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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12없는 세상의 94 07+08화

아이콘 현신
댓글: 1 개
조회: 1642
2020-08-03 10:02:01
어느 순간부터 쉴새없이 지저귀는 휴대폰 소리에 안구사는 부스스 눈을 떴다. 습관적으로 머리맡에 있을 총을 더듬거리며 찾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차분히 휴대폰을 확인했다. 들어간 적도 없는 '전 그리폰 단톡방'이라는 데에 초대가 되어, 군중 속의 혼잣말들을 휴대폰은 그대로 액정으로 전하고 있었다.

-SPRINGFIELD : 오늘은 날씨가 맑은데 조금 춥네요. 다들 따뜻하게 입고 나가세요 ^^ 07:01

-M14 : 춘전언니 오늘 카페 몇 시에 열어요? 07:01

-SPRINGFIELD : 지금 열려있어요. 07:01

-M14 : 좀따 사회복지관 갈 건데 빵 들고 들를게요! 07:02

-MDR : A형 Elid 40개체정도 소탕하러 가는데 같이가실 분? 방송중임 07:09

-톰슨 : 애들 총 거의 반납하지 않았나? 일단 나 감 07:11

-100식 : 섹스 07:40

스타가 초대한 모양이었다. 개중엔 오가며 한두번 마주치거나, 종종 함께 작전을 하던 인형들도 섞여있었다.
그러고보니 어제 잠에 든 기억이 없었는데. 마지막 기억이 비올라를 하염없이 보던 것 뿐이었다. 그러다 껌벅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나를 침대로 옮겨놨을까.
의문이 드는 순간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밥 먹어, 집주인."

익숙한 목소리였다. 따뜻한 이불 속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세입자와의 첫만남에 게으름을 피울 순 없지. 그런 의무감에 안구사는 차가운 바닥을 피해 슬리퍼를 신고 일어났다.

"...416."

자주 작전을 함께 나가곤 하던, 스스로를 엘리트 인형이라는 강박관념에 몰아붙이던 인형이었다. 제가 가는 길에 의심을 갖고, 고뇌하던 모습이 인상깊던 기억이 났다. 항상 전술적인 차림새를 하고 있었기에 가사와는 거리가 멀 거라고 생각했는데, 은색 머리를 한데 묶고 앞치마를 한 모습이 여느집 주부나 다름없었다.

"좋은 아침. 금방 일어나네."

안구사와 마찬가지로 거의 무표정하던 HK416이었는데, 웃음으로 맞이해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고소한 냄새가 주방에서 퍼져나오고 있었다. 안구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재료의 출처를 물었다.

"당연히 어제 일 끝나고 장을 봐 왔지. 짐이랑 식재료 정리하는 김에 너도 정리한 거고."

잠결에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조심스레 옮긴 모양이었다. 따뜻한 배려에 안구사는 HK416의 새로운 면모를 깨달았다. 이래서야 마치 어머니같지 않은가.

HK416을 따라 주방으로 향하는데 중간에 있던 방 하나에 HK416이 들어갔다. 이미 문이 열려있던 걸로 봐서 저 방을 쓰고 있는 모양이지. 안구사는 별 생각없이 잠시 HK416을 기다리다 홀로 주방으로 향했다. 굳이 깨우려는 사람이 있다면, 잠을 너무나 사랑하는 인형, G11일 게 분명했다. 꼬질꼬질한 꼬맹이. 작전지에 나와서도 틈만 나면 졸던 아이였다.

"잠탱아, 일어나자."

"5분만......."

"씨......."

된소리가 나오려다 움찔하는 HK416이 슬쩍 안구사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안구사는 둘이 있는 방을 이미 지나친 모양이었다. HK416은 밖에 들리지 않도록 작게 으르렁거렸다.

"발년아, 괜히 집주인한테 트집잡히고 싶어? AK12가 쟤 되게 냉정한 애라고 했단 말야. 빨리 일어나!"

"우우....... 나쁜 사람 아닌 것 같은데."

"사오 녀석만큼 음흉하지야 않겠지만......."

