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들판에서 걷고있었다.
소녀의 머리칼은 요사스러울 정도로 새빨간 색이었다.
소녀의 눈은 마치 전설속에서나 존재하는, 혹은 소설속에서나 존재하는 몽마의 그것처럼 붉었다.
마치 그 눈을 보면 달에 울부짖는 늑대처럼 되어버릴 것 같은 깊이였다.
소녀의 그 붉은 머리와 눈과 대비되는, 평범하기까지 한 그 옷.
여름에 어울리는, 시원해보이는 녹색 원피스였다. 마치 들판에 깔려있는 잔디처럼 평화로운 색이었다.
소녀는 내가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눈을 감고 풀밭을 느끼듯, 천천히 걷고있었다.
소녀는 팔을 벌렸다. 마치 들판에서 시원스레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감싸는듯 편안한 표정이었다.
저 소녀는 바람을 느낄 수 있는걸까. 나는 바람을 느끼지 못했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1분이 지나고, 2분이, 5분, 1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하늘은 무엇하나 변하지 않았다.
소녀의 붉은 머리칼은 요동친다. 마치 바람이 부는 것 처럼...
나는 바람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구름은 흐르는 것을 멈추었고 바람은 야단맞은 장난꾸러기처럼 멎어있었다.
태양은 들판을 감싸안듯이, 너무 강렬하지 않게 자신을 빛내고 있었다.
혹시나 소녀를 따라하면 바람을 느낄 수 있을까 싶어 신발을 벗고 맨발로 잔디를 걸으면서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단지 발바닥에 맴도는 잔디의 느낌 뿐이었다.
감고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햇빛이 서서히 어둡던 시야를 개척한다.
개척되어가는 시야에 들어온 것은 붉은 머리칼이었다.
붉고 큰 눈망울로, 소녀는 나를 밑에서 올려다보고 있었다.
요사스러움 뒤에 은밀하게 숨어있는 붉은 청초함...
소녀의 눈은 색과는 다르게 순수한 눈빛을 하고있었다.
소녀는 나를 향해 이슬을 품은 튤립같은 미소를 짓고있었다.
"처음 뵙네요. 바람을 따라 오신건가요?"
소녀는 아직도 웃고있었다.
"바람을 느끼고 싶으신 건가요?"
소녀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소녀의 입은 여전히 미소짓고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아..."
나도 모르게 뱉어낸 말이었다.
"전 말을 할 수 없답니다. 다만 이렇게 말을 전달 할 수 있지만..."
"어떻게..."
내가 가지고 있던 상식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소녀였다.
"에... 저도 그걸 잘 모르겠어요."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의문은 접어버렸다.
다만 난 이 소녀의 정체가 중요하기보다, 어째서 이런 곳에서 있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생김새와 분위기가 너무나도 다른 소녀를,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소녀는 여전히 웃고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니?"
나는 잠시의 침묵을 깨고 소녀에게 물어보았다.
소녀는 잠시 머뭇거리는듯 하더니 이내 다시 나와 눈을 마주한다.
"음... 그건 저도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힘드네요. 하지만 이곳에 사람이 저밖에 없었다는 것은 알고있어요."
정말인지 의심스러웠다.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주변에 나무와 들판밖에 없다는 것을 아까 보고서도 주변을 둘러본다.
정확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긴장감이 온몸을 훑어내린다.
바짓춤에 손을 비비면서 땀을 닦아냈다.
입에 고이는 침을 억지로 목으로 밀어 넣는다.
"아저씨는 여기 처음 오신 손님이에요"
정말, 질리지도 않는지 소녀는 계속 웃고있었다.
어째서인지, 소녀와 계속 눈을 마주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눈을 피했다. 모른척 짐짓 주머니에 손을 찔러본다.
옆으로 눈을 돌려 살짝 흘겨보았다.
