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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잭스X소나 팬픽-가로등과 별 29화(챕터2: 새벽빛)

아이콘 강철안개
댓글: 7 개
조회: 3303
추천: 15
2016-09-19 12:00:24

챕터2: 새벽빛




 #. 베사리아

 투둑

 “…아아 맨드레이크 저 안 잤어요!”

 베사리아는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며 발딱 고개를 들었다. 몽롱한 와중에도 그녀는 최우선적으로 얼굴을 가리며 홱 고개를 숙였다. 자고 일어난 얼굴을 남에게 보여주기 민망하다는 소녀 같은 감성 따위가 아니라 일단 얼굴부터 가려야 뭐라도 변명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팔자도 좋군, 콜민예 의원’이라는 늙은 호박 같은 맨드레이크의 이죽거림이 벌써부터 귓가에 어른거리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런 전개는 일어나지 않았다. 집무실 안은 여전히 잠잠했다. 그녀가 자기를 깨운 소리가 창가를 두드리는 빗소리라는 걸 깨닫기 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걸 깨달았을 즈음엔 베사리아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뭐랄까,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했다. 우선 그 매끄러운 윤기를 자랑하던 머리카락은 부스스하게 산발이 되어 있었고. 왼쪽 뺨에는 결재 서류에서 떨어져 나온 서류 한 장이 대롱대롱 붙어있었다. 하얀 블라우스는 대충 풀어헤쳐진 채 옷깃에 야식 겸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먹었던 초콜릿 잼이 조금 묻어있었다. 그리고 정면에선 가려진 그녀의 업무용 책상 아래쪽엔 텅텅 빈 초콜릿 잼병들이 꽤나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 으……. 뭐야, 진짜…….”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온 베사리아는 반쯤은 부끄럽고 반쯤은 짜증이 나서 책상에 머리를 콩 하고 박았다. 그녀의 발치에 초콜릿 잼병들이 잔뜩 쌓여 있다면, 책상 위엔 서류더미가 성벽처럼 쌓여 있었다. 그 속에서 간신히 책상에서의 자기자리를 사수하고 있는 황동 시계는 새벽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그 꿈결 같던 병원에서의 삶을 뒤로 하고 악마 같은 맨드레이크에게 잡혀 와 자신의 집무실에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한지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흐른 것이었다. 그동안 베사리아는 밀린 4주치 업무에 이번 ‘전쟁학회 테러 사건’에 관한 일까지 문자 그대로 고혈을 짜내며 처리를 해야만 했다. 가끔 찾아와 그래도 자기가 상당 부분은 처리해놔서 이 정도라는 둥 생색은 있는 대로 부리며 노예 감독하듯 자길 부려먹는 맨드레이크의 등살은 덤으로 해서 말이다. 아니 물론 그가 전쟁학회 업무를 생각보다 많이 처리해 준 거야 고맙지만, 그래도…그래도 베사리아는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후회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그 긴 머리가 휘날릴 정도로 힘껏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큼은 곧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베사리아였다.

 병원에서의 4주간의 요양(실제로 다 나을 때까지 고작 1주밖에 안 걸렸지만)은 그녀에게 있어 정말 꿈결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무려 5년이나 못 쉬다가 겨우 쉰 것이었다…무려 5년 동안! 1년에 고작 1주일 있는 휴가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반납해야만 했던 적이 대체 몇 번이던가? 베사리아는 쌓여 있는 서류의 산에서 애써 시선을 돌리며 그런 식으로 자기 위로를, 위로를…….

 “…….”

 해야 하는데, 불행히도 그러기엔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너무, 정말, 무진장 많았다. 분명히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건만! 베사리아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의 책상은 물론이고 집무실 공간의 1/3을 서류 더미가 차지하고 있었다. 오죽해야 집에도 못 가고 여기서 숙식까지 하면서 일을 하겠는가? 당장에 내일 아침까지 끝내야하는 종류의 일만 해도 이것저것해서 50여 건에 이르렀다. 결국 ‘오늘도’ 책상에서의 쪽잠이 이날 잘 잠 전부라는 사실을 깨달은 베사리아는 홧김에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에서 서류 더미에 화염구를 집어 던…지려다 말고 이를 갈며 집무실 구석에 있는 주전자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기왕 밤새는 것, 뜨거운 커피나 한 잔하고 새자는 심정에서였다. 겸사겸사 비 내리는 밤을 감상하며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분위기에 젖어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고 있었다. 

