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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어둠땅: 형이상학적 세계관에서 펼쳐지는 형이하학적 이야기

리리엣
댓글: 48 개
조회: 5734
추천: 71
2021-09-12 03:09:01
1. 형이상학이란?

"사람은 왜 죽는 걸까?"
"신이란 존재할까?"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행복이란 무엇인가?"

흔히 우리가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규정 짓는 질문들의 예시입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 인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들 중 일부이며,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나름대로의 답을 내리는 행위를 반복하며 인생의 '가치관'을 형성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다', '충분한 난폭함이 있다면 네 삶을 시련으로 만들어라' 등과 같은 삶의 지향점은 이러한 질문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죠.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내일 뭐 먹지?' 등과 같은 현실적인 생각을 하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돈을 버는 방법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 사람은 '돈이 최고다'라고 하는 가치관을 형성했기 때문에 그런 고민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이러한 근본적 질문들이, 우리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렇게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진리(삶, 존재, 자아, 자유의지 등)를 탐구하는 학문을 형이상학이라고 합니다. 와우 게시판에서 왜 갑자기 형이상학이니 뭐니 하는 개풀 뜯어먹는 소리를 하냐구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와우저들은 생각보다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다루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며,
둘째, 어둠땅은 그 배경 설정 상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다룰 수 밖에 없는 확장팩이었으나, 블리자드가 형이하학적인 저질 이야기를 풀어 나가며 기껏 좋은 소재를 말아먹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간수와 실바나스를 타노스급의 멋진 빌런으로 만들 기회였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2. 와우저들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철학적인 주제를 좋아한다?

첫 번째 이유의 근거부터 볼까요? MMO-Champion이라고 하는 미국의 와우 커뮤니티 사이트가 있습니다. 매일 20만 명의 방문자가 찾아 오는 사이트인데요, 군단 확장팩까지 발매된 시점에서 한 번은 이런 투표를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와우 확장팩 중 최고의 확장팩은 무엇인가?"

총 1318명이 투표에 참가했었는데요, 1위는 모든 사람들이 예상하듯 리치왕의 분노(428표)였습니다. 사실상 워크래프트 사가의 엔딩인 확장팩이었던 만큼, 모두가 인정할 만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2위로 뽑힌 확장팩이 의외로 '판다리아의 안개(344표)'였습니다. 물론 누적 유저 수 1억명이 넘는 게임에서, 고작 천 여명이 참여한 투표의 신뢰성을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 게임 커뮤니티에서 판다리아의 안개를 '최고의 확장팩 순위'에서 높은 순위에 꼽는 것을 보면, 판다리아의 안개에 대한 고평가가 주관적인 의견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필자인 제 생각에도 최고의 확장팩은 리분, 2위는 군단, 3위는 판다리아라고 보거든요.


판다리아의 안개를 최고의 확장팩 3위로 꼽는 미국 게임 기사(https://www.highgroundgaming.com/wow-expansions-ranked/)

그러면 대체 판다리아의 안개가 고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여기에서 그 이야기를 길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고평가의 요인 중 하나로 '철학적이면서 멋들어진 주제'를 꼽고자 합니다. '무엇이 싸울 가치가 있는가?', 이것이 판다리아의 안개의 주제였죠. 동양적이고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아서 워크래프트 시리즈랑 어울리지 않아 보였던 이 주제가 사실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핵심을 관통하는 주제였고, 블리자드는 이를 얼라이언스와 호드의 대립을 통해 멋지게 이야기로 풀어냈습니다. 매번 '아제로스가 위험하오! XX를 쓰러트리시오!'하는 단순한 이야기에 질린 와우저들이 판다리아의 안개를 재평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요. 스토리에 관심 없는 사람들조차도, 판다리아의 안개의 이야기 구성과 다른 확장팩들의 이야기 구성 간의 질적 차이는 쉽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니까요.

뭐...이걸로도 '사람들은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좋아한다'라는 말이 납득이 안되신다면...MCU의 타노스를 예시로 들면 어떻겠습니까?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나왔던 타노스는 뉴스에도 이름이 여러 번 언급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성공한 빌런이었습니다. 그러한 고평가의 배경에는, 그가 '뚜렷한 사상을 갖고 움직이는 빌런'이라는 점이 있었습니다.

