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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좀비와 마녀와 눈물 1

올뺌이a
조회: 45
2025-09-01 19:32:16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설산의 깊은 계곡 사이로 누군가가 걸음을 옮겼다.

 

 

예티도 추위를 느낄 혹독한 날씨. 이미 해는 진 지 오래였다. 덕분에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설령 대낮이라 하더라도 퍼붓듯 내리는 눈과 무수한 침엽수 때문에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산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사냥꾼들도 이런 날에는 그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익숙한 만큼 잘 아는 것이다. 이런 때에 설산을 돌아다니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예외는 있었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듯, 얇은 옷 하나만을 걸친 채 여행객 하나가 새까만 눈 사이로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왼쪽 다리는 완전히 부러진 듯 질질 끌고 있었다.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고, 대신 커다란 짐 하나를 메고 있었다.

 

 

으으...”

 

 

그가 메고 있던 짐이 작은 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아직 앳된 느낌이 남아 있는 청년이었고, 빈손이었지만 복장을 보아 활이나 석궁을 다루는 듯했다.

 

 

입에서 핏방울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채 떨어지기도 전에 얼어붙은 피로 청년의 입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부상당한 동료를 옮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험한 지형과 사나운 몬스터가 즐비한 곳이니만큼 다치는 일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하지만 청년에게 특별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청년이 천천히 눈을 떴다.

 

 

크윽... 여긴 어디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너무 추운 나머지 온몸이 불에 달궈진 듯한 느낌이었다.

 

 

알 수 있는 사실이라고는 누군가에게 들려 옮겨지고 있다는 것, 지금이 밤이라는 것 정도였다.

 

 

하나같이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분명 나는 사냥을 나왔었는데...’

 

 

남자의 이름은 엘론. 엘나스의 주민이었다.

 

 

엘나스에서 평생 살아왔지만 지금 주변에 보이는 풍경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산맥의 얼마나 깊은 곳까지 들어온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엘론은 정신을 잃기 전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얼마 전, 평소처럼 엘론은 사냥을 나왔었다. 사냥을 나가기에 좋지는 않았다. 지금 보면 알 수 있듯이 조만간 폭설이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말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요즘 사냥감이 잘 보이지 않아 월동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을을 나서서 주변을 수색했다. 이변은 없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허탕이었다.

 

 

언제나 혹독한 엘나스의 환경이지만, 겨울에는 더욱 그렇다. 이대로라면 겨울을 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겨우내 가족을 굶게 할 수는 없다. 엘론은 결단을 내렸다. 어떻게든 사냥을 성공시키기로.

 

 

엘론은 설원을 넘어 산맥까지 들어갔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함부로 들어올 곳이 아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동안 수색이 이어졌고, 운이 좋게도 남자는 늑대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렇게 흔적을 추적하고, 매복해서 기다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헥터 한 마리가 나타났다. 숨을 죽이고, 활을 겨누고, 쐈다.

 

 

화살은 헥터의 머리에 명중했다. 남자의 마음이 기쁨으로 차올랐다. 무리를 한 보람이 있었다. 남자는 절명한 헥터를 챙겨서 마을로 돌아가려고 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 없었다. 오히려 순조로웠다. 그런데 왜?

 

 

머리가 지끈거렸다. 몸 상태가 너무 나빴다.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희미했다.

 

 

엘론은 억지로 머리를 쥐어짰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지?

 

 

사냥을 끝낸 다음, 눈이 내리기 전에 마을로 돌아가려고 서둘렀다. 가지고 나온 짐도 많지 않았다. 눈이 얼마나 오랫동안 내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고립되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그러던 중...

 

 

맞다. 산맥을 벗어나던 중 분명 쓰러져 있던 사람을 발견했었다. 소리를 질러 그자를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누구지? 엘나스의 주민인가? 아니면 멋모르고 발을 들인 외지인?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생사 정도는 확인해야 했다. 아는 사람일 수도 있었고, 아직 물어뜯기거나 한 흔적이 없는 걸로 봐서 쓰러진 지 오래되지 않은 것 같았다. 엘론은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의아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그자의 옷은 아주 낡아 보였고, 꽤 얇았다. 훨씬 더운 곳이라면 몰라도, 이런 장소에 어울리는 복장은 아니었다. 강도라도 만난 건가?

