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읽다가 감동받아서 홧김에 번역한 소설입니다. ^^ 마지막엔 좀 보다가 울었어요..
원작자의 동의는 받았으며, 5.0 메인퀘를 다 끝내시고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에메트세르크 시점에서 이야기를 다뤘으며 파판14 5.0의 핵심내용을 포함합니다.
빛전의 성별은 나와있지 않으니 자유롭게 상상해주세요.
픽시브에서 추천 500개 가까이 받은 명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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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Efaia https://www.pixiv.net/novel/show.php?id=11465537
칠흑(5.0) 메인퀘스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있습니다.
'그 사람'과 에메트셀크 아죠씨는 이랬을려나~하는 이야기입니다.
늪에 빠진 충격을 원천삼아 기세로 써서 미흡한 부분이 많습니다만,
계속 그러고 있자니 공개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
98프로가 망상과 날조입니다
이후 공식에서 전혀 다른 설정이 나와도 "아~ 아~그렇구만"하는 정도로 생각해주십시오.
아주 깊고 커다란 늪이라서 "이런거 내 상상이랑 다르다!" 생각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세계상에선 이런 느낌이라는 걸로 용서해주심 감사하겠습니다
각자의 마음엔 다 다른 에메트 아죠씨가 있는 겁니다.
"그녀석"의 성별은 남녀 어느쪽이든 괜찮습니다만, 제가 아우라 여자로 플레이하고 있어서
그 이미지로 부여잡고 있습니다.
뭐 이렇게 망상하는 녀석도 있구나~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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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30
먼,
—먼 기억
UTOPIA
방밖에서 분주한 발 소리가 가까이 오는 듯 싶더니, 쾅 하고 소란스런 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하데스! 이거 봐! 이번에야말로 자신 있다고!”
인사도 없이 갑자기 주제를 꺼내는 것에도 이미 익숙해졌다.
그는 이쪽이 대답을 하던지 말던지 기다리지도 않고 책상 건너편에서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하기 시작한다.
올린 손에 모이는 빛을 보니 창조마법을 구사하려 한다는 건 알겠다.
“........”
창조마법을 행함에 있어서, 성공실패를 가르는 커다란 요인의 한 가지는 바로 잡념의 유무이다. 이미 마법을 펼치기 시작한 이상 어중간하게 말을 걸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서류 위에 날려대던 펜을 멈추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쪽 대답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셈 치더라도, 내가 제대로 ‘보고 있을’거란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팔짱을 끼며 눈치채지 못하게 탄식하니 마치 그때를 노린듯 눈앞의 인물이 눈을 떠 의도치않게 시선이 부딪쳤다.
왠지 어색해서 시선을 피하려는 나를 향해 “잘 보고 있으라” 는듯 입꼬리를 올린다.
그 순간 한 점으로 모였던 빛이 일제히 강한 빛을 띠면서 방 전체에 퍼져 마법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렸다.
서서히 수그러져가는 빛이 익숙해지면서 가늘게 떴던 눈을 다시 열었다. 시야에 들어온 ‘그것’을 보고선 뭐 예상대로군. 같은 생각과 함께 부러 느긋한 몸짓으로 턱에 손을 댄다.
“흠. 이건 개? ....고양이? 아니, 날개를 가졌으니 새인 건가?”
“아-냐!! 페가수스! 페가수스를 만들려고 했었어!!”
“허어.....”
“요전에 애나이더 아카데미아에 갔을 때 라하브레하가 보여줬었어. 모양은 말과 비슷하지만, 등에는 예쁜 날개가 있는....”
“말..... 말이란 말이지”
언외에 포함된 다른 뜻의 의미를 상대방도 알아차렸는지, 기세좋던 목소리는 점점 꼬리를 말아간다.
눈앞의 생물은 확실히 등에 날개가 달려있었지만, 말이라기 보단 아이들용으로 변형된 개나 고양이 인형의 모습이었다. 거기다 크기도 그런 동물정도 밖에 안되고.
그 기묘한 생물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노골적으로 풀이 죽은 표정을 짓고는, 작은 무지갯빛 날개로 팔락팔락 날기 시작한 ‘페가수스로 만들려고 했던 것’을 끌어안았다.
“에휴.. 이번엔 이데아도 제대로 보고 와서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뭐, 짐작컨데 넌 생리학적 이해가 부족해. 거기다 ‘귀엽다’거나 ‘멋있다’ 같이 쓸데없는 필터가 들어서 잡념이 너무 많아. 애초에 라하브레아가 등록한 페가수스의 날개는 무지개색이었어?”
“네 네, 센스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방금 전까진 풀이 죽어있더니 금방 뾰루퉁해져선 입을 삐죽거리는 상대에게 나는 과장스럽게 어깨를 움추려 보였다.
“정말이지, 너는 매번 그런 식으로 말해. 센스가 없다곤 말하지 않았잖아. 공부가 부족하다 말하고 있는 거다”
거짓말이 아니다. 사실 이녀석의 가진, 생물이 아닌 것에 대한 창조마법 재능은 아주 뛰어나다. 별하늘을 그대로 담은 것같은 반짝임을 지닌 보석, 요정의 날개라 평가 받았던 얇고 환상적인 옷.
이녀석이 이데아 등록을 신청한 물건들에 심취한 애호가도 많다.
아마 ‘추상적인 이미지를 구체화시키는 것’이 이녀석의 특기분야인 거겠지... 반면에, 이미 구체적인 형상을 갖춘 것을 정확하게 모방하는 건 서투른 모양이다만.
“공부, 공부말이지. 그야, 하데스같은 수재랑은 달라”
“저기 말야.....”
주늑들기 시작한 상대방이 어처구니가 없어 한 마디 하려다가 —— 문득 생각이 바뀌어 입을 다문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건너편쪽을 향해 돌아갔다.
녀석의 팔에 안긴 짜가 페가수스를 집어올려 살짝 바닥에 두자 나를 쳐다보는 두 쌍의 눈들이 뭔가를 주장하는 듯 빤하게 시선집중을 받았다. 그러나 굳이 무시하려는 양 눈을 감는다.
떠올린 건 예전에 봤던, 라하브레하원 명의로 등록된 이데아.
그 구성요소를 바르게 머릿속에 그리고, 덧붙여 눈앞의 생물을 구성하는 에테르를 파악한 후 있어야 할 모습으로 재구성되도록 상상한다.
그것들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적당히 이뤄졌다 확신했을 때 허공에 든 오른쪽 손을 딱!하고 튕겼다.
그순간 다시 실내는 빛으로 가득 찼다. 얼마쯤 지나 빛이 진정되자, 그곳에는 무지개빛 날개를 등에 지닌, 아름다운 환상의 생물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뭐 그렇군. 너같이 못하는 것에 팔자좋게 세월이 네월아 시간낭비하고 있느니 고분고분 ‘수재’한테 기대는 편이 현명한 선택지일지도 모르겠구만”
보아하니 녀석은 한층 더 우스울 정도로 눈과 입이 둥그래져선, 원래 가져야할 “페가수스”의 모습에 홀딱 빠져있다.
