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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잭스X소나 팬픽-가로등과 별 31화

아이콘 강철안개
댓글: 5 개
조회: 2059
추천: 20
2016-09-28 00:21:27

***

 모닥불이 꺼져가고 있었다. 

 베사리아는 사그라지는 잔불을 바라보며, 그 앞에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아주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그녀의 눈은 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손에 쥐고 있던 손톱만한 묘안석이 희미하게 빛을 뿜으며 바르르 떨었다. 그녀가 주변에 깔아둔 탐지 마법에 발동했다는 뜻이었다. 떨리는 보석을 힐끗 쳐다본 베사리아는 어느 방향으로 슥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 강판 같은 가면을 눌러 쓴 한 용병이 그녀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서있었다. 잭스, 바로 그였다. 그가 돌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그를 한 번 찌릿 노려봐주고선 불가 옆의 땅을 툭툭 두드렸다.

 “목석처럼 서있지 말고 와서 앉아요.”
 “…불이 꺼져가는군.” 잭스가 조용히 말했다. “땔감을 좀 구해오겠소.”

 화악

 그가 땔감을 핑계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 한다는 걸 모를 정도로 베사리아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베사리아가 모닥불을 향해 손을 휙 내저었다. 그녀가 한 행동은 그게 전부인데, 놀랍게도 모닥불은 언제 꺼져갔다는 듯 불길이 확 치솟으며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막 불을 댕긴 것처럼 경쾌하게 타닥거리는 소리는 덤이었다. 

 “됐죠? 이제 앉아요.”
 “…….”

 말주변이 없는 그로서는 방금 것이 최대한 짜낼 수 있는 회피책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무겁게 한숨을 한 번 푹 쉬고선 얌전히 와서 앉았다. 그가 앉자 베사리아는 코끝을 훅 찌르는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불빛에 비춰지는 그의 모습은 피와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잭스의 거동은 그렇게 불편해보이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그가 뒤집어 쓴 피는 온전히 타인의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한 가지였다. 

 “모두 죽였나요?”
 “그렇소.”
 “한 사람도 남김없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상처는요?”
 “전혀.”
 “그래요.”

 가면 밑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담담한 목소리를 들으며 베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방금 전과 똑같은 말이었지만, 이번엔 기운 빠지고 낙담한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베사리아는 의미 없이 손가락을 꼬며 모닥불을 바라봤다. 침묵이 찾아왔다.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만이 이 정적을 깨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그래, 결국 잭스는 그들을 죽이고 돌아온 것이었다. 그것도 압도적인 무력 차로 말이다. 말이 한 부대지 실제로 훈련된 군인 한 부대를 마법도 아닌 무력만으로 상처 하나 없이 몰살시킨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의 정체에 대해 점점 더 큰 의문이 드는 베사리아였지만 그녀는 그 궁금증을 애써 억눌렀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기엔 그다지 적당한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들의 죽음을, 그리고 그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잭스에 대해 마음 깊이 슬퍼했다. 

 한 명의 사람으로서는 착한 마음씨라 할 수 있겠지만, 전쟁학회라는 거대한 하나의 조직의 수장으로서는 좀 문제가 있는 마음가짐이었다. 효율적으로 따져보자면 애쉬람의 판단이 훨씬 옳았다. 하지만 베사리아는 그걸 알면서도, 그리고 그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마음에 군살이 붙은 탓이었다. 연민이라는 이름의 군살이. 하지만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 그녀였다. 이미 지난 일이었다. 지난 일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도 없었다.

 “당신은 애쉬람과는 다르군.”
 “아무렴 그런 막장 같은 인간이랑 똑같은 사람이 있으려고요.”

 베사리아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성격적인 차이도 있지만…….” 잭스 역시 엷은 웃음기를 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애쉬람은 저리 경박해보여도 놀라울 정도로 마법사다운 성품의 소유자요. 철저하게 합리성을 따지지. 늘 그래왔소, 늘. 때때로 그런 성격 탓에 충돌이 있기도 했지. 하지만 그의 판단과 결정은 언제나 옳았소. 납득은 하지 못해도 결국 인정을 하는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아니었소. 그저 그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는 말이지. 하지만 그런 점이 다르오.”
 “뭐가요?”
 “망설인다는 점. 애쉬람은 망설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 예전엔 상황이 꽤 긴박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가 망설임을 최대한 배제한다고 생각했었소. 하지만 아니었지. 그가 애초에 망설임 따위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성격이란 걸 알은 건 꽤 시간이 흐른 뒤였소.”
 “그래요, 그는 언제나 그랬죠. 그리고 제가 결정력이 없다는 얘기를 참 돌려서 말하시는군요. 구태여 그와 비교해서 말해주지 않아도 돼요.”