HK416의 재촉에도 결국 밍기적거리던 G11은 HK416의 손에 끌려나왔다. 질질 바닥에 끌리는 발에 이불이 걸렸다가 떨어졌다.
식탁엔 사오와 닯은 자매인형이 생글생글 웃으며 셋을 기다리고 있었다. 얄밉지 않은 여우상의 얼굴. 사오와 반대편의 눈에 흉터가 있던 그녀의 머리색깔은 사오보단 조금 밝은 갈색이었다.

"안녕, 집주인 씨! 앞으로 잘 부탁해. 나인이라고 불러줘!"

"반갑다. 부르던 대로 부르면 된다."

"히히. 그럼 우리 가족이 늘었네?"

살갑게 구는 나인의 태도가 음흉한 사오와 비교되었지만, 꺼림칙하진 않았기에 안구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 오묘한 울림이 있는 단어였다. 그사이 G11에게 HK416이 밥을 떠먹였다. 엄마같은 HK416과 애나 다름없는 G11. 그럼 사오, 나인, 그리고 자신은 그 사이에 낀 언니라던가 그런 역할인가? 실없는 생각에 안구사는 조소를 참았다.

"너희는 여전히 총을 소지하고 있는데, 우리처럼 퇴역 후 신분증을 받은 건가? 아니면 그냥 별칭?"

그들을 따라 수저를 들며 안구사가 물었다. 답은 무심한 태도의 HK416에게서 돌아왔다.

"원래 별명이야. 그리폰 녀석들처럼 우리도 서로를 이름이나 행동습관을 토대로 별명으로 부르곤 했어."

"그리고 민간인 생활도 재밌고 말야!"

나인에게서도 활기찬 말이 들려왔다. 확실히, 음지에서 활동하는 인형들이기에 필요에 의해 만든 위장신분이라 하더라도, 평소에 동경하고 있던 생활일지도 몰랐다. 안구사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걸 같이 누릴 누군가가 없다는 것이 때때로 사무쳐왔다.

"그러고보니 항상 붙어다니던 친구가 없는데. 혹시 걔는 아직 은퇴 안했어?"

"나인!"

호기심에 묻는 나인에게 HK416이 윽박질렀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 주워담아지진 않았다. 수저를 놀리던 손을 멈춘 안구사의 모습에 HK416이 긴장하며 그녀를 돌아보았고, 억울하다는 듯 나인이 항변했지만 금방 안구사의 표정을 보고 주눅이 들었다.

"왜! 궁금해서 물어볼 수도 있는 거 아냐? 흥국이 너도....... 어......."

비수에 찔린 느낌이 들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안구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게 한편으로는 서글프면서도, AK12의 유지를 따르는 거라 생각되어 얕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괜찮다. 은퇴 전 마지막 작전에서 그녀는 안젤리아를 보호하고 숨졌다. 수복이 불가능하다 하더군."

생각보다 담담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럼에도 안타까워하는 기색을 보이던 흥국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도 마인드맵 복원은 가능하지 않아?"

"테세우스의 배 딜레마와 같지. 작전을 위해서 복원하는 거라면 모르지만, 그저 내 감정을 위해 그녀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조품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기만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그녀가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그런 부질없는 희망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말하다 말곤 피아노 옆에 놓여진 비올라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스타가 말한 합주를, 피아노와 비올라를, AK12와 함께 연주한다면 그것도 정말 좋은 시간이 될 것이었다. 아니,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안구사는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말을 따르기 위해서라도 안구사는 슬퍼할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면서 안구사는 이제 자신이 완전히 받아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AK12는 이제 없다. 자신을 위하던 그녀의 말 남았을 뿐.

"미안하다. 즐거운 분위기를 망친 것 같군."

"아, 아냐. 힘들었겠다."

걱정스런 기색으로 위로하는 나인에게 안구사는 다시금 웃었다. 수많은 전투 중에 친한 동료를 잃은 건 자신 뿐만이 아닐 것이었다. 저들도 누군가를 잃은 적이 있었을 수도 있고, 그럴 위기에 처한 적도 있겠지.

"식기 전에 먹자. HK416? 네 요리는 훌륭한 것 같다."

"맛있게 먹어주면 나야 좋지."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겠지만, 안구사는 AK12의 말을 그래도 따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찾아와준 인연이란 것들이 있으니까. 스스로를 믿진 않았지만, 과거에 함께했던 사람들이 도움이 될 거라던 AK12의 말을 의심하진 않았다.