 바로 자신이 요리(랄까 먹는 걸 만드는 일 전반)에 천부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재능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 


 “…….”

 뭐, 결과부터 말하자면 ‘시도는 좋았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베사리아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아니 커피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맛은 잿가루 섞은 물 같은 해괴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선 오만상을 찌푸렸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요리는 하나도 없는 주제에 입맛은 무척이나 고급스러운 그녀의 입에 이런 맛이 맞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참고 마셨다. 오밤중에 직원용 식당이 열렸을 리도 없고, 상임의원 체면에 몰래 식당 주방에 숨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래도 일단 따뜻한 게 좀 들어가니까 그럭저럭 살만해지는 베사리아였다. 창가에 걸터앉아 바로 옆에서 통통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뜨거운 걸 마시는 것도 꽤 운치가 있었다.

 “…맛없어.”

 정확히 말하자면, 운치‘만’ 있었다.

 “잭스가 끓여 준 커피 마시고 싶다…….” 

 그녀는 무릎을 가슴께로 끌어당기며 한숨 내뱉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커피를 끓여 줄 잭스는 병상에서 골골거리는 중이었다. 소나 양의 음악 치료로 상당히 호전되었다고 듣긴 했지만, 그래도……. 베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를 반쯤 죽다 살게 한 그 불꽃은 병이 아니라 저주였다. 지독하고도 오래 된 저주. 저주를 풀지 않는 이상 치료 따윈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감성적으론 그렇게 생각하기 싫은데 이성적으로 그런 암울한 결론을 내리는 자신의 머리가 원망스러운 그녀였다.

 또 잭스에게 생각이 미치자 베사리아는 심란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일이 고되면 그에 대해 생각이 안 날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지금만 봐도 겨우 커피를 마신다는 행위 하나로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던가. 커피뿐만이 아니라 온갖 사소한 일이 그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일 따위로 잭스를 잊기엔, 그는 베사리아의 생활에 너무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차마 말로 내뱉기엔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는 베사리아에게 있어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그녀에게 그런 존재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거의 증오의 대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그녀에게 이다지도 소중한 존재로 탈바꿈 할 수 있었냐면 기구하고도 기나긴 사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베사리아는 그와 처음 만났던 때를 생각하며 피식 실소를 짓고서는 창틀에 머리를 통 하고 기댔다. 그때의 씁쓸한 추억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뭉실뭉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래, 그것은 그를 처음 만나고 나서 불과 사흘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


 한 십년쯤 전, 녹서스령 끝자락. 콜웬 마을인지 병나발인지 하는 곳.

 “죽고 싶어요.”
 “…….”

 베사리아는 음식 찌꺼기가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나무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채 말했다. 깊게 눌러쓴 후드 아래로 그녀의 긴 황금빛 머리카락이 축 늘어져있었다.

 사실 말했다기보다는 웅얼거렸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그녀는 거나하게 취해있었으니까. 테이블 위로 올라온 그녀의 왼손은 두꺼운 술잔을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붙잡고 있었다.

 “죽고 싶어요. 아뇨, 죽을 거예요. 그놈 오면 말해줘요. 그놈 죽이고 나도 죽어버릴 테니까. 이 술집 째로 날려버릴 거예요. 이제 못 참아요. 그거 알아요? 나 정말 참을 만큼 참았어요. 나 정말 열심히 일했단 말이에요. 근데 왜, 왜, 이 인간은 이런, 이런…으허헝…….”
 “…….”

 그녀의 뒤통수 아래에서 몇 번째인지 모를 흐느낌이 다시 들려오자 잭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며칠 이 소환사와 같이 지낸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정말 이 소환사의 의외의 일면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책임감 강한 일 중독자인줄로만 알았다. 항상 바빴고, 가장 늦게 퇴근했으며 가장 일찍 출근했다. 야근이나 밤샘도 밥 먹듯이 했다. 식사도 식당에 내려가지 않고 집무실에서 바로 해서, 그 자신이 몇 번 심부름꾼을 자처하며 식사를 가져다줬을 정도였다. 수면 시간도 영 불규칙했고 스트레스가 잔뜩 넘쳐흐르는 모양인지 에끌레어며 슈크림 따위를 야식으로 식사보다 더 많이 먹었다. 그러고서도 살이 전혀 찌지 않으니 그 광경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잭스로서는 그녀의 생활이 문자 그대로 마법처럼 신비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평소 생활이 그 모양인데 사는 곳이라 해서 제대로 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사는 곳도 엉망이었다. 아니 엉망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했다. 잭스는 뭔가 속에서 울컥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저택은 개판 오 분전이었다.