 베사리아는 가볍게 빈정거렸지만 아무래도 잭스의 의도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 뜻이 아니오. 합리적인 게 언제나 옳은 것만은 아니지. 이번 일처럼 말이오. 애쉬람은 비윤리성과 효율성을 저울질한다면 주저 없이 합리성을 선택하는 사람이라오. 물론, 그와 함께하고 있는 이상 나 역시 거기에 포함되지. 나는 비윤리적인 일에 양심이 찔리는 건 찔리는 거고 그것과 효율성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소. 애쉬람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요. 솔직히 말해 나는 당신이 부럽소. 망설일 수 있다는 것이……. 그 진흙탕 같은 전쟁학회의 정점에 서있으면서도 그런 올곧은 성품을 지키기란 정말 힘든 일 아니오. 내 지금껏 많은 인간군상을 겪어왔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이오.”

 잭스는 갑작스런 칭찬에 놀라 굳어버린 베사리아의 얼굴을 잠깐 쳐다보더니, 이내 망설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래서, 가능하면 친분을 유지하고 싶은 게 내 솔직한 심정이라오.”
 “…….”

 베사리아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이 무뚝뚝한 용병에게 얼굴에 금칠을 받을 날이 올 줄이야. 가식 따위는 하나도 없는 말이라 오히려 이쪽이 더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베사리아는 자기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흐, 흥! 그렇게 제 얼굴에 금칠 하셔도 어디 제 기분이 풀릴 것 같아요?”
 “입에 발린 소리나 하는 성격은 아니라오. 이래봬도 꽤 용기를 낸 건데 말이지.”
 “아으……! 그러니까 문제란 거예요. 이쪽이 다 부끄러울 지경이라고요!” 

 말은 그렇게 해도 베사리아의 태도는 꽤나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녀는 은연중 안심하고 있었다. 비록 피칠갑을 한 처참한 꼴이긴 해도 이 용병은 그녀가 알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직 둘 사이에 해결해야 할 화제가 남아있었다. 그녀는 잭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잭스 역시 이번에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당신과 애쉬람을 보면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온 사이 같았어요. 언제부터 이런 일을 했나요? 이런…음지에서 애쉬람이 말한 소위 ‘힘의 균형’을 지키는 거 말이에요.”
 “오래됐소. 이래저래 5, 6년 정도. 수상쩍은 마법 결사 하나를 몰살해야 했던 일도 있었고, 이야깃거리로나 듣던 괴물과 싸워야 했던 적도 있었소. 어느 쪽이든 유쾌했던 일은 한 번도 없었지. 하지만 애쉬람과 함께 하기로 한 결정에 후회한 적은 없소. 결국 그는 자신의 행동이 옳다는 걸 증명했으니까. 당신이 속한 전쟁학회가 바로 그 증거 아니겠소.”
 “확실히 발로란 대륙에 평화를 가져온 건 전쟁학회의 공이 컸죠. 불안정한 평화이기는 하지만. 하지만 당신은요? 당신이 하는 일이 전쟁학회가 지어지기 이전과 다른 게 대체 뭔가요? 당신 꼴을 봐요! 피범벅이라고요! 챔피언이 되어서도 그런 식으로 살 거예요?”
 “…누군가는 더러운 역할을 짊어져야 하오.”
 “그게 왜 하필 당신이냐고요!”
 “과거도 애매모호한 전쟁 용병에, 인간도 아닌 이종족이고, 얼굴을 비롯해 세간에 알려진 건 내 이름 하나뿐이지. 거기에 실력은 어느 정도 있고 말이야. 더러운 역할을 짊어지기에 이 정도로 어울리는 자가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소? 게다가 난 부귀영화나 명예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소. 내가 바라는 건 오직 전쟁이 완전히 종결되고, 가능하다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뿐이오. 그걸 위해서라면 난 얼마든지 이런 짓을 계속할거요.”
 “하지만, 하지만…….”

