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에서 문화인류학적 관점으로 오크의 호전성을 설명하셨던 글이 있어서 추가로 좀 적어봅니다.
인류학자 허버트 배리(Herbert Barry), 어빈 차일드(Irvin Child), 마가렛 베이컨(Margaret Bacon)은 1959년, 수렵채집사회와 농경민사회, 목축민사회 사회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104개의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 사회를 대상으로 아이를 기르는 방식과 생존 경제구조간의 관계에 기초한 가설을 시험하는 과정에서, 부모가 그들의 특수한 경제적 조건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몇몇 인성 자질을 특별히 강조하게 된다는 가설이었죠. 그래서 수렵채집 사회같은 식량 축적이 낮은 사회는 개인주의적, 확신적 및 모험적 인성특질을, 농경민 사회나 목축민 사회같은 식량축적이 높은 사회는 성실하고 순종적이며 보수적인 인성특질을 연결시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수렵 채집 사회는 끊임없이 자연과 투쟁해야 식량 공급이 원활히 이루어지기에 이러한 투쟁에 솔선할 수 있는 인물, 즉 독립적이고 대담한 인성의 소유자를 필요로 한다는 거죠. 반면에 농경 사회나 목축 사회는 식량 공급은 연중 보호되어야 하고 점점 개발되는 것이기에 집단의 지속적인 복지를 보장할 수 있는 순종적이고 책임감 있는 성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설에 따르면 오크가 굉장히 호전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얼핏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워크래프트 세계 내에서 오크만 그 기원이 수렵채집 사회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당장 듀로타 옆동네에 있는 대표 순둥이들, 선량함이라면 판다렌이나 투스카르를 제외하고는 명함도 못 내미는 타우렌 사회에서 '사냥'을 '주술'과 더불어 가장 고귀한 행동으로 여긴다는 것을 보시면 아실 겁니다.
<현 타우렌 수장, 바인 블러드후프>
사실 타우렌도 야운골 시절에는 매우 호전적인 종족이었습니다. 판다리아에 있는 야운골들을 보면 불의 주술을 다루며-물론 이쪽의 기원은 주술이 아니라 '석유'입니다만, 인과관계가 석유 쪽이 먼저입니다-플레이어가 보이는 족족 선빵을 날리는 걸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모구와 트롤에게 시달린 야운골 종족의 문화체계가 이렇게 호전적으로 변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겁니다.
<판다리아의 야운골>
그러면 타우렌은 언제부터 이렇게 대지모신을 믿으며 자연과의 조화를 누리고 살았을까요? 순종적인 성격은 사실 그들이 숭상하는 사냥과 그렇게 크게 부합하는 인성특질이 아닌데요.
<폴른에게 축복을 내리는 세나리우스 - 높은산 퀘스트 '홀른의 전쟁 - 스톰레이지' 中>
답은 세나리우스입니다. 사실 야운골도 처음에는 세나리우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살던 평화로운 종족이었으나, 트롤과의 생존 경쟁에서 밀려 남쪽으로 내려간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트롤을 피해 내려갔더니 마침 맞닥트린건 필멸자 최강 떤더킹의 모구. 판다렌의 봉기 이후 겨우 모구제국의 압제에서 해방되긴 하지만, 이때는 예전 세나리우스에게 받았던 가르침과 종족의 전통을 전부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조화를 중시하는 판다렌과 공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결국 야운골은 아제로스 전역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판다리아에 그대로 남은 야운골은 사마귀들과의 싸움을 지속하다가 결국 지금과 같은 호전성을 유지하게 되었고, 영원의 샘 근처로 돌아온 야운골들은 다시 세나리우스와 만나 그들의 옛 전통을 되살려 지금의 타우렌이 됩니다. 노스렌드로 이주한 야운골들 역시 네루비안들은 물론이고 혹독한 자연환경과도 싸워야 했는데, 이들은 돌의 전당의 의지의 용광로의 영향을 받아 지금의 타운카로 변하게 됩니다. 다만 타운카는 야운골보다는 상황이 좋았는데, 제 1차 전쟁보다 4500년 앞서 다시 세나리온 의회와 접촉합니다. 원인은 노스렌드의 세계수 안드랏실의 타락으로 드라이어드들이 미쳐돌아가서 타운카와 충돌했던 것으로, 세나리온 의회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스렌드로 파견되었다가 타운카들과 만나게 됩니다. 아마 이때 이후로 타운카가 다시 정령과의 교감을 되살린 것으로 봅니다. 가장 최근에 등장한 높은산 부족은 어떤가요? 그들이 갖고 있는 뿔은 누구의 축복 때문에 생긴 거죠?
