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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HK416) 고슴도치

아이콘 렝가는op다
댓글: 4 개
조회: 1804
추천: 6
2018-03-09 02:13:26




1.

 

 

 “. 416. 네 손으로 끝내는 거야.”

 은색의 머리카락, 검은색 후드 옷, 손에 들린 검은색 서브 머신건을 들고 있는 소녀가 나에게로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 저 고통을 끝내 줘야 하지 않겠어?”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하던 여자가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 에이~ 416~ 그렇게 험악한 표정 짓지 마~. 이건 네가 자초한 결과야. 그리고 이건 내가 너에게 주는 최대한의 호의고.”

 바닥에 쓰러져있는 나를 무시하고 지나간 그녀가 416의 앞에 섰다. 곧이어 416의 다리에 묶여있는 권총을 꺼내서 친절히 건네준 그녀가 말했다.

 “네 손으로 끝내.”

 시야가 점점 더 흐려져 갔다. 배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내 머리카락을 적시고 가파른 호흡이 차가운 공기에 펴져나갔다.

 밤하늘이 보였다.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이름은 전부 까먹었다. 저 별이 북극성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별빛들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별들도 계속해서 바라보자 하나 둘씩 나타나 주었다.

 416과 대화를 나누던 검은색의 그녀가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느리고 가벼운 발걸음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가 내 옆에 선 직후, 순간 복부에 가해지는 고통이 더욱 심해졌다.

 작은 신음과 함께 기침을 멈추지 않았다.

 “이것 봐. 아직 살아 있잖아. 빨리 쏘지 않으면 고통만 받다가 죽게 될 걸?”

 416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강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자 검은 옷의 소녀가 내 배를 더욱 강하게 누르며 말했다.

 “빨리 결정해~이윽고 그녀의 말투가 싸늘하게 변했다. “난 참을성이 그리 강하지 않으니까.”

 아팠다. 총에 뚫린 배의 구멍도, 체중이 실린 신발도 너무나 아프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이 고통을 끝내주었으면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살아가면서 처음 느껴본 죽음의 공포와 고통이 나를 나약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내 눈앞에 고통을 끝내줄 푸른 머리의 구세주가 다가왔다.

 그녀가 천천히 총구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총구가 내 머리 앞에서 멈춰 섰다.

지금 내리고 있는 밤이슬처럼 그녀의 볼에도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 문신위로 흐르는 붉은 빛 눈물이었다. 그녀의 눈물 앞에서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마음가짐뿐이다.

몸이 점점 차가워졌다. 손발의 감각은 없어진지 오래였고 점점 의식도 몽롱해져갔다. 피를 많이 흘린 탓 일까.

 잘 떠지지도 않는 눈꺼풀을 들어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푸른색 머리칼이 흩날렸다.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발악하는 그녀의 떨리는 무표정이 보였다. 그녀가 떨리는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입에서 붉은색 액체가 흘러나왔다. 연약해 보이는 손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총구가 흔들렸다. 약하게 들리는 숨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못해.”

 약하고, 떨리는 얇은 목소리였다.

 그녀의 볼에서 흐르던 눈물이 턱에서 뚝하고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네 방울.

 나는 그저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약하기에, 나에게는 아무런 능력도, 힘도 없기 때문이다.

 탕!

 고요한 어둠에 난데없는 총성이 울렸다.

 다리에서 엄청난 고통이 올라왔다. 살이 뚫리고 뼈가 부서지는 고통이 내 머릿속을 헤엄쳤다. 뇌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숨을 쉬는 것도 잊게 만드는 고통을 그대로 마주하는 했다. 손이라도 꽉 쥐고 고통을 참아보고 싶었지만, 손에 힘이 전부 풀려버려서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땅위에 올라온 지렁이처럼 발버둥을 치는 게 고작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하는데, 정말 겨우 꿈틀만 할 수 있었다.

 짜릿한 고통이 음주단속을 하는 경찰처럼 내 사고를 틀어막았다. 그런 와중에도 내 위에 서있는 은빛머리카락에 대한 공포만은 느껴졌다. 온몸이 공포에 물들었다. 호흡이 떨리고 온몸이 떨렸다. 진정해보려고 노력할수록 두려움은 더욱 증폭되어서 돌아왔다.

 내가 고통에 몸부림치자 검은 옷의 소녀가 내 가슴팍을 강하게 찼다.

 엄청난 충격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가슴을 팔로 감싸 안고 몸을 웅크렸다. 자연스럽게 내 몸부림은 제압되었다. 다 죽어가는 숨을 겨우겨우 헐떡였다.

 “...뭐하는 거야....”

 “내가 말했잖아. 난 참을성이 부족하다고~ 빨리 안 쏘면 이번에는 팔에 두 방 쏠 거야.”

 416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416이 검은 옷의 소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런 미친...싸이코같은 개새끼...”

 검은 옷의 소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평온한 바람이 불었다. 대지의 신이 나를 감싸주는 기분이다. 온몸이 따듯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죽는다는 게 점점 실감되기 시작했다. 땅에 묻힐 육체를 벌써부터 마중 나와 준 걸까. 이런 걸 좋아 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 고통이 조금 진정된 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려 416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검은 옷의 소녀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여전히 흔들리는 총구가 그녀의 심리 상태를 보여주었다.

 “죽여 버릴 거야

 그녀의 눈에는 살의가 가득했다.

 “날 죽이면? 그 다음엔? 돌아갈 곳은 있어?”

 “그딴 건 상관없어

 “정말? 그렇다면 쏴.”


 탕!

 

 

 

 

2.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습도가 높고 끈적끈적해서 매우 불쾌했다. 이런 날씨에는 집에서 샤워를 하고 자는 게 최고다. 다만

 “망할 야근

 나는 야간업무중이다. 시간은 벌써 새벽 3시가 다 되어갔다. 내 앞 책상에서 업무 중이던 카리나는 이미 잠들어있었다. 하는 수없이 그녀의 옆에 놓여있던 대량의 보고서를 가져왔다. 이것도 이제는 내 것이다.

