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이 3국이 추가된다는 소식에 그에 맞춰 네덜란드의 역사나 좀 끄적여볼까 합니다. 흥미가 있으시면 한번 읽어보는 것도 재미는 있을 것입니다.[확신은 못해요 =_=]
16세기는 전세계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입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임진왜란이 벌어지면서 그 정세가 크게 변화하였으며[최대 피해국인 조선은 상대적으로 그 국체를 보전하였습니다만], 인도에서는 무굴제국이 확립되었습니다.[악바르 대제와 관련된 내용이 하나도 없음이 아쉬우나, 고어에 가마 제독이 있는 걸로 봐서는 유럽의 일과는 좀 다르게 인도에서는 16세기 초를 상정한 것 같습니다] 또한 대항해시대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동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6세기 초인 1529년에는 빈을 공격할 정도로 막강해졌습니다.[오스만 제국의 쇠퇴는 17세기 후반부터이니, 뭐 중동에는 별 변화는 없었겠군요] 또한 이전에는 지중해에서 명성을 드날리던 베네치아가 쇠퇴하고 인도와 아메리카로의 항로를 개척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흥하였습니다. 그리고 16세기 말에는 영국과 네덜란드가 치고 올라오게 됩니다.
이 격변의 시기에 가장 치열한 전쟁을 벌인 것은 네덜란드였습니다. 스페인이나 영국이 대양에서의 패권을 두고 겨룬 데 비하여 네덜란드는 자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은 16세기 초의 종교개혁에서 그 불씨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암스테르담의 NPC로 등장하는 에라스무스(1469~1536)와 함부르크의 NPC로 등장하는 루터(1483~1546)가 시작한 종교개혁의 결과, 네덜란드에는 신교가 급속도로 퍼지게 됩니다.[셰익스피어가 1564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잊도록 합시다 -_-] 그것은 당시 네덜란드의 지배자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5세(1500~1558)의 마음에 들 리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카를 5세는 겐트(현 벨기에 지방) 태생이었고, 당시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신교를 적극적으로 탄압하지 못하였습니다. 카를 5세는 프랑스와의 전쟁과 신교 제후들의 반발로 끝내 루터주의의 정치적 권리까지 승인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1555). 카를 5세는 이 일로 실의에 빠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위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1503~1564)에게, 스페인의 왕위는 아들 펠리페 2세(1527~1598)에게 이양합니다(1556).
펠리페 2세는 야심이 강한 왕이었습니다. 1554년 영국의 메리 여왕과 정략결혼하는 등 카톨릭 수호 및 유럽에서의 패권 장악에 힘썼습니다만, 1558년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하면서 스페인과 영국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의 국력은 압도적이었기에 영국에서도 뭐라 할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여하간 펠리페 2세는 카를 5세보다도 훨씬 공개적이고 강력하게 네덜란드의 신교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559년 이복 여동생인 마가렛 공주를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보냈으며 카를 5세의 방침과는 달리 네덜란드 각 주의 대표들을 스페인인들로 임명하였습니다. 이렇듯 무거운 세금과 신교 탄압이 계속되자 네덜란드인들의 불만은 지속적으로 쌓여갔습니다. 이 와중에 펠리페 2세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마무리짓고(1559) 그 군대를 네덜란드로 투입하자 네덜란드인들은 봉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네덜란드인들이 봉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일단 마가렛 총독(파르마 여공)의 고문인 아라스 주교(그란벨러 주교)의 교회 재조직령에 반발하여 펠리페 2세에게 그의 사퇴를 청원했습니다. 아라스 주교는 1564년 퇴진하였지만, 그의 퇴진으로 교회 재조직령이 철폐되어 이득을 본 것은 네덜란드의 귀족 세력들 뿐, 칼뱅주의가 널리 퍼진 네덜란드의 빈민층에게는 좋을 것이 없었습니다. 이 즈음 몰타에서 투르크 해군을 격파(1565)한 펠리페 2세는 다시 네덜란드에서 강력한 집권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자 신교파의 영수 격이었던 오라녜 공 빌렘(1533~1584)은 펠리페 2세에게 좀 더 관대한 처분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귀족들처럼 여유가 있지 않았던 빈민들은 폭동의 길을 선택하였고, 자신들의 식량난이 카톨릭 세력의 우상숭배에 있다고 믿게 되면서 교회들을 습격하게 됩니다(1566). 이 우상 파괴 폭동으로 네덜란드 전역의 교회가 파괴되고 불타버렸으며 수많은 성상들과 교회 장식들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현재 네덜란드에도 별로 이름난 종교 건축물은 없습니다.