타노스는 맬서스 이론의 신봉자였습니다. 맬서스 이론의 골자는 '토지, 식량 등과 같은 자원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므로, 인구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개개인의 삶의 질은 저하될 것이다'입니다. 타노스는 자신의 고향이 맬서스 이론에 따라 멸망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라고 하는 자신의 사상을, 전 우주에 실현하고자 하는 무지막지한 빌런이 되었습니다. 그저 절대악으로 군림하는 빌런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사유를 바탕으로한 사상을 기반으로 행동하는 타노스. 그의 매력에 전세계가 뒤집어졌습니다. 인피니티 사가는 현대 오락 문화에 있어 스타워즈 급의 족적을 남겼죠.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생각보다' 철학적인 주제를 좋아합니다. 적어도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주제도 없는 것보다는 말입니다.


3. 사후 세계인 어둠땅, 형이상학적 세계

그리고 어둠땅은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풀어내기에 너무나도 좋은 배경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어둠땅 자체가 '사후 세계란 존재하는가?',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라고 하는 철학적 사유의 산물이니까요. 그리고 어둠땅에서 등장한 여섯 영역-오리보스, 나락, 승천의 보루, 말드락서스, 몽환숲, 레벤드레스는 저마다 철학적으로 심도있게 생각해볼 만한 요소들이 하나씩은 있었습니다. 이따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지만 '무지의 장막', 마키아벨리즘, 공리주의, 구원과 속죄의 문제 등 어디서 한 번씩은 들어본 주제를, 어둠땅에서는 전부 건드리고 넘어갈 수 있었어요.

그리고 블리자드는 이를 대차게, 의도적으로 무시했습니다.

물론 블리자드의 선택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게임이 무슨 철학 학습용 게임도 아니고 말이죠. 선한 플레이어측 진영이 악한 적대 진영을 쓰러트리는 것이 골자인 게임인데, 괜히 개똥철학을 집어 넣었다가 게이머들로부터 '유저를 가르치려고 드느냐', '괜히 머리 아프다', '그냥 무진장 나쁜 놈(Big Bad Evil Guy, 이른바 BBEG) 쓰러트리면 되는 건데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기냐'라는 등의 반발을 살 수도 있고요.

하지만 9.1 패치의 스토리 결말이 공개된 현 시점에서 결과론적으로 놓고 봤을 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블리자드는 차라리 철학적 사유를 이번 확팩에서 건드리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게 나았다구요.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해서든, 간수와 실바나스의 행동에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여야 했습니다.

지배의 성소의 결말 시네마틱 영상이 공개된 이후 전세계 와우저들이 들고 일어났죠. 이른바 '실바나스 심신 미약 엔딩'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실바나스가, 뭔가 거창한 동기를 갖고 있을 거라고 기대했으니까요. 그녀가 저질렀던 어마어마한 악행들, 그 악행을 납득하지는 못할지언정 이해는 할 수 있게 만들어줄 동기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맞이한 결과는 어떤가요? 실바나스의 악행은 그녀의 영혼이 반으로 쪼개져 있던 탓이었습니다. 실바나스 역시 간수의 꼭두각시였을 뿐이고, 간수는 그저 온 세상을 자기 발밑에 두려는 단순한 악당에 불과했습니다. 심신미약 엔딩에 비하면 케리건의 젤나가 엔딩은, 다시 보니 선녀처럼 보이는군요.

혐주의) "미친 자는 벌하지 않습니다! 저는 심신미약은 감형의 사유라구요!"


