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오브듀티' 시리즈의 첫 등장은 그리 극적이지 않았다. '메달오브아너'와 '배틀필드', '데이오브디피트'가 각축전을 벌이면서 생긴 '2차 세계대전 배경 FPS' 시장에서 꽤 그럴싸한 후발 주자 정도의 느낌이었달까? 당시 기억으로는 사운드 이펙트가 끝내주는 작품이긴 했지만, 독립 타이틀만 열다섯이 넘어가는 대형 프렌차이즈가 될 거란 생각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마 그건 개발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여튼 프렌차이즈가 구성되고, 타이틀이 점점 늘어나다 보니 콜오브듀티 시리즈는 참 특이하게도 시리즈 내에서도 시대적 배경에 따라 하위 시리즈가 분화되었다. 2차 세계대전을 그대로 이어가는 클래식 시리즈, 콜오브듀티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모던 워페어'. 그리고 블랙 요원들의 공작 활동을 주제로 삼았으나 왠지 모르게 이상해진 '블랙 옵스' 시리즈가 그것이다.
이 중, 가장 애매한 포지션이 '블랙 옵스' 시리즈일 것이다. '월드 앳 워'에서 전장의 잔혹함과 처절함을 필터 없이 그려낸 트레이아크는 마치 어둠에 물든 개발사마냥 냉전 시기의 여러 사건들을 소재 삼아 '콜오브듀티: 블랙 옵스'라는 타이틀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타이틀은, 지금껏 모든 시리즈의 엔딩을 본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시나리오의 작품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다. '블랙 옵스2'에서 근미래를 배경으로 삼고 싶은 욕심과 전작의 인물들을 활용하고 싶은 상반된 욕망 사이에서 길을 잃은 트레이아크는 다음날 일어나면 다행일 나이의 노인들을 대거 출연시키는 무리수를 두었다. 멀티플레이의 인기는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전작의 그 충격적인 모습을 엿볼 수는 없었다. 이는 후속작에서도 마찬가지. 3편은 배경을 너무 먼 미래로 잡아 신기할지언정 몰입은 어려웠고, 4편은 아예 싱글 플레이가 없었다.
오늘 말할 작품인 '콜오브듀티: 블랙 옵스 콜드 워(이하 콜드 워)'는 과거로의 회귀를 지향한다. 그냥 무작정 타이머를 뒤로 돌리는 대중 없는 회귀는 아니다. 월남전의 참혹함이 가시지 않았던 60년대를 배경으로 삼은 '블랙 옵스1' 이후의 이야기. 세계 경제는 호황을 맞이했지만 그 이면에는 열강들의 핵경쟁과 이웃집에 간첩이 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존하던 시대. 한국에서는 제5공화국이 기치를 들던 1980년대 초가 바로 '콜드 워'의 시대적 배경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18년째 콜오브듀티 시리즈를 연달아 플레이해온 기자의 촉으로 볼 때 이 작품은 진짜다. '모던 워페어'나 '월드 앳 워'와 같이, 타이틀 리스트에 드물게 박혀 있는 명작의 냄새가 스멀스멀 났다. 본격적인 정보 공개 며칠 전, 블리자드 코리아를 방문해 '콜드 워'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정보들을 압축해 정리했다. 지금부터 써내려갈 내용이 바로 '콜드 워'를 기대하게 하는 세 가지 이유다.
※ 본 기사에서는 '콜드 워'의 싱글 플레이 및 캠페인, 서사에 관련된 내용을 다룹니다. 멀티 플레이 및 기타 콘텐츠와 관련된 사항은 추후 공개될 예정입니다.
※ 콜오브듀티: 블랙 옵스 콜드 워 Q&A
ㄴ [Q&A] [Q&A] '블랙 옵스 콜드 워', 게임 속 모든 작전이 실존 작전이었다?
주인공을 내가 만든다?
