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아나테르님이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글을 올리셨고, 플로렌티노님이 그에 대한 부가적인 내용을 첨가하셨기 때문에 제가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이 불손한 일일 수도 있으나, 당시의 유명인사들의 이름이 일부만 언급되었고 사건들도 간략하게 나와있어서 감히 글을 쓰려고 합니다. 사실 6개국의 역사에 관한 글을 조금씩 써보려고 생각해도, 네덜란드의 독립전쟁과 프랑스의 위그노전쟁 외에는 뭔가 딱 이름붙일 사건이 별로 없어서 일단 쓰기 쉬운 나라부터 -ㅅ-
프랑스의 위그노전쟁은 보통 1562년을 그 공식적인 시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 그것도 내란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터지는 것이 아니겠죠. 프랑스의 위그노전쟁은 대부분 아시겠지만 종교개혁으로 촉발된 전쟁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프랑스 이벤트에 나오는 줄리앙[이름이 맞을까 모르겠습니다. 그냥 슥 읽어보기만 해서]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다면 응당 종교개혁에서부터 이 위그노전쟁의 시발점을 찾을 수 있겠죠.
종교개혁은 대부분 마르틴 루터(1483~1546)가 처음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교황청과 정면으로 대립하면서 신교의 불을 댕긴 것은 루터가 맞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주장한 것은 그 이전에도 프랑스에서 논의된 바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당연한 것으로, 당시 카톨릭의 권위가 추락을 거듭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쉽게 나오는 결론입니다. 십자군의 실패는 마호메트가 예수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냐는 단순하고도 위협적인 의문을 깊이 생각할 줄 모르는 농민들 사이에 퍼뜨리는 계기가 되었고, 생각이 깊어 십자군과 신앙을 어느 정도 분리해서 따질 줄 아는 사람들은 교회가 쥔 막대한 권력과 재물을 시기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불만을 키워가게 됩니다. 그리고 보르지아 가문의 알렉산데르 6세(1431~1503)와 같은 교황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조카 체사레 보르지아(1475~1507)를 시켜 로마냐에 강력한 국가를 설립하도록 하는 등 일반 민중에게는 경멸을, 유럽의 왕과 제후들에게는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황청 직속 사창가를 만들어 축재에 열을 올렸던 식스토 4세(1414~1484)가 고안해낸 면죄부는 교회의 권위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의 빌미가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카톨릭 교회의 부패는 교황청에 의하여 걸러진 라틴어 성서 대신 성서의 원전을 읽어 진정한 성서의 뜻을 알자는 운동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루터와 같은 강경한 개혁은 아니지만, 최소한 루터가 주장한 것의 기초는 이룰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르네상스로 인해 지적 수준이 높아진 인문주의자들은 그들이 익히고 있던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통해 성서의 원전을 읽고 영혼의 구제는 관습, 의식, 절차 등에 예속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1508년, 파리대학의 교수였던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1450~1537)은 구령(救靈)은 헌납이 아닌 신앙으로 얻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당시 교황청이 고수하던 많은 관습들을 비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용감하게도 성서 원전을 불어로 번역하여 간행합니다. 이어 1517년에는 루터가 비텐베르크의 성당에 95개조 논제를 못질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불을 붙입니다. 르페브르와 달리 과격했던 루터는 교황이 심지어 그리스도의 적이라고까지 하였고, 1520년 파문까지 당합니다. 루터는 이 파문장을 불태움으로써 교황청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루터와 비슷한 사상을 가진 자들에 대한 교황청의 압박이 시작되었습니다. 르페브르 역시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나 프랑수아 1세(1494~1547)와 그 누이 마르그리트(1492~1549)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복음주의에 동조하고 있었으며, 루터와 달리 온건하게 카톨릭의 테두리 내에서 복음주의를 통해 좀 더 신와 구령에 가까워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가 파문까지 받은 상황에서 프랑스에서 여전히 강성했던 카톨릭이 르페브르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수아 1세가 1525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1500~1558)에게 패하여 파비아에 유폐되자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카톨릭 세력이 대대적으로 공격을 개시합니다. 섭정이었던 루이즈 드 사부아는 프랑수아 1세처럼 적극적으로 복음주의를 옹호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는 국왕이 포로로 잡힌 국난의 상황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교회와 손을 잡았고, 드디어 종교개혁의 문제는 학술원에서 종교재판장과 화형장으로 옮아갑니다.
