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들려오는 아련한 북소리에 그는 눈을 떴다. 푹신한 모포와 깃털로 가득 찬 침대에 누워있지만 가끔 나그란드의 초원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디선가 달려온 외로움이 그의 머리맡에 앉아있다. 그리운 북소리는 언제나 그를 잠에서 깨우고, 정작 그가 눈을 뜨면 닿을 수 없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발 밑에 내려놓은 도끼날에 손을 살짝 베고서야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작은 상처는 쉽게 아물었지만 큰 그리움은 쉽게 갈 생각이 없었다.
"아직 밤입니다. 이 밤에 어딜 가십니까."
처소를 나가는 그의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에서는 투구로도 미처 가리지 못한 긴장감이 새어나왔다. 눈을 내리깔지 않는 것을 보니 겁 먹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귀찮으면서도 대견한 기분을 느꼈다. 훌륭한 코르크론이 아닌가.
"불침번은 처음인가."
"어제 부로 순번이 바뀌고 오늘부터 새로 불침번을 서게 되었습니다."
"모른 척 해."
그는 격려를 담아 신병의 어깨를 꽉 쥐어준 후 자신의 처소를 나섰다. 밤의 치마가 걷어올려지지 않은 오그리마는 고요했다. 새벽이면 으레 들려오던 늙은 오크의 기침소리와 술에 취한 이들의 웩웩 거리는 헛구역질 소리가 들리지 않은지도 꽤 오래 되었다. 미친 용을 추앙하며 어스름한 골목에서 사람들을 끌어모으던 종말론자들은 이미 목이 잘린지 오래였다.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진행한다고 했지만 날 선 긴장감마저 감출수는 없는 걸까. 그런트들의 무기가 반짝거릴수록 주점들은 하나 둘씩 밤에 불을 꺼버렸고 대장간의 화로만이 밤늦게까지 불씨를 살렸다. 누구도 입밖에 꺼내지 않았지만 전쟁에 민감한 피가 그들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칼을 들어야 할 때가 다가온다'
골목길 어귀에 접어드니 이제는 달빛마저 희미해졌다. 간간히 보이는 횃불만이 시야를 밝혔다. 차원의 문을 넘어온지 오래되었다고 해도 그는 아직 오그리마가 익숙치 않았다. 잘 정비되어있는 이 길들이 낯설었고 밤에도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고블린들이 낯설었다. 자유로운 바람들을 모두 가두려는듯 높게 솟아있는 절벽들이 거추장스러웠다. 귀를 기울여봐도 들리는 건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뿐인 도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아는 세상은 넓어졌지만 중심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제멋대로 뻗어있는 풀들이 무릎을 스치는 인사가 그리웠다. 그리움은 언제 어디서나 그를 갑자기 나그란드의 초원 한복판에 덩그라니 던져놓았다. 바람이 초원을 간지럽힐 때 풀들이 몸서리치는 소리를 듣고 싶은 밤이었다.
그리움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나그란드에서의 삶은 괴로움이 더 많았다. 철이 들기 시작할 때 부터 호의보다는 적의를 먼저 느낄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에게 거리를 두던 친구들. 모두가 같이 사냥을 나갈 때에 홀로 손도끼를 만들었고 그들이 불 앞에 모여 앉아 사냥감을 구울 때, 홀로 커다란 나그란드의 품에 안겨 몰래 울었다. 그나마 가장 친했던 친구가 무리들 몰래 다가와 넌지시 말해주었던 불편한 진실이 떠올랐다. 그 진실을 관통하는 한 사람의 흔적이 어느새 눈앞에 있다.
"아버지."
갑갑하게 시야를 방해하던 후드를 벗어버렸다. 오그리마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달빛이 잦아드는 이 곳에 커다란 갑옷이 있다. 갑옷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깊게 파여있는 도끼자국과 함께. 누군가는 이 앞에서 부족들을 파멸로 이끌었던 멍청이를 떠올렸고, 누군가는 피의 저주에서 부족을 구원한 구원자를 떠올렸다. 수치와 영광. 그 모든 것을 마무리지어버린 도끼자국 앞에서 그가 떠올리는 것은 고작 '아버지'.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죽인 악마의 갑옷이 아버지 '그롬'을 추억하는, 몇 안되는 연결고리였다.
한여름인데도 만져지는 갑옷의 감촉이 차가웠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음에도 세월을 넘어서는 혼은 아직도 날이 서있는건지, '피의 울음소리'를 만졌던 손 끝의 상처가 다시 터져나갔다. 이 도끼를 내려찍으면서 느낀 아버지의 심정은 무엇이었을까. 후회? 자책감? 아니면 사명감? 스랄이 해주었던 말이 기억났다. 아버지는 밤이 되면 항상 앉아서 잠을 청했고 모닥불의 불꽃이 춤을 출 때 입버릇처럼 되내었다고 했다.