만족감으로 인해 나도 몰래 풀어질 것 같은 입꼬리를 당기며 애써 평정스런 표정을 유지하고는, 최대한 빈정대며 말했다. 그러나 상대는 그런 나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앞의 페가수스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이, 듣고 있는 거야?”
“대단해! 대단하다! 하데스! 그래, 이렇게 만들고 싶었어. 과연 하데스네......”
그리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순수한 칭찬의 의미밖에 없는 데다가, 흥분으로 눈을 반짝반짝 거리는 모습은 사람들을 이끄는 14인 위원회에 속한 현자라곤 도무지 생각지 못할만큼 아이같았다.
이성적일 것. 침착함을 미덕으로 삼는 우리들 아모로트 시민들 중에서 감정이 쉽게 겉으로 드러나고, 매순간마다 빙글빙글 표정이 바뀌는 이 녀석의 상태는 이단이라 할 수 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묘하게 주변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으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녀석은 천생 본의아니게 사람을 끌어당기지]
예전에 휘틀로다이우스에게 말했던 걸 떠올린다.
[그런가?]
[그렇고말고. 거기다 요령도 좋지, 곤란에 처한 사람을 돕고 싶은 거. 뭐 그런건 자기 좋을대로 하면 되지만, 그녀석의 “사람돕기” 때문에 생겨난 요런 저런 귀찮은 일이 전부 나한테 흘러들어 온다고. 왜 그놈이 미아가 된 애 부모 찾다가 회의 출석도 잊어버려서, 그 회의 준비나 의사진행도 다 내가 해야 되는 거냐? 그녀석은 그 귀찮은 회의에 관련된 잡다한 것들은 하나도 손을 댄 게 없다고. 아아. 정말 귀찮아]
불평할 생각으로 말했지만 그것을 들은 휘틀로다이우스는 큭큭대며 목구멍 안쪽으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는다.
[뭐가 그렇게 웃기냐?]
[아니, 너는 싫다싫다 하면서도 그 사람 이야기를 할때 네 얼굴이 정말 즐거워 보인단 생각이 들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친우의 얼굴을 반쯤 눈을 흘겨뜨고 밉살맞게 말해준다.
[아모로트에서 제일 가는 ‘진실을 보는 눈’이란 게 듣고 웃겠다]
[저런, 진실이란 것은 의외로 당사자에겐 보이지 않은 법이야]
대답을 하는 것도 바보스러워서 한숨과 함께 어깨를 움추려 보였지만, 휘틀로다이우스는 아예 소리를 높여 웃기 시작하는 모양새였다.
—마치 거울같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좋고, 대범하면서 머리보다 먼저 몸이 움직이는 그녀석과, 비꼬길 좋아하며 꼼꼼하고 평소 고생하는 것보단 낮잠 자길 좋아하는 나.
—마치 쌍둥이같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겉모습이 아닌, 서로의 생각이나 행동을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알아 차리는 점.
‘근본이 쏙 빼닮았어’ 라 했던 휘틀로다이우스의 말.
그녀석이 뭐냐고 묻는다면 어렵다.
친우? 악우? 가족? 단짝?
그 어느 것도 아니며, 내 안에 어떤 것이긴 하다만 한 마디로 이거라고 나타낼 수 있는 말이 존재치 않다.
다만, 그렇지.
그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녀석이 ‘둘도 없이 소중한 것’이란 사실.
예전에 누군가 나와 그녀석을 ‘태양과 달’같다고 말했던 적이 있는데 그것만은 질색이다.
태양과 달은 같은 하늘에 있을 수 없잖아.
나한테 있어서 그녀석은 함께 진실을 짊어지고 탐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니까.
.....물론 이런걸 직접 말할 생각은 없다만.
“좋아. 이 아이의 이름은 하데스로 하자”
“그 . 만 . 둬”
잠자코 넘길 수 없는 말이 들려와서, 회상의 바다에서 강제로 끌어올려졌다.
“아잉——-“이니 뭐라느니 항의하는 놈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아 조용히 하게 만들곤, 페가수스를 데리고 함께 방 밖으로 나왔다.
이 크기라면 이걸 타고 하늘을 날 수도 있겠지.
오늘은 날씨도 좋다.
따뜻한 햇살과 산들바람이 부는 아모로트의 거리를 하늘에서 내려다 본다면 필시 웅장하고 아름다울 것이 틀림없다.
—- 이건 영원 속에 아주 작은 한 장면.
그렇다. 모든 것이 영원할 것이라 아무 의심없이 믿었던 때의.
++++++++++++++
처음 그것은 매우 하잘 것 없고 사소한 사건중 하나라고 여겨졌다.
바다 건너편의 대륙에서 의도치 않은 창조마법이 발현되어, 추악한 모습을 지닌 흉폭한 ‘짐승’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제까지 이와 비슷한 소동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라하브레하원의 직원이 그 ‘짐승’을 포획하여 이에 대한 대항책이 될 환수 연구를 시작했다 한다. 그러니 모두 사태가 곧 종식되겠거니 여겼다.
.....하지만, 별의 질서는 갑작스럽게 붕괴되어 간다. 국지적 현상이라 여긴 ‘짐승’의 발현현상은 그 후에도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마치 돌림병처럼 전세계를 잠식해갔다.
라하브레하원의 견해로 ‘짐승’은 사람들의 공포심이 모여 생긴 집합체가 아닐까 추측한다고 한다.
‘짐승’을 만난 사람들이 그 울음소리에 공포를 느끼면서, 이는 또다른 짐승을 낳는다. 공포가 공포를 불러 더욱더 힘을 키운 ‘짐승’은 마침내 하늘에서 재앙의 별을 불러내게 되었다.
14인위원회는 결단을 촉구받고 있었다.
이미 평범한 방법으론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겨지면서 모두가 위원회가 제시할 방침을, 인류는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원회 본부인 캐피탈 의사당을 거느린 아모로트의 거리는, 아직 ‘짐승’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는 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각지에서 전해들려오는 이야기로는 그것 또한 시간 문제인 데다가, 그 소문을 들은 거리의 사람들이 가진 공포심에서 언제 ‘짐승’이 생겨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닥쳐오는 시간제한 안에서 14인 위원회가 낸 결론.
그것은 ‘별의 의지’ 창조계획이었다. 붕괴된 별의 질서를 대신할 새로운 질서를 풀어낼 ‘별의 의지’를 창조마법으로 만들어 재앙를 물러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대규모의 창조마법을 펼치기 위해선, 한 사람의 마력으론 도무지 감당할 수 없다.
....아니 마력 운운할 상황이 아니다. 필요한 건 생명 그 자체다. 그것도 남아있는 인류 인구의 약 절반에 해당할 만큼의.
인도적으로 생각해봐도, 말도 안 되는 계획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의 희생을 치르지 않는다면, 이제 별을 구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것이, 우리들이 낸 결론이었다.
그녀석이 희안하게도 ‘할 얘기가 있다’며 먼저 기별하고 내 방을 찾아온 것은 그런 시기쯤이었다.
그가 입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고하는 말. 소리도, 의미도, 틀림없이 전달 되었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물음을 되묻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위원회를 나가겠어”
조용하지만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녀석은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입에 담는다.