 아. 자살하고 싶다. 라는 장난 섞인 생각을 잠시 했다. 나는 다리를 의자 앞으로 쭉 내밀어서 허리를 쭉 피고 누웠다. 더욱 굵어진 빗방울은 유리창을 두드렸다거센 바람소리가 빗방울을 열심히 도와주었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흘러내리는 물줄기들 너머로 나무들과 산들이 보였다. 원래는 녹색이어야 할 배경이 검은색으로 물들어있다. 막막하고 어두운 상황에 어두운 세상.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까.


 나는 책상에 쌓여있는 서류들을 무시하고 지휘실을 나섰다. 지금시간에는 외출이 금지이므로 갈 수 있는 곳은 단 하나, 옥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떨어질 생각은 전혀 없다. 아무리 업무가 힘들고 가끔 충동이 일어난다 해도 나는 지금 내 삶에 만족한다.

 

 옥상에는 한 번도 가 본적이 없지만 그냥 막연한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손에는 녹이 슬은 검정 우산을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어두운 계단에는 녹색 비상등만 켜져 있었지만 올라가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 진짜 되는 일 하나 없네.”

 옥상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문 앞에는 붉은 색 글씨로 출입금지라고 세로모양으로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순간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나는 아까부터 쌓여왔던 스트레스를 담아 문을 한번 세게 때렸다.

 큰 소리가 났다.

 그게 내 손이 부서지는 소리인지 문이 부서지는 소리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소음과 동시에 두 가지 변화가 내 앞에 펼쳐졌다. 첫 번째는 내 손이 무지하게 아프다는 변화고, 두 번째는 문이 열렸다는 변화다.

 나는 살이 벗겨져서 피가 흐르는 손을 반대쪽 겨드랑이에 끼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진짜 아프다. 내가 왜 그랬을까. 아 잠깐만, 미치겠네.

 나는 그 상태로 계속 쭈그려 앉아서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숨도 못 쉴 고통이었다. 통증에 둘러싸인 나는 누군가 내 앞에 서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누구신데 거기서 그러고 있는 거죠?”

 위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땅에 닿아있던 무릎이 옆으로 넘어졌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비에 젖어 눌린 푸른색의 머리카락, 그 위에 쓴 검은색 베레모, 그 밑으로 보이는 녹색 눈동자. 누구지?

 분명 그리폰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과 인형들의 이름과 얼굴을 외웠을 터인데. 내가 모르는 얼굴이라는 건 정말 이상했다.

 설마 외부 침입자 인건가? 아니지. 침착하게 생각해보자. 외부 스파이라면 내가 이러고 있을 때 말을 걸게 아니라 나를 바로 죽였을 거다. 그렇다는 건 외부 침입자도 아니면서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 인건가.

 나는 주저 없이 말했다.

 “당신 누구야.”

 “제가 먼저 묻지 않았나요? 누구시죠?”

 “나는 이번에 새로 부임된 지휘관이다. 당신은 누구지? 소속이 어디야.”

 그녀는 녹색의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지휘관이라는 말에도 전혀 놀란 기색이 없어보였다.

 그녀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런가요? 그럼 돌아가서 잠이나 자세요.”

 그녀는 자기 말만하고 내 옆을 스쳐지나 갔다. 궁금증이 더욱 커졌다.

 “잠깐만, 이름이 뭐야?”

 푸른 머리카락의 여자는 내 말을 무시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비에 젖은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갔다. 손의 고통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다. 걸음이 생각보다 빠른 그녀를 따라 잡은 건 계단을 전부 내려간 1층 복도에서였다. 그녀의 등을 보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내 말 안 들려?”

 내가 어깨에 손을 올리자 그녀가 내 손을 쥐어 잡았다. 그녀가 손을 잡을 때 비로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다친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고통을 잠시 잊어버린 게 문제가 되었다.

 그녀가 내손을 세게 쥐어 잡으며 말했다.

 “이 이상의 관심은 위험해요. 지휘관.”

 동시에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까의 충격으로 약해졌던 뼈가 부서진 것 같았다.

 아까보다 더 아픈 고통이다. 내 손을 건드릴 수도 없었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밀착했다.

 나의 사정을 모르는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엄살 부리지마세요,”

 당장이라도 상황 설명을 하고 싶었지만 꽉 물고 있는 어금니를 놓으면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목을 붙잡고 멀어지는 그녀의 발걸음을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한 10걸음을 걸었을 때 그녀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옷에 몇 번 손을 닦더니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내 옆에 쭈그리고 앉은 그녀가 내 다친 오른손을 거칠게 잡아서 눈앞으로 가져갔다.

 “피가 나시네요.” 그녀가 내손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말했다. “걸을 수 있겠어요?”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내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르더니 나를 일으켜 세웠다. 다리가 풀려서 몇 번 넘어 질 뻔 했지만 나름대로 걸을 수는 있었다. 그리곤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낮에는 여러 인형들이 시끄럽게 돌아다니는 복도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의 젖은 옷의 물기가 내 옷을 물들였다. 축축함이 느껴졌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손이 박살이 났는데 누가 과연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있을까.

 

 나는 그녀를 슬쩍 쳐다보았다. 아까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붉은색 눈물 문신이 보였다. 순간 고통을 잠시 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냥 바라보았다. 계속 바라보았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처럼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의 고통이 다시 느껴진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우리는 의무실에 도착했다. 내 사원카드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두운 병실이 나왔다. 푸른 머리카락의 여자는 나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앉히고 무언가를 가지러 갔다. 손의 통증은 거의 가라앉긴 했지만 움직일 때마다 다시 아파왔다.