르페브르는 마르그리트가 파비아까지 가서 그를 보호하라는 서한을 얻어왔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으나 그와 동조하던 사람들은 모두 이단으로 규정되어 화형을 받게 됩니다. 프랑수아 1세는 유폐 1년만에 귀국했지만, 이렇게 과격해진 상황을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는 마르그리트와 고등법원 사이에 끼어 오락가락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복음주의에 심정적으로는 동조한다고 하나 온건주의는 모두 겁에 질려 교회를 지지하고 과격한 사람들만 남은 복음주의는 프랑스의 치안을 위협하는 일이었습니다. 복음주의의 대표자들은 1534년 영국의 헨리 8세(1491~1547)가 영국 국교회의 성립을 선언하자 그를 따라 프랑스 교회를 교황청에서 분리시킬 것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는 성왕[루이 9세(1214~1270)를 칭함]의 후손으로서 그럴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1533년 태자[후일의 앙리 2세(1519~1559)]를 메디치 가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1519~1589)와 통혼시켰기 때문에 카톨릭을 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마르그리트는 카트린을 설득하여 복음주의가 공인되도록 노력하였으나 성과는 없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희망이 옅어짐에 따라 더욱 과격해졌고, 드디어 교황의 미사가 끼치는 피해에 관한 벽보를 왕궁에까지 붙입니다. 이 벽보의 내용이 워낙 선동적이었기 때문에 프랑수아 1세는 복음주의에 크게 실망하고 더 이상 복음주의를 이단이 아니라고 비호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프랑수아 1세의 이러한 결단은 화형대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고등법원은 이단자들이 더 오래 고통에 몸부림치도록 불을 작게 하는 묘안[?]을 짜냅니다. 프랑수아 1세는 친히 화형장을 방문하여 고등법원에 권위를 실어주었습니다. 1538년, 프랑수아 1세는 완전히 카톨릭으로 돌아서 스페인과 같은 편을 이루게 됩니다. 고등법원은 갈수록 잔인해져 1545년에는 촌락 단위로 화형을 집행했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비록 그들을 지지한다고는 해도 촌락 단위의 화형까지는 바라지 않았으나 앓아누웠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남프랑스에서는 24개 촌락이 분멸되어 3천에 달하는 촌민이 화형당하였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유언으로 이 가혹한 행위를 한 자들을 처벌하라 하였으나 실제로 처벌을 받은 자는 전무했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복음주의를 거부했어도 과격한 탄압에는 반대했고, 누이 마르그리트는 언제나 복음주의의 편에 서서 그들의 방벽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이 모두 세상을 뜨고, 앙리 2세가 집정하면서 상황은 극으로 치닫기 시작합니다. 앙리 2세는 복음주의, 이때즘 가면 루터주의로 불리는 사상에 동조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 도리어 루터주의가 왕실을 위협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당시 신대륙에서는 다량의 금과 은이 유입되고 있었고 이로 인한 물가의 급격한 상승은 국민들이 루터주의에 빠지기 쉬운 조건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앙리 2세는 이에 1549년 고등법원에 이단에 대응하는 특별 법정을 설치하고 새로운 법령을 반포합니다. 이 법령은 간단한 조항 3개로 구성되었는데, 이단자의 재산의 1/3은 통보인에게 보수로 지급하며(밀고의 장려), 이단적인 서적의 판매와 소유는 금지하며(불관용의 장려), 모든 이단자는 사형에 처한다(잔인의 장려)는 것이었습니다. 간단하고 잔혹한 법령으로 인해 이단 사냥은 급증하게 됩니다.