콜오브듀티 시리즈에서 '블랙 옵스'가 가지는 의의 중 하나는 최초로 주인공이 캐릭터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블랙 옵스 이전의 콜오브듀티 게임에서 주인공은 대사도, 얼굴도 없는 '병사A'일 뿐이었는데, 이는 주인공이 독립적인 캐릭터성을 가질 경우 게이머와 유리되어 몰입이 깨질 수 있음을 방지하기 위한 FPS 게임의 전통적 공식을 따른 결과였다. '하프 라이프'에서 주인공 고든 프리먼 박사가 목소리가 없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블랙 옵스에선 '알렉스 메이슨'이라는 주인공을 내세웠고, 게임 내에서 게이머는 메이슨의 모습과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다. 트레이아크는 이에 따른 몰입도의 저하를 굉장한 수준의 서사로 해결해버렸고, 이후 콜오브듀티 시리즈는 주인공이 독립적 캐릭터성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이런 흐름을 또 다시 깨버린 것이 트레이아크다. '콜드 워'에서는 게이머가 직접 싱글 플레이에 사용될 캐릭터를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단순히 외모와 성별 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소속(MI6, CIA, 전 KGB)과 심리학적 프로필까지 지정할 수 있다. 다소 폭력적이지만, 임무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백인 여성 CIA 요원이 될 수도 있고, 침착하고 신중한 성격의 전 KGB 소속 중년 남성 요원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콜오브듀티 시리즈가 추구하는 '몰입 과정'이 변화함을 뜻한다. 최초 클래식 시리즈에서 얼굴 없는 주인공을 내세워 몰입을 유도했고, 2010년 이후 주인공에게 확실한 캐릭터성을 부여하되, 강력한 서사를 통해 관객 시점의 몰입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보다 현대적인 게임관에 맞춰 게이머가 직접 몰입을 만들어내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기존의 다른 게임들에서는 꽤 이른 시기에 도입된 시스템이지만 콜오브듀티 시리즈에서 이런 강력한 커스터마이징 기능이 도입되는 것은 처음이다.
이에 따라 게임 플레이도 다소 미묘하게 변화했다. 콜드 워에서는 현대 RPG 게임에서 흔히 보는 그것과 같이 상황에 따라 대사를 선택하는 기능이 추가되었다. 게이머가 지정한 캐릭터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을 게임 내에 미리 준비해 둔 것이다.
이는 퍽 '트레이아크'다운 모습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그들은 콜오브듀티가 선형 FPS 게임의 대명사로 불리던 시절에도 꾸준히 멀티 엔딩을 시도하고 게임 내에 분기점을 만들곤 했다. 차후 시리즈에서도 이런 시스템이 도입될지는 다소 의문이지만, 일단은 콜오브듀티 시리즈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음은 확실해 보인다.
기존의 틀을 깨는 '비선형적' 게임 디자인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이 비선형적 구성을 위한 기반이라면, 게임 플레이 자체는 보다 더 노골적으로 비선형을 추구한다. 주된 흐름 외에도 게임 진행 도중 새로운 단서를 얻거나 진행 과정에 따라 서브 목표가 열리는 식인데, 이 때문에 기존의 콜오브듀티 시리즈처럼 가라는 대로 이동해 모든 적을 총으로 쏴 버리고 다음 지역으로 이동하는 형태가 아닌, 보다 적극적으로 게임 내 세계를 탐험해야 한다.