 베사리아가 안타까운 듯 말을 잇지 못하자, 잭스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능하다면 나도 이러고 싶지 않소. 내게 다른 재주가 있었다면 그걸 이 대륙의 평화를 지키는 곳에 사용했겠지. 하지만 늙은 개에겐 새로운 재주를 가르칠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소. 내게 있는 재주라고는 그저 누굴 죽이는 것밖에 없고, 지금 와서 뭔가를 새로 하기엔 너무 늦었소.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와버리기도 했고 말이오. 난 후회할 수 없소, 소환사. 아니 후회해서는 안 되오. 절대로 말이오. 내가 내 과거를 후회한다면, 내 손에 죽어간 이들은 대체 뭐란 말이오? 헛된 꿈이나 꾸는 이 빌어먹을 용병에게 개죽음 당한 거나 마찬가지 아니오? 그러니 난 멈출 수가 없소. 이 길의 끝에 구원이 있든, 파멸이 있든…나는 끝까지 가야만 하오.”
 “그 전에 당신이 죽을 수도 있어요. 몸이 아니라, 마음이 죽을 수도 있다고요. 당신의 행위는 너무 가혹해요. 그건 자신을 죽이는 행위란 말이에요.”
 “하하, 그거야말로 내게 딱 맞는 죽음 아니겠소.”

 잭스는 유쾌한 농담이라도 들은 듯 웃었지만, 그 웃음은 메말라있었다. 일종의 자조에 가까웠다. 그런 잭스를 보는 베사리아는 속이 상했다. 화가 났다. 그녀는 이상을 꿈꾸며 이곳 전쟁학회에 들어왔다. 피로 피를 씻어내지 않고서도 대륙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하지만 분하게도, 정말 분하게도 그녀는 감정적으론 도저히 용납할 수 없으면서도 이성적으로는 잭스와 같은 존재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까놓고 말해 애쉬람과 말다툼을 벌일 때는 어린애처럼 떼를 쓴 것에 불과했다. 만약 거기서 애쉬람이 대책을 물어봤다면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을 터였다. 그걸 알고 묻지 않았는지 아니면 모르고 넘어갔는지…아니다, 베사리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알고도 그냥 넘어가 준 것이 분명했다. 그녀도 알고 있던 걸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전쟁학회가 막을 수 있는 건 큰 분쟁뿐이었다. 아무리 전쟁학회가 날고 긴다고 하지만 대륙의 모든 일을 알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번 일처럼 분쟁의 불씨가 될 법한 일들이 있다 해도 전쟁학회가 대처할 수 있는 시기는 이 불씨로 인해 불이 어느 정도 커졌을 때였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지 생각해본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한 명의 인생을 나락 저 아래로 떨어뜨려도 된다는 건 아니었다. 

 “제가 데마시아 출신이라는 거 말한 적 없죠?”

 베사리아는 툭 던지듯 입을 열었다.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전쟁의 여파를 겪으며 자랐어요. 전쟁 때문에 부모님을 잃었거든요. 아버지는 군에 반강제로 끌려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하셨고, 가뜩이나 몸 약하던 어머니는 그 충격에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어요. 불과 몇 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었죠. 정신을 차려보니 제게 남은 거라고는 약간의 돈과 허름한 집 한 채가 전부였어요.”
 “…….”

 잭스는 침묵했다.

 “그래도 전 운이 나쁜 부류 중에선 운이 좋은 편에 속했어요. 선천적으로 마법에 재능이 있었거든요. 간단한 염력이나 빛의 구슬을 만든다던가, 뭐 그런 거요. 그래서 거의 도박에 올인하는 기분으로 남아있던 재산을 정리해서  왕립 마법원에 입학했어요. 하, 입학금이 어마어마하더라고요. 게다가 하필 전공을 보석 마법으로 해서 그 뒤의 지출도…휴, 지금 생각해보면 끔찍했어요.”

 베사리아는 옛날 추억을 회상하듯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잭스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녀의 어린 시절이라면 줄잡아 10년하고도 몇 년 전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그가 한창 전쟁터에서 낮에는 피에 젖고 밤에는 술에 젖고 하는 생활을 반복하던 때였다. 어쩌면…….