그러나 상황이 묘하게 꼬여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루터주의에 왕족인 나바르 가문, 부르봉 가문, 콩데 가문 등이 물들어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법관들마저 교회의 굉장한 부패를 비난하고 나서자 앙리 2세는 분개하여 그들을 직접 화형시키겠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1559년 신하인 몽고메리 백작과 마상시합을 하다 눈을 찔려 죽게 됩니다.[앙리 2세의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에 관해서는 아나테르님의 글이 상세하므로 쓰지 않겠습니다] 앙리 2세가 죽어 루터주의에 대한 탄압은 잠시 수그러들었지만, 루터주의자들은 이제 더 이상 단순히 이단으로 있어서는 안 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교리와 조직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제공할 의사가 제네바의 칼뱅(1509~1564)에게 있었습니다. 칼뱅은 제네바를 거점으로 동맹시인 프라이부르크, 베른 등에 신교를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이 동맹을 뜻하는 독일어 Eidgenossen에서 프랑스어인 Huguenot가 나오게 됩니다. 앞으로 지겹게 들으실 위그노라는 단어입니다. 위그노는 프랑스의 신교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칼뱅에게서 교리와 조직을 제공받은 루터주의자, 아니 위그노들은 프랑수아 2세(1544~1560)가 즉위하면서 본격적인 반격을 준비합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강한 세 당파는 부르봉 가문, 기즈 가문, 몽모랑시 가문이었습니다. 부르봉 가문의 수장은 앙트완 드 부르봉과 동생 콩데 공이었습니다. 앙트완 드 부르봉은 프랑수아 1세의 누이 마르그리트의 딸 잔 달브레와 결혼하였기 때문에 그 아들 앙리[후일의 앙리 4세(1553~1610)]는 발루아 왕조가 단절될 시 왕위를 계승받을 것이었습니다. 기즈 가문은 본래 로렌 가문의 일원인 클로드(1496~1550)가 프랑수아 1세를 위해 공을 세워 기즈 가문이라는 이름을 얻어 생겨났습니다. 그 아들 프랑수아(1519~1563)는 칼레 탈환에 공을 세우는 등 프랑스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여담으로 말하자면, 칼레가 백년전쟁 때 영국에 넘어간 후로 프랑스가 되찾은 것은 1558년의 일입니다] 몽모랑시 가문은 프랑수아 드 기즈와 마찬가지로 수장 안느 드 몽모랑시가 원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몽모랑시 가문은 기즈 가문과 대립하고 있었으며, 안느의 조카 콜리니(1519~1572)가 위그노였기 때문에 위그노전쟁에서 더욱 격렬한 대결을 할 것이었습니다.
기즈 가문은 프랑수아 드 기즈의 질녀이자 스코틀랜드의 왕녀였던 메리 스튜어트(1542~1587)를 프랑수아 2세와 결혼시켜 먼저 권세를 장악합니다. 아직 프랑스에서는 카톨릭이 우위에 있었고, 위그노는 전면적인 저항을 결행할 의지를 확고히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기즈 가문에서 관용을 보였다면 기즈 가문의 통치도 수월하게 흘렀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개입된 분쟁은 결코 이렇게 좋은 해결을 보는 바가 없으며, 기즈 가문은 앙리 2세의 강경한 탄압책을 그대로 계승합니다. 기즈 가문의 독재는 수많은 정적들을 위그노의 동조자로 만들어버려 위그노전쟁의 단초를 제공합니다. 기즈 가문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 세가 욱일승천하던 위그노파는 무력 봉기를 시작합니다. 신성로마제국과의 평화조약으로 제대군인이 급증하여 병력 충원은 금방이었습니다. 위그노파 신학자들에게서 정당성을 확인받은 위그노들은 블루아와 앙부아즈로 진군하여 정권을 전복하려 시도하였으나 변호사 아브넬의 배신으로 좌절, 기즈 가문에게 토벌당합니다. 프랑수아 2세 대신 왕으로 추대될 예정이었던 콩데 공은 비록 점잖은 대우는 받았으나 기즈 가문에 의해 감시당하게 되고, 나머지 주모자들은 모조리 처형당하는 등 잔혹한 보복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기즈 가문이 이렇게 위세를 떨칠 때 그들의 기반이었던 프랑수아 2세가 중병에 걸립니다. 기즈 가문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프랑수아 2세의 쾌유를 빌어 로렌 추기경[기즈 가문이 로렌 가문에서 나왔으나 로렌 추기경은 기즈파입니다]은 국왕의 쾌유를 위한 기도 행렬을 거행했고, 기즈 장군은 국왕이 서거하면 의사들도 모조리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수아 2세는 회복하지 못했고, 재위 1년만에 숨집니다. 