4. 블리자드가 무시한, 어둠땅의 철학적 가능성
그래서 이번 게시글에서는 어둠땅의 각 영역이 내포하고 있는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아마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어? 이거 좀 에반데...'하면서 이미 느끼셨던 것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 글의 마무리 부분에서는 "이러한 주제들을 바탕으로 블리자드가 이렇게 스토리를 전개했더라면 어땠을까"라고 하는 희망 사항을 적어볼 것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저의 주관적인 생각이고, 제가 무슨 철학 전공자도 아니므로 오류가 잔뜩 있을 수 있습니다. 그저 주관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니, 혹시 본인의 생각과 다르다거나 학술적으로 오류가 있다면 아주 따끔하게 지적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1) 승천의 보루와 존 롤스: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승천의 보루는 생전에 충직한 삶을 살았던 이들이 오는 곳으로, 키리안(Kyrian)이라고 하는 고결한 이들이 지키는 곳입니다. 키리안은 죽은 자들의 영혼을 오리보스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키리안이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식을 통해 생전의 기억을 모두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이를 공평하게 대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거나, 생전의 기억을 없애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의구심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서리한으로 영혼이 조각난 좌서 형님이 바로 여기에 해당했는데요, 이들은 '이탈자'라고 불리며 '타락한 존재'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과연 이탈자 세력을 '사악한 세력'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생전의 기억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행위는 문제가 되는 행위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해보기 위해 알아야하는 사람이 바로 존 롤스입니다.

존 롤스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무려 40년 동안이나 고민했던 20세기의 위대한 정치철학자입니다. 그의 정의론의 핵심은 바로 '공정성'인데요, 그는 정의란 공정한 것이며,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라고 하는 원초적 입장을 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무지의 베일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의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이 아직 세상에 태어나기 전, 저승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곧 태어나게 될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를 모릅니다. 남자로 태어날지 여자로 태어날지, 키가 클지 작을지, 잘생겼을지 못생겼을지, 돈이 많을지 적을지.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이 정의의 원칙을 정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다음 중 어떤 것이 정의로운 원칙이라고 합의하시겠습니까?

1) 돈이 없는 사람도 최소한의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정의로운 원칙이다.
2)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가 모든 것을 취하는 것이 정의로운 원칙이다.

아마 열에 아홉은 1번을 정의의 원칙으로 정할 것입니다. 내가 운이 좋아서 강자로 태어날 수도 있지만, 약자로 태어난다면? '에이, 이번 인생은 망했어. 빠르게 다음 생으로 간다!'라고 하며 도박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물론 롤스의 이러한 정의는 '경제적의미에서의 정의'이므로, 일반적인 의미의 '공정한 정의'를 추구하는 키리안의 상황에 딱 맞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롤스나 키리안이나, 모두 '절차가 공정해야만 정의다'라는 신념을 갖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롤스도, 키리안도, 모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될 것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키리안은 롤스의 정의론의 신도나 다름 없는 자들이죠.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사상은 없는 법이죠. 롤스의 정의론에도 무수히 많은 비판점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무지의 상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입니다. 롤스는 인간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사실'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가 무지의 베일이라고 주장했는데요, '도대체 일반적인 사실의 기준이 뭐냐'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대체 어디까지를 알고 어디까지를 몰라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었죠.

키리안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덕이란 상대적인 것이므로, 모른다는 것으로는 아무런 도덕 원칙도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키리안은 어디까지의 기억은 내버려두고 어디까지의 기억은 삭제해야 할까요? 그 기준은 대체 무엇일까요? 기준은 집정관이나 심판관이 세우는 것일까요? 키리안은 주로 심부름꾼의 역할이고 심판하는 자는 아니니, 아마 앞의 두 사람이 세운 기준에 따라 기억을 삭제하는 게 맞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남은 기억을 통해 만들어진 정의는 집정관의 정의, 심판관의 정의일 것입니다. 이탈자가 이러한 정의의 대해 의구심을 느끼고 승천의 의식을 포기하는 것도 납득이 갑니다. 아무런 위험성이 없는 의식이어도 그럴진대, 심지어 의식 도중 죽어나갈 수도 있으니, 아마 이 의식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정말 맹목적인 신념을 갖고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결국 승천의 보루는 롤스의 정의론을 신봉하는 키리안과, 이에 반대하는 이탈자들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서로 다투는 장소인 것입니다. 과연 누가 옳을까요? 그에 대한 답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승천의 보루는 아무런 모순도, 문제점도 없는 이상향의 세계는 아니라는 점과, 이탈자를 '타락한 자들'이라고 비하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는 점입니다.