 “그래도 마법을 배울 때는 좋았어요. 어려웠거든요. 어려우니까 마법을 공부할 때는 슬픔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하지만 가끔 생각에 잠길 여유가 있는 밤이 되면 늘 악몽에 시달렸죠. 아직도 기억나요. 아버지의 전사통지서를 받던 날이. 누런 양피지에 대충 휘갈겨 써진 아버지의 이름, 그리고 그걸 떨리는 손으로 꺼내보던 어머니의 얼굴……. 전 죽을 때까지 그 광경을 잊지 못할 거예요.”

 어쩌면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자가 자신일수도 있다는 사실이, 잭스는 두려웠다.

 “그게 제가 애쉬람을 따라 전쟁학회에 들어간 이유였어요, 잭스. 저 같은 사람이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이 대륙에서 전쟁을 없애기 위해서. 당시에는 상당한 모험이었어요. 그때 제가 좀 잘나가서 왕립 마법원의 연구직 제의도 들어왔었거든요. 한마디로 부와 안정된 직장을 걷어차고 애쉬람을 따랐던 거였어요. 후후, 지금 생각해보면 다행이지만요. 만약 그때 연구직을 받아들였으면 어땠을까요? 분명 곰팡내 나는 양피지 더미에 파묻혀서 톱니바퀴처럼 일만 하고 있었을 거예요.”
 “나는…….”
 “당신을 책망하는 게 아니에요.”

 베사리아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저 그 지옥 같은 전쟁터 속에서 살아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신이 이런 상처투성이 삶을 살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잭스. 당신은 살아남았잖아요, 그렇죠? 우리 아버지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은 살아돌아오지 못했던 그 시절에서 살아남아, 이렇게 제 앞에 있는 거라고요. 잭스, 이건 감사할 일이에요.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일이 아니라 기뻐해야 하는 거라고요.”

 베사리아는 울컥하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잭스의 손을 꽉 쥐었다. 아직 피의 끈적거림이 남아있는 그 손을, 잭스는 깜짝 놀라 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악력은 여자의 그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머리가 마치 단단한 바이스에 고정된 것만 같이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베사리아의 눈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잭스는 그 눈동자 속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연민과 슬픔, 그리고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었다. 가면 속에서 그는 눈을 감았다. 그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고맙소.”
 “…….”
 “누군가에게 위로받아보기는…정말 오랜만이오. 고맙소, 소환사.”
 “소환사는 제 이름이 아니에요. 정말, 그만큼 했으면 적당히 알아서 호칭 좀 바꿔봐요.”

 베사리아가 가볍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아, 알겠소, 미스 콜…….”
 “그냥 베사리아로 됐어요!”

 이번에는 으르렁거리며 말하는 베사리아였다.

 “알겠소, 베…사리아.”
 “좋아요. 소환사나 미스 뭐시기라는 호칭보단 훨씬 낫군요.” 베사리아는 썩 맘에 들지는 않는다는 표정을 짓다,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얘기 끝났으니까 이제 썩 나와요, 애쉬람! 왔으면 왔다고 기척이라도 좀 해야죠!”
 “애쉬람이 어디 있다는 말이오. 보이지도 않는데.”

 허공을 향해 소리치는 베사리아를 보며 잭스가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베사리아는 그런 잭스의 태도에도 아랑곳 않고 한 번 더 빽 소리를 질렀다.

 “안 나오면 당신이 학회장실에 몰래 쑤셔 박아둔 술들 죄다 하수구에 던져버릴 거예요!”
 [헉, 그건 안 돼!]
 “…….”

 다른 사람에게야 안 보이겠지만 지금 잭스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머리 위쪽 허공에서 애쉬람의 목소리가 울리나 싶더니 무슨 커다란 포대 자루 같은 것이 그들 앞에 툭 하고 떨어졌다. 그것은 바로 어찌나 관리를 안 했는지 자루 쪽이 더 깨끗할 것 같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꼬질꼬질한 소환사용 로브를 입고 있는 애쉬람이었다. 이전과 좀 다른 모습이 있다면, 그의 한쪽 손에 칙칙한 묘비 같은 장식이 달린 목걸이가 담긴 반투명한 유리 상자가 들려있다는 점이었다. 베사리아는 별로 놀랄 것도 없다는 듯 입을 삐죽이며 고갯짓으로 상자를 가리켰다.