기즈 가문은 권력의 기반을 잃은 채 프랑수아 2세의 동생 샤를 9세(1550~1574)가 즉위하는 것을 지켜봅니다. 샤를 9세는 10살이었기 때문에 섭정이 필요했습니다. 누가 섭정이 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고, 기즈 가문과 부르봉 가문이 대립하는 틈을 타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양측을 교묘히 이용하여 섭정이 됩니다. 그녀는 대립하는 양측 모두에 손을 내밀었고, 두 세력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시도합니다. 그리고 1560년 오를레앙에서 삼부회를 개최하여 프랑스의 종교분쟁을 해결하고자 합니다.
당시 재상이었던 미셸 드 로피탈(1505~1573)은 신구의 구별을 버리고 국민교리회를 설립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를 위하여 태후는 일단 지금까지 있었던 위그노의 예식 금지를 풀고 위그노들이 자유롭게 예배하는 것을 허락합니다. 이에 분개한 카톨릭과 고등법원은 반발했고 교황은 국민교리회의 설립을 금합니다. 태후는 다시 공개 토론을 벌여 종교분쟁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종교와 관련된 분쟁을 공개 토론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순진한 희망은 금세 무너집니다. 로피탈의 합리적인 제안은 양쪽 모두에게 거부당하였습니다. 태후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위그노에게 관대한 정책을 펴며 양측을 동등하게 대우하려고 노력합니다. 1562년 위그노의 집회를 허가하고 양측의 무기 휴대를 모두 금지하는 법령이 내려졌지만, 이미 이러한 법령 따위로 해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와 제네바가 한치도 양보하지 않고 팽팽히 겨루는 상태에서 기즈 장군과 콜리니 제독이 화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파리에서는 위그노의 집에 방화가 벌어졌고, 남프랑스에서는 위그노파가 카톨릭 교회를 습격하게 됩니다. 태후는 불안을 느껴 콜리니 제독에게 왕조를 수호하기 위하여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인지 묻게 됩니다.
이는 양쪽 모두가 바라던 바였습니다. 합리적이고 평화적인 해결책 따위는 양쪽 모두 바라지 않았습니다. 남은 것은 오로지 내전뿐이었습니다. 그리고 1562년 3월 1일, 기즈 장군이 바시에서 위그노파의 기도회와 맞닥뜨려 공격을 명령, 수십의 신자를 살해합니다. 카톨릭에서는 단순한 사고로 치부했지만 위그노파에서는 학살이라 분격하며 군대를 동원합니다. 유폐에 가까운 상태였던 콩데 공은 위그노파의 동원령을 내렸고 기즈 장군은 급히 파리로 상경하여 콩데 공을 다시 붙들었습니다. 기즈 장군은 파리에 입성하면서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송을 받았고 파리 시민 모두가 국왕 대신 그에게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습니다. 이제 유화정책은 완전히 물건너갔습니다. 드디어 위그노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위그노전쟁은 처음부터 심상치않은 규모로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직접적이고 공식적인 파병은 없었지만 스페인의 펠리페 2세(1527~1598)는 카톨릭을 적극 지원했고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위그노에 대한 성원을 계속했습니다. 처음에는 프랑스의 자주권이 달린 일이라 국내의 병력만으로 끝을 보려 했지만 불리한 상황이 될때마다 스위스, 스페인, 독일 등지에서 용병들이 유입되었습니다. 제대군인들은 농촌을 휩쓸고 다녔고 곳곳에서 도적들이 출몰했습니다. 최고위층은 포로가 되어도 정중한 대우를 받았으나 다른 자들은 참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프랑스는 온갖 악행에 휩쓸렸습니다. 나바라의 왕이며 왕의 인척이었던 앙트완 드 부르봉이 전사하였고, 몽모랑시 원수와 콩데 공은 포로가 되었으며, 기즈 장군마저 위그노파의 귀족에게 암살당합니다. 고작 1년 사이에 이렇게 전황이 어지럽게 돌아가는 와중 콜리니 제독은 기즈 장군의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자 '기즈의 죽음은 왕국과 자신의 교회, 그리고 나에게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하며 상대를 조롱했습니다. 1563년 기즈 장군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1년만에 기진맥진한 양측은 강화를 맺었습니다. 아무 조건도 없이 맺어진 이 파격적 강화는 재정비를 위한 시간벌기에 불과했습니다.