“나가서 어쩌려고”
“바다 건너..... 최초의 ‘짐승’이 나타난 땅을 조사하러 가고 싶어. 처음 재앙의 ‘시초’를 알아내는 걸로, 현 상황을 타파할 대책을 얻을 수 있을 지도 몰라”
거의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었지만, 나는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땅은 이미 사람이 들어갈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들었어. 헛수고다”
“그치만”
“게다가 이제 그런 시간조차 남아있지 않아”
상대방의 반론을 기다리지 않고 덧씌우는 것처럼 의견을 말했다. 내용자체는 사실이었지만 그것보단, 이이상 이 녀석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심리가 컷던 걸지도 모르겠다.
내 자신의 감정을 우선시하다 상대의 의견을 묵살하는. 그건 토론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행위의 하나일 터인데.
그렇지만 들으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이 미래에서 기다리고 있을 결정적인 결별의 길로부터.
“모두 함께 내린 결론이다. 그것도 지금부터 하지 않으면 때를 못 맞출 수도 있어.”
“알아. 알고 있어. 지금 이 상황에선 ‘별의 의지’ 창조계획이 가장 현실적인 타개책이야.”
“그렇다면....”
“그치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동의할 수 없어. 창조마법이 낳은 재앙을 같은 창조마법으로 억누르는 것은... 힘을, 더욱 더 큰 힘으로 제어하려는 것이 진짜 해결책이 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아. “
“......철회해라. 그 말은 이번 계획에 자원한 자들에 대한 모욕이다.”
내 예상보다 더 싸늘한 목소리가 나와 상대방이 기가 죽은 게 느껴졌다.
“.....미안. 맞아. 지금 이 자리에서 그걸 대신할 수단을 제시할 수 없는 나에겐, 계획에 관해 뭐라 말할 자격은 없어”
초연한 모습으로 녀석은 고개를 숙였다.
‘별의 의지’ 창조계획에 대해선 아직 공표되진 않았지만 검토할 즈음에 협력을 얻은 일부 연구자나 의회의 직원들 중에는 내용을 아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미 은밀히 계획에 자원하고자 하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았다.
물론 계획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도 감수하고서.
이녀석의 말에 그들을 책망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언성을 높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것은..... 아마 이러한 길밖에 제시하지 못 하는 내 자신을 향한 분노일까.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온 방을 지배한다.
아주 약간, 이녀석이 ‘포기할게’ 라 말하길 기대했지만, 입술이 하얘질 정도로 꽉 문 입에서 나온 말은,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렇지만. 그래도..... 나는 발버둥 쳐 보고 싶어. 저항하고 싶어. 한없이 사소한 가능성이라도, 결의해 준 모두와, 그 주위의 사람들도, 누구도, 아무것도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을 마지막 한 순간까지 찾고 싶어”
“.....좀 냉정해져 봐. 그건 감상적인 말에 지나지 않아. 14인 위원회로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지금 한순간의 고통을 견뎌서라도 별의 멸망이란 최후의 비극을 피하는 방법이다”
“맞아. 그러니 더더욱 그 길을 택할 수 없는 나는, 위원회에 남을 수 없어”
처음 말했던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이었다. 그말에 담긴 단호한 소리를 듣고 이이상에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보다, 아무리 말을 해보아도 이녀석의 뜻을 바꿀 수 없는 건 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이어갔던 것은 그저 한결같이 ‘끝’을 미루고 싶었을 뿐. 이거야말로 의미없이 뱉고 있는 ‘감상적인 말’이다.
녀석이 부러 대화의 서두로 돌아간 것 같은 말을 한 것도 분명 그걸 알려주기 위함이겠지.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 나에게, 마침내 녀석은 내쪽을 향해 돌아 앉는다. 그리고 잠시 우물쭈물한 기색을 보이다가 고개만 살짝 이쪽을 향해 숙인다.
“........하데스, 이건 나의 이기적인 에고야. 아무도 희생되지 않는 길을, 최후의 마지막순간까지 찾고 싶어. 이 마음은 거짓이 아니야. 그치만 이건 ... 사실 인류를 위해,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희미하게 보이는 녀석의 옆모습에서 자조적인 웃음이 떠오른다.
“인류의 절반을 필요로 하는 ‘별의 의지’가 다음엔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을 거라 누가 단언하겠어? 그때 희생되는 것이 너의 생명이라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거야”
“..........”
“아마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가는 거야 .....이런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 인류를 이끄는 위원회의 현자라니, 듣고도 어이가 없지?”
“..........”
——-그렇다면, 지금 이 생각 또한 나의 에고겠지.
네가 위원회를 나가 이 계획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나눠진 것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느낌과 동시에 어딘가 안심한 것도.
사실 전력적인 의미로서도, 혹은 쓸데없는 변화로 인해 민심이 혼란해지는 것을 막는 의미에서도 나는, 14인 위원회의 한사람 된 입장에서 반드시 너를 잡아야 하겠지.
그러나 ‘별의 의지’를 만들어내는 창조마법은 14인 위원회에 소속된 사람 하나하나가 그 발동과 제어를 맡게 되어있다. 14인 위원회로서 이 계획에 참여하는 건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서 목숨을 버리라고 종용하는 것과 같다. 마법을 주관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도 없는데도 말이다.
자신의 아픔엔 둔감한 주제에 다른 사람의 아픔에는 필요이상으로 민감한 이녀석이, 그 자신도 납득 못 한 채 계획에 관여한다면 틀림없이 그 마음을 죽이고 말 거야.
한쪽은 별의 미래를 위해 생명을 바치고, 한쪽은 그 모든 것을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한다.
버리는 각오와 버리게 만들 각오.
양자 모두에게 한없이 잔혹한 각오를 다른 인간에겐 강요하면서, 이녀석이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다니. 그거야말로 에고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이녀석이 선택하려는 길에 필요한 각오도 어중간 한 것은 분명 아닐 게다. 다만 그건 선택을 강요받는게 아니라 그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직접 택한 길인 이상 그 각오가 적어도 이녀석의 마음을 죽이진 않을 것이다.
“.........한 가지만 약속해다오”
방을 나가려 앞을 본 녀석의 등을 향해 던진 목소리가 쉬거나 떨리지 않은 건, 나 스스로도 잘한 것같다.
“어떤 모습이든 괜찮아. ....반드시 돌아와라”
문에 손을 짚은 녀석의 등이 미미하게 떨린다. 뭔가를 말할 것처럼 머리가 움직였지만, 말이 되진 않았는지 고개를 젓고는..... 얼마쯤 지나, 잘 안 보일 만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대로, 뒤돌아보지않고 방을 나간다.
철컹, 하고 문을 닫는 소리가 묘하게 커서, 그 후엔 심해같은 정적만이 남았다.
깊게, 한숨을 쉬며 의자에 몸을 묻는다.
창밖 아모로트의 풍경에 눈을 주니 불현듯 지난 날 거리에서 만난 노부인의 말이 되살아났다.
“이 아모로트도... 언제 대지가 울리고 재앙에 휘말릴지몰라..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지지말고...꼭 같이 붙어 있으렴…….”