 말이 좋아 저택이지 폐가나 다름없었다. 전쟁학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황무지에 덩그러니 있는 모양새도 그랬고, 관리를 하지 않아 잡초며 덩굴이 우거질 대로 우거져 밀림 저리가라 할 정도로 엉망인 안뜰도 그랬다. 그렇다고 안쪽의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안쪽 상황에 비하면 바깥쪽은 양반에 가까웠다. 안쪽은 잡동사니와 쓰레기 더미가 뒤섞여 마경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주제에 기억력 하나만큼은 좋은 모양인지 그 잡동사니 사이를 뒤적여 칫솔이며 잠옷을 찾아내는 베사리아의 행동은 잭스가 보기엔 거의 묘기나 신기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베사리아의 생활상 자체를 관찰할 시간은 많았지만, 정작 그녀와 직접 얘기다운 얘기를 나눠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잭스였다. 어찌되었든 그녀와의 첫 만남은 최악이었다. 그녀는 늘 바빴고, 잭스도 자기 싫다는 사람에게 구태여 먼저 말을 걸 정도로 사교성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저 옆에서 일이나 도와주고 가끔 먹을 거나 배달해주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그 베사리아 콜민예라는 소환사가, 시정잡배나 마실만한 싸구려 진(Gin)을 맥주잔에 꽉꽉 눌러 담아 안주도 하나 먹지 않고 연거푸 마셔대다 제풀에 나자빠져서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술주정을 하는 이 광경은, 그에게 있어 정말 뭐랄까…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광경이었다. 그녀에 대한 잭스의 인상은 좀 달라져 있었다. 잭스는 일 중독자라는 평가를 정정하기로 했다. 그녀는 일 중독자가 아니었다. 그냥 이중인격자였다. 그것도 아주 질 나쁜 이중인격자. 잭스는 심란한 마음에 손도 대지 않은 술병을 옆으로 밀어놓고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저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레지널드 애쉬람 그 빌어먹을 놈을 떠올리며 애꿎은 이만 득득 갈뿐이었다.

 왜 그와 그녀가 챔피언 심판을 앞둔 이런 중대한 시국에 전쟁학회에서 무진장 멀리 떨어진 녹서스 변두리에 있는 싸구려 술집에 있는 것인가?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누군가가 불러서였다. 누구냐고? 잭스와 베사리아라는 두 인물과 공통분모를 가지며 남의 사정 따윈 아랑곳 않는 인물은 한 명밖에 없지 않던가. 현 전쟁학회 상임의원이자 전쟁학회장, 그리고 한 조직의 수장인 주제에 행방도 묘연하기로 이름난 레지널드 애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공연히 그 이름을 말해 베사리아를 자극할 정도로 잭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사흘 전만 해도 그래요!”

 …왜냐하면 구태여 자극하지 않아도 그녀의 상태는 최악이었으니까. 베사리아는 발딱 고개를 쳐들더니 그 한마디 외치고선 다시 술을 발칵발칵 마시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후드가 뒤로 넘어가며 그녀의 잘 땋아서 우아하게 쪽진 황금빛 머리카락과 함께 아름다운 외모가 드러나자 술집 여기저기서 휘파람이 터져 나왔다. 희디 흰 피부에 수려한 미목구비는 그녀가 귀족의 영애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외모였다. 그런 미녀와 대작하고 있는 잭스에게 부러운 시선이 몇몇 꽂히기도 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잭스는 똥 씹은 표정으로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요 사흘 간 그녀의 좋은 꼴 싫은 꼴 다 본 잭스에게 지금 와서 그녀의 외모가 호감을 줄 리 만무했다.        
 잭스는 두건 위로 애꿎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만날 시간은 넘겨도 이미 한참을 넘긴지 오래였음에도 불구하고 애쉬람은 이곳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으며, 홧김에 베사리아는 강술만 진탕 퍼마셨고, 그는 심란한 마음에 술 한 잔 제대로 못 마시고 있었다. 차라리 술에 취하면 진탕 다 때려 부수는 그라가스 쪽이 훨씬 나았다. 적어도 그건 힘으로라도 제압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건…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잭스였다.   