카톨릭은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위그노파 역시 라로셸과 같은 요새들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뇌부의 강화는 프랑스의 치안을 회복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남프랑스에서는 성당과 수도원이 약탈당했고, 상대측에 대한 비적행위는 신앙심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궤변이 널리 퍼졌습니다. 태후는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도 스페인과 영국 모두에 우호를 청하였고, 이는 도리어 양쪽 모두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강화는 여러 해를 넘기지 못하고 깨졌으며, 위그노파는 앙리 드 부르봉을 새로운 수장으로 하여 재정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초기의 전투는 카톨릭의 승리로 끝났고, 콜리니 제독은 남프랑스로 도피하였다가 신병을 모아 파리를 재점령하였습니다. 파리를 점령하고 궁을 장악한 콜리니 제독은 1570년 온건한 카톨릭인 폴리티크파와 강화를 맺었습니다. 프랑수아 드 기즈의 아들로 새로이 기즈 가문을 이끌던 앙리 드 기즈(1550~1588)와 로렌 추기경은 파리를 탈출했고 위그노파가 결정적 우위를 점한 것 같았습니다. 태후마저 자신의 딸 마르그리트(1553~1615)를 앙리 드 부르봉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아들 앙주 공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통혼시켜 신교국과의 유대를 공고히 하고자 했으나 엘리자베스 1세의 거절로 실패합니다.
태후는 평화를 위해서 이러한 조치를 취했으나 이 결혼식이 새로운 비극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콜리니 제독은 승리를 자부하고 카톨릭을 경시하였으며, 일찌감치 스페인과의 전쟁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나바라 왕국, 영국의 지원을 받는다면 스페인을 타도할 수 있다는 콜리니 제독의 자신만만한 말은 내전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난 샤를 9세에게 매력적으로 들렸고, 전쟁을 반대하는 태후를 배제하고 작전을 모의했습니다. 태후는 대노하여 콜리니 제독이 자신의 아들을 뺏고 프랑스를 무모한 전쟁으로 끌고간다고 여깁니다. 태후는 콜리니 제독을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고 기즈 가문과 공모, 1572년 8월 22일 콜리니 제독을 저격합니다. 그러나 콜리니 제독은 팔에 총을 맞아 목숨을 건졌고, 카톨릭에게는 더더욱 공포심을 안겨주었습니다. 샤를 9세가 총애하는 콜리니 제독이 저격당했으니 철저한 조사의 명령이 떨어진 것은 당연했고, 오래지 않아 분명 태후와 기즈 가문에까지 그 조사의 손길이 미칠 것이었습니다. 태후는 프랑스의 평화와 종교적 화합을 포기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태후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결단을 내립니다.