이름 모를 노부인.
할 얘기가 있다던 녀석의 말에, 분명 그녀석과 결별하게 되리란 예감이 들어 울적한 기분으로 혼자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내가 꽤나 깊이 생각하고 있던 표정이었는지 염려하듯 말을 걸어주었다.
같이 간다고 했으면 좋았을까.
....아니. 그건 신념을 굽히는 일이다.
나는 나의 신념과 각오가 있어 이 길을 택한 거니까.
“충고가 헛되게 돼버렸군. 부인.......”
입에 쓴 웃음을 지으며 닿을 리 없는 사죄를 보낸다.
——-이후 ‘제 1의 짐승’이라 불리우는 재앙이 거리를 덮친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의 일이었다.
++++++++++
비명과 굉음이 곳곳에서 울려퍼지고 있다.
아모로트에서 가장 높은 크기를 자랑하는 첨탑. 그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거리는 각지에서 불길이 오른다. 쌓인 건물의 잔해가 산을 이루어 예전의 장엄하고 아름다웠던 모습은 흔적도 없이 그저 까맣게 그슬리고 있었다.
눈앞에서 또 한 채 커다란 건물이 무너져,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는 것을 보았다. 조금 더 위로 시선을 옮기니, 하늘을 가득 메우는 운석의 무리. ‘짐승’이 부르는, 이 대지를 파괴하기 위한 유성이 지상에 떨어져 내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중심에는 이 세상에 모든 혐오를 집대성한 듯한 모습을 가진 역겨운 ‘짐승’의 그림자가 보인다.
‘메가세리온’이라 명명된 그 종말의 ‘짐승’은 가까이 오는 것만으로도 참극을 불러 일으켜, 저것이 이 곳에 다다랐을 때,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상상하는 것조차 꺼려질 정도였다.
“......때가 됐다 에메트셀크”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기척과 함께, 등뒤에서 엄격한 남자의 목소리가 고한다.
“준비는 끝났다. 저 짐승이 이 거리에 도달하기 까지 남은 건 앞으로 하루. 이 시기를 놓친다면 이제 저걸 칠 수단은 없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저 특징적인 목소리의 소유자는 14인 위원회의 장인 라하브레아다.
용케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았군. 하며 어딘가 남의 일처럼 눈을 감는다.
—-제 시간에 맞추지 못 했나.
그녀석이 위원회를 사임하고, 이 거리를 나간 후 ‘별의 의지’ 창조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나 또한 준비를 위한 일에 쫓기면서, 그저 마음 속 한 켠에서 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길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녀석에게선 소식도 없고,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낙담할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마음 속이 무거운 돌로 가득 찬 듯한 감각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것들을 삼키듯 천천히 눈을 뜨니 문득 발끝에 어렴풋이 반짝이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몸을 굽혀 주워보니 그건 연한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는 한 개의 깃털이었다.
.......결국 녀석은 그 페가수스에 ‘에메트셀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내가 널 위원회의 ‘자리’ 이름으로 부를 일은 없을테니 괜찮잖아” 라며 넘어갔지만, 녀석이 주변에서 내 자리의 이름을 계속 연호하는 것엔 위화감밖에 못 느껴서, 미묘한 기분이었던 걸 기억하고 있다.
그 녀석이 이 거리를 떠나면서 페가수스의 모습을 볼 일이 없어졌으니, 아마 함께 데리고 간 거겠군.
한순간, 그날 하늘에서 내려다보았던 아모로트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눈앞의 황폐해진 풍경과 겹쳐진다. 그러나 이에 적막감을 느끼기에 앞서, 갑작스런 바람이 내 손에서 깃털을 빼앗았다.
대지는 썩어가고 물은 탁해졌으며 불은 파괴밖에 가져오지 않는 지금 상황에선 바람조차 정체되어 지나가는 일은 없을 터인데. 자그마한 무지개빛이 그대로 붉게 물든 하늘 저편으로 빨려들어간다.
(...... 이젠 뒤돌아볼 수 없는 건가)
이젠 텅 비어버린 손을 굳게 쥔다.
그래. 나는 내가 선택한 길을 완수해야만 한다.
모든 것을 털어내는 것처럼 발을 돌리고, 등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하브레아 옆에 나란히 섰다.
“가자. 할아범. ......별을 구해야만 할 때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의 의지’ 창조계획은 성공하였다. 인류의 절반을 먹이 삼아 현현한 ‘조디아크’라 명명된 그것은, 우리들의 바람대로 망가진 별의 질서를 복구하여 ‘짐승’을 비롯한 재앙은 이 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조디아크는 이 별을 뒤덮었던 참극을 되돌리진 못했고 이미 많은 종들이 멸종되어 대지가 죽음에 달했다는 사실은 바꿀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조디아크에게 빌어, 별의 순리를 되찾자]
그렇게 발언한 것이 누구였는지.
어쨌든 그 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승인되었다.
재앙 자체는 물러났어도 살아갈 대지가 멸망한 상태라면 그저 멸망의 때를 늦춘 것에 지나지 않다. 그 누구의 눈에도 별을 구하지 못 했다는 건 명백했다.
.....그렇게 또, 살아남은 자들 중 반수가 조디아크의 ‘힘’으로써 그 생명을 바치길 결단하였다.
[부디 재앙 이전처럼, 생명이 넘쳐흐르는 별을 되찾아줘]
내 손을 꽉 잡으며 그렇게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정작 볼 수 없을 미래일 것임에도, 별의 구원을 구하는 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이 방법 뿐이라고, 아무리 스스로에게 되새긴들 그건 나의 죄악감을 가벼이 하게 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다.
그리하여 조디아크는 ‘별의 순리를 되찾는다’는 소망 또한 현실로 만들었다.
별은 정화되었고, 나무와 작은 생명들이 다시 별을 채우기 시작했다.
——동시에, 우리들이 짊어져야 할 혼의 무게 또한 늘어만 간다.
그들의 기억, 그들의 집념, 그들의 희망 ........그들의 절망.
재앙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까지 포함한다면, 이미 그 수는 재앙 전에 살아있던 인류의 1/6 정도까지 줄어들었다. 이제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을 일으켜선 안된다.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 별을 앞에 두고, 14인 위원회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세계를 육성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시 자라나 충분히 풍요로워졌을 때, 그 한 줌의 생명을 조디아크에게 바친다....
이를 통해 조디아크 안에 힘으로 흡수된 동포들을 지상에 부활시키고 .......다시 모두 함께 세계를 관리한다.
조디아크가 가져온 새로운 생명의 순리에 따라 만들어진 생명들은 재앙 전에 살아가고 있던 우리들에 비해 육체와 혼의 강도가 아직 약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재앙에 대해 알고 있는 우리들이 세계를 관리해나간다면, 또 세계가 같은 궤적을 밟지 않도록 보호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위원회에선 라하브레아를 중심으로 이 안건이 결의되었고 남은 건 때가 되었을 때,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다.
이 별의 미래는, 새롭게 창조된 생명에게 맡겨야 한다며 조디아크와 마주하는 존재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있던 것이다.