2) 말드락서스와 마키아벨리: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Exitus acta probat)."
말드락서스는 어둠땅의 영역 중 나락을 제외하면 가장 냉혹한 곳일 것입니다. 이곳은 영원한 전쟁터이며, 적자생존의 세계입니다. 오직 강력한 자들만이 살아남고 나약한 이들은 온갖 실험의 대상이 되고 말죠. 유쾌한 분위기에 무시하고 넘어가기 쉽지만, 말드락서스는 사실 약자들에게는 나락만큼 무시무시한 곳이 아닐까 합니다. 전쟁에서 패배하면 누더기괴물이 되어 기존의 자아를 잃고 통합된 하나의 자아가 되거나, 더 나쁜 경우 아무런 지성도 없이 슬라임화되어 영원히 배회하거나...또 말드락서스에서 퀘스트를 하다 보면, 중개자가 다른 곳에서 생명체를 잡아다가 투기장의 결투 상대로 써먹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체 이 생명체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곳으로 끌려와야 하는 걸까요...

말드락서스는 이 모든 행위를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정당화합니다. "우리는 어둠땅을 수호한다." 하지만,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괜찮은 걸까요?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해보기 위해서, 이번에는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 유명한 '군주론'을 쓴 사람이죠. 

15~16세기, 이탈리아 피렌체 사람이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굉장히 냉혹하고 잔인한 사람으로 오해를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의 사상을 뜻하는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용어는 '피도 눈물도 없는 지독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될 정도니까요. 이는 그가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는 군주의 행동에 대하여 민중은 그 결과로써 수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라고 군주론에서 적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그의 사상을 절반 정도만 이해한 것인데, 그는 어디까지나 '좋은 목적'일 때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목적의 예시로 나라가 멸망하기 일보직전일 때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목적 등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공익을 우선시할 때만 그 수단이 정당해진다는 뜻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마키아벨리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을 전부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대체 공익의 기준은 누가 세우느냐'나,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는 게 맞냐'를 들 수 있습니다. 설명이 필요할 만큼 어려운 비판은 아니니 예시는 과감하게 패스하도록 하겠습니다. 정 이해가 안 가신다면, 말드락서스 중개자에게 납치되어 고통의 투기장으로 끌려온 말살자 코고브의 입장이 되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말살자 코고브가 된 여러분은, 말드락서스의 대의에 기꺼이 동참하실 수 있으신가요? 과연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조각난 숲(Scattered Grove)에서 납치된 말살자 코고브(Khogov the Expunger)

3) 몽환숲과 제레미 벤담: 공리주의
몽환숲은 영혼의 정수인 령을 빨아들여, 환생을 기다리는 자연의 영혼들에게 양분을 공급하는 영역입니다. 그렇게 생명과 죽음의 순환을 담당하는 영역이라고 하는데...따지고 보면 이곳도 문제가 많습니다.

일단, 이곳에서 환생할 수 있는 존재는 야생씨앗(Wildseed)에 담긴 영혼, 즉 야생 신 뿐입니다. 다른 존재들이 환생한다는 묘사는 아직 나온 바가 없습니다. 나이트 페이들이 야생씨앗을 몽환숲의 존재의의라고 하는데, 사실상 몽환숲은 영혼들에서 령을 빨아들여 이 야생씨앗을 다시 환생시키는 공간에 불과한 곳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와우피디아나 와우헤드를 뒤져가며 퀘스트 지문, NPC들의 대사를 확인하고 있는데 일반 영혼이 환생할 수 있다는 언급은 찾지 못했습니다. 혹시 찾으신 분이 있으시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두 번째 문제점은, 령 가뭄 때문에 그 야생씨앗의 영혼마저 몽환숲을 살리기 위해 희생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장 아라론이라고 하는 몽환숲의 존재는, 시들어 가는 몽환숲을 위해 자신이 담당하는 야생씨앗, 우르속의 영혼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겨울 여왕에게 이세라를 살려야 함을 강변할 때, 그는 이렇게 말하죠.