 

 

엘론의 머릿속에서 그자가 살아있을 확률이 크게 내려갔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런저런 의문을 뒤로하고 엘론이 후드를 벗겨 얼굴을 확인하려는 순간.

 

 

기억은 그곳에서 끊겼다.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여기서 왜 갑자기 기억이 끊겼지? 쓰러져 있던 그자가 뭔가 한 건가?

 

 

정황상 그게 맞겠지만, 엘론은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이 나이에 한 명의 사냥꾼으로 인정받은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엘론은 그자에게서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 혹시 눈으로 좇을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한 자일까? 그렇게 강하다면 왜 그런 장소에서 그런 꼴로 있었지? 혹시 다른 일행이 있었던 건가?

 

 

주변을 둘러봤지만 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엘론은 자신을 옮기고 있는 자를 보았다.

 

 

얇고 허름한 넝마 같은 옷차림. 그리고 깊게 눌러쓴 후드. 분명 마지막에 봤던 쓰러져 있던 사람과 같은 옷이다.

 

 

엘론의 머릿속에 수많은 감정이 떠올랐다. 의문, 분노, 공포.

 

 

뭐 하는 놈이지? 목적은 뭐고? 애초에 이딴 곳까지 들어온 이유는?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엘론은 천천히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의미 없는 고민을 계속하기보다 상황을 개선할 방법을 고민하는 편이 낫다.

 

 

여전히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엘론은 우선 마나를 일으켜보았다.

 

 

몸이 망가진 탓인지 마나도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엘론은 깊은 무력감을 느끼며 어떻게든 마나를 다뤄보려 애썼다.

 

 

그러던 사이에도 괴한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눈이 그쳤다. 그들은 설산을 벗어나 어떤 숲에 다다랐다.

 

 

그 광경을 보자마자 엘론은 정신이 옥죄여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죽은 지 오래된 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는 숲이었다. 썩고 비틀린 나무들이 바람을 맞으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그것들은 부서지거나 쓰러지지 않았다.

 

 

영원히 안식하지 못할 저주에라도 걸린 것처럼.

 

 

엘나스에 이런 끔찍한 장소가 있었나?’

 

 

이곳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만 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런 엘론의 바람과는 다르게, 괴한은 더욱더 숲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엘론은 눈을 감았다 떠 보았다. 이 모든 것은 단순한 악몽이고, 눈을 뜨면 안락한 집과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을 볼 수 있길 바라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 괴한의 걸음이 멈췄다.

 

 

!”

 

 

괴한은 마치 물건을 대하듯 엘론을 떨어뜨렸다. 단단하게 언 땅에 부딪힌 엘론은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엘론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똑같이 후드를 눌러쓴 또 다른 괴한 세 명이 서 있었다.

 

 

젠장. 한 놈도 힘든데 세 놈이 더 있다니...’

 

 

놈들이 입고 있는 복장은 일종의 로브였다. 낡고 망가져서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것은 마법사가 입는 옷과 비슷해 보였다.

 

 

엘론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말했다.

 

 

... 놈들은 누구냐? 날 여기로 데려온 목적이 뭐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큰 원한을 산 기억도 없고, 이런 짓을 저지르는 놈들이 엘나스에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괴한들의 정체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괴한들은 엘론의 의문을 해결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고개가 높구나.”

 

 

모래처럼 메마르고 혼탁한 목소리였다. 도저히 생물이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오로지 불길함으로 가득한 목소리였다.

 

 

무슨...?”

 

 

다음 순간, 엘론은 강력한 힘이 자신을 지면으로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다. 졸지에 무릎을 처박은 엘론이 비명을 질렀다.

 

 

!”

 

목소리를 낮추어라. 위대하신 분께서 잠들어 계시니.”

 

...... 네놈들이 멋대로 데려와 놓고는...”

 

 

생긴 거나 하는 짓이나 아무리 봐도 제대로 된 놈들일 가능성은 없다. 엘론의 머릿속에 몇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흑마법사. 어쩌면 사교도의 사제일지도 모른다.