.......우리들이 조디아크를 만들어낸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
신과 비등한 두 거대한 존재의 싸움에 세계는 비명을 지르듯 떨고 있다.
조디아크를 봉인함이 마땅하다 주장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하이델린’이라 불리우는 존재는 바쳐진 생명의 수 때문인지, 조디아크 정도의 힘은 갖지 못했다. 반면 조디아크를 봉인한다는 기도에 특화되어 만들어진 특성 덕에 힘을 깎아 없애는 것에는 파격적인 능력을 갖고 있었다.
양자의 힘은 지금도 팽팽하게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재앙 전 세계에 살고 있던 인류도 처음으로 두 세력으로 나뉘어 다투게 되었지만 두 거대한 존재가 싸우기 시작한 이상, ‘사람’이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도하며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14인 위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조디아크와 하이델린이 방출하는 빛의 잔상이 길게 달리는 하늘을 그저 올려다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문득, 이제 신들의 전장이 되어버린 하늘 한복판에서 무지개색 가는 빛이 한 줄기 가로지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이봐, 에메트셀크?”
등뒤의 미트론이 타박하는 듯한 목소리를 냈지만, 그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신이 드니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모로트에서 먼 북쪽에 위치한 작은 언덕 위로 따듯한 곡선을 그리며 유성처럼 떨어지는 빛을, 일종의 확신을 가지고 쫓는다.
뒤를 잇는 것처럼 빛은 언덕에 내려앉았고 그 꼭대기에 서있는 작은 인영을 향해 걸어갔다. 예상했던 대로 인간이었다.
“왠지 모르지만, 너는 알아챌 거라 생각했어”
그렇게 투덜대는 뒷모습은 그날 방을 나가던 때와 변함이 없다.
“돌아왔나”라고 하려했지만 곧바로 위화감을 깨닫는다. 그 몸에서 느껴지는 건, 지금 머리 위에서 조디아크와 싸움을 거듭하는 존재—— 하이델린의 힘이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에 지배되어 주먹을 꽉 쥔다.
“......그게 네가 낸 결론이냐. 창조마법을 통한 구제를 부정한 너가, 결국 창조마법에——하이델린에게 의존하는 거냐“
“......하데스.....”
뒤돌아본 녀석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정말 뭐라 할 말이 없어. 너의 분노도, 실망도, 지극히 당연한 거다 .....나는 결국 찾아내지 못했어. 창조마법에 기대지않고 이 별을 구할 방법을.”
피를 토하는 듯한 기운으로 말을 짜낸다. 고개 숙인 얼굴에서, 녀석의 대명사였던 쾌활한 표정은 추호도 없다는 사실이 나에게 무거운 아픔을 가져다 주었다.
“아무것도 못 했던 내가 끼어들 자격이 없다고 모두가 말하겠지. 그치만, 그래도 너희들의 다음 계획을 막아야만 해.”
“막는다고?”
되물은 나에게 녀석은 시선을 옆으로 보내며, 그리워하는 듯 온화한 표정을 띄운다.
“재앙이 물러간 세계를, 너희들이 되찾은 세계를 봤어. 그리고 다시 되찾은 생명들과 함께 살았어. 그들은 재앙은 물론, 너희들이 얼마만큼 일을 해서 이 별을 지켰는진 모르지만. 그래도 이 세계를 아름답다고 하고 있었어.”
“............”
“.......하데스. 이번에 너희들은 그들의 생명을 써서 동포들을 되찾으려 하는 거지”
“.........그래. 새로운 생명들은 아직 작고 약해서 그 재앙의 무서움도 모른다. 두번 다시 그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조디아크에게 잡아먹힌 동포들을 다시 불러내어 우리들이 세계를 관리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너 자신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
올곧은 시선에 꿰뚫려,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것을 대답이라 생각했는지, 녀석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너라면 사실 알고 있을 거야. 조디아크의 힘으로, 이 별은 멸망을 피했어. 생명의 순리를 되찾았어. 그건, 조디아크의 힘 없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거다. 그치만, 그 이상을 바란다면.... 소망을 위해 저것에 목숨을 바치는 끝없는 연쇄를 낳게 되는 거야. 하물며, 우리들 외에 다른 것을 쓰기 시작하면 더 그래”
“그건......”
“우리들은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지만, 그래도 불사는 아냐. 일전의 재앙처럼, 외적요소가 있다면 죽기도 해. 그렇게 동포가 줄어든다면, 또 저것에 생명을 바칠건가?”
일순간, 대답할 말을 잃는다. 그건 위원회에서 계획이 제안 됐을 때, 내가 가장 걱정하며 두려워했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익숙해진다. 아무리 스스로 경계해도.
이번 한번만이라 맹세해봤자, 소망을 이루는 방법이 있는 한, 사람은 그 선택지를 영원히 버릴 수 없겠지.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재앙을 막기 위해서, 별을 재생시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자들에게 맹세했다. 이제 다신 그 비극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이건 그걸 위한 희생이야. 별을 위해서 주저 않고 목숨을 내어준 그 사람들을 다시 부르는 것이 이 별을 지키는 것이다”
“이 별에 내려진 재앙은 우리들의 것이야. 재앙이전에 살았던 너희들이, 새로운 생명보다 우수하다는 인간들이 일으킨 거다. 그걸 뒤집기 위해 필요했던 희생을, 새로운 생명에게 짊어지게 해선 안 돼! 너희들이 바치려고 하는 새로운 생명에게도 마음이 있어.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위선이다. 조디아크에게 생명을 바친 자들 앞에서, 그 가족들 앞에서, 가까운 자들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나!”
절규했지만, 녀석이 눈을 피하는 일은 없었다.
비장하기까지 한 결의를 담고 나를 다시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래. 그건, 지금까지 희생된 자들에게 포기하라고 하는 거다. 현재의 생명을 위해, 그대로 죽어있어 달라고 하는 거야. 그래도, 생명을 계속해서 바쳐야하는 연쇄를 끊어내기 위해서라면, 그 업보는 내가 지겠어. 그들과 같은 재앙 전 인류의 책임자이자, 모두가 구원받는 길을 찾지 못한 책임자로서. 너희들을 막기 위해 내 생명을 소모하는 ‘최후의 창조마법’을 쓸 거야. 그 아이들과도 그렇게 결정했어”
‘그 아이들’이란 게 누구인지 확실치 않았지만, 아마 하이델린을 소환할 때의 동지같은 것이겠지. 우리들이 조디아크에게 생명을 바친 자들의 기도를 등에 지고 있는 것처럼, 녀석도 하이델린을 부르기 위해 생명을 써 버린 자들의 결의를 짊어지고 있다.
하이델린을 조디아크와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냈음에도, 녀석이 지금 여기 살아있다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녀석이 말을 거듭한다.
“하데스, 저것에 생명을 바치는 건 이제 그만 하자. 우리들이 해야 할 건 세상을 관리 하는 것 따위가 아냐. 동포들이 지켜 준 별에서 살아가는 생명을, 지켜보는 거다. 모두가 이어준 목숨을 그걸 위해서 써야 하지 않을까”
“———윽, 그걸.........”
