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셀은 눈을 떴다.
기이한 곳이었다. 온 세상이 새하얬다. 그것이 전부였다. 하얀색 외에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셀은 자신의 지식으로 이 현상을 가늠해 보려 했다. 가장 그럴듯한 가설은 화이트아웃이었다. 눈보라 때문에 화이트아웃이 발생하면 지금 보고 있는 것과 비슷한 풍경이 나타난다.
하지만 화이트아웃이라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바람이 불지 않았고,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체감이 느껴지지 않는, 텅 빈 공허와도 같은 끝없는 하얀색.
“벨?”
하셀은 목소리를 내어 보았다.
“메리엘 씨?”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덜컥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 무엇보다 두려웠다.
“으아아악!”
하셀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하셀은 미친 듯이 달렸다.
달리려 했다. 하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움직임을 멈추었다.
꼭 허공을 밟는 듯한 느낌이었다. 바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주변 풍경도 변함이 없으니 나아간다는 느낌이 없었다.
어쩌면 떨어지는 중일지도 몰랐다.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중이라고 한들 알아차릴 방법이 없다.
의미 없는 행동이라 생각하면서도, 하셀은 휘적거리듯 팔다리를 움직여 걸음을 흉내 내었다. 그것마저 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왜 이런 곳에 떨어진 걸까? 리치의 저주일까?
어떻게든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셀은 걸었다.
걸었다.
걸었다.
걸었다.
걸었다.
걸었다.
걸었다.
하염없이 걸었다. 점점 시간 감각이 희미해졌다.
이런 끔찍한 곳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앞쪽에서 흐릿한 무언가가 일렁였다.
안개 같기도 하고, 하얗게 칠한 그림자 같기도 했다.
잘못 본 걸지도 모르지만, 하셀은 그것을 그냥 지나칠 생각이 없었다. 하셀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사람의 윤곽을 닮아 있었다.
한쪽 손을 들고 있었다. 집게손가락을 펴고, 나머지 손가락은 구부린 상태였다.
그것은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셀은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하셀이 걸어온 방향의 반대 방향이었다. 물론, 그 방향에서 똑바로 걸어온 게 맞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하셀은 그것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저기요...?”
“…….”
그것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기요?”
하셀은 미칠 것만 같은 기분으로 간절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것이 말했다.
“...아가.”
“네?”
아가? 무슨 말이지?
그것이 또다시 말했다.
“돌아가.”
그 순간, 세상이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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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셀은 눈을 떴다.
식은땀으로 몸이 흥건했다. 하셀은 숨을 몰아쉬었다.
지긋지긋한 하얀색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보이는 건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방이었다.
하셀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일어나려 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꿈틀거리는 하셀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하셀. 일어났구나.”
“메리엘 씨?”
메리엘이었다. 메리엘은 안도한 듯 말했다.
“다행이야. 못 깨어날까 봐 걱정했거든.”
“제가... 요?”
“그래. 사흘 동안 의식이 없었어.”
“사흘이나요?”
“사흘이면 빨리 일어났지. 얼마나 크게 다쳤는지 알아? 살아남아서 기적이야. 벨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마저도 못 찾았을지도 몰라.”
메리엘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온몸에 성한 뼈가 없고... 출혈도 엄청났고... 그나마 경사진 곳에서 잘 구른 데다, 눈이 충격을 줄여 줘서 망정이지. 아니면 즉사했을걸? 아마 형체도 못 알아보게 곤죽이 되었겠지...”
무시무시한 이야기에 하셀은 몸을 오소소 떨었다.
“리치가 널 허공에 텔레포트 시킨 거지? 그래서 추락한 거고.”
“아... 하하. 네, 맞아요...”
하셀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엘은 하셀이 일부러 절벽에서 뛰어내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그리고, 만약 메리엘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하셀은 그건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메리엘은 눈을 반짝였다.
“리치한테 누가 화살을 쏴 줘서 진짜 큰 도움이 됐는데, 혹시 하셀 네가 떨어지는 와중에 쏜 거야?”
하셀은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보통 일이 아니잖아!”
메리엘은 벌떡 일어나서 하셀이 신궁이 될 거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셀은 겸연쩍게 웃었다. 하셀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메리엘 씨, 리치는 어떻게 됐어요?”
“아, 리치 말이지.”
메리엘은 다시 자리에 앉고는, 하셀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리치는 죽었어. 더 이상 리치에 의한 피해자가 생길 일은 없을 거야. 리치가 앗아갔던 생명력의 주인들도 모두 성불했고.”
“그건... 다행이네요.”
하셀은 진심으로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다지 기쁘지는 않았다.
사라진 것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
리치가 죽자 그 차가운 현실이 너무나 실감 되었다.
‘그러고 보니, 생명력의 주인들이 다 성불했다면.’
형도 성불했을까?
어쩌면, 하얀 세상에서 보았던 형체는 떠나기 전에 형이 잠깐 찾아온 걸지도 모른다.