"희생해야만 하는 자도 있지만, 꼭 구해야만 하는 자도 있습니다."

...몽환숲은 이렇게, 철저하게 '몽환숲을 유지하는 것'만을 절대가치로 삼으며 행동합니다. 이를 위한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여기죠. 이러한 행동 원칙은 제러미 벤담과 스튜어트 밀이 주장한 사상, 공리주의의 원칙을 따른 것입니다.

공리주의는 사실 너무나도 익숙해서 굳이 설명이 필요 없지요. 이미 우리 사회의 대부분은 공리주의 원칙,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거든요. 그리고 이에 대한 비판도 너무나도 쉽습니다. 딱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지요.

"열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죽인다면, 그것은 열 명의 살인자를 만드는 일이지."

물론 누가 옳다고 말할 수 없는 문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몽환숲이 하는 일이 무슨 신성한 책무인 것 마냥 포장될 이유도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4) 레벤드레스와 구원: 누가 용서하는가? 누가 용서받을 수 있는가?
레벤드레스는 교만하고 사악한, 하지만 갱생의 여지가 있는 영혼이 가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영혼들은 벤티르라고 하는 존재에 의해 자신의 죄를 반성하게 되고, 속죄에 성공한 영혼은 어둠땅의 다른 영역으로 가거나 벤티르가 되어 다른 영혼을 구원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레벤드레스가 갖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점이 무엇인지 쉽기 이해하려면 한국 영화 한 편을 보면 됩니다. 바로 이창동 감독의 명작, <밀양>입니다.


주인공인 이신애(전도연 분)는 남편을 잃고 아들 준과 함께 고향인 밀양에서 새출발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들 준이 밀양에서 납치되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신애는 기독교에 귀의하여 마음의 안정을 얻고자 합니다. 신애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아들을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고자 마음 먹고 교도소에 찾아가 범인을 만나는데...그 살인범이 신애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니님이 이 죄많은 놈에게 손내밀어 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제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주인공 신애는 멘탈이 나갑니다. 작중에 묘사된 내용만 보면 정신병에 걸린 것과 같은 모습을 보이며, 신에 대한 증오를 마음껏 표출합니다. 교회 부흥회(신자들의 믿음을 부흥시키기 위해 하는 교회 행사)에 가서 '거짓말이야' 노래를 크게 틀어버린다든가, 교회 장로를 꼬셔 성관계를 시도한다든가, 손목을 긋든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신애는 하늘을 보며 '보여? 보이냐구'라고 야유합니다. 그녀가 무엇에 분노하게 되었는지는, 그녀의 대사를 통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용서를 해요, 하나님이 벌써 용서하셨다는데.. 내가 어떻게 용서를해요,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요, 내가 용서를 해야지..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를 해요."

레벤드레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악하고 교만한 영혼들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벤티르들의 무시무시한 고문을 통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벤티르에게 비명처럼 사죄의 말을 내지를 뿐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얼마나 교만했는지를 깨닫게 된다고 하는데...벤티르가 용서의 주체가 되는 속죄는 정의로운가? 피해자에게 그 어떤 사죄없이 이루어지는 속죄는 정당한가? 이런 비판이 제기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문제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과연 레벤드레스에 도착한 영혼들에게 구원이 주어져도 되는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레벤드레스에 도착한 이들의 명단을 한 번 살펴볼까요?

붉은십자군 수도원의 사냥개조련사, 록시. 과거 수도원에서 무고한 이들을 자신의 야수에게 던져주던 이였습니다.
줄진. '분노에 찬 영혼(Wrathful soul)'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음...엘프들에게 영토, 눈, 목숨,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죄(?)가 있습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샤르스 볼둔. 마나 폭탄 제조 기술을 개발한 사람입니다.
가로쉬 헬스크림. 이하 생략.
캘타스 선스트라이더. 이하 생략.

뭐...레벤드레스 행이 어울리는 분들도 있지만, '얘가 나락행이 아니라고?'라는 생각이 드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겉바속촉 치킨님이 그렇지요. 가로쉬와 같은 수많은 학살을 자행한 이들, 이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는 것. 이것은 과연 정의로운 일일까요?


