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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중세 기독교의 역사 4편 (스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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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7559
추천: 4
2015-08-17 02:40:38
상편 

중편 

하편


16. 예루살렘 왕국의 몰락과 3차 십자군의 발호



▲ 하틴 전투 이후에 살라딘에게 생포된 기 드 뤼지냥. 의자에 앉은 인물중 오른쪽입니다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군대가 분쇄되고, 예루살렘이 발리앙-살라딘 간의 협정으로 살라딘에게 넘어가자 예루살렘 왕국은 사실상 멸망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왕국의 제2, 3의 도시 아스칼론과 아크레가 살라딘에게 항복했으며, 십자군과 함께 중동으로 이주했던 기독교인들은 안티오크와 티레, 트리폴리로 도망가게 됩니다. 예루살렘 왕국에서 쫓겨나게 된 셈이죠.

일부 기독교인들은 무슬림들에 의해 도시가 점령될 때에도 남아있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훗날 이슬람과 카톨릭 세력을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 우르바누스 8세의 초상화

어쨌건 예루살렘 왕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은 유럽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줍니다. 아랍인들을 몰아내고 성지를 수복했다는 자부심도 잠시뿐, 결국 침략자들이 다시 패퇴해 돌아가게 된 것이죠.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 3세는 이 비보를 듣고 충격으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고, 이어서 그레고리우스 8세가 즉위하게 됩니다. 우르바누스 8세는 전 유럽에 7년간의 휴전령을 내리고, 빼앗긴 성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 무슬림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한 명분으로 - 십자군 원정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1187년의 일이며, 이를 3차 십자군이라고 합니다.

사실 당시 유럽엔 교황에 휴전령을 내려서 멈출만큼의 큰 전쟁은 없었고, 휴전령은 카톨릭 세력을 통합하기 위한 상징적인 장치였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어쨌건 수많은 카톨릭 군주들이 너나 할것 없이 일부는 종교적 이유로, 일부는 경제적 이유로, 일부는 예루살렘 왕위라는 명예를 이유로 참가하게 됩니다. 로렌의 공작 고드프루아를 중심으로 한 1차 십자군 원정이나 프랑스 위주의 2차 십자군 원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모이게 되는데, 특기할만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국의 왕 "사자심" 리처드 1세



프랑스의 왕 "미남" 필리프 2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붉은 수염" 프레드리히

그러니까 이전에 왕위가 없어 새로 왕이 되고 싶어 출발한 1차 십자군이나, 프랑스 + 신성 로마 제국 조금인 2차 십자군과는 달리 3차 십자군은 당대 유럽의 최강자들이 모두 참여한 역대 최대의 십자군으로 "왕들의 십자군"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군주들 개인으로만 봐도 유능한 군주이자 전략가였기에 교회는 이들의 참여를 축복하며 각국에 사면령을 내렸고, 이렇게 제 3차 십자군은 순탄하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17. 3차 십자군 원정의 전반부


▲ 제 3차 십자군의 원정로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하듯이, 너무나 순탄하게만 보였던 원정은 프레드리히 황제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 십자군이 육로를 통해 동로마 제국의 영토에 들어서면서 삐걱대기 시작합니다. 1,2차 십자군은 이슬람을 견제하려던 동로마 제국의 큰 환대를 받았지만 2차 십자군이 예루살렘 왕국을 이슬람 국가들로부터 고립시키고, 결국 예루살렘 왕국이 멸망하는 모습을 본 동로마 제국의 황제 이사키우스는 십자군을 고의적으로 홀대하며 진군을 방해했습니다.

이러한 고의적인 사보타주에 프레드리히는 당장 이슬람교들을 치게 길을 열고 성지로 향할 배를 내달라고 요구했으나, 이사키우스는 로마 제국을 참칭하는 자는 돕지 않을 것이라며 근 400년이 다되가는 케케묵은 핑계를 대며 거절합니다. 이에 격분한 프레드리히는 동로마 제국의 대도시중 하나였던 아드레노폴리스를 점령, 십자군의 강대한 무력을 과시하고, 이런 초 강경수에 당황한 이사키우스는 십자군에게 식량과 배를 제공하게 됩니다. 이 함대를 통해 아나톨리아에 안전하게 상륙, 살레프 강변의 도시 이코니움을 점령해 거점으로 삼은 십자군에게는 이제 영광만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 살레프 강을 도하하는 프레드리히 황제