‘마지막까지 날 돌봐줬구나.’
하셀은 고개를 떨구었다.
메리엘은 하셀을 살짝 안아주었다. 하셀은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메리엘 씨. 이제 저는 혼자예요. 옆에 아무도 없는 게 너무 무서워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메리엘은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며,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힘들겠지. 하셀,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엘론 씨는 네가 주저앉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
메리엘은 말을 이었다.
“엘론 씨는 네가 행복하길 바랐어. 그걸 잊지 말았으면 해. 살아가다 보면 네 곁에 있을 사람을 또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하셀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메리엘은 기다려주었다,
“당분간은 엘나스에 있을 거니까, 괜찮다면 나도 네 옆에 있어 줄게.”
한참 시간이 흐른 뒤, 하셀이 말했다.
“저... 이제 괜찮아요.”
메리엘은 하셀에게서 떨어졌다. 하셀은 어색한 듯 뺨을 긁적였다.
“고마워요.”
“아니야, 뭘.”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메리엘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그러고 보니 이것도 말해줘야지.”
메리엘은 가방을 뒤적여서 반짝이는 물건을 꺼냈다.
단풍잎 문양이 새겨진 훈장. 하셀은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베테랑 모험가의 훈장! 메리엘 씨, 시험에 통과하셨군요!”
베테랑 모험가의 훈장. 모험가가 3차 전직 시험에 통과하면 받는 훈장이었다.
“그래, 이제 나도 어엿한 프리스트야. 대단하지?”
“정말 축하드려요!”
“에헴.”
메리엘은 자랑스러운 듯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더 많은 걸 보고, 더 많은 걸 경험하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겠지. 벌써 기대되네.”
하셀은 동경 어린 시선으로 메리엘을 바라보았다.
“왠지, 메리엘 씨는 높은 경지에 닿으실 것 같아요.”
“그런가? 내가 보기엔 하셀 너도 그래.”
메리엘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일어났다.
“그럼 난 가볼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말고 푹 쉬어.”
“네. 메리엘 씨. 안녕히 가세요.”
메리엘은 하셀을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또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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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디찬 벌판의 한구석. 돌아다니는 몬스터들 사이에 한 작은 무덤이 있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지만, 방치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메리엘은 비석에 쌓인 눈을 조심스레 털어내었다. 그리고 비석에 적힌 이름을 읽어보았다.
“엘미나.”
이 작은 무덤은, 알케스터에게 들은 엘미나의 무덤이었다.
알케스터는 엘미나가 마을에서 쫓겨나 숲으로 떠났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엘미나를 찾아보았지만 결국 실패했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녀가 죽었다고 여겼다.
알케스터는 엘미나의 무덤을 만들어주고자 했다. 엘미나의 시신이 없었기에, 그녀가 남긴 유품 몇 개를 묻은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이후 설산의 마녀라는 몬스터가 나타났고, 알케스터는 그 몬스터에게서 엘미나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알케스터는 엘미나가 원한 때문에 몬스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뒤에도 무덤을 없애지는 않아, 엘미나의 무덤이 이렇게 남게 되었다.
엘미나는 무덤 옆을 살짝 파내었다.
적당한 구덩이가 생기자, 메리엘은 얼음 눈물을 꺼내었다.
리치의 심장에 걸린 마법을 파괴한 뒤에도 얼음 눈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본래 위험할 정도로 차가웠던 얼음 눈물은, 이제 평범한 얼음이나 다름없는 수준의 온도로 변해 있었다.
메리엘은 얼음 눈물을 구덩이에 놓은 뒤 흙을 덮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무덤을 본 메리엘은, 문득 무덤이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이라도 하나 놔두면 좋겠다는 생각에, 메리엘은 가방을 뒤졌다.
다행히 연금술로 포션을 만들 때 쓰는 꽃이 몇 개 남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메리엘의 눈길을 끌었다.
레몬밤 꽃이었다. 과거에 한 친구에게 레몬밤의 꽃말을 들은 적 있었다.
“뭐였더라...”
한참을 고민하던 메리엘은, 마침내 꽃말을 떠올려 내고는 손뼉을 쳤다.
위로.
분명 그런 꽃말이었다.
적절하다고 생각한 메리엘은 비석 앞에 레몬밤 꽃 몇 송이를 두었다.
메리엘은 손을 모으고, 짧게 기도를 올렸다.
“이제는 편히 쉬기를.”
리치는 죽었지만, 설산의 마녀가 완전히 사라진 건지, 아니면 또 나타나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메리엘은 진심으로 그녀가 안식할 수 있기를 바랐다.
기도가 끝나고, 메리엘은 몸을 돌렸다.
어느덧 저녁이었다. 배가 고파 오기 시작한 메리엘은 걸음을 서둘렀다.
메리엘의 등 뒤로, 얼음이 노을빛에 따스하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