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신벌
달이 뜨고 어둠이 찾아왔다.
카멘은 언제나 있던 그 자리에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천장에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어둑한 동굴에 허락받지 못한 존재들이 찾아왔다.
그림자들.
정말 그림자들이었다. 까마귀의 그림자, 늑대의 그림자, 그리고 작은 광대의 그림자.
카멘, 그가 태초의 상태로 돌린 것들이었다. 그것들이 동굴의 벽을 이리저리 오가며 알 수 없는 소리로 옹알거렸다. 감히 어둠의 주인을 조롱하기도 했지만, 카멘은 그것들을 내버려 두었다. 원래 그런 것들이었다.
흐르는 대로 두어라.
우연이 생긴다면 그 또한 두어라.
그것이 혼돈이리라.
그림자들이 달빛 아래 머무는 흑단나무로 우르르 몰려갔다.
작은 흑단나무는 어느새 부쩍 자라났다. 무성해진 잎사귀마다 빛줄기가 뻗어나가 은은하게 빛났다. 작은 가디언과 어둠의 주인. 빛과 어둠, 그리고 혼돈이 섞인 알 수 없는 조화였지만, 짧은 사이에 그렇게 자라있었다.
그림자들이 나무를 어찌할 수는 없었지만, 카멘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투구에서 푸른 안광이 빛났다.
금기는 있다. 그것은 오직 그의 기준이었다.
질서가 간섭한 결과가 만들어낸 혼돈의 작은 기준.
이는 질서와 다르다.
이 또한 품을 수 있기에 혼돈이다.
그 눈빛에 놀라 그림자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망쳤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검에 기대어 있던 카멘은 위를 올려보았다. 이내 그는 순식간에 동굴 위의 공중으로 올랐다. 그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저 하늘 위에서 황금색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신의 문자가 둥근 형태의 마법진을 만들었다. 그것은 동굴 앞 분지를 가득 채울 크기로 새겨졌다. 황금빛 마법진은 동굴 외에도 인근 곳곳에 떨어졌다. 실리안의 군대와 대치하던 자경단 위에도, 동굴로 향하던 황혼의 군대에도, 인근의 여러 마을에도 마법진이 떨어졌다. 이것이 무언지 아무도 몰랐다.
곧 황금빛 빛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카멘은 순간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그것을 검푸른 검기로 갈라버렸다. 밤하늘에 섬광이 일며 번개가 치듯 번쩍였다. 빛기둥이 없던 것처럼 사라졌다. 공허의 공간이 다시 채워지며 펑-소리와 함께 충격파가 이어졌다. 바람이 일고 주변의 나무들이 크게 흔들렸다.
빛기둥은 인근의 마을 여러 곳에도 떨어졌다. 신의 문자가 새겨진 마법진 위로 찬란한 황금빛이 쏟아졌다. 소녀가 있는 마을은 카단이 막았지만, 몇몇 곳은 오롯이 빛에 휩싸였다.
실리안은 밝은 빛에 눈을 가렸다. 곧 시력이 돌아왔다. 처음엔 몰랐다. 실리안의 군대와 자경대는 그저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자경대 뒤에서 길을 막고 있던 사제와 신성 기사들도 어리둥절했다.
곧 혼란스러워졌다.
빛기둥에 맞은 사람들이 다치진 않았다. 단지 굳어 있었다. 돌처럼.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풀, 나무, 동물, 벌레 등 마법진에 있던 모든 생명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굳은 동료를 발견한 사람들의 비명이 이어졌다.
신의 언어가 새겨진 마법진이 이제 위치를 바꿨다.
실리안은 부하들을 향해 후퇴를 명했다.
밤하늘은 다시 밝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자경단은 물론 황혼의 사제와 신성 기사들도 마법진을 피해 뛰었다. 또 하늘이 황금빛으로 빛나며 빛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마을 곳곳에서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무것도 모르고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집과 함께 통째로 굳어버렸다. 마법진의 경계에 있던 곳에선 비명이 더 커졌다. 마을의 거리에 도망쳐 나오는 사람들이 이어졌다. 일부는 마을 밖으로, 일부는 군대가 있는 산으로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다.