운명의 장난인지 문제는 살레프 강을 도하하다가 발생했는데, 그날은 유난히 강의 물결이 거세 봉신들은 도하를 미루자는 제안을 했지만 프레드리히는 이들의 성지 탈환에 대한 의지에 대한 일갈 이후 즉시 도하를 시작할것을 명령하며 선두에 서게 됩니다. 하지만 살레프 강의 거센 물살에 말이 쓰러지면서 프레드리히는 물에 빠지게 되고, 중갑주를 입은 그는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후에 군인들이 잠수해 그를 물 위로 끌어올렸을 때 그는 이미 반쯤 익사한 상태였으며,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수일 후 죽음을 맞게 됩니다.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 내에서는 이 초유의 사태를 두고 대 혼란이 발생합니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종신 임기의 선거제였는데, 갑자기 십자군 원정 중에 황제가 사망함으로써 체계의 정점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대로라면 십자군에 직접 참가한 제후들끼리도 황제위를 놓고 싸울것이고, 본토의 제후들끼리만 새 황제를 뽑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한 지휘관들은 귀환을 선택합니다. 이렇게 가장 세력이 강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십자군은 잔류를 택한 일부를 제외하면 어이없게도 가장 먼저 귀환하게 됩니다. 이 잔류인원들은 예루살렘에 성모 마리아 교회를 세우게 되는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든 군사조직 "성모 마리아 교회의 독일 형제단"이 이듬해 교황 클레멘스 3세의 교지를 받아 정식 카톨릭 군사조직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이들은 튜튼기사단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이 소식을 접한 영국과 프랑스군은 황당해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었으므로 해로를 통해 시리아에 도착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예루살렘의 왕으로 누구를 인정하느냐에 대해 의견이 갈리게 됩니다. 필립 2세는 당시에 중동에서 가장 세력이 강했던 기독교 국가인 티레의 영주 코라도를 지지했으나 리처드 1세는 기존의 예루살렘 왕 기 드 뤼지냥을 지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두 진영 사이에 신경전이 펼쳐지게 되는데, 리처드 1세는 프랑스 내부의 소유 영지에서는 프랑스 왕의 봉신이었으나 전반적으로 영국을 포함한 세력은 더 컸기에 결국 리처드 1세가 십자군의 주도권을 가지게 됩니다. 이에 크게 상심한 필리프 2세는 다음 목표인 아크레를 점령한 이후에는 돌아가겠다고 선언하게 되고, 이에 대다수의 봉신들과 사제들이 크게 반발하나 고집을 부려 프랑스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굽히지 않습니다.


▲ 아크레 공성전의 기록화

이어 십자군은 항구도시 아크레를 공격하는데, 이는 바다를 통한 보급에 크게 의존하던 십자군의 특성상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살라딘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하나 리처드 1세의 뛰어난 용병술로 20일만에 아크레가 함락당하면서 십자군은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게 됩니다. 이후 아크레는 1291년에 함락당할때까지 기독교인들의 거점으로 남게 됩니다.

18. 3차 십자군 원정의 후반부


▲ 아루스프 전투에서 승리하는 리처드 1세

아크레를 점령한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으로의 진격을 시작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살라딘 또한 군대를 움직이게 됩니다. 살라딘은 최대한 정면 충돌을 피하고 유리한 상황에서의 소규모 접전만을 계속해 피해를 누적시켜 십자군의 공세종말점을 앞당기려 시도했으나 영국군의 높은 숙련도와 엄격한 규율로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봉신들이 직접적인 공격을 요구, 살라딘이 수락함으로써 아루스프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아루스프 전투는 십자군의 다른 전투에 비해서는 기록이 적게 남아있는데, 카톨릭측의 기록은 시간이 지나면서 소실되었고, 이슬람측은 이 전투에서의 패배를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기 떄문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슬람군의 맘루크들이 십자군의 중앙을 돌파하는데 성공했으나 기병 전력에서 우위에 있던 리처드 1세의 과감한 기동으로 성당 기사단과 영국군 근위대가 이슬람군의 양쪽 측면을 찌르며 중앙을 돌파한 적에 상대로 포위를 성공해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틴 전투에서 쉽게 승리해 자만하던 이슬람군에게 경각심을 불어넣었고, 이후 살라딘은 대규모 회전을 최대한 피하고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모든 변수를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가 진행될 수 있게 하기 위한 전술을 펴는 지략가적 면모를 보이게 됩니다. 


▲ 무슬림 포로들을 처형하는 리차드 1세

이후 이슬람교도들의 도시 야파가 점령되고, 리처드 1세는 이 도시에 살던 무슬림 군인들과 귀족들의 몸값으로 20만 디나르와 성 십자가의 반환, 그리고 카톨릭 포로들의 송환을 요구합니다. 살라딘은 이 조건에 동의해 카톨릭 포로들을 송환했으나, 기한 내에 20만 디나르와 성 십자가를 반환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댓가로 리처드 1세는 무슬림 포로들을 살라딘군의 눈에 보이는 곳에서 집단으로 처형하게 됩니다.

이후 살라딘은 후방으로부터의 지원군을 받으나 아직 십자군과 정면충돌은 악수라고 판단해 주둔하던 아스칼론의 성벽을 스스로 파괴하고 예루살렘으로 퇴각하며, 일부 부대들을 잔류시켜 지연전을 수행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살라딘의 결정으로 리처드 1세는 아스칼론에 무혈입성하는 것에 성공하나, 문제는 이 다음이었습니다. 해안으로부터의 보급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아스칼론의 존재가 필수적인데, 성벽 없이 십자군이 출병했다가 우회한 이슬람군에게 도시가 점령당한다면 십자군 전체의 보급이 끊길 수 있기 때문이죠. 이에 리처드 1세는 아스칼론의 성벽이 복구될 때 까지 주둔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대부분의 봉신들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할것을 강력하게 요구함으로써 다시 출병하게 됩니다.