 다시 나타난 그녀의 품에는 온갖 의료 도구들이 가득했다. 침대위에 수많은 약통과 붕대, 주사기를 내려놓은 그녀가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순순히 내 손을 그녀에게 주었다. 손을 받은 그녀가 상처 주위에 이상한 주사기를 몇 번 찔러댔다.

 “뭐 하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가 대답했다.

 “마취요.”

 “마취라니?”

 그녀가 주사기를 빼며 말했다.

 “싫으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잠자코 있으세요.”

 주사기의 약물이 들어가고 시간이 지나자 신기하게도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내 손을 약하게 때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신기하다. 내 손인데 내 손이 아니게 되어버린 기분이다.

 내 표정을 유심하게 살피던 소녀가 메스를 집어 들었다.

 “잠깐, 뭐 하려는 거야.”

 “고개를 돌려주세요.”

 “뭐하려는 거냐니까?

 “뼈를 맞춰야 해요. 걱정마세요.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니까요.”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싫으시면 내일 아침까지 여기서 기다리시던가요.”

한숨만 나왔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내일 아침까지 고통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알았어. 마음대로 해
 나는 고개를 반대로 돌리며 말했다.

 그렇게 그녀의 수술이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내 팔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걸로 봐서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옥상에는 왜 있었던 거야?”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신경 꺼요.”

 “...그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긴 침묵이 이어졌다. 말을 더 걸었다가는 그녀가 홧김에 내 손을 망쳐버릴 것 같아서 말을 걸지도 않았다.

 병실창문에 비치던 밤하늘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고요하게 내리는 빗소리만이 우리사이에 흘렀다. 적막하고 소란스러운 빗줄기였다.

 점점 떠오르는 태양이 얼굴을 살짝 내밀었을 때 비로소 그녀의 수술이 끝났다.

 “끝났어요.”

 나는 창가에서 눈을 돌려 손을 보았다. 손에는 붕대가 단단히 매어져있었다. 이 상태로 사람을 때린다면 아마 한 번에 죽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이번에는 시선을 그녀에게 돌려보았다.

 깜짝 놀랐다.

 그녀의 모습은 매우 초췌했다. 옷과 장갑에는 내 피로 보이는 혈흔이 가득하고, 눈빛은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르게 힘이 없어보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나를 위해서 온 힘을 다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괜찮아?”

 “괜찮아요. 신경 꺼요.”

 그 말을 마치고 소녀는 침대위에 엎어져버렸다.

 

3.

 

 쓰러진 소녀를 업은 채로 내 숙소에 도착했다. 원래대로 라면 그녀의 숙소로 향해야하는 게 정상적이지만 나는 그녀의 이름도 모른다. 숙소를 어떻게 알겠는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나는 소녀를 침대위에 눕혔다. 곤히 자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아까전과 대비되었다. 만약 사진으로 찍어서 비교를 하면 분명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것 같았다.

 다음으로는 그녀의 젖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옷은 물기 가 거의 없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물기가 묻어 나왔다.

 “갈아...입혀야 할 텐데...”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만약 내가 한다면 분명 잡혀갈 것이다. 게다가 만약 갈아입히다가 깨어난다면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나는 손으로 뒤통수를 몇 번 벅벅 긁었다.

 그때였다.

 똑똑.

 “지휘관씨~”

 평소처럼 나를 깨워주러 온 Kar98K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야?”

 “, 깨어나 계셨네요. 평소처럼 문안을 온 것뿐이랍니다. 깨어나신 것을 확인 했으니, 저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순간 좋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로 방문을 열고나가 현관문을 열고 그녀에게 말했다.

 “잠깐 들어와 봐. 부탁할게 있어.”

 Kar98K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 ..갑자기 이러시면 곤란하답니다. 지휘관씨.”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팔을 잡아당겨 집안으로 이끌었다. Kar98K는 왠지 몰라도 순순히 들어와 주었다.

 집안에 들어온 Kar98K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현관에 뻘줌하게 서있었다.

 그녀가 두 손을 맞잡고 손가락을 배배꼬며 말했다.

 “.....그래서 그 부탁이라는 게 무...엇인가요?”

 “내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누워있는 애 옷 좀 갈아입혀줄래?”

 “? ....그게 무슨...”

 “설명 하자면 길어 부탁 좀 할게

 “... 네 알겠습니다.”

 Kar98K는 조금 침울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빠른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잠시 후 그녀가 검은색 옷들을 손에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살짝 미소를 띠고 말했다. 다만 그 미소는 무언가가 어색해 보였다.

 “다 끝났답니다. 이 옷은 제가 세탁해서 다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 그래 고마워. Kar98K. 그런데 오늘 시간이 된다면 저 애 좀 간호해줄래? 나는 이제 슬슬 잠을 자야해서.”

 “,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오늘 또 밤을 새셨군요. 힘 들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셔도 좋다니까요. 잠깐만요, 손은 또 왜 그러신 건가요. 다치셨나요?”

 나는 그녀가 안심할 수 있게 작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럼 저 애 좀 잘 부탁해.”

 “.... 맡겨만 주세요. 지휘관씨.”

나는 그녀의 어색한 미소를 뒤로하고 거실 소파에 몸을 눕혔다. 슬슬 마취가 풀리려는지 손에서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다. 그 때문에 나는 빨리 잠을 청했다. 지긋지긋한 고통을 다시 느끼고 싶지는 않다.

 다행이도 잠은 금방 들었다.

 

 



4.



 “지휘관씨 일어나세요. 왜 이런 곳에서 주무시고 계신 거 에요?”

Kar98K의 목소리에 이끌려 나는 잠에서 깼다. 그래도 잠을 꽤나 푹 잤는지 피곤하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야?”

 “왜 이런 곳에서 주무시는 거 에요?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뭔가 이상했다. 그녀의 언행에서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내가 분명 그 여자의 간호를 부탁했을 텐데. 잠시만, 멀쩡한 침대라고? 내 침대에는 분명 그 여자가 누워있을 텐데.