소녀는 울상을 짓고있었다. 괜히 소녀를 달래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다시 소녀와 눈을 마주한다. 다시 목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
"부담스러우신가요?"
목소리에 습기가 베어있다. 무엇때문에 이 소녀는 이렇게도 나의 외면에 슬퍼하는 것일까.
"어째서..."
"외로웠답니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인지, 소녀는 내가 의문을 가지는 것을 정확히 짚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단순히 하고싶은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멈춰버렸기 때문에, 전 이곳에 얼마동안 있었는지도 모른답니다. 하지만 제가 있기에는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지요."
상상해본다. 생김새가 어떻건, 이렇게 어려보이는 소녀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얼마나 되는 시간인지도 모를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간개념이 사라진다는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다.
이 자그마한 소녀가 느꼈을 고독은 어느정도였을까...
공감은 하지만, 느껴줄 수는 없었을 그 쓸쓸함, 외로움, 고독...
내가 살면서 느껴본, 작은 외로움에서 큰 외로움까지, 쓸쓸함까지, 고독까지 모두 곱씹어본다.
그것으로 비교 할 수 있을까?
마치 비에 젖은 아기고양이같은 이 소녀가 그것을 견딜 수 있었을까.
그렇기때문에 나에게 이렇게 한없이 미소를 짓는 것은 아닐까...
"너무나도 오랜시간이 지나서...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대체 무엇때문에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하는 것은 이미 포기해버렸어요."
눈가가 촉촉해지는 소녀를 바라본다.
"......"
"그걸 생각하면서 지내왔더라면 어떻게 됬을까요?"
소녀는 희미하게 웃어보이면서, 눈가에 맺힌 그 외로움을 볼을 타고 흘려보낸다.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칼을 단정하게 넘겨주고,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듯한 강아지처럼 다가온다.
소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자국을 엄지로 지워준다.
지워주면서 손에 묻어나는 그 눈물이 굉장히 안쓰럽다.
흘러내린 긴 생머리를 단정하게 다듬어준다.
방금 목욕을 마치고 말린 머리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손에 스친다.
그 손을 바라보자 마치 내 손 위로 오래된 레드와인이 흐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소녀는 품에 안긴채 잠이 든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소녀의 안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가만히 하늘을 바라본다.
아!
구름이 흐르기 시작했다.
태양은 자신의 빛을 뽐내듯이 강렬하게 우리를 비추었다.
햇빛은 우리를 비추면서, 들판에 나의 그림자를 남기고
나의 가슴팍에 소녀의 그림자를 남겼으며, 나의 가슴 속에 소녀의 마음을 묻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저 시간이 가는 것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문득 나에 대한 시선을 느꼈다.
소녀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태 보인적 없는 환한 미소를 보이면서 나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일지, 얼마 전일지, 오래 전일지 모르는 때에 벗어제꼈던 신발.
그리고 맨발.
그 맨발을 통해 느껴지는 들판의 잔디는 더이상 평범한 감촉이 아니었다.
여름에 깊은 산 계곡물 속에 있는 바위를 디딘 듯한 시원함과 안정감이 동시에 발바닥을 타고 온몸으로 뻗쳐오른다.
그 시원함에 나도 모르게 숨을 내뱉는다.
소녀는 그 소리를 들은 것일까, 내쪽을 바라보며 소리없이 웃는다. 미소가 아니라 정말로 즐거운 듯이,
단란한 가족 드라마를 음소거로 보는 듯한, 이질적인 웃음이었지만...
그런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단지 이 소녀가 나로 하여금 이렇게 행복해하는 듯 한데...
내가 살면서 과연 남에게 이렇게 행복을 준 적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돌이켜본다.
과연 어떨까.
나는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이렇게 행복하게 해준 적이 있었나?
"......"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본다.
소녀가 다시 웃게 된 이후로 처음 떠오른 상념
그 순간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면서 내 머리를 헝클어놓았다.
