 먹을 거야?"

"난 괜찮다."

"그럼 안만든다."

고개를 끄덕이는 안구사의 앞에 레어로 익힌 고기를 담은 접시가 놓아졌다. 쌀쌀한 집 안 공기 덕에 김이 모락모락 나오는 것이 보였다. 조금 시린 손을 고기 앞에 갖다대는 안구사의 맞은편에 스타 몫의 고기도 올라왔다.

"춥냐?"

"아, 아니다. 그냥."

"말하지 그랬냐."

의자를 뒤로 뺐던 스타는 앉기 전에 한쪽 벽의 냉난방 버튼을 눌렀다. 돌아와 앉으며 스타는 머그컵을 들었다.

"조금만 참아. 여기 바닥이 데워지는 형식이라 조금 걸리....... 쿨럭."

벌컥벌컥 머그컵 안의 보드카를 들이키다 사레가 들렀는지 기침을 해대는 모습. 안구사도 머그컵을 반 정도 비우고는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은가? 역시 보드카를 데워서 따라줬어야 했나......?"

"수, 술잔은 어쩌고 여기다가 따라놓은 거야! 물인 줄 알았잖아!"

"술잔이 있었나? 그보다 보드카는 원래 컵에 따라마시는 거다. 조그마한 술잔에 따라마시면 어느 세월에 저 병을 비우겠는가."

"아니......."

원래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복잡한 표정으로 스타는 안구사를 쳐다보았다. 농담기 하나 없는 언제나 그렇듯 진중한 표정. 스타도 사실 보드카는 처음 마셔보는 것이었기에, 안구사의 말이 맞는건가 싶으면서 그러려니 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몰랐네. 먹자."

"잘 먹겠다."

둘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술 한잔 하자는 의미는 보통 그간 어떻게 지냈냐던가, 요즘 어떻게 지내냐던가, 혹은 다른 주제에 대해 오가는 대화를 하자는 것일텐데, 둘은 정말로 술과 고기만을 조용히 삼켰다. 안구사의 컵이 비었을 때도 스타가 말없이 병을 들어 기울이는 게 자연스러웠다. 오랫동안 같이 지내며 오디오를 채우는 것은 M4A1과 AK12였지, 그들이 주도적으로 입을 열어 화제전환을 한 적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AK12.
잠시 닿은 생각에 안구사는 고기를 썰던 손을 멈추었다.

"왜. 맛없어?"

"아, 아니다."

스타의 부름에 다시 정신을 차린 안구사는 서둘러 손을 재촉하고 입에 고기를 다시 넣기 시작했다.

"정말 맛있다. 빈 말이 아니다."

"그럼. 누구한테 배운 건데."

나름 자랑스러워하는 듯한 말투에 안구사는 칭찬하길 잘했다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술을 마실 때면 한 모금마다 얼굴을 찌푸리는 게 썩 보드카를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혹시 마시기 어렵다면 음료수와 섞어마시는 게 좋다. 무리해서 마시지 않아도 괜찮다."

"아. 솔직히 너무 쓰고 독해서....... 오렌지 쥬스면 적당하려나."

"내가 해주겠다."

AK12에게 배운 비율대로, 냉장고에서 꺼낸 오렌지 주스와 보드카를 섞어주었다. 스타는 그렇게 마시고 썩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맛있다."

"그럼. 나도 누구에게 배웠는데."

고스란히 돌려주는 말에 스타는 즐겁게 웃다가 오렌지 주스 병을 들었다. 이번엔 제가 만들어주겠다는 듯.

"넌 그냥 마실 거야? 괜찮아?"

"익숙해져서 괜찮다."

처음엔 자신도 스타처럼 확 올라오는 알코올의 향에 온갖 인상을 썼던 기억이 난다. 옆에서 깔깔대며 웃던 AK12는 이번엔 다르게 먹어보자며 주스를 섞어주었고, 그것은 맛있었지만, 생으로 보드카를 들이키는 AK12를 따라 자신도 그 후엔 계속 섞지 않고 얼음만 넣어 마셨다.

쓰다. 하지만 익숙하다. 그리고 익숙해질 것이다.
속으로 되뇌이며 안구사는 병을 들었다. 고기는 이미 다 먹었고, 아직 취하진 않아 계속 술을 홀짝이는 중이었다. 스타도 마찬가지. 아직 취기도 오르지 않은 자신과 달리 스타는 헤실거리며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좋다. 다 끝나고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어서."

"...이제 뭐 할지 생각해둔 것은 있나?"

스타에게 한 질문은 곧 스스로에게 한 질문과도 같았다. 지침이 사라져버린 안구사는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잃은 더미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반면 스타는 딱히 그런 걱정은 없어보였기 때문에 충동적으로 물어본 것.

"한동안은 쉬어야지. 아....... 그러고보니 MDR이 유튜브였나. 거기다가 연주하는 방송같은 거 올려보라던데."

"연주? 오보에?"