또한 이때부터 네덜란드의 독립운동은 본격화하게 됩니다. 지금도 네덜란드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오라녜 공 빌렘, 에그몬트 백작(1522~1568), 호른 백작(1518~1568)이 이끄는 네덜란드 독립군이 스페인 군과 맞서게 된 것입니다[에그몬트 백작과 호른 백작은 대항해시대에도 등장합니다. 잉글랜드 이벤트를 해보셨다면 바다 여단의 사령관이 에그몬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대적으로는 맞지 않는 것 같지만, 네덜란드 이벤트 등장인물 소개를 보니 호른 백작과 4살 차이라 대충 맞는 것 같습니다]. 이에 마가렛 총독은 처음에는 유화책을 썼으나 결국은 무력으로 진압하는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이에 빌렘은 독일로 망명하게 됩니다(1567).
빌렘이 망명한 뒤에도 네덜란드의 소요는 끊이지 않았고, 마가렛 총독의 진압이 시원찮다는 판단이 들자 펠리페 2세는 악명높은 알바 공(1507~1582)을 신임 네덜란드 총독으로 임명합니다(1567). 알바 공은 부임하자마자 무자비한 공포 정치를 시작하여, 폭동재판소를 설치하고 에그몬트 백작, 호른 백작 등을 비롯하여 1만이 훨씬 넘는 수의 네덜란드 인사들을 처형하였습니다. 알바 공의 무자비한 탄압은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켜 상대적으로 스페인에 대한 반감이 덜했던 네덜란드 남부의 카톨릭 지방의 이반마저 불러왔습니다. 이에 알바 공은 그 뛰어난 전술적 재능으로 네덜란드 독립군을 줄줄이 격파하였지만 네덜란드의 반발심은 알바 공의 승리횟수와 비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칼뱅파 귀족들은 영국이나 독일 등으로 망명하거나 해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스페인 궁정에서는 이들을 일컬어 거지들(Geuzen)이라 했는데, 이들이 모여 '해상 거지단(Zeegeuzen)'을 결성하고 스페인 해군을 공격하였습니다.[이들은 대항해시대에 나오는 바다 여단인 것 같습니다. 에그몬트가 사령관인 것을 봐서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한편 빌렘은 독일의 나사우에서 네덜란드의 독립을 선포하였습니다(1568). 이로써 네덜란드의 80년 독립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즈음 펠리페 2세는 영국이 해상 거지단을 비호하는 것을 강력히 규탄하였는데, 이에 엘리자베스 1세는 이 해상 거지단을 영국에서 추방하게 됩니다(1572).[이것은 잉글랜드 이벤트에서 바다 여단이 오슬로로 떠난 것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역효과를 불러일으켜 이 해상 거지단이 마스 강 하구의 브리엘(로테르담 근처)을 함락하게 됩니다. 이에 프랑스의 신교도와 엘리자베스 1세는 네덜란드의 상황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네덜란드 전역에서 알바 공의 위세에 숨죽이고 있던 세력들이 떨치고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스 강(이 강은 라인 강과 거의 비슷한 곳을 흐릅니다) 유역이 평정되고 이어 하를렘(암스테르담 서쪽)에서 스페인 함대가 격파되었습니다. 암스테르담 등은 교역의 퇴조를 우려하여 적극적인 참전을 미루었지만 빌렘이 귀국하여 자치의회를 결성하고 홀란드 총독으로 선출되면서 네덜란드 독립군은 하나의 체계를 이루게 됩니다. 빌렘은 칼뱅교로 개종하고(1573) 더욱 강력히 스페인 군을 압박하게 됩니다.