진행 방식 또한 여러가지. 게임 시연에서는 크렘린 궁 침투를 예시로 들었는데, 침투 과정에서 무사 통과를 위해 뇌물을 쓸 수도 있고, 독을 사용해 경비병을 암살한 후 통과할 수도 있으며, 약점을 잡아 협박할 수도 있다. 또한, 돌아온 미니맵 시스템 외에도 평면 지도 기능을 통해 아직 가지 않은 곳을 찾아보면서 단서를 수집할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기존의 콜오브듀티식 건플레이에 '디스아너드'의 비선형적 게임 디자인을 융합한 느낌이 강한데, 이는 앞서 언급한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요소와 맞물려 매우 강력한 몰입을 유도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게이머가 미리 설정한 주인공 성향에 맞춰 게임 플레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사회적이고 폭력적 성향을 가진 주인공이라면 잴 것 없이 총을 꺼내들고 플랜 B를 선택할 테고, 신중함과 결단력을 겸비한 요원이라면 최대한 안전하면서도 확실한 루트를 선택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대되는 부분'이자 동시에 '걱정되는 부분'이다. 게임 디자인에 있어 선형과 비선형 중 무엇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둘 다 나름의 장점과 단점이 혼재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콜오브듀티 시리즈 중 본가인 '인피니티 워드'가 개발한 작품들은 극도로 선형적인 디자인을 추구했다. 선택지가 있다 해도 곧 잊어버릴 조연 하나가 죽느냐 사느냐 정도거나, 미션의 진행 순서가 바뀌는 것 뿐, 게임의 서사 자체가 뒤틀리거나 바뀌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반면 '트레이아크'는 꾸준히 선형 디자인으로부터의 탈피를 꿈꿨고, 콜드 워에 이르러 레이븐 소프트웨어와 함께 자신들이 꿈꾸던 게임 디자인 철학을 아낌없이 때려박았다. 하지만 그 또한 무조건 좋을 거라 장담할 수는 없다. 잘 풀리면 게이머의 자유로운 서사 구성과 시리즈 특유의 완성도 높은 연출, 건플레이가 융합해 좋은 결과물을 내놓겠지만, 반대로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물건이 나올 수도 있다. 게임 플레이 시연 영상으로는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지만, 적어도 게임 디자인 부분만큼은 게임이 완전히 출시된 이후에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음모, 첩보, 편집증까지... 초기 '블랙 옵스'의 느낌 그대로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콜드 워'는 1980년대 초를 주 무대로 삼는 작품이자, '블랙 옵스1'의 시퀄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당연히 전작의 주인공인 알렉스 메이슨을 포함해 친구인 프랭크 우즈와 매력덩어리 빡빡이인 제이슨 허드슨도 등장한다. 전작에서 소련의 주요 시설을 사보타주하고, 유리조각을 입 안에 넣고 펀치를 날리는 고수위의 심문을 하는가 하면 세뇌로 인한 인격 해리까지 겪었던 우여곡절의 3인방이다.('그레고리 위버'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 인물들은 '콜드 워'라는 작품으로 게이머를 이끄는 견인차다. 이후 게이머들을 마주하는 것은 1980년대의 미국, 그리고 거대한 음모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뒷세계의 작전이다. 게임 속 세계의 분위기부터 문화 코드, 그리고 인물의 복장과 블랙 옵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정신 착란까지. '콜드 워'는 블랙 옵스에서 느낄 수 있었던 독특한 매력을 2020년의 기술로 다시 정제했다.
'콜드 워'의 주요 목표는 소련이 미국에 침투시킨 첩보원이자 코드네임 '페르세우스'를 막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전작의 등장 인물들을 포함한 여러 요원들과 함께 행동하고, 역사적 실존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이는 전작인 '블랙 옵스1'에서도 비슷하게 도입되었던 바 있는데 '블랙 옵스1'에서는 6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에 걸맞게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피델 카스트로 등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콜드 워'는 시대적 배경이 바뀐 만큼 등장 인물도 바뀌었다. 먼저 확인할 수 있었던 인물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레이건 대통령은 알렉스 메이슨과 프랭크 우즈, '콜드 워'의 신규 인물인 '러셀 애들러'와 함께한 자리에서 '페르세우스'에 대한 제이슨 허드슨의 브리핑을 듣는다. 또한, 대사 상으로 소련의 서기장(1985년 이후)이 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이름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런 역사적 실존 인물들은 서사와 맞물려 게임 속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는 역할이다. 개발사인 트레이아크와 레이븐 소프트웨어는 콜드 워의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불과 4~5년 전부터 기밀 해제가 이뤄진 미국 정부의 문서들을 다수 참고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 이 과정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여기서 말하는 충격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었다고?'
'콜드 워'는 어둡다. 네온 사인과 백열등으로 밝게 빛나고, 경제는 대호황을 맞이했던 1980년대이지만, 게이머들이 마주할 이야기는 월남전부터 핵경쟁 시대로 이어지는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역사의 이면에 존재했던 첩보와 음모, 비밀 작전이다.
'페르세우스'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고, '러셀 애들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요원이며, 1편의 등장 인물들은 또 다시 위험천만한 작전에 투입된다. 이전의 그 어느 시대보다도 문명화되어 있지만, 드리운 빛만큼이나 그림자도 짙었던 시절. '콜드 워'는 그 시기의 이야기를 그 시대의 느낌으로 그려냈다. 바로 그것이 '콜드 워'를 기대하는 마지막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