 “무슨 소리하는 거야? 침대에는 머리가 파란 여자가 있잖아.”

 Kar98K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 에요? 침대에는 아무도 없어요.”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으로 들어갔다.

 없다. 거짓말처럼 아무도 없었다. 침대 매트리스의 물자국도 없어져있었다.

 꿈이었나. 손에 붕대가 있는걸 보면 꿈은 아니야.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Kar98K가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거지. 왜지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고 의문을 풀만한 열쇠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알 수가 없다. 일단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아니야 신경 쓰지 마. 꿈을 꿨던 것 같아.”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휘실에 돌아가서도 내 의문은 끊이지 않았다. 그 이상한 여자에 대한 생각으로 일에 집중할 수 가 없었다. 다행이도 신참인 나는 별다른 지휘를 하지 않아서 주로 보고서를 썼다. 만약 실전에서 이런 상황이었다면 우리제대는 분명 궤멸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하루 이틀이라면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겠지만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동안 나는 그녀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나에게 주어진 업무도 전부 해내지 못했다.

 보다 못한 Kar98K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상부에서 어떤 소리를 들었을 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지휘관씨? 요즘 들어 이상하네요. 어딘가가 아프신가요?”

 내 앞 책상에서 카리나와 같이 업무를 보던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아니야. 별일 아니야.”

 “그런가요...”

 “나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

 “,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지휘관씨

 “미안해. 조금은 혼자 있고 싶어

 “... 네 알겠습니다.”

 시무룩해진 그녀를 뒤로 하고 나는 복도를 걸었다.

뭐였을까. 귀신이었던 걸까? 아니면 잠들었던 사이에 내가 다른 세계에 와 버린 걸까. 도대체 뭐가 뭔지.

 나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옥상으로 향했다. 철문은 아주 약간이지만 오목하게 파여 있었다. 얼마나 세게 때렸던 거야.

 거대한 붉은색의 경고문을 무시하고 손잡이를 잡아 돌려서 문을 열어보았다.

 문은 순순히 열렸다. 예상외의 결과라서 조금 놀랐다. 이럴 거라면 왜 출입금지로 해놓은 걸까. 딱히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상관은 없다.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문을 지났다.

 옥상으로 들어가자마자 노을빛으로 물든 하늘이 나를 반겨주었다. 천천히 사라지는 비행기구름이 하늘을 갈라놓았다. 그리고 그 밑에는 푸른 머릿결을 가진 한 여자가 서있었다. 노을빛을 받아 특이한 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천천히 흩날렸다.

 분명히 존재했다. 꿈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가득 찼던 망상들이 한순간에 인어공주의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나는 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숨을 쉬어야한다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긴장되었다. 내가 몇 발자국 다가가자 나를 눈치 챈 소녀가 힐끔 뒤를 보았다.

 “또 오셨어요?”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것처럼 차가운 한마디였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굉장히 당황했지만 나는 최대한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담담한척을 했다.

 “바람 좀 쐬러왔어.”

 나도 그녀처럼 난간에 팔을 걸치고 말했다.

 “그러는 너는 왜 여기있는거야? 아니, 그전에 궁금한 게 있어. Kar98K가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지?”

 푸른 머리의 여자는 나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침묵했다. 계속해서 추궁하고 싶었지만, 풍경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에 압도되어서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한번 쉬고 지휘부 밑 풍경을 바라보았다. 울창한 수풀이 바람에 흔들려서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어 내주었다.

 소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손은 어때요?”

 “덕분에. 의사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했어.” 나는 오른 손에 감긴 붕대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이런 건 어디에서 배운 거야?”

 “신경 꺼요.”

 “... 그럼 다른 질문, 너 이름이 뭐야?”

 그녀가 나를 강하게 째려보았다. 알았어, 알았어. 조용히 닥치고 있을게.

 강제적인 침묵이 흘렀다.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이대로 여기서 나간다면 영영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붕대로 칭칭 감아놓은 손을 밖으로 쭉 내밀고 턱을 난간에 걸쳤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은은한 노을빛에 감싸여진 모습이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 붉게 물든 하늘에 검은 먹물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반짝거리는 우주의 보석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서늘한 바람이 내 목덜미를 스쳐 지나가고 밑에서 부엉이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잠시 밤하늘에 눈을 맡겼다. 전 세계가 붕괴액으로 난리가 나기 전에는 천체학자의 꿈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별들의 이름과 별자리를 전부 외우고, 날짜별, 년도 별의 위치까지도 전부 외우기도 했다

 이제는 별자리도, 별이름도 제대로 기억 해내지 못하지만 아직도 별을 보면 다시 천문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가 그런 꿈을 마음에 품었었을까. 어린아이의 순수함에서 비롯된 걸까. 부모의 강제에 의해서 가지게 된 걸까. 아마 부모의 선택은 아니었을 거다. 세상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굶어죽기 좋은 직업을 가지라고 할까. 나 같아도 그러지 않을 거다.

 한참을 별을 보다 이상한 기운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언제 사라진 거지.

 지휘실로 돌아온 나는 Kar98K와 카리나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다. 잠시 나갔다 오려했던 것이 벌써 5시간을 넘겨버린 탓이다. 밤늦게까지 서류들을 정리하고 나서야 숙소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날 밤늦게까지 그리폰에서 받았던 모든 자료들을 뒤져보았다. 내가 받았던 자료에는 그녀가 없었다. 때문에 나는 수사범위를 조금 더 넓혀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그 결과 약 3시간 만에 그녀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알아낸 정보는 겨우 이름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 나는 만족했다.

 HK416. 나는 그 이름을 한번 되뇌어보고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5.

 

 다음 날 나는 다시 한 번 옥상에 찾아가 보았다. 다행이도, 당연하게도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그녀가 나를 살짝 흘겨보며 말했다.