바람이 불어온 방향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그 소녀가 가슴 앞에 양손을 모은채 서있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있었다.
나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뭔가...
나는 저렇게 가냘픈 여자아이마저 걱정시키고 있었던 것일까.
별로 웃을만한 기분은 들지 않았지만.
짐짓 소녀에게 웃어보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어본 적 없는 가장 큰 웃음을 지어보였다.
순진한걸까 순수한걸까. 소녀는 나의 웃음을 보자 다시 밝아지는 듯 했다.
소녀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먼저 가면서 내 손을 잡아 이끈다.
어린 조카들과 놀아주는 삼촌처럼 작은 여자아이의 손길에 이끌려 어디론가 걷는다.
걸어가다 보니, 바닥에서 느껴지는 시원함과 동시에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가벼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면서 잽싸게 도망가는 산들바람.
그 간지러운 바람을 받아가면서 걸어간 곳에는 어느샌가 옅은 강가가 있었다.
강가 옆에 놓인 커다란 돌에 걸터앉은채 소녀가 강가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본다.
나에게 같이 오라는듯 손짓을 한다.
왠지 모를 의욕이 생겨 벌떡 일어난다.
소녀의 초록색 원피스 끝자락을 물들인 강물을 서서히 밟으며 들어간다.
무릎 약간 위까지 덮은 강물을 손으로 소녀에게 쳐보낸다.
물방울이 터지면서 소녀의 붉은 머리칼을 적신다.
소녀는 짐짓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나에게 복수의 물길을 보낸다.
차가운 물살을 맞으며 크게 소리내어 웃는다.
어느새 물에 빠진듯 젖어버린 재킷을 던져버렸다.
꽤 긴 시간이 지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직도 그자리에 서있는 태양은 우릴 비추었다.
신나게 놀고서 겨우 뭍으로 올라온 나와 소녀는 거의 물에 빠졌던 사람처럼 온몸이 젖어있었다.
머리카락을 타고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는 빗방울같은 물방울.
온몸에 무겁게 달라붙는 옷가지들.
소녀를 바라보았다.
부끄러운 것일까, 나를 등지고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있었는지 이미 말라버린 재킷을 소녀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난 그 옆에 드러누워서 태양을 직시한다.
눈이 아프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포근한 햇빛이었다.
은은한 불빛같은 태양광을 만끽하며 크게 숨을 쉰다.
소녀 역시 눕는 기척이 보이길래 팔을 뻗어주었다.
자연스럽게 소녀는 내 팔을 베고 누웠다.
피곤했던 것인지, 그녀는 작은 숨결을 내뱉으며 잠들었다.
아직 젖어있는 한가닥 머리카락이 소녀의 목에 밀착되어있다.
손을 뻗어 머리를 정돈해주고 소녀를 바라본다.
이슬을 맞은 가을날의 구절초같은 청초함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단지 머리속이 하얗게 비어버린다.
나도 그렇게 잠이 들었다.
......
......
......
시간이 조금 지나고, 팔이 가볍다는 것을 느낀 나는 몸을 일으켜세웠다.
강가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은채 앉아있었다.
"무얼 그렇게 생각해?"
소녀는 내가 일어난 것을 몰랐던 듯이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본다.
"아... 그게..."
망설이는 것을 보자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말을 한다.
"말해봐. 들어줄게."
소녀의 옆에 자리를 잡는다. 소녀는 내쪽을 바라보며 똑바로 앉았다.
"아저씨는 저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제법 어려운 질문이었다.
게다가...
아저씨인건가.
"으음... 어려운 질문이네."
짐짓 크게 웃으며 생각한다.
내가 저 소녀를 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아름답다? 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순수하다 라는 쪽이 더 맞는 말이었을까.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순수하다 라는 느낌인것 같은데?"
소녀를 마주보며 씨익 웃어준다.
소녀는 기쁜듯 웃는다.
"그런가요?후후..."