모험가는 일단 루와 소녀가 있는 치유시설부터 찾았다. 그들을 대피시켜야 했다. 카단이 빛기둥을 막아주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광범위한 지역에 떨어진 마법진을 어떻게 피해야 할지도 막막했지만, 지붕 아래도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
멀리 떨어진 어느 절벽 위에는 청동빛 대포가 세워져 있었다. 섬세하고 정교한 장식과 신비한 무늬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아름다운 구조물에는 신의 문자가 감돌았다. 그 조종석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혼돈의 존재가 자리했다.
세이튼은 재밌는 게임을 하듯 시시덕거렸다.
“후-하하. 이거, 루페온도 참 짓궂다니까. 이런 재밌는 장난감으로 말 안 듣는 피조물들을 혼내줬다 이 말이지?”
세이튼은 옆을 돌아보았다. 맞장구를 쳐줬어야 할 작은 광대는 웅얼거리며 이리저리 오갈 뿐이었다. 세이튼의 섬뜩한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본격적인 사냥을 시작해볼까.”
세이튼은 아이처럼 신이 나서 이것저것 눌러댔다.
그런 모습을 휠체어에 앉은 바실리오와 그를 수행하는 황혼의 사제들이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
마법진이 다시 산 위로 정렬했다. 그것은 동굴이 있는 산 전체를 덮어버릴 듯 넓게 퍼졌다.
산 아래서 길을 막던 자경단이 흩어졌다. 이제 산으로 올라갈 수 있었지만 실리안의 군대는 더 진입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마법진이 그들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온통 산 위를 덮은 마법진이 어디까지 펼쳐져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안전한 구역이 있더라도 황혼의 사제와 기사들이 있을 것이다. 실리안은 산 위를 쳐다보았다. 어둠의 장막 위로 검은 구름이 넓게 퍼졌다. 그것이 밤하늘의 달과 별을 가려갔다.
실리안은 확신했다. 저곳에 카멘이 있다.
치유 사제와 루테란 기사들의 인솔을 따라 소녀와 루는 사람들의 피난 행렬에 합류했다. 몸이 약한 소녀와 몇몇 노약자들은 마차에 탔고, 그 옆에서 루가 함께 걸으며 이동했다. 소녀는 마차에서도 누워있어야 할 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모험가는 그들의 안전을 확인한 뒤, 다시 마을로 발길을 돌렸다.
소녀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동굴이 있는 산을 바라보았다. 산 위에는 퍼져나온 검은 구름이 마을까지 덮었다. 간혹 검푸른 번개도 번쩍였다. 정말 말로만 듣던 악마의 힘이 눈앞에 펼쳐졌다.
“누누. 정말 케이브 아저씨가 저기 있을까?”
그것이 어떤 악마의 힘인지도 알게 되었지만, 소녀는 도무지 그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 아마도.]
“아저씨가 왜 돌아왔을까?”
[글쎄다,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루는 뒤를 돌아보다 소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소녀는 저 멀리 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 괜찮을까?”
“괜찮을 거다. 그는 강하니까. 네 생각처럼 베른의 마법 기사는 아니지만, 한때 페트라니아에서 진짜 무서운 악…아니, 기사였단다.”
소녀의 시선이 루를 향했다. 여전히 아기염소 같은 모습이지만 송아지보다 커진 누누와 시선이 맞았다.
“누누. 방금 말한 거야?”
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나는 계속 말하고 있었다.”
그만큼 영력도 더 강해진 듯했다. 소녀의 파리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누누. 정말 가디언이구나.”
“그렇단다. 얘야. 나는 늘 말해왔건만. 이제야 너에게도 닿게 되었구나. 나는 가디언이 맞단다.”
“와-. 누누가 가디언이라니.”
왕의 기사님도, 날개 달린 예쁜 언니도, 그리고 동굴 아저씨도 그를 가디언이라 했지만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과 깨닫는 것은 달랐다. 소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고는 마차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루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소녀는 루의 미간에서 코까지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아저씨 말이…진짜였어.”
“…그래, 그렇단다.”
소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 아저씨는 한 번도…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루는 잠시 생각하다 답해주었다.
“그래. 그랬구나.”
“아저씨는 이름도, 고향도 다 말해줬었어. 내가…믿지 않은 거야.”