 “또 오셨나요?”

 이런 반응을 대충 예상해서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그래도 변함없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나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며 그녀의 옆 난간에 팔을 걸쳤다.

 “심심해서 와봤어.”

 소녀가 짜증이 조금 섞인 말투로 말했다.

 “왜 굳이 여기인거죠?”

 “글쎄.... 여기가 편해서랄까.”

 “그런 이유라면 좀 꺼져주실래요? 짜증나니까요.”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HK416.”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제 뒷조사라도 하신건가요?”

 “뭐 그렇지.”

 갑자기 그녀가 난간에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전보다 더욱 싸늘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제가 누군지 아셨겠네요.”

 “그게 궁금했어. 너는 어떤 인형이지?”

 “조사를 할 거라면 좀 제대로 하시죠.”

 “그러게. 조사를 할 수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어떻게 자료가 하나도 없을 수가 있어?”

 그녀가 침묵한다.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사람들마다 사정이 있듯이 그녀도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다. 뭐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름을 알아냈으니 그걸로 만족한다.

 그날 이후로 매일 같이 옥상에 올라갔다. 내가 옥상에 올라 갈 때면 언제나 그녀가 있었다. 늘 같은 장소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언제나 안녕?” 이라고 말했고 그녀는 나를 쏘아보며 또 오셨네요.”라고 답했다.

 우리는 사소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말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재밌기도 하고 즐거웠다

 가끔 시답잖은 농담에 웃음 짓는 그녀의 웃음을 보기위해 여러 가지 유머를 찾아보기도 했다. 내가 여러 가지 말장난을 치면 그녀는 피식하고 웃어주었다. 그저 작은 반응이지지만 그걸로 괜찮았다.

 어느 날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지휘관은 별 좋아하시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도 모르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두 눈에 우주가 비춰졌다. 그녀의 푸른 머릿결이 은하수처럼 흩날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냥요.”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해.”

 그녀가 갑자기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놀란 표정이었다.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구나.

 “, 갑자기 그게 무슨...”

 “뭘 그리 놀래. 별 좋아한다고. 뭘 생각한 거야.”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 닥쳐요.”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어릴 때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어. 별을 안 좋아 할 리가 없지.”

 “그럼, 저 별 이름이 뭔지 아세요?”

 “몰라.”

 “뭐에요. 공부 안했어요?”

 “그게 언제 적인데 아직도 기억하겠냐.”

 “그런가요.”

 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별이름이 기억의 경계선을 왔다 갔다 했다. 그래도 하나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있다

 북극성. 북극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찾을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정말이다. 당장 밖에 나가서 북극성을 찾아보라하면 못 찾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나는 눈으로 하늘을 쓰다듬으며 북극성을 찾아보았다.

 찾았다. 북극성. 그 밑으로 이어지는 작은곰자리. 그 옆에는 북두칠성이 있다. 그리고 북두칠성에서 선 몇 개를 긋자 큰곰자리가 그려졌다.

 그녀에게도 알려줄까 했지만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아서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물어보았다.

 “너는 별 좋아해?”

 “이제부터 좋아해 보려고요.”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알지 못했다. 그래도 그녀가 별을 잘 모른다는 사실은 알았다.

 나는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내가 알고 있는 별자리와 별들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별들의 위치에 대해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답답해진 나는 그녀에게 바싹 붙어서 설명을 해주었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어지는 거야. 알겠어?”

 “. 알겠어요. 저별이랑 저거랑 저거요? 저게 어딜 봐서...전혀 안 닮았는데요?”

 “낸들 아냐. 고대인들이 그렇다 하는데 그렇다 해야지 뭐.”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칫하면 코 닿을 거리에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나와 그녀가 같은 극의 자석처럼 떨어졌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서로 시선을 회피하며 난간 앞에 서있었다.

 먼저 정적을 깬건 나였다.

 “슬슬 돌아가자. 시간이 너무 늦었다.”

 “그러죠.”

 그리폰 복도에서 그녀와 작별을 했다. 따라가 볼까 라는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녀를 볼 때마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에 다시 들어간 나는 밀린 업무를 시작했다. 이걸 다 끝내고 내일 다시 그녀를 만나러 가야지. 라는 일념 하에 키보드를 두드렸다. 다행이도 정해진 시간 안에 일을 마칠 수 있었다.

 

 

 

6.

 

 며칠 뒤 나는 여느 때와 똑같이 그녀를 만나러 옥상 문을 열었다. 여느 때처럼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그녀의 옆에 다가갔다.

 “안녕?” 하고 평소처럼 말을 걸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또 오셨네요.” 라고 대답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평소랑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의 몰골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녀는 상처투성이였다. 옷은 다 찢어져서 헤져있고 얼굴과 팔에는 잔상처가 가득했다.

 “너 꼴이 왜 그래.”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닌 게 아니잖아.”

 “신경 꺼요.”

 나는 그녀의 팔을 붙잡아 이끌며 말했다.

 “따라와.”

 “어디를요.”

 “어디긴 수복실이지.”

 내말을 듣자마자 그녀가 내 손을 뿌리쳤다.

 “됐어요. 필요 없어요.”

 “네가 애냐. 고집부리지마.”

 “싫다면 싫은 줄 아세요.”

 진전 없는 대화는 한동안 이어졌다. 의미 없는 기 싸움이 계속됐다. 어찌나 어린아이 같던지. 저녁노을의 그림자가 더욱 길어졌다.

 결국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한 나의 패배였다. 대신 그녀의 치료를 위해 내 숙소로 가는 것에는 그녀가 동의해서 대신 내 방으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응급상자를 찾아 그녀에게 가져갔다. 애초에 인형에게 사람이 사용하는 약이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사용하기로 했다. 없는 것 보다는 낫겠지 뭐.