 “그게 밴시의 장막이에요? 생각보다는 작네요.”
 “형태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이걸 봉인할 이놈을 만드느라 좀 시간이 걸렸어. 봉인 자체도 좀 까다로웠고 말이야. 당최 마법이 제대로 먹혀야 말이지.” 애쉬람이 유리 상자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근데 내가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 분명 네 탐지 마법에 안 걸렸는데 말이야.”
 “애초에 기대도 안 했거든요.” 베사리아가 도끼눈을 뜨며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이렇게 몰래 훔쳐듣는 거 어디 한두 번 인가요?”
 “아, 하긴 그래.”

 애쉬람은 얼굴에 두꺼운 철판이라도 깔아놓은 듯 선선히 인정했다. 그런 애쉬람에게 선전포고라도 하듯 베사리아는 잭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제가 오늘 일에 대해 어물쩍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애쉬람.”
 “…그래, 이번엔 정말 미안했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연관되는 일은 없도록 할게.”
 애쉬람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베사리아의 다음 발언은, 그 애쉬람조차도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뇨, 그 반대에요. 이제부터는 제가 당신들과 같이 다닐 거니까요.”
 “그래…아니, 잠깐만, 뭐라고?”
 “소환, 아아니 베사리아.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

 호칭 문제로 다시 한 번 더 베사리아의 눈총을 받은 잭스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그 모습이 흡사 조련사 앞에서 쩔쩔매는 맹수와도 같았다.

 “말한 그대로에요. 잭스에게 말했던 거, 애쉬람 당신에게도 해당하는 거니까요. 그래요, 저도 음지에서 이런 활동이 필요하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오늘 같은 방식으로는 절대 안 돼요. 제가 막을 테니까요. 오늘 이후로 당신들이 두 손에 피를 묻히며 자책하는 일은 없도록 할 거예요.”
 “아니, 하지만 그러면 내 계획에 좀 차질이…….”
 “앞으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차질이 생기게 해드릴 수도 있는데요, 애쉬람?”

 베사리아가 싱긋 웃으며 애쉬람의 멱살을 잡았다. 분명 화사하게 웃고 있는데 어째서 이리 무섭게 느껴지는 건지 잭스도 애쉬람도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애쉬람은 본능적으로 여기서 선택을 잘못 했다간 뭐가 되었든 끝이 좋지 않을 거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결국 애쉬람은 눈알을 이리 뒤룩 저리 뒤룩 굴리며 궁리를 하다 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 하며 입을 열었다.

 “뭐, 네가 정 하고 싶다면야 어쩔 수 없지 뭐.”
 “애쉬람! 자네 정말…….”
 “어쩔 수 없다고, 잭스. 우린 이미 베사리아에게 목줄이 잡혀버렸으니까.” 애쉬람이 잭스를 슥 돌아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아무리 나라도 네가 내 이상에 무리해서 어울려주는데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단 말이야. 차라리 잘 된 일이지. 읏차! 그럼 이 이야기는 이걸로 끝. 잭스, 이 야영지 좀 정리해주겠어? 늘 그랬듯이 우리의 흔적을 알 수 없도록 해서 말이야. 나랑 베사리아는 조금 더 할 얘기가 있거든.”
 “언젠 도와줬다는 듯이 말하는군. 정리라는 단어와는 담을 쌓고 지낸 주제에.” 잭스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다녀오게. 일단 지금 자네 얼굴을 조금만 더 보고 있다간 주먹이 날아갈 것 같으니.”

 애쉬람도 그렇지만 잭스도 더 이상 번복할 수 없는 일에 억지로 붙잡고 늘어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중간과정에 아무리 마찰이 있다 해도 결정 자체는 시원시원한 것이 그의 장점이었다. 애쉬람은 그런 잭스를 향해 씩 웃어주고는 베사리아에게 눈짓을 했다. 곧 둘은 얼마 떨어진 곳으로 왔다. 베사리아는 대체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는 눈빛으로 팔짱을 낀 채 나무에 기대어 섰다.