녀석이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건, 조디아크에게 생명을 바친 자들의 말을 듣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녀석이 함께 걸어왔다던 새로운 생명들의 말을, 나는 듣지 못했다.
결국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같았던’ 거였다.
서로가 가까이 해 온 것을 지키기 위해, 서로가 지키려 했던 것을 지킬 수 없는 업보를 서로 짊어지려 하고 있다.
저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짓는 나를 보고 의문스러운 표정을 띄우는 상대에게 대답하고자 입을 열어 말을—- 하지만 그 순간 대화는 결렬되었다.
“에메트셀크!”
대화를 자르듯 뛰어들어 온 것은, 라하브레아의 목소리였다.
미트론에게 이야기를 듣고 쫓아온 것이겠지. 돌아보니, 뒤에 엘리디부스도 있다.
“너는....”
내 앞에 선 녀석의 모습을 보고, 아마도 그 안에 있는 하이델린의 힘을 알아챈 라하브레아가 뭔가를 말했지만, 그 말도 예기치 못하게 도중에 끊어졌다.
갑자기 저도 모르게 귀를 막고 싶은듯한 불협화음이 온주변에 퍼지며 문자 그대로, 세계에 금이 간 것이다.
보아하니, 하이델린이 날린 일격이, 조디아크의 몸 중앙을 깊이 꿰뚫고 있다.
그렇지만, 그 일격의 여파는 조디아크 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온상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세계가......찢어진다.......”
중얼거린 것은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땅에 떨어져 깨진 거울처럼, 세계의 윤곽이 급속도로 희미해지고, 몇 겹으로 겹쳐지다 조각조각난다.
쾅, 또 한 번 격렬한 충격이 주위를 덮치고, 동시에 격심한 땅울림이 들리며 나와 녀석이 서있는 대지 사이에도 거대한 균열이 났다.
“————!!”
무너진다, 고 느낀 순간 서로의 입장도 잊고 무의식 중에 녀석의 이름을 외쳤지만, 그 목소리조차 찢겨, 형태도 남기지 않고 흩어져만 간다.
“에메트셀크!”
“칫, 이 이상은 못 버텨...... 후퇴한다, 엘리디부스, 에메트셀크를”
가까이서 라하브레아의 목소리가 들리고, 엘리디부스가 억지로 나를 어둠의 영역—-물질계와 에테르계의 틈새로 끌어당기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뿌리치는 것처럼 대지를 달리는 균열의 저편에 서있는 녀석에게 손을 내민다.
하지만 상대방은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더니 쓸쓸한 듯 웃고는, 작게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나는, 내가 선택한 길의 책임을 지겠어”
“기다려!”
엘리디부스가 다시 나를 틈새로 밀어넣는다.
틈새로 건너가기 직전, 모든 색을 잃어버린 순백이 눈 앞을 뒤덮어 가는 것을 알았다.
“하데스, “
소리가 사라져간다.
천천히 움직이는 녀석의 입술이 소리가 없어져도 뭔가를 전하려 했지만, 그 목소리조차 빛의 파도 속으로 삼켜져 간다.
세계를——생명을 분단시키는 빛
그 불길한 빛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겠지.
++++++++++
“뭐야..... 이건”
틈새에서 세계의 상태를 봤을 때,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산산조각났군’
한 개 였던 세계는 14개나 되었고 그곳에 살고 있던 모든 생명이나 혼까지 똑같이 분리돼 버린 것 같았다.
잠시동안 관찰한 결과, 어떤 세계던 간에 우리들이 보기에 생명은 하나같이 무서울 정도로 짧고 유한한 것이 되었으며, 거기다 각각의 세계가 고유한 역사를 걷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분리된 세계의 인류가 가진 정신적인 미숙함이었다.
생명이 유한해진 것에서 나온 비열함인가, 사소한 것으로 분노하며, 서로 미워하고, 상처입혔다. 그 어리석은 치졸함에, 마치 무지한 어린 아이들이 헛되이 세계를 농락하는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세계를 통합한다”
어느날, 단 세 명만 남은 동포중 한 사람, 라하브레아가 그렇게 말했다. 위원회에서 남은 것은, 그와, 나와, 그리고 엘리디부스 단 세 명 뿐이었다.
우리들처럼 차원의 틈새로 도망간 자들도 있던 것 같았지만, 그것만으론 세계를 분단시키는 하이델린의 일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 우리는 차원의 틈에서 라하브레아가 조디아크의 힘을 쓴 결계를 신중하게 치고 있었기에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이델린에 의해 분단된 세계를 본디 하나였던 세계로 다시 되돌린다. 그리하면 조디아크도 본래의 힘을 되찾겠지. 그리고 다시 동포의 부활을 비는 거다.......”
그의 말에 엘리디부스도, 그리고 나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우리의 원대한 계획은 시작되었다.
나눠진 세계에서 힘의 균형을 붕괴시키고, 그에 따라 일으킨 재앙이 세계를 나누는 벽을 상처입히면, 그 구멍을 사이에 두고 세계를 융합시킬 수 있게 된다.
수백년에 걸쳐 세계를 관찰해서 도출해 낸 이론을 토대로, 각 세계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위해, 혼돈의 씨앗을 뿌리며 돌아다녔다.
모든 것이 물에 떠밀려, 대지가 없어진 세계를 보았다.
녹지 않는 얼음에 갇혀, 영원히 시간이 멈춘 세계도 있었다.
연옥의 불꽃이 대지와 하늘을 태우는, 지옥의 모습이 돼버린 세계.
완전한 어둠에 삼켜져, 통합조차 하지 못하게 된 세계도.
일만 이천년의 시간을 거쳐, 간신히 절반—-7개의 세계 통합에 성공했다.
본디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 일만 이천년이란 세월은 결코 길진 않았지만, 고난의 여정이긴 했다.
세계의 통합을 도모하려 움직일 때마다, 그 세계의 ‘영웅’이니 ‘용자’이니 하는 놈들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뭐, 세계의 균형의 붕괴 ——차원압괴를 일으키기 위해 우리들이 하고 있는 행위는 대개 그 세계를 혼란시키는 것이기에, 각각의 세계의 주민들이 반항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오랫동안 그런 걸 계속하다보면 서서히 내 스스로가 ‘삐걱대는’ 걸 느꼈다.
라하브레아는 남은 ‘오리지널’ 세 명 중에서 통합을 위해 가장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다만 너무나 많은 수의 타인에게 씌여 그들을 흉내내는 와중에, 라하브레아 그 자신의 마음과 소망이 애매해지게 되어, 그저 조디아크가 가진 활성과 격화의 충동에 끌려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닌지 생각 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 너는 어떤가?”
라하브레아의 상태에 대해 말했을 때, 엘리디부스는 그렇게 되받아쳤다.
“나? 나는 정말 필요하지않는 한, 가능한 같은 모습을 유지하려 하니까. 그렇게 자아가 파탄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수많은 모습을 구분하며 쓰는 라하브레아의 자아가 조각나고 있는 거라면, 한 가지 모습을 고집하는 너는, 사고가 필요 이상으로 고정되어 간다는 생각이 드는데”
“...........”