내가 없으면 우리 94는 참 힘들겠지만요. 울지 말고 꼭 재밌게 살았으면 좋겠네. 알았어요?

눈을 감고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웃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아침을 먹고나서, 자리에 없는 사오를 제외한 404소대의 일원들은 집 안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못 보던 박스들이 구석에 놓여있다 했더니 그런 것들이 있었나. 조립식 플라스틱 나무를 뻥 뚫린 2층 난간에까지 닿도록 쌓아올리는 나인에게 안구사는 미심쩍게 물었다.

"지금 뭐하는 건지 물어보고 싶은데."

"내일 크리스마스잖아!"

"크리스마스?"

"뭔지 몰라?"

"아니, 모르는 건 아닌데......."

안구사가 인조 나무를 꺼림칙하게 올려다보았다. 이걸로 끝나진 않겠지. HK416이 난간 곳곳에 LED조명과 솜, 별 장식 따위를 달았다. 졸고 있어야 할 G11조차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쪽에 장식들을 붙였다.

"우리랑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기리기 위해 이러는 건 낭비가 아닌가......?"

"응? 누굴 기려?"

"예수. 기독교와 천주교의 교리에 나오는 성인 중 하나가 아닌가. 그가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날이 크리스마스라고 알고 있다."

"헤에? 크리스마스는 산타한테 선물을 받는 날인데!"

"......."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나인의 얼굴에 안구사는 입을 다물었다. 슬쩍 HK416과 눈이 마주친 안구사는 일단 맞장구쳐주기로 했다. 순진한 인형의 꿈을 짓밟을 정도로 안구사는 눈치가 없진 않았다.

"그런 날이기도 했지. 난 산타한테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몰랐군."

"구사는 나쁜 아이구나? 괜찮아! 내가 산타할아버지한테 구사도 선물을 달라고 기도할게!"

"고맙다."

"예이이이......."

G11도 늘어지며 환호했다. 제 얼굴만한 양말을 트리에 거는 모양이 정말로 산타가 줄 선물을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사오나 HK416이 나인과 G11에게 산타인 척 오밤중에 선물을 넣어놓고 모른 체하는 거겠지만, 안구사는 애써 그것을 외면하고 슬그머니 장식을 들었다.

"나도 도와줘도 괜찮을까?"

"당근이지!"

삭막했던 저택이 점점 구색을 갖춰갔다. 그러고보니 크리스마스 테마로 지휘관이 숙소 하나를 이렇게 꾸몄던 적이 있었지. 안구사는 꾸며진 숙소를 보고 행복해하던 인형들이 꺄르르 웃던 때를 떠올렸다. 그 중 살아서 퇴역한 인형이 몇이나 될까는 계산하지 않기로 하고 우울할 뻔했던 상념을 떨쳐버렸다. 한창 집 곳곳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도록 인조 나뭇잎과 장식을 부착하던 안구사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뭐해?]

스타였다. 뚱한 목소리가 어디 바람맞기라도 한 것 같아 필터링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물었더니 진짜로 그랬던지 까칠하고 퉁명스러운 대꾸가 돌아왔다.

[몰라. 댄들라이인지 민들레인지 뭔가하는 년이랑 엠포는 놀러간다고 하고. 로도 소프랑 영화관 간다고 하고. 잭이랑 둘이 있으면 날 놀리기밖에 더하겠냐구. 일단 나왔는데 할 게 있어야지.]

스타도 안구사 말곤 친구가 없는 모양이었다. 스타의 유일한 친구라는 것에 안구사는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AR소대가 그녀의 소속이었지만, 퇴역한 지금은 가족과 같은 개념일 테니까.

"그럼 우리 집에라도 오겠는가? 이번엔 내가 초대할 차례인 것 같다."

"친구 오는 거야?"

나인이 눈을 반짝였다. 안구사는 먹이를 발견해 눈밭으로 다이빙하기 직전의 여우같은 나인을 보고 재빨리 대답했다. 가만두면 2층에서 뛰어들어 휴대폰을 뺏을 것 같은 느낌에.

"AR15다. 집에 부를 생각인데."

"난 환영이야!"

"예에이이이."