 “할 말이 뭔데요? 내가 이제부터 같이 다닌다는 게 불만이에요?”
 “아니, 그 얘기가 아냐. 잭스에 관한 거야.” 애쉬람은 베사리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잭스를 부탁해. 잘 좀 봐줘.”
 “당신이 그렇게 안 말해도 어차피 챔피언이 될 테니까 제 소관…….”
 “그런 거 말고. 그래, 뭐랄까…친구가 되어 달라는 뜻이야. 잭스는 내게 정말 큰 도움을 줬는데 난 그에게 줄 게 없거든. 하지만 넌 줄 수 있잖아.”
 “뭘요?”
 “일상.”

 애쉬람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그에 대해선 맘이 편치 않기는 매한가지야. 그는 내게 정말 큰 도움을 줬어. 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전쟁학회 설립에만 10년이 걸렸을 거야. 하지만 그가 날 전적으로 믿고 따라와 주면서, 말로 다 못할 온갖 더러운 일들과 어려운 일들을 해준 덕분에 그 기간이 반으로 줄어들었어. 내가 전쟁학회 건으로 공식 석상에서 한창 얼굴도장을 찍고 있을 때도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말 많은 일을 해줬지.”

 처음 듣는 얘기였다. 베사리아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번졌다.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전쟁학회라는 거대한 조직이 새로 세워지는 데에 이상하리만치 마찰이 없긴 했다. 각국의 이해가 겹쳤다, 라는 이유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잭스는 아무도 모르는 음지에서 전쟁학회를 세우는 데에 일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슬픔도 고통도 모두 스스로 인내하고 삭히면서.

 “하지만 그 때문에 그의 인생은 처참하게 상처투성이가 되고 말았어.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말이야. 그는 외로워. 그래서 네게 소개시켜 준 거였어. 너라면 그를 잘 이해하고, 또 그를 받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 역시…너로 인해 좀 소란스러운 일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은 번드르르 해도 또 절 이용한 거네요? 그에게 일상을 줄 수 있는 친구로요.”
 “미안. 오늘은 정말 사과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네.” 
 “됐어요. 의도야 어쨌든 그와 죽이 꽤 잘 맞았다는 건 저도 부정하지 못 하겠으니까요. 특별히 용서해드릴게요. 그러니…….” 베사리아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솔직히 당신이 말 안 해도 친구로 지내려고 했는데요, 뭘. 그런데 겨우 그 말 하려고 일부러 따로 이런 데까지 온 거예요?”

 베사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뭔가 더 중요한 일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싱거운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굳이 애쉬람이 부탁 안 해도 잭스와는 친하게 지내고 싶은 베사리아였다. 하지만 애쉬람은 베사리아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안심이 된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 보여주는 그 경박한 웃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 비록 모습은 꾀죄죄해도 그렇게 웃으니 정말 연륜 깊은 대마법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이때의 베사리아는 그의 미소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래, 겨우 그 얘기 하려고 그랬어. 뭐 해주겠다니 다행이네. 그럼 슬슬 돌아가자고. 아아~이거 학회 아이템 보관소에 넣으러 가는 김에 학회에서 좀 씻고 가야겠다. 아무래도 속옷을 네 번이나 뒤집어 입는 건 나라도 무리인 것 같아.”
 “꺅, 더러워! 저리 떨어져서 걸어와요.”  

 베사리아가 질색을 하며 그에게서 휙 떨어졌고, 애쉬람은 여느 때처럼 경박하게 킬킬 웃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벌써 정리를 마친 잭스가 가면 구멍 사이로 풀이파리 하나를 질겅질겅 씹으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분이 유쾌해진 베사리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잭스를 향해 걸어갔다. 

 바로 이날부터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베사리아는 그의 앞에서만큼은 어떤 가식도 비치지 않았고(솔직히 말해 너무 편하게 대해서 문제였다) 잭스 역시 일부러 거리를 두거나 하는 일 없이 그녀를 편하게 대했다. 비록 애쉬람과 예의 그 음지에서의 일을 할 때와 같은 상황에선 의견충돌이 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것 역시 서로의 끈끈한 신뢰와 우정으로 금방 풀어나갔다. 그녀는 언제까지고 이 우정의 관계가 지속될거라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왜 애쉬람이 그녀에게 그를 부탁했는지를.
 그리고 그녀의 결심이라는 게, 얼마나 얄팍하기 그지없었던 것인지를.
 훗날 그녀가 잭스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죄를 짓게 되리라는 것을, 이때의 베사리아는 모르고 있었다.