결국 사정이 이에 이르자 펠리페 2세는 더 이상 알바 공을 네덜란드 총독으로 유임시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6년 전과 비교해 최악의 상황에 이른 네덜란드를 무마하기 위해 펠리페 2세는 유화적인 총독 레스퀸스를 임명합니다. 1574년 레이덴(헤이그 북동쪽)에서 스페인 군이 패하면서 스페인 군의 북부지방에 대한 장악력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이 와중 레스퀸스 총독이 돌연사하자(1575) 재정 악화로 급료가 밀린 스페인 군은 앤트워프를 중심으로 폭동을 벌이게 되는데, 이 '스페인 광란'으로 8천이 넘는 네덜란드인이 무고하게 죽어갔습니다. 이 일은 네덜란드인의 분노를 자극하여 종교가 다른 남부지방이 북부지방과 연합을 맺게 됩니다. 이것이 구체화된 것은 이듬해 체결된 강의 맹약이었습니다. 네덜란드 17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맹약한 사례입니다.
1571년 레판토에서 투르크 해전을 완파하여 지중해 최고의 강자로 부상한 펠리페 2세에게 네덜란드에서의 소요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야망을 가지고 있던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인들이 카톨릭을 믿기로 하면 그 자주권을 인정해줄 요량이었습니다. 그에 새로 부임한 총독 돈 후안(1547~1578)은 스페인 군의 철수를 공표하는 한편 카톨릭만을 믿을 것을 강요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그동안 벌어진 소요의 근본원인조차 재지 못한 펠리페 2세의 방침은 당연히 실패하였습니다. 이에 돈 후안 총독은 군사적 탄압을 시작하였지만 군사적으로 알바 공에 미치지 못한 그가 성공할 리는 만무하였습니다. 돈 후안 총독은 결국 레판토 해전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운 알렉산더 파르네세(1545~1592)에게 총독 직위를 넘겨줍니다(1577). 파르마 공이자 대항해시대에서는 파르네세 공작으로 세비야에 한가로이 앉아있는 이 사람은 16세기 네덜란드에 부임한 자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고 또한 그 공적 역시 가장 대단했습니다.
파르네세 공작[본래 파르마 공이라 해야 하나 대항해시대를 하신 분들께는 파르네세 공작이 더 익숙한 이름일테니]은 장블루 전투에서 네덜란드 군을 완파하는 한편, 분리 대응하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비록 강의 맹약을 맺었다고는 하나 그 결속력이 약했던 북부와 남부를 다르게 대우하여 북부는 강압적으로, 남부는 유화적으로 대한 것입니다. 이에 남부 10주는 내분을 겪게 되었고, 북부 7주 역시 곤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북부 7주의 주요한 요새였던 마스트리히트(현재 네덜란드의 최남단에 위치한 도시)가 파르네세 공작의 공격으로 함락되었습니다. 이로써 당시 독립전쟁을 주도하던 빌렘의 명성은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빌렘은 결별선언문을 발표, 북부 7주로 구성된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합니다(1581). 이는 1579년 결성된 위트레흐트 동맹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이 즈음 포르투갈을 병합하고(1580) 승승장구하던 펠리페 2세는 파르네세 공작의 승전보에 방심했는지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앙주 공을 신임 총독으로 임명합니다(1581). 앙주 공은 사욕을 채우기 위해 앤트워프를 계속 공격하였습니다(1583). 파르네세 공작의 유화책으로 흔들렸던 남부 10주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네덜란드는 다시 혼미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러던 중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영웅이었던 오라녜 공 빌렘이 스페인 자객에게 암살됩니다.(1584) 이렇게 되자 북부 7주는 빌렘의 아들 모리츠(1567~1625)가 이끌게 됩니다. 또한 무능한 앙주 공 역시 프랑스로 소환되었습니다. 이로써 파르네세 공작은 다시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부임하였습니다. 파르네세 공작은 앙주 공이 들쑤셔놓은 덕에 다시 스페인에 저항하게 된 앤트워프를 13개월간 포위하여 함락시켰으며(1585), 이로써 남부 10주를 완전히 스페인의 치하에 두게 됩니다.[북해에 스페인 영지가 하나 콕 박혀있는 원인제공자입니다 -_-]