G11도 누워서 기어다니며 한 손을 흔들었다. HK416도 거절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집주인은 너잖아. 허락 구할 필요 없어. AR15라면 나도 안면이 있는 애고."

"그렇다는군. 다 널 환영할 것 같다."

[뭔데. 집에 누구 더 있어?]

"404소대랑 동거하게 됐다."

스타의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표정이 상상됐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그냥 예상 밖의 일에 대한 의아함이 가득한 그 얼굴.

[...일단 갈게.]

그렇게 어정쩡하게 말한 스타가 도착한 건 거실과 2층 난간까지만 전부 꾸몄을 즈음이었다. 다른 방들과 주방은 생략. 눈이라도 왔다면 눈사람도 만들었을 거라며 아쉬워하는 나인에게 추운 건 귀찮다며 G11이 투덜거리던 찰나 마당에서 소리높여 안구사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야, 이거 초인종 고장났어?"

"맞네. 저거 어제 올 때 안눌리더라. 고쳐야겠어."

HK416이 까먹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안구사는 몰랐던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며 스타를 맞이했다. 양손 한가득 뭔가를 들고 왔다.

"안녕."

어색하게 손 대신 얼굴을 흔드는 스타에게 나인이 달려들어 안겼다. 빈손이 없어 스타는 볼을 부벼대는 나인을 밀어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그것을 받아들어야 했다.

"반가워어어! 이렇게 민간인으로 만나니까 더 반갑네!"

"어어어......."

떨떠름해 하면서도 희미하게 웃는 걸 보면 격한 환영인사가 마냥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안구사도 웃으며 스타가 든 짐을 거들어주었다.

"케이크?"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 네가 준 것에 비하면 별 것 아니지만."

봉투 하나엔 생크림 케이크. 그리고 포장된 크고 작은 상자들이 다른 봉투들에 담겨있었다.

"소프같은 애가 여기도 있네."

안구사 덕에 자유로워진 손으로 소프에게 그러듯 나인을 쓰다듬자 나인은 소리내어 웃었다.

"히히. 사오 언니를 안을 때랑 똑같다."

"뭐?"

영문모를 소리에 갸우뚱한 스타였지만 좋다는 말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잖게 생각하며 집으로 들어섰다. 인형이라 인간보다는 추위를 덜탄다고 해도 추운 밖보다는 안이 나았다. 따뜻한 공기에 스타의 표정이 풀어졌다.

"저기, AR15."

HK416이 G11의 단추를 잠궈주며 우물쭈물 불러왔다. 데면데면 고개나 꾸벅이는 정도의 눈인사만 하던 사이였기에 AR15도 어색하게 아는체를 했다.

"어, 응. 416. 왜?"

"그럼 집에....... 그 녀석 혼자 있는 거야?"

"그렇겠지. 그딴 녀석, 술이나 쳐먹으면서 뭐 앨범이나 뒤적이고 있든지 말던지......."

"그렇지, 그딴 녀석."

조금 얼굴이 붉어진 HK416은 슬그머니 일어나 옷을 차려입기 시작했다. 안구사가 어디 가는 곳이 있는가? 하고 묻자 잊어버린 약속이 생각났다면서 G11을 발로 밀어냈다.

"얘 좀 잠깐만 맡아줘. 얌전하니까 재우기만 하면 성가시게 하진 않을 거야."

"난 짐이 아니라구우."

"알았다. 조심히 다녀와라. 공기가 차갑다."

다시 네 명이 남은 저택 안. 그중 한 명은 그새 나른한 공기에 잠이 들었고, 나머지 셋은 나인이 헤실거리며 주도하는 대화 덕분에 어색해하지 않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블랙옵스답지 않게 나인은 꽤 활기찼고, 스타는 위화감없이 그녀 또한 퇴역했다고 생각하며 괜찮은 녀석이라고 받아들였다.

HK416은 저녁시간까지도 들어오지 않았다. 약속이 조금 길어진다는 연락과 함께, 양념에 재워둔 고기를 구워먹으라면서 자상한 이모티콘까지도 딸려왔다. 그 너머로 M16A1의 취기오른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걱정할 거 없겠지. 우리끼리 먹자."

"흥국이는 항상 엄마같다니까!"