'나그란드가 그립다.'
가로쉬는 다시 후드를 거칠게 뒤집어썼다. 오크에게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갑옷은 그에겐 수치나 다름없었다. 이 갑옷을 볼수록 열등감만이 솟아날 뿐이었다. 대족장이 되지 않았다면 도끼자국은 그에게 자랑이었을테지만, 대족장인 그에게 갑옷은 약점이었다. 그의 자리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이들은 많았고 이 갑옷은 그런 이들의 안줏거리였다. 무슨 짓을 해도 그는 벗어날 수 없었다. 오크의 파멸에 첫 걸음을 내딛은 '그롬'의 아들이라는 낙인에서.
열등감이 그를 덮쳐올 때마다 의문이 그의 머리속을 떠돌았다. 왜 스랄은 나를 선택했나. 나에겐 바란 건 무엇인가. 스랄이 해왔던 것처럼 평화를 바란거라면.
"난 그대가 아니다, 스랄."
가로쉬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가 평화를 바란 것이라면 자신에게 이 자리를 물려주었을리 없지. 아버지 '그롬'과 오랜시간을 함께 해온 스랄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사냥감에게 자비란 없고, 가로막는 것은 잘 벼린 도끼날로 찍어버리는 헬스크림의 방식을.
이견이 있다해도 아버지는 결국 시간이 흘러 영웅이 되었다. 처음의 선택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끝이 모든 것을 덮어주었다. 가로쉬는 스스로가 기로에 서있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아버지가 피의 잔을 들던 그 때처럼. 하지만 이 선택은 크게 중요하지 않으리라. 끝에는 오크만이 남을 것이고 오크의 대족장인 그의 앞에는 영광만이 남을게 분명했다.
"여기 계셨습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방해했다. 나즈그림이었다.
"굳이 찾아올 필요가 있었나. 아무나 보내도 됐을텐데."
"검은창부족의 족장이 뵙길 원합니다."
"볼진?"
가로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게으른 해는 아직도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분명했다. 며칠 전 전령을 통해 보냈던 서신에 대한 답변일테지. 달마저 아직 반 편인 이 밤에 찾아온 볼진의 의도가 느껴졌다.
'거절'
말 하나, 행동 하나에도 의미를 담는 트롤들의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어디에 있지? 이 곳으로 오고 있나?"
"처소에서 독대를 원하고 있습니다."
갑옷을 한번 더 흘겨본 뒤 가로쉬는 걸음을 돌렸다. 왔던 길을 되짚어 가지는 않았다. 답답한 마음은 그를 좀 더 넓은 길로 이끌었다. 지혜의 골짜기를 거쳐 처소로 가는 길에는 밤인데도 불구하고 모닥불에 모여 의식을 치루는 드루이드들의 모습이 보였다. 타우렌과 트롤. 스랄은 저들을 피를 나눈 형제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러나 모를 일이었다. 저들이 진정한 오크의 동맹일까.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케른과의 막고라가 치뤄지던 날 자신에게 쏟아지던 경악과 원망. 그리고 불신의 눈빛들. 어느 것 하나 동맹에게 보내서는 안 되는 감정들이었다.
"나즈그림."
"네, 대족장님."
"이번 출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나?"
초라함. 그것은 분명히 초라함 혹은 나약함이었다. 나즈그림은 잠시 걸음을 멈춰세우고 눈동자에 담기는 가로쉬의 뒷모습을 살펴보았다. 거대한 등이 어쩐지 작아보였다. 그가 바라는 대답은 어떤 것일까. 둘 중 어느 대답이 그를 붙잡아 줄 수 있을지 잠시 고민하던 나즈그림은 고개를 저었다. 판단은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그저 따를 뿐입니다."
"늘 재미없는 대답이야."
볼진이 기다리는 걸 알면서도 가로쉬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 느려졌다.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를 만나러가는 발걸음이 빠를 수는 없었다. 가로쉬보다 앞서나간 나즈그림은 대족장의 처소에 먼저 도착해 코르크론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입이 무거운 오크들을 골라서 뽑았다지만 트롤의 족장과 대족장의 언쟁은 알려져서 좋을 게 없는 일이었으니까. 입구에서 고개를 숙인 채 기다리던 나즈그림은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가로쉬의 등을 바라보았다. 목구멍에서 울컥 솟아나던 말을 애써 삼킨 채 고개를 들었다. 삼킨 말 대신 힘없는 목소리가 어금니 사이를 맴돌았다.
"이 또한 무사히 지나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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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우면 떠오르는 그분을 위한 헌정 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