파르네세 공작은 북부 7주에 대한 공격을 세심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만, 본국에서는 파르네세 공작의 바람과는 달리 영국 공격을 결정하였습니다. 아르마다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결집하여 영국 본토에 상륙, 단숨에 런던을 함락하고 엘리자베스 1세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펠리페 2세의 계획은 파르네세 공작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파르네세 공작은 자신이 이끄는 스페인 정규군 3만과 함께 프랑스 북부의 됭케르크로 남하합니다. 또한 그의 군대가 탑승할 수송선들은 칼레에 기항시켜두었습니다. 산타크루즈 후작[세비야 왕궁에 있는 NPC죠]은 리스본에 130척의 무적함대와 3만의 군대, 그리고 파르네세 공작과 함께 사용할 군수물자를 집결시킵니다. 그러나 스페인의 무적함대의 출격은 전조부터 좋지 않았습니다. 집결 중이었던 1587년, 영국의 사략해적으로 기사 작위까지 받은 프랜시스 드레이크(1545~1596)가 카디스를 습격하여 스페인 함대에 타격을 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끄떡도 않는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인지 이듬해 스페인 무적함대는 5월 18일 리스본에서 출항합니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이 이끈 스페인 함대는 도버 해협을 목표로 북상하였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영국도 함대를 정비하여 하워드 경이 이끄는 해군을 둘로 나누어 시모어 경이 도버 해협을 경비하고 하워드 경은 드레이크 등과 함께 플리머스에서 스페인 무적함대를 습격하기로 합니다. 당시 스페인은 해전이 아닌 상륙을 준비하였기 때문에 북상하는 무적함대에서 실제 전투선은 20여 척에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군수물자를 실은 수송선(컨보이)들이었습니다. 상륙하는 육군을 호위하기 위해 단거리 함포(캐논포) 위주로 탑재한 스페인 군함들은 기동력 있게 다가오면서 장거리 함포(캘버린포, 칼로네이드포)를 발사하는 영국 갤리온들을 효과적으로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영국 해군의 원거리 사격으로 폭약을 수송하던 컨보이들은 화려하게 폭발해버렸고, 스페인 해군은 최선을 다해 칼레로 향했습니다. 이 도주 과정에서 영국 해군은 칼레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스페인 해군을 공격하여 제대로 된 일전도 벌이기 전에 스페인 해군은 진이 빠지고 맙니다.
7월 19일 플리머스 앞바다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한 스페인 해군은 칼레에서 정비한 뒤 영국에 상륙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네덜란드 해군 130여 척이 도버 해협을 봉쇄한 데다가 28일에는 영국의 화공선들이 칼레의 스페인 함대를 향해 돌진했습니다. 이로 인해 전열이 흩어진 스페인 해군은 이튿날 칼레와 됭케르크 사이의 그라블리느에서 영국 해군과 격전을 벌입니다. 8시간이나 이어진 이 해전에서 스페인 해군은 끝내 사거리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궤멸되어갔습니다. 이 와중에도 파르네세 공작은 지속적으로 영국 본토에 상륙하려고 하였지만 끝내 30km에 불과한 도버 해협을 건너지 못한 채 물러나게 됩니다. 결국 7월 30일, 스페인 해군은 북해를 떠나기로 결심하였지만 영국 해군의 지속적인 공격과 남하 중에 만난 폭풍으로 참담한 피해를 안은 채 54척의 전함만이 간신히 9월 23일 귀국합니다.