앙리 드 부르봉의 결혼 때문에 파리로 모인 위그노들은 콜리니 제독의 저격에 분개하고 있었고, 전통적으로 카톨릭 도시였던 파리 시민들은 이들을 적대시하게 됩니다. 8월 23일 저녁 태후는 샤를 9세에게 자신의 행위를 털어놓고 위그노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왕실이 무너질 것임을 설득합니다. 샤를 9세는 오래도록 고민했으나 결국 사태를 되돌릴 수 없음을 인지, 콜리니 제독을 구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태후의 요청을 승인합니다. 8월 24일 새벽 1시 반, 생제르맹의 종이 울렸습니다. 학살의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카톨릭 교도들은 무차별적으로 위그노들을 죽였습니다. 콜리니 제독은 명예롭게 자결했고, 파리에서는 4천에 가까운 위그노들이 학살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방에서도 학살이 성행하여 며칠만에 1만이 넘는 위그노들이 죽었습니다. 이 성바르톨로메오의 학살은 위그노전쟁 최대의 비극이었습니다. 왕가와 인척관계였던 앙리 드 부르봉과 동생 콩데 공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개종을 강요받게 됩니다. 이 학살의 소식이 전해지자 엘리자베스 1세는 조의를 표하였으나 펠리페 2세는 싱글벙글하며 '내 생애 가장 기쁜 일'이라는 축사를 프랑스에 보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1502~1585)는 신의 은총에 감사하는 찬송가를 부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학살이 위그노전쟁의 끝을 알릴 수는 없었습니다. 위그노파가 일격을 맞기는 하였으나 뿌리가 뽑힌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해가 바뀌자마자 위그노파는 다시 저항을 시작합니다. 이들은 남프랑스에서 새로운 행정조직을 발표하며 카톨릭 프랑스와 구별되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위그노전쟁이 다시 격화되던 1574년 샤를 9세가 성바르톨로메오의 학살 이후 우울증에 시달리다 병사합니다. 그리하여 동생 앙리 3세(1551~1589)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지만, 폴란드의 왕이던 그가 프랑스로 돌아오는 비용을 마련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프랑스의 국고는 바닥이 난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돌아온 앙리 3세는 앙리 드 부르봉이 1576년 파리를 탈출해 위그노가 세운 공화국으로 가게 되어 전쟁이 재발할 것 같자 신교도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으로 그 전쟁을 막으려고 합니다. 위그노의 안전보장, 예배의 자유, 관직에 오를 권리 등을 주면서 그들을 회유한 것입니다. 당시 식비조차 없었던 앙리 3세로서는 전비를 지출할 방도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전비로 쓸 자금을 축적하느라 양측은 8년이란 세월을 증오심을 품은 채 대치하였습니다. 그러나 1584년 정국을 다시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발생합니다. 태후가 한때 엘리자베스 1세와 통혼시키려고 했던 앙리 3세의 동생 앙주 공이 숨진 것입니다. 앙주 공의 사망으로 앙리 3세가 죽을 시 왕위를 계승받을 사람은 앙리 드 부르봉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정국은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축성받지 못한 것은 물론 파문당한 왕을 맞이한다는 기묘한 사실 외에도 카톨릭이 대세를 이루고 있던 프랑스에 또 어떤 피바람이 불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앙리 드 기즈는 이대로 두면 카톨릭이 무너질 것으로 여기고 앙리 3세가 죽기 전에 앙리 드 부르봉을 제거하여야겠다는 생각을 굳힙니다. 앙리 드 기즈는 자신의 조상인 로렌 가문이 샤를마뉴 황제의 후손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설령 그것이 증명된다손쳐도 앙리 3세의 22촌 종제인 앙리 드 부르봉보다 먼 것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펠리페 2세는 카톨릭 측에 병력 지원까지 약속하며 프랑스에 신교도 국왕이 나오는 것을 막고자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카톨릭 측의 주의를 끌기 위해 칼레와 르아브르를 반환할 것을 요청하며 무력행사를 할 의지도 있음을 내비쳤습니다.