 “아니 그 인간, 자기가 분명 사흘 뒤에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근데 뭐, 뭐뭐? ‘잭스가 필요해. 베사리아 당신도 와주면 더 좋고. 기다리고 있을게!’라고요? 이 사람이 웬일로 제 수정구로 연락을 다 하나 싶더니 고작 그따위 말이나 하려고……! 죽여버릴 거야! 진짜로 죽여버릴 거야!”
 “거기 가면 쓴 양반! 애인 좀 조용히 시키쇼! 거 예쁘장한 아가씨가 술버릇이 왜 그렇게 더러워?”
 “누가 누구 애인이에요, 기분 나쁘게에에!”
 “후우…….”

 제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취한 주제에 그런 소리는 기가 막히게 잘 들리는 모양인지 베사리아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을 향해 마구 팔을 휘둘렀다. 

 “이봐, 술 튀잖아! 저거 완전 미친 거 아냐?”
 “재수가 없으려니……. 가세나, 가! 더러워서 피해야지, 원.”

 술이 사방천지로 흩날리자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손님들이 질색을 하며 대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사리아와 잭스가 좀 만만해 보이는 상대였다면 나가야하는 쪽은 반대였겠지만, 딱 봐도 싸움 깨나 할 용병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그럴 모험을 하고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나가는 쪽은 그들이었고, 한 무리가 자리를 뜨자 줄줄이 소시지처럼 한순간에 술집에 있던 사람들 중 반 이상의 손님들이 나가버렸다. 술집의 하루 장사는 밤부터 시작인 법. 방금 베사리아의 행동은 가뜩이나 아까부터 그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술집 주인의 짜증에 불을 댕겨버렸다.  
 “어이 용병! 당장 그 아가씨 들쳐 매고 썩 나가! 가뜩이나 요즘 장사가 안 돼서 죽겠는데 돈도 안 되는 진이나 시켜놓고선 무슨 주정을 해도…에이, 빌어먹을!”

 술집의 왕은 술집 주인이었다. 결국 잭스에게 베사리아와 같이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술집 추방령이 떨어졌다. 여전히 상황파악 못하고 안 간다고 오만 응석을 부리는 베사리아는 덤으로 해서 말이다. 따지고 보면 가장 가까이에 있던 그가 제일 큰 피해자였지만…잭스는 군말 없이 테이블에 동화 몇 닢 내던지고선 베사리아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리 잭스라 해도 상황이 그 지경이 되었는데 버티고 있을 정도로 낯짝이 두껍지는 않았다. 

 “왜 나와, 왜 나와요? 나 오늘 술독에 빠져 죽을 거야! 아냐, 애쉬람 그 인간부터 먼저 죽일 거야…음냐…….”
 “…….”

 베사리아는 잭스의 침묵에도 아랑곳 않고 버둥거렸지만, 그녀의 팔을 잡은 잭스의 손이 바이스처럼 꽉 조여져 있었기에 별다른 저항은 하지 못했다.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몰랐다, 잭스가 화가 나면 화가 날수록 더더욱 말이 없어지는 타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까지 날뛰지는 못했을 터였다.   
 
 밖은 조용했다. 밤바람만이 휑하니 불뿐이었다. 하긴 이런 늦은 시간대의 변두리 마을에서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가면 밑에서 잭스의 낮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긴 당장 잘 곳부터 찾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 마을의 유일한 술집 겸 여관인 이곳에서 쫓겨날 정도면 다른 집에서 잠자리를 얻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아까 나간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서 아무 말도 안했겠는가? 이런 변두리일수록 외지인들에 대한 경계심이 심해진다는 걸 모르는 잭스가 아니었다. 그 말은 오늘 이 마을에서 잠은 다 잤다는 것이요, 즉 마을 밖으로 나가 노숙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허, 허허.”

 잭스는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만 연거푸 냈다. 세상에 바로 등 뒤로 숙소가 있는데 노숙을 생각해야 했고, 돈은 없었고, 심지어 한쪽 손엔 고주망태가 된 채 연신 혀 꼬인 소리나 하고 있는 짐 덩이 이상의 가치를 느낄 수 없는 여자가 매달려 있다니. 어떻게 꼭 그놈이 엮인 일은 항상 이따위로 꼬이는 것인가? 잭스는 이 모든 상황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레지널드 애쉬람이라는 작자에게 살의마저 품을 지경이었다. 