그렇다면 오크는 어떻습니까? 사실 오크들도 드레노어에서 드레나이와 오천 여년을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았습니다. 이때도 딱히 농경사회였다는 묘사는 없었어요. 그럼에도 생존을 목적으로 한 호전성 이외의 흉폭함은 딱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나그란드를 굽어보는 오크 - 나그란드 컨셉 아트 by Peter Lee>
그리고 킬제덴이 왔습니다.
<굴단과 접촉하는 킬제덴>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오크의 흉폭함은 거의 이때부터 시작된 겁니다. 킬제덴은 굴단을 시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오크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뭉치게 만들고, 그들을 통솔할 한 명의 존재를 내세웠습니다. 집단의 이름은 호드(Horde), 그리고 그들을 대표하는 이는 대족장(War-chief)이었습니다. 오크의 피로 얼룩진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되었죠.
<굴단 이후 오키시 호드의 잔혹성과 이전 오크의 명예로움이 공존하는 모순된 인물, 그롬마쉬 헬스크림>
물론 수렵 사회였던 만큼 어느 정도의 호전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실제로 만노로스의 피를 마시기 이전에 자신들의 의지로 드레나이들을 학살했다고 소설 호드의 탄생에서도 나오고, 바로크 사울팽 역시 이를 소설 전쟁범죄에서 고백하니까요. 하지만 만약에 이들의 이러한 호전성이 극복 불가능한 것이었다면 애초에 드레나이와의 반만년 넘는 공존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사실 진정한 오크의 모습은 킬제덴의 통치를 거부한 서리늑대 부족에게서 찾으시면 될겁니다.
드레노어의 전쟁군주에서 듀로탄으로 대표되는 드레노어의 서리늑대 부족은 홀로 강철 호드에 참가하는 것에 반대, 유저들의 편에 서서 드레노어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 애쓰죠. 아제로스의 서리늑대 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리늑대의 지도자였던 듀로탄은 홀로 만노로스의 피를 마시는 것을 거부했다가 암살당하고, 굴단에게서 살아남은 나머지 부족민들을 드렉타르가 이끌고 알터랙 부근으로 피신가게 됩니다.
대격변 이후 시점, 언덕마루 구릉지에서 만날 수 있는 드렉타르는 본인들의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의미에서, 또 포세이큰의 잔악무도함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호드에의 협력을 거부하죠. 또한 전쟁범죄에서 바로크 사울팽이 자신들의 죄악을 고백하는 장면을 통해 유추해보면, 이후 오크 사회에서 주도권을 차지할 이들은 아이트리그나 바로크를 비롯한 늙은 오크들, 그러니까 온건주의자들일 것입니다.
* 아참, 강철호드는 가로쉬의 손에 변화된 오크들이니까 논외입니다. 애초에 오크 사회에 '호드'란 공동체는 없었습니다.
<언덕마루 구릉지의 퀘스트 '명예 문제' 中>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현재 얼라이언스 측 종족의 문화인류학적 분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만, 최소한 호드 내에서 가장 호전적인 종족이라고 불리는 오크의 호전성은 어느 정도 킬제덴에 의해 극대화되어 '흉폭함' 수준까지 이르렀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로쉬의 폭거는 오크들이 킬제덴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당장 인게임 내에서도 판다리아 이후의 어그로 담당이 최근에는 포세이큰으로 넘어가 있는 걸 보면 확인할 수 있죠.
일단 워크래프트의 사회는 온갖 외계인이 등장하고, 세계의 창조자 및 타 문명의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는 세계라 자연적인 문화 형성이 불가능한 환경입니다. 그나마 자연스러운 애들은 트롤 정도일텐데, 얘들도 로아들과 교감을 이루어서 이것저것 배웠을테니 사실 엇비슷합니다.
* 수정 - 호전성이 딱히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부분은 '생존을 목적으로 한 호전성 이상의 흉폭함을 보여준 적은 크게 없었다'라고 수정하겠습니다. 또한 글 내부에서 '호전성'과 '흉폭함'이라는, 의미는 비슷하지만 뉘앙스는 전혀 다른 두 단어가 혼용되었는데 이를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