5. 어둠땅이 나아갔어야 하는 길: 어둠땅을 자기 신념대로 바꾸려고 하는 간수, 그리고 실바나스
위에서 살펴 봤듯이, 어둠땅의 모든 영역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사후 세계라고는 볼 수 없는 곳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비합리적이며 뜯어 고쳐야 할 곳이란 건 아니고...도덕적 판단이 모호한, 도덕적으로 회색인 영역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이트 페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놓고 슬퍼하는 척하는 위선자들일까요? 말드락시들은 전부 마키아벨리즘에 미쳐버린 냉혹한 광신도들일까요? 답을 내리기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모두들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또, 어둠땅은 삶과 죽음의 순환을 위해 필수적으로 존재하는 곳이라는 느낌이 별로 안 듭니다. 아직 묘사가 안 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제가 놓쳐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어둠땅에서 환생하는 영혼은 정말 극소수고, 대부분은 령 배터리 취급받으며 소모품으로 전락하기 일쑤니...

결론적으로, 어둠땅이 존재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영혼들에게 이상적인 영구불멸의 사후 세계를 제공해주는 것도 아니고, 어둠땅의 영혼이 그대로 환생하여 삶과 죽음의 고리를 이어주는 것도 아니고...굳이 존재의의를 찾자면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우주를 구성하는 여섯 가지 힘 중 하나, 죽음의 힘의 영역이라 반드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일까요? 이 부분은 이렇다 할 근거가 없어 뭐라고 확실히 말을 하기가 힘듭니다. 목적의 길이 대체 무엇인지, 생명과 죽음의 순환이 대체 뭔지 좀 속 시원하게 알려주면 의문이 풀릴 것 같은데 말이죠.

어쩄든 블리자드는 실바나스와 간수의 동기를, 이런 어둠땅의 구조적 문제점에서 찾아냈어야 한다고 봅니다. 도덕적 회색지대인 어둠땅에서, 간수와 실바나스는 사상의 광신도로서 어둠땅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뜯어고치는 빌런이 되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타노스처럼 두 사람의 사상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어야 하겠지만요.

이 경우 실바나스의 동기를 '필멸자의 영혼을 장기말이나 소모품으로 취급해버리는, 우주의 섭리에 대한 복수' 정도로 잡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좀 더 확실한 동기 부여를 위해 지배의 투구를 만들어 낸 것이 말드락시라고 해도 좋을 것 같군요. 이 경우 말드락서스에게는 마키아벨리즘에 입각한 변명거리를 만들어 주면 되겠네요. '말드락시를 더 많이 만들어 어둠땅을 지키기 위함이었다'라고요. 물론 이렇게 해도 실바나스의 모든 악행들이 정당화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심신미약 엔딩으로 끝나는 것보다는 실바나스의 캐릭터성도 유지하고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6. 결론: 이해는 가는, 하지만 매우 아쉬운 블리자드의 선택
하지만 블리자드는 심신미약 엔딩을 선택했습니다. 실바나스를 그저 간수에게 조종당하는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리고, 간수는 그저 힘만 센 지배욕의 괴물로 만들어버렸죠. 물론 저 같은 놈보다야 블리자드의 작가진이 훨씬 머리도 좋을 테니, 지금처럼 이야기를 진행한 데에는 저같은 범인은 이해 못할 어떤 이유가 있을 게 분명합니다. 뭐...어려운 주제는 유저들이 이해를 못하니까 안된다, 유저들은 스토리에 별로 관심이 없다, 기타 등등...아무튼 돈이 안 된다고 판단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지 않을까 합니다.

이 글은, 폭주하는(제 기준으로) 스토리에 대한 넋두리이자, 어둠땅을 재미있게 플레이하는 유저들이 한 번 쯤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은 주제를 소개해드리고자 쓴 글입니다. 아마 위에서 언급했던 철학적 주제들에 대해 나름대로 답을 내려가며 어둠땅을 플레이하신다면, 게임에 대한 몰입도를 더욱 높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Lv50 리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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