 “이봐, 잭스? 밖에서 뭐 해…….”

 빠악

 “캐핵!”

 그래서일까. 잭스는 레지널드 애쉬람이란 인물의 목소리가 나는 순간 거의 본능적으로 그쪽에 주먹을 날려버렸다. 

 본능적이라고는 하나 그의 분노를 대변하듯 말아 쥔 그의 주먹에선 까드득거리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려올 정도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털푸덕 쓰러지자 그쪽을 향해 잭스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꼭 녹슨 태엽인형이 움직이는 것처럼 기기긱 소리가 날 법한 움직임으로 말이다. 달밤에, 가면을 쓰고 있는 그가 그러니 한층 더 괴기스러운 모습이었다. 

 가면에 난 구멍 사이로 잭스의 시야에 한 남자가 포착되었다. 밀짚 같은 푸석푸석한 머리카락, 돌에 낀 이끼처럼 얼굴의 반을 덮고 있는 누런 수염, 길게 자란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는 두 눈, 그리고 거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꾀죄죄한 옷차림.

 “아니, 친구. 맞아, 화났겠지. 약속 시간에 늦었어. 근데 뭐야? 옆에…어, 베사리아야? 아니 얘랑 같이 술 마시면 어떡해? 네 주량을 따라올 사람이 누가 있다고……. 하이고, 이거 완전히 맛이 갔네?”
 “애쉬라암…음냐…….”

 …그리고 그 특유의 뻔뻔스러운 어투와 행동까지. 천연덕스럽게 베사리아의 얼굴 앞에 손바닥을 휘휘 흔들어보는 이놈은 애쉬람이 틀림없었다. 잭스의 눈에서 불꽃이 튀기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의 주먹이 두 번째로 허공을 가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퍽 

 “아니 왜? 대체 왜 그래?! 방금 맞았잖아? 그걸로 퉁친 거 아니었어? 우리 사이에 쩨쩨하게 왜 그래?”

 “쩨쩨하다고? 내가? 여기가 마을 한복판인 걸 천만 다행으로 여기게. 안 그랬으면 자넨 이미 반쯤 죽어 있었어.” 잭스가 바득바득 이를 갈며 말했다. “지금부터 아무 말 말고 따라오게, 알겠나?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입이라도 벙긋 했다간…그때는 계약이고 챔피언이고 나발이고 다 없을 줄 알게.”

 잭스의 목소리에 어찌나 진득한 살기가 풀풀 풍겨져 나오는지 애쉬람은 찍소리 못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물론 고개만 끄덕거릴 뿐, 태도 자체는 ‘도대체 이놈이 뭣땜에 이리 화가 났을까’ 그 자체였다. 잭스는 거의 발작이 일어날 지경이었지만 사력을 다해 참고선 베사리아를 업었다. 그리고 땅바닥을 꾹꾹 누르며 걷기 시작했다. 흙 알갱이 하나하나가 전부 애쉬람의 얼굴이라고 생각하면서…….

 ‘…설마 내 등에 토하진 않겠지.’

 그리고 하도 시달려서 그런지 이젠 별게 다 걱정이 되는 잭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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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0. 챕터 2 시작합니다. 소제목은 '새벽빛'입니다.

1. 베사리아의 회상이 좀 길겁니다. 한 2~3화 분량?

2. 베사리아도 리즈 시절이 있었습니다. 

3. 물론 리즈 시절에도 겁나게 시달리며 살았겠죠.

4. 레지널드 애쉬람도 베사리아랑 비슷한 성격입니다. 남들 앞에서는 완벽하거든요.

5. 그것빼고 나머진 다 틀립니다. 애쉬람은 남 빡치게 하는데 고수입니다. 본인은 자각이 없고요.

6. 거기다 주제에 머리는 겁나 좋습니다. 네, 전형적인 머리 좋은 X발놈입니다.

7.시기상 CLE 10년도 즈음 됩니다. 애쉬람은 CLE 15년에 행방불명되니, 베사리아-잭스-애쉬람 트리오로 5년 정도 있었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8. 덧붙이자면, 베사리아와 잭스의 관계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9. 후에 나올 내용이니 이만 생략.

10. 선추댓은 환영합니다.

11. 댓글 달면 대답해줄지도

Lv74 강철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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