무적함대의 이러한 참혹한 패배는 스페인의 전성기의 종말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진압한다는 것은 이제 한낱 꿈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본국에서의 보급로가 영국과 네덜란드의 연합군에 의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파르네세 공작마저 1588년의 참패의 원인으로 지목받은 데 대한 충격으로 분사하자(1592) 스페인은 북부 7주에 대한 영향력을 사실상 상실하게 됩니다. 빌렘의 아들 모리츠가 이끄는 네덜란드 독립군은 영국의 도움을 받아 남하, 파르네세 공작이 어렵사리 일구어놓은 북부 7주 지방의 에스파냐 정복지를 탈환해갔습니다. 1595년에는 스페인에 호의적이었던 프랑스마저 스페인에 등을 돌려 앙리 4세(1553~1610)마저 영국, 네덜란드와 맹약을 맺음으로써 현 벨기에 지방의 스페인 군은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앙리 4세가 스페인에 등을 돌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앙리 4세는 본래 신교도였는데, 앙리 3세(1551~1589) 사후 신교도군을 이끌고 파리에 입성하여 즉위하였습니다. 이에 프랑스 내의 카톨릭 세력은 앙리 4세의 왕통을 부정하였고, 펠리페 2세가 이에 개입하여 앙리 4세를 축출하기 위해 프랑스를 공격하였던 것입니다(1589). 칼레에서의 참패를 똑똑히 목격한 프랑스인들은 펠리페 2세의 내정 간섭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앙리 4세는 자신의 왕통을 부정한 펠리페 2세의 행각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입니다. 앙리 4세는 1593년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프랑스 내부의 반대세력을 무마시켰지만, 스페인과의 관계는 그대로 틀어져버린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앙리 4세는 이후 낭트 칙령으로 프랑스 내에서 신교를 믿는 것을 전면 허용합니다(1598).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으로 네덜란드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조약이 1596년에 체결됩니다. 스페인으로서는 펄펄 뛸 일이었지만 1598년 펠리페 2세가 사망하면서 스페인이 네덜란드를 되찾을 가능성은 영영 사라지게 됩니다. 뒤이어 즉위한 펠리페 3세(1578~1621)는 펠리페 2세만한 군주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지속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북부 7주의 지역에서 스페인 군을 완전히 몰아내게 됩니다(1600). 그러나 국제적 고립에 빠졌던 스페인은 영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다시 네덜란드 수복에 나섭니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죽고 제임스 1세가 즉위하여 영국과 간신히 수교하게 된 스페인은 1607년 다시 네덜란드를 대함대로 공격합니다. 그러나 이미 몰락한 스페인 함대는 혈기왕성한 네덜란드의 함대를 이겨내지 못하고 참패합니다. 결국 1609년,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12년을 기한으로 한 휴전 협정을 맺게 되는데, 이는 사실상 펠리페 3세가 네덜란드의 독립을 인정했음을 의미합니다.
네덜란드는 이때부터 황금기를 맞이하여 세계 곳곳으로 함대를 파견합니다. 일취월장하던 네덜란드는 모리츠의 결정에 따라 스페인의 휴전 기간 연장 요청을 거부하고 스페인과 다시 전쟁에 돌입합니다(1621). 그러나 모리츠는 남부 10주에 대한 공격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죽었으며, 스페인도 30년 전쟁이 더 급해 네덜란드에 군대를 파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흐지부지 이어지던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네덜란드의 독립이 확실하게 인정되면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7세기 초 황금기를 맞았던 네덜란드는 독립을 확정하자마자 쇠퇴하기 시작,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의 항해조례(1651)와 영국과의 전쟁(1차 1652~1654, 2차 1665~1667, 3차 1672~1674), 루이 14세(1638~1715)의 팽창정책에서 비롯한 프랑스와의 전쟁(1672~1678)으로 완전히 유럽의 2등국가로 전락하게 됩니다.
제가 아는 내용하고 여기저기서 참조한 내용을 짜깁기해서 올렸는데...뭐 어떨지 모르겠네요. 게시판 성격에 안 맞는 것도 같지만 딱히 올릴 곳도 없고. 잘못된 내용은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