수줍어하는듯이 웃는 모습을 보니 마음에 들었나보다.
"사실 이 곳에 사람이 온게 아저씨가 처음은 아니랍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이 오고 갔었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제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었죠. 단지 나를 보기 위해서 온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갑작스레 이야기를 시작하는 소녀를 보며 나는 그저 조용히 들어주었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저를 보고 열정을 느낀다고 말한답니다. 뜨겁고 열정적이며 약간은 퇴폐적이라고 저에게 늘 그래왔어요."
그 말을 듣고서 놀랐다. 대체 이렇게나 가냘픈 소녀에게 어떻게 그런 것을 느꼈던 것일까.
"그래서 전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서서히 잊혀져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열정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열정이란 단어는, 저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 역시 알게 되었습니다."
소녀는 슬픈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저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전부였던 나로선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단지 가만히, 소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하지만 아저씨가 말해주었던 그 말은... 달랐어요. 그 사람들과는."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서서히 내게 다가와 날 끌어안았다.
이렇게 되면 대체 누가 위로를 받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소녀의 손길을 뿌리칠 수 없는 내 의지력을 한탄해야겠지.
잠시 방심하고 있었던 탓일까.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내 얼굴 바로 앞에 소녀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빨갛게 물들어있는 소녀의 얼굴.
뭘 하려는 건지 짐작이 가면서도... 왠지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천천히 소녀의 얼굴은 다가온다.
조금 더. 조금더.. 조금더...
그리고 입술이 포개어진다.
누가 입맞춤이 달콤하다고 했던가. 단지 이것은... 피부와 피부가 닿는 감촉일 뿐일텐데...
그런데 왜 갑자기 눈물이 고이고 코가 시큰해지는 것인가.
난 그렇게 입술이 포개진 상태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할 수 없었던 것일까?
짧은지 긴지 모를 포개짐이 끝나고 거미줄처럼 허공에 무엇이 늘어진다.
"기뻤어요. 고맙기도 하고. 단지 저와 잠시의 시간을 보냈던 것 뿐이지만..."
말끝을 흐리면서 그녀는 나의 눈길을 피한다.
나로서는 꽤 오랜 시간이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지금까지 이곳에서 지내왔던 시간에 비하면 찰나인 것일까.
"잠시 시간을 보낸 것 뿐이지만... 이곳에 와서 유일하게 느껴본 행복이었어요. 감사합니다."
눈물을 머금은채 나에게 미소를 보내며 서서히 뒤로 걸어간다.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래서 나는 벌떡 일어나 걸어가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챈다.
강한 힘에 이끌려 내 품으로 넘어진 그녀는 안심한 것 처럼 한숨을 내쉰다.
어째서...
"그러면. 이대로 끝낼 생각이야? 이대로 내가 언제건 간에 사라져버리면. 또 지금까지 받아왔던 오해를 받으면서 괴로워 할거야?"
갑자기 고양되는 정신상태로 말이 격하게 나가기 시작한다.
"그건..."
그녀는 당황한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시선을 피한다.
난 그녀의 양쪽 어깨를 거칠게 잡아 나와 눈을 마주치게 한다.
"그치들이 오해를 하면, 나는 모르지만 넌 슬프잖아. 그런데도 계속 그렇게 할 생각이야? 그들에게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란걸 보여주고 싶은 적은 없었어?"
"하지만... 어떻게."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 그렇게 끝이 나면 그녀는 얼마나 실망할까. 그래서 나는 결국 생각나는대로 지껄이기 시작한다.
"네가 생각 하기 나름인 거잖아? 그렇지 않아? 너는 너를 순수하게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은 널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하기 때문에 너의 순수한 모습을 보이면 되지 않겠어?"
"그럴...까요? 정말로 그렇게 하면 될까요?"
"그러엄. 당연하지."
말도 안되는 허세를 보여본다. 하지만 이 여자가 그렇게 진심을 보인다면 그 사람들도 알아주지 않을까?