*** 


 빗줄기가 거세져가고 있었다. 

 기세를 보아하니 아침이 되어도 그치지 않을 성 싶었다. 베사리아는 빗물이 흐르는 창문에 몸 한쪽을 기댄 채 맥없이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도 마시지 않은 커피가 든 컵은 그녀의 손가락 끝에 걸린 채 차갑게 식어있었다. 하지만 깊은 생각에 잠긴 베사리아는 컵의 존재 따윈 깨끗이 잊은 상태였다. 

 “벌써 10년…….”

 베사리아는 창틀에 머리를 기댄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렇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었다. 잭스를 처음 만나고 벌써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이었다. 처음 만났던 때를 비롯해 잭스와의 여러 가지 일들이 그녀의 뇌리를 어지럽게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그와의 관계가 마냥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서로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거리며 싸웠던 적도 있었고 한 달 동안 말도 붙이지 않고 대치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란 괴로웠던 기억들도 추억으로 미화시켜주지 않던가. 이제 와서는 다 그리운 추억일 뿐이었다.

 그러나 모든 기억이 전부 추억으로 미화되는 건 아니었다. 

 그럴 수 없는 일도 있었다. 아무리 옛 기억을 추억으로 미화시킨다 해도, 그래서는 안 되는 일까지 추억으로 여길 만큼 그녀는 양심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입에서 쓸쓸한 한숨이 낮게 흘러나왔다.

 [잭스를 부탁해.]
 “바보 같은…….”

 애쉬람. 그는 그 날 분명 그렇게 말했다. 지금 그는 이 세상에 없었다. 어디 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의 여부조차도. 그녀는 그런 약속의 굴레를 씌운 그가 원망스러웠고, 그걸 원망스러워하는 자신을 증오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아니, 지키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오히려 그녀는 더 끔찍한 방법으로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잭스가 고통스러워하고, 가장 힘들어할 때 그녀는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를 위로해주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위로받은 건, 그녀 쪽이었다.

 “…….”

 그녀의 볼을 타고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다. 그녀는 늘 잭스에게 도움을 받을 뿐이었다. 괴로웠다. 차라리 그가 그녀를 원망해준다면 속이 시원할 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비참했고 더 미안했다. 그녀는 그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죽지 마요…….”

 베사리아는 흐느끼며 말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죽지 마요, 잭스……. 당신이, 당신마저 죽어버리면 전 정말…앞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단 말이에요.”

 두려웠다. 그가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때마다 그의 공백을 상상해야 한다는 게. 그 저주 받을 푸른 불꽃을 잭스에게 사용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몇 번이나 결심했는데, 결국 잭스에게 그 불꽃을 사용하도록 만들어버렸다. 그건 분명 수명을 깎는 불꽃이었다. 뭐가 되었든 그런 이단적인 힘에 대가가 따르지 않을 리 없었다. 그것도 아주 큰 대가가 말이다. 그녀는 울었다. 오래도록. 잭스가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베사리아였다.

 남들이 들으면 무슨 과장이 심하냐고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잭스는 베사리아에게 친구 이상의 의미를 지닌 존재였다. 현 시점에서 그는 그녀와 추억과 고통스러운 기억을 동시에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으며, 그녀가 마음을 가장 많이 터놓은 인물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있어 도피처이자 안식처였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걸 방패로, 결국 그녀는 약하고 약한 본심을 내비치고야 말았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도와줘요, 잭스. 제발…….”

 베사리아는 눈에선 거세어지는 빗방울처럼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소중한 친구를 잃을 수 없다는 슬픔이었고, 그 친구를 걱정하면서도 결국 그 친구에게 의지하려는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부끄러움의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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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0. 회상 및 떡밥 투척 끝

1. 다음화부턴 스토리 진행 나갑니다 허이짜

2. 주가가 오르고 계시는 베사리아 여사님

3. 내가 봐도 매력적이야 흐흐 맘에 들어

4. 하지만 아직 소나의 턴은 돌아오지 않았다

5. 댓글선작추천 감사합니다

6. 질문 있으면 받아줌

7. 보고싶다는데 올려야지 뭐...

Lv74 강철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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