 

 

위대한 자니 뭐니, 이런 외진 곳에서 그따위 주접들을 떨 미치광이들이 제정신일 리가 없다. 자신을 납치한 이유도 필시 끔찍하기 그지없을 터다.

 

 

엘론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괴한은 엘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떨고 있구나. 두려운가?”

 

 

엘론은 머릿속에서 뭔가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엘론은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멀쩡한 사람을 이따위로 취급해 놓고는, 두렵냐고? 모자란 놈아. 그게 진짜 궁금해서 묻냐?”

 

 

엘론의 외침에 뒤에 있던 괴한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나 엘론과 대화를 나누던 자가 손짓하자 걸음을 멈추었다.

 

 

그자가 조용히 말했다.

 

 

널 데려온 목적을 물었지.”

 

그래.”

 

위대한 분을 깨우기 위한 제물로 삼기 위함이다.”

 

 

엘론은 무슨 헛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괴한의 말이 이어졌다.

 

 

위대하신 분의 혼은 범인들과 무게가 다르니, 그분의 생명을 다시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장작이 필요했다. 이를 모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 우리는 이곳에서 오랜 세월 인내하며 장작을 모아 왔다.”

 

 

괴한의 목소리에 어떠한 감정이 깃들었다. 감동? 환희? 엘론은 저것도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느꼈다.

 

 

참으로... 참으로 오랜 세월이었다. 그 오랜 시간을 보잘것없는 벌레처럼 숨어 살았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다. 이제 마지막 장작을 구했으니, 그분께서 눈을 뜨시리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옛 영광을 되찾아 주실 것이다!”

 

 

괴한에게서 느껴지는 광기에 엘론은 숨을 죽였다.

 

 

너희는 그 위대하다는 자를 모시는... 사제 같은 건가?”

 

정확하진 않지만, 비슷하다.”

 

대체... 그자가 뭐 하는 작자길래?”

 

 

괴한들은 말없이 한 발짝 옆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그들이 가리고 있던 무언가가 엘론의 시야에 들어왔다.

 

 

황량한 대지에 홀로 놓여 있는 무덤. 그것은 평범한 무덤이 아니었다. 무덤에서 느껴지는 강대하고 사악한 기운.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천천히 가라앉는 듯했다. 짙은 어둠이 피부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엘론은 경악했다.

 

 

엘론은 마법이나 위대한 존재 따위는 잘 몰랐다. 하지만, 저것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절대 저것이 깨어나서는 안 된다.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꿇어앉아 있는 엘론을 보며 사제가 말했다.

 

 

운이 나빴구나. 이것 또한 네 운명이니 받아들여라. 고통은 짧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엘론은 대답 대신 고개를 떨군 채 가만히 있었다. 작은 흐느낌 같은 것이 들려왔다.

 

 

사제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엘론에게 다가갔다.

 

 

엘론의 바로 한 걸음 앞에서 멈춰 선 사제는 손을 뻗어 엘론의 목을 틀어쥐려 했다.

 

 

서서히 움직이던 사제의 손이 마침내 엘론에게 닿기 직전, 갑자기 엘론의 몸이 사라졌다.

 

 

놀고들 있네. 내가 너희들 뜻대로 해줄 것 같냐?”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졌다. 지금이다!

 

 

엘론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리고, 정신이 든 후로 계속 운용해 왔던 마나를 모아 화살 한 대를 만들었다.

 

 

엘론은 마나 화살을 역수로 쥐고, 사제의 관자놀이에 꽂았다.

 

 

사제는 그때까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됐다!’

 

 

예상한 대로 대응이 느렸다. 사제니 뭐니 아무리 대단한 것들이라고 해도, 역시 육체 능력은 떨어졌다.

 

 

불시에 기습을 당해서 여기까지 납치당하기는 했지만, 엘론도 나름대로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방심하고 있고, 전위도 없으며, 거리까지 가까운 사제에게 일격을 먹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활이 없으니 다른 스킬은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엘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른 놈들도 마저 처리해야 한다. 엘론은 곧바로 새로운 스킬을 시전했다.

 

 

애로우 플레터!’

 

 

엘론이 손짓하자 마나로 만들어진 거대한 활이 나타났다.

 

 

파바박!

 

 

활은 스스로 움직이며 사제들을 조준하고는 빠르게 화살을 세 대 발사한 뒤 사라졌다.