스타는 HK416의 말대로 나인과 함께 냉장고를 뒤져 통 안에 든 고기를 찾아냈다. 안구사는 고기의 종류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스타가 소고기라니까 소고기겠지. 하며 식탁을 차렸다. 어차피 요리는 배운 적도 없고 요리를 잘하는 것 같은 두 사람이 있으니 도와준다고 거들어봤자 방해만 되겠지. 제 분수를 금방 파악한 안구사는 각을 제대로 잡고 세팅한 식탁에 혼자 뿌듯함을 느꼈다.

"구사야, 쟤 누구냐....... G11?"

"잠탱이!"

"그래, 잠탱이좀 깨워줘. 같이 먹게."

야채를 소스에 버무리고 있는 나인 대신 안구사는 소파에 늘어져있는 G11에게 다가가 흔들어 깨웠다. 잠꼬대도 하지 않고 반응도 없는 G11을 몇 번 부르자 으으으, 하며 실눈을 떴다.

"흥국이는......?"

"아직 안왔다. 먼저 저녁을 먹으라더군."

"그래애애......."

어리광을 부릴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G11은 곧장 부스스 일어나 슬리퍼를 질질 끌며 식탁으로 다가왔다. 의자에 앉아 식탁에 그대로 머리를 얹고 잠드려는 G11의 볼에 나인의 손가락이 다가와 쭉 잡아당겼다.

"밥 먹고 자자, 잠탱아."

"아햐햐햐햐."

"그러엄. 아프라고 잡아당겼징."

손이 꽤 매운 모양이었다. 잠이 확 깬 G11은 나인에게서 제 몫의 음식이 담긴 접시를 받아들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스타는 점점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집은 다르지만 M16과 HK416이 함께 있다면, 바로 옆집이기 때문에 무슨 소리가 들려올지 모른다는 것. 껄끄러우면 자고가라는 안구사의 제안에 나인은 인질을 교환했다며 즐거워하고, 스타는 그 농담에 푸스스 웃었다.

식사 후에도 별 일은 없었다. 스타가 사온 케이크를 디저트삼아 한조 각씩 먹으며 스타의 오보에 연주를 듣다가, 그와중에 G11은 그것을 자장가삼아 잠들고, 나인은 그런 G11을 침대에 옮겨주고, 연주가 좋았다며 예의상 박수를 치는 안구사에게 스타의 크리스마스 캐롤 레슨이 이어지고.

늦지 않은 밤까지 거실에서 담소를 나누다가 스타와 나인을 먼저 재운 안구사는 다시 혼자 거실에 덩그러니 남았다. 어제와는 달리 마음이 허전하지 않았다. 마음이라. 인간을 모방하기만 한 감정일지라도, 안구사는 오늘 하루가 즐거웠다는 것에 신기해했다. AK12가 없어 의미가 없는 하루가 아니었다. AK12가 함께했다면 좋았을 아쉬운 하루. 그렇지만 그 아쉬움이 AK12가 제 마음 속에서 차지하는 만큼의 공백이라는 것을, 안구사는 슬퍼하지 않았다. 그 빈 부분마저 안구사는 기꺼이 AK12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밤이 늦었다. 슬슬 불을 모두 끄고 잠자리에 들려던 찰나, 정문을 두고 담을 넘는 인영이 있었다. 등에는 붉은 선물주머니를 등쳐맨 채.

"어머. 산타가 오는 늦은 밤까지 잠이 안드는 아이가 있네. 구사는 나쁜 아이구나."

"...사오. 꽤 늦게왔군. 일이 이제 끝났나?"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저 주무장을 들고 나간 것은 아니니 격한 임무는 아니었겠구나, 넘어갈 뿐.

"나 기다린 거야? 그럼 착한 아이네. 선물을 줘야겠는걸."

"딱히 널 기다린 건 아니다만."

주섬주섬 선물주머니를 뒤진 사오가 포장된 상자를 내밀자 구사는 조심스레 상자를 받으며 말했다.

"난 준비한 게 없다만. 내일이라도 나가서 선물을 사오도록 하겠다. 혹시 원하는 게 있나?"

"어머. 선물은 비밀로 하는 게 원칙이라구. 기대할게. 후후."

크리스마스 트리에 걸쳐진 양말들에 각각 '이건 우리 나인 꺼. 이건 흥국이 꺼. 이건 잠팅이 꺼.' 하며 넣은 사오는 다시 선물주머니를 동여매고 일어섰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나?"