그러나 기즈 가문과 카톨릭 측에 둘러싸인 앙리 3세는 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권한을 앙리 드 기즈에게 일임하였고 1576년의 관용적 칙령은 폐지되었습니다.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위그노전쟁의 막바지인 이 전쟁은 앙리 드 발루아, 앙리 드 부르봉, 앙리 드 기즈가 주역이었기 때문에 3앙리전쟁이라고도 합니다. 태후는 더 이상 개입할 힘이 없음을 깨닫고는 평생의 노력이 헛수고로 되는 것을 보며 탄식만 계속했습니다. 앙리 드 기즈는 정국을 쥐기 위해 앙리 3세와 대립했고, 앙리 3세는 1588년 5월 앙리 드 기즈를 파리에서 추방합니다. 그러나 앙리 드 기즈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파리에 입성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앙리 3세는 이에 격분하여 군대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파리의 시민들은 바리케이트를 치고 국왕의 병사들에게 공격을 가했습니다. 루브르 궁까지 시위대가 몰려들자 도리어 앙리 3세가 파리를 탈출해야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종교적 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앙리 3세는 카톨릭 세력을 적으로 규정했습니다.
앙리 드 기즈는 머뭇거리는 통에 왕을 칭하지 못했고, 이 사이 블루아로 피신한 앙리 3세는 앙리 드 기즈에게 굴복하는 척하면서 그를 블루아로 불러 암살합니다. 로렌 추기경도 바로 체포되어 처형당하였습니다. 태후는 대경하였지만 상황은 그녀의 손을 벗어났습니다. 그녀는 절망하며 병석에 누워 해가 바뀌고 며칠만에 숨을 거둡니다. 그러나 블루아의 암살이 카톨릭 동맹의 명맥을 끊지는 못했습니다. 파리는 분노로 들끓었고 앙리 3세는 벌써부터 '선왕'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카톨릭 동맹은 앙리 드 발루아와는 교섭할 수 없다며 완강하게 버텼고, 파리에서는 10만에 달하는 인파가 촛불을 들고 집회를 벌이며 일시에 그 촛불을 모두 끄면서 발루아 왕조의 운명이 이럴 것이라고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주는 이 집회는 무력한 저항에 불과했습니다. 앙리 3세는 프랑스군의 정당한 총사령관으로서 군대를 모았고, 앙리 드 부르봉을 투르로 불러 휴전을 맺고 파리로 함께 진군하기로 결정합니다. 파리를 포위되었고, 카톨릭 동맹은 절망적인 상황에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패배는 피할 수 없다는 인식이 퍼진 가운데 블루아의 복수를 하자는 분위기가 파리에 널리 퍼졌습니다.
그리고 도미니크파 수도사 자크 클레망이 왕의 시역이 신에 대한 죄가 되는지를 문의하여 무죄를 보증받고 1589년 8월 1일 앙리 3세를 배알한 자리에서 그를 암살합니다. 비록 살아있을 때는 여성적이다, 엽색행위를 일삼는다 등등 갖은 추문이 있었지만 그의 임종은 국왕다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왕국의 장래만을 염려하는 유언을 남겼고, 앙리 드 부르봉에게는 왕위를 물려줌과 동시에 왕국의 효과적인 통치를 위한 개종을 권고했습니다. 앙리 3세의 부고가 전해지자마자 파리의 카톨릭 동맹은 앙리 3세의 시해는 합법적이며 앙리 드 부르봉은 파문된 자로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권리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앙리 드 부르봉은 일단 앙리 4세로 즉위하였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앙리 4세는 개종에 큰 거부감을 느끼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왕이 되기 위하여 평생을 지켜온 신앙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불명예스럽게 비칠 것인지 우려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적시라는 판단이 설 때까지 개종을 미루기로 합니다. 그는 카톨릭의 교육을 받고 개종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는 카톨릭 신자 중에서도 프랑스와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대를 건다는 말로 그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앙리 드 기즈의 동생 마옌 공은 그렇게 참을성이 좋은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추기경 부르봉을 샤를 10세로 추대하고 앙리 4세에게 도전합니다. 그러나 앙리 4세에게 설득당한 카톨릭 동맹은 그에게 동조하지 않았고, 앙리 4세는 1만의 군사로 진군, 디에프에서 그의 군대를 격파하였습니다. 카톨릭 동맹은 스페인, 사부아 등 외세와 결탁하였다는 이미지 때문에 약화되었고, 마옌 공도 앙리 4세에게 굴복합니다. 평화를 갈구하던 프랑스 국민들은 앙리 4세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보냈습니다. 도적이 아니고서는 3주를 지탱할 물자를 지닌 자가 없다고까지 칭해지던 프랑스의 비참한 상황은 강력한 군주를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앙리 4세는 파리 입성을 할 때가 왔음을 깨닫습니다. 앙리 3세가 죽은 이후로도 파리는 앙리 4세의 입성을 거부하고 있었으나 1593년 파리에서 삼부회가 열립니다. 카톨릭 세력이 펠리페 2세의 딸을 왕위에 앉혀서라도 앙리 4세를 거부하고자 함을 안 대의원들은 경악하였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앙리 4세에게 개종하여 정통성을 지닌 프랑스의 왕이 되어주기를 요청합니다.