 

 

원래 이렇게 금방 사라지는 스킬이 아니지만, 모자란 마나를 긁어모아 급조했더니 겨우 세 발이 한계였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어줬으면 했는데... 하는 수 없나.’

 

 

화살이 사제들의 몸통에 꽂히는 것을 확인한 엘론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뒤돌았다.

 

 

이것으로 놈들을 쓰러트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기습은 어디까지나 도망칠 기회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우선 최대한 멀어진다!’

 

 

방향은 상관없다. 어차피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니까. 우선 저놈들과 거리를 벌리는 게 우선이다. 길은 그 뒤에 별자리라도 보며 천천히 찾으면 된다.

 

 

엘론은 땅을 박차고 뛰쳐나가려 했다.

 

 

꽈악.

 

 

하지만 엘론의 시도는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우악스런 손길이 엘론을 붙잡았다.

 

 

이게 무슨!?’

 

 

이렇게 곧바로 대응한다고? 분명 화살이 박히는 걸 봤는데?

 

 

처음부터 막아냈다면 모를까. 일단 공격을 허용했다면 완전히 멀쩡할 수는 없다.

 

 

도대체 어떻게...?’

 

 

엘론을 붙잡은 것은 머리에 화살이 박힌 사제였다.

 

 

그는 화살을 뽑아내지도 않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제들도 피 한 방울 흘리거나 신음 한 번 내는 일 없이 몸에 박힌 화살을 무심히 뽑아내고 있었다. 엘론은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사제가 말했다.

 

 

제법 실력이 괜찮구나. 나이를 생각하면 놀라운 성취다. 하지만 아쉽구나. 우리에게 이런 것은 아무 소용 없다.”

 

 

엘론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엘론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말도 안돼.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사제는 대답 대신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스산한 달빛이 사제의 얼굴을 비추며 그 형태가 드러났다.

 

 

엘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썩어 문드러진 피부. 거미줄 같은 핏발이 선 왼눈은 눈꺼풀이 사라져 안구가 그대로 돌출되어 있었고, 오른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코도, 입술도 없이 콧구멍과 이빨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움푹 파인 머리의 한쪽에는 엘론이 꽂은 화살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부패한 시체였다. 말할 리도, 움직일 리도 없는 시체.

 

 

다른 사제들도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엘론은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도망치겠다는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엘론의 머릿속은 오직 공포로 가득했다.

 

 

사제가 엘론의 눈을 응시하며 나직이 말했다.

 

 

봐 버렸군.”

 

맙소사...”

 

추한 몰골이지. 그렇지 않나?”

 

 

엘론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답을 고르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엘론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갑자기 사제가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던 사제는 돌연 웃음을 멈추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이 모습을 봐라. 우리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고통받아 왔다. 순리를 거스르려 한 죗값이란 이토록 무거운 것이다.”

 

 

이제 사제는 엘론을 바라보지 않았다. 사제는 하늘을 바라보며 그곳에 있을 무언가를 향해 말했다.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잘못을 뉘우치던 때도 있었다. 수십 년이 넘도록 용서를 빌었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저주를 없애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 보았다. 그중에 효과가 있었던 것이 얼마나 있었을 것 같나? 없었다. 단 하나도 말이다. 우리더러 어떡하란 말이냐? 영원토록, 이 세상이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이렇게 고통받으라는 말인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증오가 느껴졌다. 엘론은 그 분노에 압도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응축된 분노는, 이미 어떠한 광기로 변질된 상태였다.

 

 

사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사제가 갑자기 엘론을 돌아보았다. 동시에, 엘론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했다.

 

 

네게 원한은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에게 남은 방법은 이것뿐이다. 이따위 운명을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완전한 괴물이 되기를 선택하겠다.”

 

 

엘론은 어느새 사제들에게 포위당한 상태였다. 사제가 천천히 엘론을 향해 다가왔다. 다리에 힘이 풀린 엘론은 그만 주저앉아버렸다.

 

 

엘론은 질끈 눈을 감았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엘론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의 모습이었다.

 

 

... ...”

 

그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리라.”

 

 

검게 물든 숲 속에서, 엘론이 다시 눈을 뜨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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