“분명 세계의 통합은 우리들의 숙원이다만, 그 소망을 너무 무겁게 ‘짊어지면’ 신세를 망칠 뿐이다”
“...... ‘조정자’님은 걱정이 많으시군. 그렇게 애태우지 않아도, 일은 착실히 해 보이겠어”
엘리디부스의 말을 한 번 웃어 넘기고, 지금 시대의 ‘작업장’으로 돌아간다.
몇 번의 활동을 거쳐, 원초세계에선 ‘전란의 씨앗을 뿌리는 것’........즉, 세계에 거대한 영향력을 가진 존재를 만들어, 그걸 수족으로 정세를 조종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란 것을 알았다.
이번엔, ‘갈레말 공화국의 솔’로서 쌓아온 마도기술을 사용하는 군사대국 ‘갈레말 제국’이 바로 그것이다. 옛날 만들었던 알라그 제국 정돈 아니지만, 전란의 불씨로서는 꽤 잘 만든 것이라 해도 좋다.
‘솔 황제’가 압도적인 무용으로 주변 각국을 평정하며 지배해가는 과정에 열광한 백성은, 옛날 본인들이 마법을 쓸 수 없어 변방으로 쫓겨난 약자란 것도 잊고 영토확대를 위해 진군하는 자국에 심취하였다. 실로 어리석고, 다루기 쉬운 말이다.
[너희들이 바치려고 하는 새로운 생명에도 마음이 있어.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그런 건 이미 알고 있어.
그렇지만, 우리들이.... 내가 여기서 포기한다면, 이 등에 진 소망은, 혼은 어찌하면 좋은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변함없이 약하고, 어리석으며, 맘에 들지 않는 상대를 힘으로 제압하는 걸 옳다 생각하고, 벗이라 부르는 이를 간단히 배신하는 존재다.
동포들이 그대로 목숨을 걸고 되찾은 이 별을, 이런 ‘불완전한 것’ 들에게 맡길 수 없다.
“.......그래, 어차피 그놈들은 ‘불완전한 것’. 도저히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네가’ 말한 것 같이 그들을 지켜 볼 가치가, 정말로 있는 거냐?’
중얼거리는 혼잣말은 그 누구도 답하지 않았고, 그저 틈새의 어둠에 삼켜져만 갔다.
++++++++++
“라하브레아 영감이 죽었다고?’’
“.........그래”
오랜만에 만난 엘리디부스는 말없이 끄덕였다.
“그런가. 그럼 ‘오리지널’도 이제 너와 나 뿐인가. 뭐, 조금 맘먹고 ‘윤회자’ 녀석들을 찾는 편이 좋을 지도 모르겠군그래”
“.................”
“.......왜 그래, 뭔가 맘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원래 수다쟁이 기질이 있는 건 아니지만, 평소보다 한층 더 말 수가 적어진 엘리디부스에게 물으니 그는 이쪽에 시선도 주지 않고 혼잣말 하듯 답했다.
“.......라하브레아가 죽은 원인이 된 인간 말인데”
“그래, ‘빛의 전사’니 ‘영웅’이라느니 불리는 놈들말이지? 나프리알레스도 그놈에게 죽었다고 했었던가? ........뭐, 할아범은 다소 너무 노출되게 행동했던 것 아닐까 싶다만, 무대만 갖춰놓고 내버려두면 될 것을. 수고롭게 직접 나서니까 발목 잡히는 것 아닌가?”
“........이번 ‘빛의 전사’는 좀 까다롭다”
“호오.......? 그치만 뭐, 원초세계에서 설치고 다녀도 그냥 내버려 두면 되지 않나? 여차하면 갈레말의 말로 어떻게든 되겠지.”
“...........”
엘리디부스는 변함없이 이 쪽을 보려 하지 않는다.
‘아씨엔’의 가면에 감춰진 표정을 판명하긴 어려웠지만, 이쪽이 다시 한번 묻는 것보다 먼저, 가까스로 입을 열어 주었다.
“그 ‘영웅’은 제1세계에 간 것 같다. 지금 그 세계를 관할하는 건 너였지.”
“......뭐, 그렇다만. 근데 아씨엔도 아닌 자가 세계를 건넜다고? 육체를 가진 채로 말인가?”
“1세계쪽에서 부른 것 같다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확실치 않군.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냐?”
“......보면 안다”
그것만 말하고는, 더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는 것 마냥 어둠에 그 몸을 녹여버린다.
이런이런, 귀찮기도 하지, 하며 연극적인 몸짓으로 혼자 어깨를 움추리고 있어도, 반응을 보여줄 기색조차 주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제 1세계를 건너, ....... 거기에서 엘리디부스가 말한 의도를 겨우 알아차렸다.
“.............그런 거였나”
혀를 차는 걸 금할 길이 없다.
내가 서있는 벼랑 아래에 달려가고 있는 몇몇개의 그림자.
그 가운데에 ‘녀석’은 있었다.
일만 이천년간 아무리 세계를 건너도 찾을 수 없었는데, 왜 지금, 이제 와서.
원초세계의 ‘영웅’. ‘빛의 전사’.
그리고 잘 못 볼 리 없는 ———그 혼의 소유자.
.......처음엔 그저 조그만 변덕이었다.
녀석이 그 혼의 소유자라면, 서로 죽고 죽이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있을까하고.
그러니 한 가지 내기를 했다.
이 ‘영웅’이 모든 대죄식자를 쓰러뜨리고, 세계의 균형을 되찾을 만한 빛의 힘을 그 몸에 모아,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다면.
‘불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대등한 존재로서, 함께 걷는 길을 모색해봐도 좋을 것이다.
‘아씨엔’이라 밝히고 모습을 보이니, 아니나 다를까 꽤 무서운 눈으로 노려본다.
그렇지만 내가 상호 이해의 필요성과 협력을 역설하니, 처음엔 반신반의하면서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나도 점점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 재미있어져서, ‘영웅’이 나에게 이야기를 들으러 올 때마다 그만 이것저것 알려주게 되어 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옛날 학술서를 보다가 모르는게 생기면, 그때마다 이쪽 상황 같은 건 개의치 않고 찾아와서는, 납득이 갈 때까지 질문 공세를 펼쳤던 녀석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그나저나 참 시끌벅적하군...... 동지들이 모이면 다들 신나서 북적거리는 건 우리가 살던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군그래”
‘영웅’과 단 둘이 되었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해버린 건 일종의 방심이라고밖엔 말할 길이 없다.
지금까지 상대방과 의견이 다르면 바로 다투고, 힘으로 굴복시키는 모습만 봐왔기에, 율모어 주민들간의 논쟁을 ‘화해’란 형태로 이끈 그들의 행동은, 먼 옛날 우리들이 살아왔던 방식과도 흡사해서 솔직히 참 감탄했다.
“........당신들 아씨엔도 저런 식으로 떠들기도 하고 그런가?”
“왜? 아씨엔이나 고대인은 피도 눈물도 없을 줄 알았나? 이거 실망인걸. 너희한테 있는 감정이 우리한테 없을 리가 없잖나!”
정말 의외란 얼굴로 물어오는 ‘영웅’에게, 녀석이 머리속에 그리고 있을 이미지를 상상하며 쓰게 웃는다.