앙리 4세는 드디어 파리와 프랑스를 굴복시킬 때가 왔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1593년 7월 25일 생드니에서 개종을 하게 됩니다. 카톨릭 동맹은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고 완전히 해체되었고 1594년 3월 앙리 4세는 그렇게나 염원하던 파리에 입성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보복을 금지하고 관용을 선포합니다. 그는 인내심을 발휘하여 정적들을 감화시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는 최대의 정적 마옌 공에게도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관절염으로 고생하던 마옌 공을 자신과 같은 속도로 뛰게 한 것으로 복수를 마친 앙리 4세는 스페인과도 협상을 벌여 친선관계를 회복하였습니다. 물론 1596년 네덜란드의 독립을 승인하는 조약에 서명한 것으로 보아 완전히 감정을 삭힌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교황청과의 관계도 회복되어 프랑스의 교회는 예전에 인정된 자주권을 확인받았습니다. 그러나 골수 위그노파는 관용을 베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앙리 4세의 개종을 배신으로까지 여긴 위그노파는 앙리 4세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개종하지 않았습니다. 앙리 4세는 위그노파의 불만을 이대로 묵과했다가는 다시 내전이 터질 것을 우려,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위그노파를 달래고자 노력합니다.
위그노전쟁의 종식점이라고 여겨지는 1598년의 낭트 칙령은 휴전 협정에 불과했습니다. 현재 위그노파가 장악한 지역에서 위그노가 자유롭게 예배를 올리는 것, 재산, 학문, 관직의 분야에서 위그노에게도 카톨릭 신자와 마찬가지 권한을 주는 것, 현재 위그노파가 장악한 지역을 위그노파가 신앙의 안전지대로 점유함을 허락하는 것, 양측의 분쟁 조정을 위해 카톨릭 신자 10명, 위그노 6명으로 이루어진 특별 법정을 설치하는 것이 칙령의 골자였습니다. 프랑스의 국교를 카톨릭으로 인정하고 짜여진 칙령이라 위그노에게 불리한 점이 많았음에도 카톨릭 측에서는 반발이 심하여 앙리 4세가 고등법원을 힘으로 굴복시켜야 하기도 했습니다. 이 칙령은 위그노가 지방의 150여 요새를 점거하는 것을 허락하여 프랑스 내에 사실상 다른 나라가 존재하는 것을 허용한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내전이 재발할 불씨를 남겨놓은 채로 선포된 낭트 칙령의 이 안전지대 조항은 루이 13세(1601~1643) 때 폐지되었고, 루이 14세(1638~1715) 때인 1685년에는 칙령 전체가 철폐되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개가를 올렸을지 모르나 40만에 가까운 신교도가 국외로 탈출하여 프랑스의 국력 출혈이 심했습니다. 이 신교도들은 대개 상인, 공예인, 기사, 군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글이 너무 길군요 -ㅅ- 뭐 혹 이 분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셨다면 도움이 좀 되었을라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