 최근에 붕대를 풀어 자유로워진 손을 이용해서 그녀의 상처에 약을 발랐다. 약은 누구에게나 따끔한지 그녀가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상처가 정말 많았다. 눈에 보이는 곳 말고도 크고 작은 상처가 즐비했다.

 “어쩌다가 이런 거야.”

 “그쪽이랑은 상관없잖아요.”

 “같은 옥상 외톨이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

 “외톨이라..”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러네요. 외톨이.”

 “, 근데 미안. 나는 친구가 좀 많거든. 너만 외톨이야.”

 그녀가 나를 살짝 째려보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즐기며 붕대를 감아 주었다.

 다 됐어. 이걸로 그때의 빚은 갚은 거다.”

 “겨우 이걸로요? 저는 제가 가진 모든 연산기능을 쓰고 쓰러졌는데, 겨우 이정도로...”

 “농담이야. 빚은 나중에 천천히 갚을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뭐 마시고 싶은 것 있어?”

 “홍차요.”

 “그냥 커피 마셔.”

 그녀가 나를 벌레 쳐다보듯이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헝클고 짜증 섞인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부엌으로 향했다.

 주전자에 물을 넣고 불 위에 올렸다. 찬장에서 커피가루를 찾아 적정량을 컵에 담았다.

 방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와본 남자 방에서 리모컨을 어떻게 알고 찾아 낸건지. 대단할 다름이다.

 쟁반에 커피를 담아 방안으로 들어가자 어두운 방에서 텔레비전 불빛을 쐬고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방해 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들어가서 그녀에게 커피 잔을 건네었다. 416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잔을 받아들었다.

 뭘 그렇게 재밌게 보는 거지? 하는 생각에 나도 같이 화면에 집중해보았다.

 굉장히 잔인한 드라마였다. 좀비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사람을 뜯어먹는 세계에서 생존하는 이야기였다.

 뭐 따지고 보면 이제는 현실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한 번도 그런 장면을 본적이 없는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재미가 없다는 건 아니다. 내용은 상당히 재밌었다. 앞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봐도 상당히 몰입이 되었다.

 나중에 전편 정주행을 해볼까 했지만 화면 상단에 있는 flying Dead시즌 26. 51라는 문구를 보고 접기로 했다.

 “이런 드라마 좋아해?”

 “아니요. 제 친구가 좋아해서요.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에요.”

 “친구가 있긴 하구나.”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다시 드라마에 집중했다. 주인공이 권총 한 자루만 들고 좀비가 가득한 공장으로 들어갔다. 음산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주인공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들리는 기분 나쁜 쇳소리가 긴장감을 높였다.

 그녀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상당히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화면에서는 절대 눈을 떼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상남자였다면 그녀를 내 품에 끌어당겨서 점수를 땄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런 인물이 되지는 못했다. 무서운 건 질색인지라 그녀에게 신경을 여유가 없기도 하다.

 화면 속 주인공이 공장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그녀의 손이 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주인공이 조심스럽게 공장 안에 있는 사무실 문을 열었다. 끼이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와 그녀의 신경이 곤두섰다. 스산한 분위기와 함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이 문이 열렸다

 주인공의 긴장된 얼굴이 화면에서 강조 되었다. 이윽고 주인공이 사주경계를 하며 방안으로 뛰쳐들어 갔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주인공과 우리는 혼연일체가 되어 동시에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잠시 마음이 놓인 주인공이 문을 닫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그순간 뒤에서 좀비가 주인공을 덮쳤다.

 깜짝 놀란 그녀가 내 팔을 껴안았다. 나도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자연스럽게 그녀를 안는 모양이 되어버렸다. 드라마가 끝날 때 까지 그러고 있었다. 아니, 끝나고 나서도 그러고 있었다

 드라마가 끝나면 정신이 돌아온 그녀가 깜짝 놀라며 나를 밀어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가 내 어깨에 머리기대며 말했다.

 “피곤해요. 실례 좀 할게요.”

 직후 그녀는 잠에 빠져버렸다. 새근새근 거리는 숨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손을 살짝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을 휘감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강아지 같은 소리를 내며 내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잠들면 순한 양처럼 되는구나.

 그녀에 대헤서 아는 게 전혀 없다보니 이런 사소한 것에도 감사하게 된 것 같다앞으로는 어떤 걸 더 알게 될까. 조금은 기대가 된다.

 나는 그녀의 머리에 살짝 기댔다. 시간이 시간이라 그런지 금세 졸음이 몰려왔다.

 

 다음날 아침에 Kar98K가 나를 깨우러 왔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난 뒤였다. 꿈은 아니었다. 소파 옆 커피 잔 두 개가 그걸 증명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지도를 꺼내 부관과 이런저런 작전 상담을 했다. 일이 끝나면 언제나 옥상으로 가서 그녀를 만났다.

 이런 일상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건 내 큰 착각이었다이 세상에 영원한건 없다. 그걸 모르고 있었다.

 

7.

 

 그녀가 사라졌다. 하루정도는 바빠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분명 무슨 일이 생겼다. 여러 인형들에게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그녀를 알고 있는 인형은 한명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그녀를 알고 있는 M16A1도 그녀의 행방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내가 뭔가를 실수 한 걸까. 잘 모르겠다.

 그녀가 없는 옥상을 나 홀로 지켰다.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별을 바라보았다. 별은 여전히 밝았다.

 그때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바라보았다. 기대했다. 여기에 올 사람은 그녀뿐이기에 당연히 그녀라고 생각했다.

 문 앞에 서 있던 건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한껏 부풀었던 기대감이 허무함으로 바뀌었다.

 “안녕하세요. 지휘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천천히 그녀를 관찰해보았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은빛머리카락. 검은색 후드. 검은색 스타킹과 왼쪽 다리에 보이는 강화 외골격. 처음 보는 인형이다.

 “누구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건 제가 416이 어디 있는지를 안다는 거에요.”