"산타는 너희들한테만 오는 게 아니거든."

"아, 그런 임무였나....... 고생이 많다."

"그럼 돈의 노예는 다시 어린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주러 이만."

왔던 것처럼 다시 훌쩍 담을 넘어 사오가 떠난 다음에야 안구사는 포장을 풀어보았다. 리벨리온 소대 시절 쓰던 헤드셋과 디자인이 닮은 머리띠였다. 슥슥 머리를 쓸어본 안구사는 그게 없는 게 그리 어색했나, 싶다가 조금 웃었다. AK12도 간혹 헤드셋이 본체가 아니냐며 놀리곤 했었는데.

AK12를 다시 생각했다는 것에 조금 놀란 안구사는 이제 그녀를 떠올리는 것이 괴롭지 않다는 것에 한번 더 웃었다. 기억을 떠올리는 건 하나의 감정뿐만이 아니었다. 기쁨, 슬픔, 즐거움, 괴로움....... 어떠한 느낌이었든,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그래, 이걸 그리움이라고 하는 거구나.

침대 머리맡에 머리띠를 둔 안구사는 스탠드 등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안구사가 다시 눈을 뜬 건 자그마한 인기척에 반응해서였다. 어쩌면 쳐지지 않은 커튼으로 내려오는 희미한 달빛을 누군가 가려서였을 수도 있다. 조용히 눈을 뜬 안구사는 침대 옆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누군가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지켜본다는 표현이 맞을까.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고, 입가엔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질끈 한갈래로 올려묶은 은발은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안구사의 동공처럼.

"AK...12? 정말 너인가?"

"이런, 일어났네."

손으로 침대를 짚으며 일어난 안구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AK12의 얼굴을 더듬었다. 허상이 아니었다. 무표정한 안구사의 얼굴이 깨지고, 점점 일그러지더니 눈물을 주르륵 쏟아내기 시작했다. 엉거주춤 일어난 안구사는 와락 AK12에게 안겨들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토닥임이 안구사의 등에 전해져오고, 안구사는 격해진 감정에 딸꾹질을 하다가 포옹을 풀고 AK12의 얼굴을 마주했다. 어둠에 가득한 방에 유일한 조명이 구름에 가린 달빛이어도, 언제나 동경하고 따르는 걸 마다않았던 AK12를 자신이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른 채 입만 벙긋거리던 안구사에게 AK12는 여전히 눈을 감은채로 싱긋 웃었다.

"잘 지냈어?"

뭐라 말을 해야겠는데, 목이 메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자 안구사는 고개만 여러차례 끄덕였다. AK12의 장난스러운 웃음이 짙어졌다.

"그래? 우리 구사는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았나 봐. 나 없어도 이렇게 즐겁게 사네."

안구사의 부정은 긍정보다 격했다. 미친듯이 고개를 흔드는 안구사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 AK12는 안구사를 조금 떼어내며 쓰다듬었다.

"그래. 주변 사람들이랑도 잘 지내는 것 같고. 이제 걱정 없네."

안구사의 표정이 처량해졌다. 간신히 숨을 가다듬고, 안구사는 AK12에게 매달렸다.

"가지 마라."

"누가 간대?"

"그럼......."

기대어린 안구사의 눈빛을 받은 AK12가 미안하단 얼굴로 말했다.

"근데 가야돼."

"안된다."

AK12의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은 안구사의 이마에, AK12는 한번 입술을 갖다대곤 입을 열었다. 안구사는 AK12의 말을 들으려 그녀의 입에 집중했지만, 갑자기 물에 들어간 것처럼 먹먹하게만 들려왔다. 고개만 저으며 안된다. 안들린다, AK12. 제발. 하며 중얼거리던 안구사는 눈을 떴다. 베갯잇이 눈물에 젖어 축축했다.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방 안은 누가 왔다간 흔적도 없고, 자기 전 그대로였다.

이게 꿈이란 거구나. 안구사는 아직도 선명한 AK12를 꼭 껴안았던 느낌을 떠올리며, 애원하며 꽉 잡았던 두 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직은, 괜찮지 않은 것 같다. AK12.

Lv89 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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