▲ 리처드 1세를 방문한 살라딘. 영웅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걸까요.

이 결과로 십자군은 아스칼론의 성벽을 복원하는 것에 걸리는 시간을 아꼈지만, 이슬람군의 우회를 막기 위해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의 모든 이슬람 요새들을 점령하는 것에 시간을 써야만 했습니다. 어쨌건 살라딘은 원하던대로 시간을 벌 수 있었죠.

결국 십자군은 예루살렘 근교까지 진군하는 것에 성공했고, 잇다른 승리로 십자군의 사기는 매우 높았습니다. 이에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에 대한 공성을 시작해야한다고 봤으나 구호기사단의 기사들이 내륙 도시 예루살렘은 리처드 1세가 귀국하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다며 군사적 우위가 있을 때 협상으로 이득을 봐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이 의견을 받아들인 받아들인 리처드 1세는 협상을 준비하기 위해 잠시 아스칼론으로 돌아가나, 이번에는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고 돌아온 것에 대해 병사들이 반발하게 됩니다. 결국 리처드 1세는 다시 출병하긴 하나, 예루살렘의 방어는 이전보다 더 견고해져 있었고, 살라딘은 후방으로부터 계속 지원군을 받고 있었습니다.

리처드 1세는 적의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이집트를 침공해야한다는 전략을 내놓았지만, 현실적으로 십자군에게는 이집트까지 원정을 할 방법도, 주변이 무슬림 천지인 살라딘의 홈그라운드에서 가지는 이점도 전혀 없었기에 결국 시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양쪽이 서로를 먼저 공격하는 것을 꺼리자 리처드의 사자가 살라딘의 진영을 찾아 팔레스타인 해안가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지배를 인정해 주는 대신 십자군을 물릴 것을 제안합니다. 살라딘은 십자군이 어디까지나 본국에서 한참 먼 곳에 원정 나온 군대임을 감안, 장기전의 불리함을 이용해 아스칼론의 반환까지 요구하는 제안을 합니다.

훗날에 기독교도들이 예루살렘을 다시 치겠다면 아스칼론은 없어서는 안될 거점이니만큼 리처드는 살라딘의 제안을 거절했으나, 한참 전에 귀환한 필리프 2세가 자신의 삼촌과 결탁해 프랑스 내 자신의 영지들에 대한 소유권을 날조한다는 소식을 듣고 살라딘의 제안을 수락한뒤 부랴부랴 귀국을 준비하게 됩니다. 결국 제 3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점령에는 실패했으나 팔레스타인 해안가에 대한 지배권과 불가침을 인정받고 기독교인들의 자유로운 예루살렘 순례를 보장받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19. 이후의 십자군 원정들과 십자군의 끝

제 3차 십자군 원정이 유럽의 초강대국 모두가 참여했던 것임에도 실패했으니, 이후의 십자군 원정들의 결과 또한 자명한 것이었습니다. 이후의 십자군들은 단 한번도 예루살렘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으며, 대부분은 처음의 수 차례의 전투에서 지휘관이나 왕이 포로로 잡혀 단기간에 종료되었습니다.


▲ 엔리코 단돌로의 초상화. 자세히 보시면 양쪽 눈의 초점이 안맞습니다.

심지어 제 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의 장님 도제 "엔리코 단돌로"의 사주로 성지 예루살렘이 아니라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는 희대의 배신을 저지르게 되고, 이 십자군에 참여했던 이들은 모두 파면당하게 됩니다. 이 공격은 동로마 제국을 일시적으로 멸망시키고 카톨릭 계열의 라틴 제국이 콘스탄티노플 근방에 세워지게 되는 결과를 낳는데요, 기존의 동로마 제국이라는 강력한 십자군 스폰서를 잃은 5차 십자군부터는 애초에 중동에 도달하는 것부터 힘들었다는 점을 봤을때 역사에 남을 팀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에 이때 팔레스타인 해안의 기독교 도시들은 상당히 번영했는데, 살라딘 사후에 이슬람 세력들이 서로 살라딘을 계승하려고 싸운것도 하나의 요인입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 도시의 기독교 상인들은 오랜 세월 싸우기도 하고 공존하기도 하면서 이슬람 문화에 익숙해졌기에 유럽과 중동을 연결하는 무역소로써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누구 하나가 독점하지 못하게 이슬람 세력끼리 서로를 견제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죠.

하지만 결국 맘루크(노예병)의 지지를 받은 아이유브 왕조가 복권, 시리아-팔레스타인 주변의 이슬람 세력을 통합하고 기독교 도시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게 됩니다. 1249년 마지막 기독교 도시 아크레가 맘루크에게 점령당하면서 약 200년에 걸친 십자군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렇게 십자군의 이야기가 끝나고, 시대는 이미 중세의 후기로 접어들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카톨릭에 대해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P.S. 분량 관리에 실패해서 상, 중, 하, 완으로 못끝내는게 아쉽네요 ㅠㅠ

Lv70 Sham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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