 그녀가 말했던 친구라는 게 이녀석인건가. 아무튼 그건 상관없다. 요점은 그녀가 416의 행방을 알고 있는 중요한 열쇠라는 점이다.

 “416은 어디 있어.”
 “저를 따라오세요.”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알게 될 거에요.”

 “내가 너를 어떻게 신용하지?”

 “제가 416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요.”

 “...좋아.”

 그녀가 내게 눈웃음을 지어주었다. 그래서 인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인도한 곳은 높은 산 속이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산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올라가는 그녀에게 경의를 표한다. 다행이도 평상복으로 미리 갈아입은 덕에 제복보다는 편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산 중턱에 다다르자 계곡하나가 보였다. 사람들이 모여서 놀만큼 크지는 않았다. 계곡 근처에는 여러 가지 야생동물들이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눈동자들 때문에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다.

 산 정상에 거의 다다를 때 쯤 그녀가 멈춰 섰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있네요. 가보세요.”

 그곳을 바라보자 정말로 그녀가 있었다. 나는 바로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산에서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길고 검은 총에 달려있는 조명을 이곳저곳에 비추며 사주경계를 하는 그녀를 멀리서 불러보았다.

 내 목소리를 들은 그녀가 바로 나에게 달려왔다. 그녀가 바로 내 앞에 멈춰섰다. 반가움에 이것저것 묻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총을 땅에 내려놓은 그녀가 내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어디 다친데 없어요? 어떻게 빠져 나온거에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왜 다치고, 어디를 빠져나온다는 소리일까.

 “무슨 소리야?”

 그녀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철혈에게 붙잡혔었다면서요. 어디였나요. 위치를 알려주세요.”

 “무슨 소리냐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45가 그랬어요. 당신이 붙잡혔다고.”
 “내가 붙잡힐 리가 없잖아. 나는 사무직이야. 철혈을 만날 리가 없어.”

 그녀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녀가 멍하니 내 눈을 바라보았다.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다.

 “...” 그녀가 뭔가를 알아낸 듯 했다. “함정...”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허리가 뒤로 꺾였다. 배를 찢는 것 같은 엄청난 고통이 올라왔다. 땅이 나를 덮쳐왔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폐를 누군가가 강하게 쥐어 잡은 것 같았다.

 “움직이지 마. 416”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다. “너도 저 꼴나기 싫으면 말이야.”
 “...뭐하는거야. 45.”

 “네가 부상당했던 날레가 그랬어. 네 마인드맵에 쓸데없이 용량을 잡아먹는 기억이 있대. 상부에 보고했더니 그 원인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없애라고 하더라고. 작전에 피해가 간다고 말이야. 나는 명령을 수행하는 중일뿐이야.”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아니. 나는 너에게 많은 시간을 줬어. 시간이 지나면 상태가 나아 질줄 알았지. 근데 아니었어. 최근에는 부상까지 입었잖아. 예전에 너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였어. 그 때문에 작전 실패까지 할 뻔 했고 말이야.”

 “, 그거야...”

 “난 봐줄 만큼 봐줬어. 416. 기회를 놓친 건 너야.”

 회색머리의 여자가 416에게 다가갔다. 나는 배의 구멍을 겨우 틀어막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45라는 이름의 여자가 416의 권총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 416. 손으로 끝내는 거야.”


 여기까지가 나의 과거 회상이다. 죽을 때가 되어서그런지 정말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죽음의 순간에서는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점점 의식이 현실로 돌아온다. 따듯하게 느껴졌던 땅의 온기가 점점 식어갔다. 흐릿했던 시야가 점차 회복되어간다.

 고통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통각이 마비가 된 건지, 아니면 이미 죽어버린 건지는 잘 모르겠다.

 편안하다. 고통에서 해방되자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았다. 그것도 잠시 다시 배에서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싫다.

 먹먹하게 울리던 소리가 점차 뚜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다리에서도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목을 막아놓았던 음식물을 내뱉는 것처럼 숨을 내뱉었다.

 모든 게 뚜렷해졌다. 고통이 다시 느껴졌다. 칼로 배를 가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겨우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41645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 바로 코앞에서 쏜 것이라 제대로 조준했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전혀 없어보였다.

 하지만 45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권총을 든 그녀의 손이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앞에서 발사된 총성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무겁게 흐르는 정적을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가득 채웠다.

 “그거야, 416. 그 기세야. 이걸 원한 거라고. ...좋아. 마음이 조금 바뀌었어.” 그녀가 416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416의 멱살을 쥐어 잡고 말했다. “이게 마지막 기회야. 저 남자를 살리고 싶다면 말이야.”

 거칠게 416을 밀어낸 그녀는 사뿐사뿐한 발걸음을 옮겨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416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그녀가 다리를 질질 끌어 나에게 다가왔다.

 힘겹게 나에게 온 그녀가 나의 상태를 살폈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정확히 말하면 고통 때문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통을 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상처를 본 그녀가 겉옷을 찢어 만든 천으로 내 다리를 묶었다. 어찌나 세게 묶는지 잠시 정신을 잃을 뻔 했다.

 그녀가 내 머리를 자신의 다리위에 올렸다. 내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 후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의식을 잃었던 것 같다. 흐릿하게나마 기억하는 건 얼굴을 쓰다듬던 감촉과 입술에 느껴진 낯선 감촉뿐이다.

 

 

 

 

8.

 

 

 

 

 화창한 날씨다. 뭉게구름이 두둥실 흘러가고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햇빛이 책상을 비췄다. 나는 병원에서 퇴원하고 난 뒤 밀린 서류들에 사인을 하고 있었다. 한참을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던 나는 문뜩 들은 생각에 시계를 바라보았다. 638. 이제 곧 7시다.

 “슬슬 가봐야겠네.”