“좋은 세계였었다. 평온하고 활력이 넘치고.... 강인한 혼을 지닌 진짜 인간은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 수 있었지. 그러니 여유가 없어서 생기는, 비열한 다툼도 없었고, 가끔 의견이 부딪히더라도 그만큼 다른 의견을 존중해주었어. 웅장하고도 아름다웠던 아모로트의 거리..... 높은 탑 위로 펼쳐진 하늘에선 햇빛과 바람이 쏟아져 내렸었지”
묻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말한 건 —-알아주길 바래서였을까.
공감해주길 바란 걸까.
기이하게도 우리들에겐 감정이 없는 게 아니다.
일만 이천년이란 시간이, 영원을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 끝없는 것이 아니라곤 해도, 고독을 느끼지 못한단 건 아니다.
“...........이렇게 말해봤자 기억도 못하겠지만”
“............기억?”
어벙한 얼굴로 되묻기에, 한 줄기 통증이 가슴을 스친 건 나로서도 어리석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뭔가 더 묻고 싶은 것처럼 보이는 ‘영웅’에게 다시 한 번 쓴 웃음을 돌려 보낸다.
“됐어, 못 들은 걸로 쳐.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나은 세계란 건 사실이야. 이런 보잘 것 없는 세계에서 줄곧 싸워왔던 너라면 의외로 맘에 들어할걸?”
그래. 재앙 전의 세계는, 적어도 한 줌의 ‘선량한 자’가 그 마음과 몸을 계속해서 깎아내야만 하는 세계가 아니였다.
이미 본래의 색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혼이 빛에 물들어버린 ‘영웅’이 애매한 웃음을 짓는 모습에서 눈을 돌리며, 나는 ‘결말’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저 ‘영웅’은 마지막 빛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에 관해선 내 예상은 결과적으로 빗나갔다. 그럼 당초 계획처럼 제1세계는 빛에 의해 멸망해줘야만 한다.
그걸 위해선, 상세한 건 모르지만 그 수정공이 꾸미고 있을 계획이 방해가 될 것이다.
녀석에겐 세계를 건널 수 있는 능력, 혹은 기술이 있는 것 같으니, 아마 대충 ‘영웅’이 모을대로 모아둔 빛을 받아서, 틈새던 어디던 전이한 후에 이 세계에 넘쳐나는 빛을 없애려 하는 건가.
녀석들과 손을 잡는단 선택지가 없어진 이상, 그렇게 따분한 방법으로 끝낼 생각은 없다. 아씨엔도 가지지 못한 지식과 기술을 가진 수정공을 수중에 넣고, ‘영웅’은 희대의 대죄식자로서, 절망의 상징으로서, 이 세계를 계속 빛으로 정체시키게 만든다.
다만........ 만약.
만약, ‘영웅’이 그녀석과 똑같이 발버둥치기를, 저항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아씨엔으로서 내가 가진 모든 어둠의 힘을 부딪치게 한다면, 어쩌면 녀석 안에 있는 빛의 힘도......
——그렇다면, 그에 걸맞는 무대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운 그 거리. 긴 세월을 거쳐도 끊임없이 가슴을 애태우게 만드는 무념이 시작되는 땅. 그 옛날 나와 그녀석의 꿈이 잠드는 장소.
환상의, 아모로트의 거리를.
++++++++
“하데스————!!”
외침과 함께, ‘영웅’이 쏜 에테르의 칼날이 빗나감 없이 몸을 찢어가른다.
녀석이 쓰는 마도구의 힘 때문에 차원의 틈새로 도망가지 못했고, 이 손에 남은 마지막 한 조각 힘마저 부서져 사라졌다.
마력으로 형성된, 어둠의 힘을 증폭시키는 종말의 공간이 안개처럼 흩어진다. 그 후 잠깐동안 밝기가 돌아온 환영의 도시 아모로트를 등지고, 지금 우리들은 서로 바라보고 있다.
봐준 건 아니지만, 왠지 이러한 결과를 예상한 것도 사실이라서 마음은 기이하게도 평온했다.
“그렇다면, 기억해라. 우리들은...... 분명 살아있었다는 걸.”
‘영웅’이 끄덕인다.
그 혼은 아직 불완전하기에, 그녀석 자체는 아니다.
다만, 그 안에 지닌 반짝임은. 그녀석이 만들어낸 존재가 갖고 있었던 그 무지개빛 색채는. 속절없이 ‘그 녀석’의 것이었다.
거기엔, 혼을 침범하는 꺼림칙한 빛은 이미 없었고, 먼 옛날 이 거리에서 보았던 그리운 반짝임이 있다.
아아, 그래.
너는 ‘돌아왔던’ 거구나.
설령 지금의 네가 이 거리를, 그 때를, 기억하지 못해도.
네 스스로 선택한 길을 걸어온 결과로서, 끝내 이곳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그 혼을 지킬 수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그걸로 괜찮군.
——-그걸로 좋다고, 생각했다.
[하데스, 살아줘]
그래, 살았다.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어.
너 때문에 지독하게 고생했다고. 슬슬 좀 쉬어도 되지?
남은 건 너에게—- 네 혼을 가진 ‘영웅’에게 맡기도록 하지.
.......뭐, 슬퍼하지 않아도, 에테르의 바다 저편에서, 느긋하게 낮잠이나 자면서 네가 선물로 가져올 얘기거리를 기다리도록 할게.
의식이 허공으로 사라질 무렵, 옛날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있지, 하데스는 꿈같은 거 있어?]
[응? 뭐냐 갑자기]
[아니, 그 어쩐지. 그러고보니 들은 적 없구나 싶어서]
[뭐, 그렇지. [온 세상의 과자를 다 먹고 싶다]던가 [하늘 나는 가오리에 타고싶다]같은 네 시시한 꿈은 항상 듣고 있다만]
[안 시시하다!!]
분개하는 녀석을 가볍게 받아넘기며, 잠깐 생각하다가 답을 한다.
[14인 위원회같은 귀찮은 일은 관두고, 긴 휴가를 받고 싶군]
[뭐야 그거. 꿈이라기 보단 단순히 농땡이치고 싶은 거잖아. 그래서 계속 낮잠이나 자려고?]
[응? 그렇군. 낮잠도 좋긴 하다만]
작게 미소짓곤, 그때 결국 말하지 않았던 대답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래, 만약 이룰 수 있다면.
——너와 세상을 여행하는 것도, 나쁘진 않네.
그날 하늘에서, 아모로트의 정경을 둘이서 바라봤던 것처럼, 이번엔 낯선 땅을.
아아, 그건 정말 아득하고도, 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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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주
*ひとたらし : 말을 예쁘게 잘해서 사람을 끌어 들이는 사람
일본어 원문에도 이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한국에선 어떻게 번역했는지 모르겠네요.
빛전의 묘사는 이 ひとたらし라는 표현으로 자주 나옵니다. 설정상 빛전은 날때부터 호구 맞는 덧
직역보단 자연스럽게 의역하길 우선하였으며, 되도록 한국 정식 칠흑 게임 내 대사를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