한때 연주회에 잠입하던 작전이 있었다. 각자 악기를 들고 연주자처럼 위장했어야 했던 일이 있어, 스타와 안구사가 속했던 리벨리온 소대를 비롯해 404소대, AR소대의 일원들은 악기로 연주하는 솔로곡과 합주곡을 연습해 갔었지. 열심히 하던 인형들도 있었고, 왜 이런 일까지 해야하냐며 불평을 하던 인형도 있었지만, 그것을 즐기던 것은 스타와 SOP2 뿐이었다. SOP2야 그냥 팀파니를 신나게 두들길 수 있어서,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즐거워했던 거였지만, 스타는 연주 자체에 열정적으로 임했다. 적성에 맞았나보지.

"너라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

쑥쓰러운 기색이 만연하면서도 좋아한다. 항상 뚱하고 퉁명스럽던 스타의 수줍은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것을 부드럽게 지켜보며 안구사는 머그컵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새 집 안의 온도에 익숙해져 보드카는 미지근해졌다. 상관없다. 차갑든 미지근하든 AK12를 떠올리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니까.

"너는?"

"나?"

"뭐 할 건데."

꽤 취했는지 슬슬 몸을 가누기 힘든 모양이었다. 스타는 의자에 늘어져 앉아 물었다. 그래도 아직 말이 뚜렷한 걸 보면 제정신이긴 한 것 같았다. 술만 먹으면 성격이 변하는 종류의 인형들도 있으니, 이런 술버릇이라면 양호하지. TMP라던가, HK416은 정말 고약하다고 들은 바가 있었다.

"글쎄.아직 생각해둔 게 없다."

"뭐....... 당장 뭐 해야될 정도로 우리가 쪼달리는 건 아니니까. 안해도 되고. 심심하면 놀러와. 친구잖아."

"...그래. 친구지, 우린."

자기도 모르게 안구사는 웃음이 나왔다. 이제야 풀린 표정에 스타의 웃음은 더욱 밝아졌다. 다 비워진 안구사의 병과 달리 스타의 것은 반도 줄지 않았지만, 안구사는 더 권하지 않았다. 휘청이는 모습이 슬슬 취한 모양이었고, 제 몸을 못가눌 정도로 과음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나머지는 다음에 마시겠는가? 많이 취해보인다."

적당한 때 끊어주는 것도 친구의 역할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 안구사에게 만용이 돌아왔다.

"아직 안 취했어."

그러면서 병을 잡으려는 시도는 헛손질이 되어버리니, 곧바로 수긍한 스타는 비척이며 일어섰다.

"그러네. 취했네. 슬슬 가봐야겠다. 94, 잘 먹었어."

코트를 걸치고 안구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스타는 현관으로 나갔다. 안구사도 배웅을 하러 그녀를 따라갔다.

"괜찮겠나?"

"당연하지. 술 좀 마셨다고 내가 길이라도 잃을까봐?"

툭툭 앞꿈치를 바닥에 두드려 운동화를 발에 맞춰신은 스타는 코트 앞자락을 여몄다. 밤공기는 차다.

"춥다. 들어가. 담에 또 보자."

"조심히 가라."

허언은 아니었던지 찬 공기를 맞자마자 스타의 걸음은 정확해졌다. 으, 춥다. 하며 거북이처럼 목을 쑥 코트깃으로 숨긴 스타는 문 너머로 사라졌다. 안구사는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스타가 남긴 보드카를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아직 나는 취하지 않았으니 괜찮아, 라는 심상. 그러다 물끄러미 빈 접시들에 시선이 닿았다. 기름이 굳기 전에 처리해야지. 피가 마르기 전에 현장을 정리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설거지는 식사를 마치고 빨리 할수록 좋다. 두 그릇에 포크와 나이프 두 쌍이라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세제가 묻은 손을 온수로 마저 씻어버리고, 미지근한 머그컵을 다시 잡아 선 채로 홀짝였다.

아직도 낯선 집. 공기는 따뜻하지만, 한 사람 분의 온기가 빠져나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위화감이 든 안구사는 입을 천천히 벌리며 탄성을 질렀다.

"...아."

여긴 자신의 집이 아니다. 집주인 스타는 그럼 어디로 가본다는 것이었을까.

"취한 게 맞았군."

스타도, 자신도. 이 간단한 착각을 깨닫지 못하고. 안구사는 혀를 차며 스스로를 꾸짖고 외투를 걸쳤다. 녀석도 퇴역한지 얼마 되지 않으니 길을 잃어버릴 수 있었다. 맨정신이 아니니 더더욱.
다급하게 문을 열고 나가 난간을 잡고 아래를 보니, 저 멀리 이미 걸어가고 있는 스타가 보였다. 성큼성큼, 저 작은 키에 어떻게 저리 빠른지 거침없이 걷는 걸음에 안구사는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총을 반납했어도 한때 전술인형이었던 몸. 엘리베이터보다는 빠르다. 단숨에 5층 높이를 내려간 안구사는 스타를 뒤쫓았다. 스타에게 들러붙는 검은 그림자가 있어 주먹을 움켜쥔 채. 스타도 나름 근접전에 강했기 때문에 쉽사리 당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알코올이란 변수에 그녀의 승리를 점칠 수는 없었다.

스타는 큰 키의 그림자에게 고개를 돌렸고, 이윽고 그녀가 쓰러지는 것을 그림자가 받아들었다. 안구사의 눈에 서릿발같은 기운이 흘렀다.

Lv89 현신

태양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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