 나는 서류들을 정리해서 책상 서랍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내 앞에서 산더미만큼 쌓인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던 카리나가 나를 보며 말했다.

 “또 나가세요? 어휴. 누구 만나러 가는 거 에요?”

 “카리나씨, 괜찮으시겠어요? 저에게 말을 거셔도? 딱 봐도 저에게 신경 쓰실 여유가 없어 전~혀 보이는데요.

 “하아...네네~ 알겠습니다.”

 나는 실실 웃으며 문밖을 나섰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지루한 업무에서 벗어나 그곳에 간다는 상상만으로도 나에게 활력소가 되었다.

 발걸음이 닿은 곳은 그리폰의 옥상 문 앞이다. 출입 금지라는 붉은 색 글자가 쓰여 있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

 손잡이를 돌려서 그곳으로 들어갔다. 끼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틈 사이로 햇빛과 신선한 공기 가 들어왔다.

 나는 옥상의 가운데로 걸어가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살 곁에 닿자 그제야 진정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동시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늘에 떠있는 뭉게구름과 들려오는 산새소리, 땅을 내리쬐는 햇빛과 바람에 몸을 맡긴 푸른색 긴 머리카락.

 평소와는 다른 평범한 사복 차림의 그녀가 보였다. 사복차림도 나쁘지 않네.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난간에 팔을 걸치고 있는 그녀의 옆에 섰다.

 “또 오셨어요?” 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왜 오신 겁니까.”

 “너 보려고 왔지. 그나저나 너는 나만 보면 그 소리냐. 다른 할 말은 없어? ‘오랜만이네요.’ 라던가 보고 싶었어요.’ 같은 거.”

 “없어요.”

 “거 참.”

 상승기류를 타고 올라온 나뭇잎 하나가 중력을 역행했다. 흔들흔들 춤추는 파란 이파리가 빙글 빙글 돌아서 그녀의 머리위로 떨어졌다.

 그녀가 머리에 붙은 잎을 떼어내서 다시 난간 밖으로 살며시 떨어트렸다. 그러자 나뭇잎이 다시 춤을 추며 하늘로 올라갔다. 우리는 한동안 나뭇잎을 바라보았다나는 나뭇잎이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기를 기도했다. 그렇게 해서 어디든 날아 갈수 있기를 바랬다.

 이파리는 하늘 높이 올라갔다. 점점 멀어져서 사람의 시력으로는 보이지 않았다그래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내가 원하던 지평선은 아니지만 나름 나쁘지는 않았다.

 내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볼 때 416이 난간 밖으로 길게 내밀은 내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슬며시 입 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주었다. 예뻤다. 웃으니까 얼마나 좋아.

 “근데 말이야. 어떻게 병문안 한번을 안 오냐.”

 그녀가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제가 바빠진게 누구 탓인지는 아시는 거죠?”

 “알고 있어. 미안해.”

 “미안할 필요는 없어요. 반쯤은 제 탓이니. 제가 아니었으면 당신이 그렇게 다치지 않았겠죠.”

 “맞아. 네 탓이야.”

 그녀가 내 어깨에 기댔다.

 “그래요, 제 탓이네요.” 그녀가 피식 웃었다. “벌로 머리 좀 쓰다듬어주세요.”

 “그게 왜 벌이야.”

 “그냥 그런 줄 아세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앞으론 자주 못 만날테니까요.”

 “. 그래?”

 “. 오늘도 이만 가봐야 해요. 아쉽지만.”

 그녀가 갑자기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깜짝 놀란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작게 웃음 지었다.

 “다음 주 월요일을 기대하세요.”

 말을 마친 그녀가 뒷걸음질로 손을 작게 흔들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도 그녀의 인사에 화답하여 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녀가 떠난 뒤에도 나는 옥상을 지켰다.

 별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에서 삶에 대한 감사를 기도했는지도 모른다.

 별자리를 그리며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잠시 돌이켜보았다. 차갑기만 할 줄 알았던 그녀가 보여준 다양한 모습들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잎사귀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바람에 날리던 잎사귀를 눈을 쫓았다.

 멀리 가라니까 왜 다시 돌아왔대. 그렇게 한탄하며 떨어지는 잎사귀를 공중에서 낚아챘다. 그리고는 다시 하늘 높이 던졌다. 당연히 멀리 나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뒤로 날아갔다. 잎사귀를 다시 줍기 위해 뒤를 돌아본 순간 눈에 사람하나가 들어왔다. 얘는 또 왜 돌아온 거야.

 “왜 다시 돌아왔어.”

 그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당황한 나는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과거를 헤집어 보았다. 딱히 화날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녀가 바로 내 앞에 섰다.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는 눈빛에 압도되어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녀가 박력 넘치게 내 얼굴을 붙잡아 자기 얼굴 쪽으로 끌어당겼다. 입술에서 그때와 같은 감촉이 났다.

 그녀가 말했다.

 “45가 오늘은 쉬어도 좋다고 했어요.”

 말을 마친 그녀가 나를 껴안았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깨달은 게 있다. 내가 그녀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그녀는 절대로 차갑고 괴팍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는 고슴도치였다. 고슴도치는 날카로운 가시로 자신을 보호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러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한 냄새에는 가시를 세우지 않는다. 그녀는 가시대신 차가움을 내세운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녀를 전부 알지 못한다. 그녀의 직업, 취미,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래도 그것들 보다는 더욱 값진 사실을 알았다. 다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웃고 울 수 있다.

 나도 그녀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체온이 느껴졌다. 천천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실실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그녀처럼 웃음 지으며 그녀의 이마에 내이마를 가져다 댔다.

 밤은 점점 더 깊어져갔다.

 우리의 웃음소리도 계속 이어졌다.

 여름이지만 동짓날처럼 끝날 줄 모르는 밤이었다.



fin



 예전부터 끄적이던 글을 이제야 완성시켰네요. 

 모자란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Lv28 렝가는op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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