“그래. 하지만 네 잘못은 아니란다. 누구라도 믿지 못했을 게다.”
“누누, 아저씨가….”
그때 세상이 또 한 번 황금빛으로 번쩍였다. 소녀와 루는 동시에 산을 바라보았다. 산 위에서 퍼진 검은 구름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갔다.
소녀와 루는 눈을 떼지 못했다.
***
마을에서도, 산에서도 사람들은 도망치며 신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그들이 찾는 신은 대답 대신 다른 답을 주었다. 빛기둥으로. 신이 아니라 악마가 퍼트린 검은 구름이 그들을 구원할 성역이 되었다. 검은 구름에 가려지지 않은 마법진 위의 모든 것들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빛기둥과 충돌한 검은 구름이 황금빛으로 물들며 번쩍였다. 동시에 검은 구름이 소멸했다. 어둠과 빛이 뒤섞인 뒤에는 공백만이 남았다. 공백이 메워지자, 응축된 공기가 후폭풍이 되어 산 아래까지 밀려 내려갔다. 거대한 흙먼지가 일고 바위들이 굴러떨어졌다.
어둠이 걷히고 다시 밤하늘이 드러났다. 그 사이 카멘은 어둠의 창을 생성하고 있었다. 멀리에서 산을 올려보는 사람들에게도 번뜩이는 검푸른 번개가 보일 정도로 거대한 창이었다.
실리안은 산의 입구에서 그것을 무력하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몇몇을 제외하곤 저 검푸른 번개가 무언지 알지도 못했다. 어둠의 창이 어디를 향할지는 알 수 없었다. 실리안은 검은 구름의 그늘에서 신의 기둥을 피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혼란스러웠다.
거센 바람의 여파는 인근 마을까지 덮쳤다. 모험가는 잔해 더미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옆으로 카단이 내려왔다. 카단은 산을 주시하며 안부를 물었다.
“괜찮나.”
모험가도 몸을 일으키고는 산을 바라보았다. 산 위에서 번쩍이는 어둠의 창이 보였다. 황금빛 마법진이 또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법진은 이제 산을 중심으로 주위 일대를 둘러쌌다. 몇 개의 마을이 걸쳐졌는지 알 수도 없었다.
모험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이 어둠의 창이 어딘가로 쏘아졌다. 어둠의 창은 검푸른 궤적을 그리며 멀리 날아갔다. 카단이 나직이 말했다.
“저 창을 쫓아라. 그곳에 범인이 있을 거다.”
하늘에서 또 황금빛 기둥이 쏟아져 내렸다. 카단은 검에 빛나는 검기를 발동시키며 뛰어올랐다. 모험가는 바로 움직였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동굴이 있는 산 위, 카멘은 빛기둥을 피해 이리저리 날았다.
어둠의 창이 저 가소로운 태초의 그림자들을 향한 뒤, 빛기둥이 순식간에 빗발치듯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받아쳐 낼 틈도 없었다. 동굴 주위의 암벽과 봉우리가 부서지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굳어버렸다. 하지만 어둠의 창이 도달하는 순간 저 광대의 놀이는 끝날 것이다. 곧 반격은 시작된다. 감히 어둠의 주인을 건드린 대가는 태초의 상태도 아닌, 완전한 소멸로 치러야 할 것이다.
눈앞의 빛기둥만 넘기면 이제 그의 차례였다. 그런데, 하필 그 빛기둥이 동굴 위로 떨어졌다.
투구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소녀의 말이 맴돌았다.
‘…내가 끝까지 못 지킬지도 모르니까 아저씨가 지켜줘.’
상흔이 남은 손에 새겨진, 아무도 모를 그 약속이.
피할 수가 없었다. 아니, 피해서는 안 됐다.
떨어지는 빛기둥을 카멘은 온몸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
루페온과 일곱신의 성물이 있다는데 8개만 있을지 그 이상이 있을지 궁금하네요.
글을 쓸 때 음악을 많이 듣게 되는데...
게임 BGM '종말의 시' 음악을 많이 들었죠.
타임 버전도 많이 들었지만, 포엠 버전을 더 많이 들은 것 같습니다.
팬(유투버 김민서님)이 만든 '종말의 시 국악 버전'도 정말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애록이 나온다면 그런 처연한 음악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