"자... 잠시만, 눈을 감아주실래요?"
생각 할 것도 없었다. 의심 할 여지도 없었다. 예수의 말씀을 따르는 제자들처럼 나는 굳게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눈... 뜨세요."
내가 눈을 뜨자 내 눈앞에 있는 것은 붉은 머리의 그녀가 아닌, 새하얀 백금발의 그녀가 얼굴을 붉히고 서있었다.
어떻게 한 것일까. 라는 시시한 의문은 덮어두자. 다만 난 그녀의 입을 통해 그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녀가 왠지 모를 자신감에 차있다는 사실에 다시 놀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판의 풀밭이 전부 노을에 젖은 것처럼 붉게 물들어있다는 사실 역시 놀랐다.
어느새 기울어있는 태양은 마치 이 공간의 끝을 말하고있는 듯 했다.
노을을 등지고 있는 황혼의 백금발을 가진 그녀. 어리다는 인상을 주었던 소녀가 아니라 나와 비슷한 높이에서 나를 바라보는 그녀가 나를 향해 걸어온다.
한걸음 두걸음 세걸음...
내 앞에 멈춰선 그녀는 손을 들어올려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눈을 감아주세요."
기분좋게 차가운 그녀의 손의 감촉을 느끼며 침대에 누워 잠이 들듯 편하게 눈을 서서히 감았다.
눈을 뜨면, 그녀가 있을거라고 굳게 믿은채...
시간이 지나고 지나도 그녀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눈을 떠보았다.
노을을 등지던 그녀는 온데간데 없고, 단지 아름다웠던 들판을 증명하듯 드문드문 보이는 갈색의 잔디와 얼어붙어버린 강물, 그리고 그 위에 쌓인 새하얀 눈송이들... 그리고
그녀의 부재.
그리고 나는 서서히 몸이 뜨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모든 것을 잊은채
눈가에 눈물을 맺은채
언젠가 풍성하게 열린 그 열매를 딸것이라고 생각하며...
잠이 들듯 쓰러졌다.
......
......
......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환자의 상태는 어떤가?"
"유독성 기체 과량 흡입으로 현재 환각을 보고있는 상태입니다. 아직까지 깨어나진 않았구요."
나를 말하는 것인가? 눈을 뜨고 싶었지만 내 몸이 아닌 것 처럼 눈꺼풀이 무겁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힘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고개를 돌린 곳에
장미를 닮고, 백합을 닮았던 그녀가 없을까 두려워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끝끝내 소녀에게, 그녀에게 묻지 못했던 것을 입에 담아본다.
"이름이...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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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건 제가 쓰고싶어서 쓴거지만 정말 못썼다고 생각하는게...
처음 이 글을 쓰려고 했을때 생각했던 것이
"사람들의 틀에박힌 고정관념을 다소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고정관념의 대상을 의인화해서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 고정관념을 깨자!"라는 생각으로 썼습니다.
글을 읽으시면서 예상하신 분도 있겠지만 남자가 마지막에 이름을 묻던 소녀는 '장미'가 형상화된 소녀이죠.
실제로 붉은색 장미는 '정열'이 꽃말이며 많은 글에서 정열, 혹은 요기 등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나쁘게 말하자면 퇴폐적인 뜻을 담고있는 꽃이기도 하죠.
그리고 글이 후반부에 달해갈때즈음, 소녀의 머리가 흰색이 됩니다. 정확히는 백금 색이지만요.
아실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백장미의 꽃말은 '청초'입니다.
청순하고 순수하다는 것과 비슷한 뜻이죠.
사실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볼수도 있겠지만 전 적어도 이 글을 쓰기 전 고심하면서 나름대로 철학적으로 생각해봤던것 같습니다 ㅎ
부족한 글이지만 즐감해주시고 꼭 평좀 남겨주세요 ^^
조만간 퇴고해서 한번 더 올릴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