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교길거북이'님 단편소설 리퀘입니다
벨라가 리시타와 재회하는 내용을 요청하셨습니다.
총 2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카카오톡 채팅창에서 작성된 글이라 가독성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솔로 관람 주의
1부.
Vella
사람은 누구나 죽기 직전에 살아왔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고 한다.
하지만 쏟아지는 비속에서 내가 두 눈 속에 담았던 것은 부모를 모두 마족에게 잃었던 비참했던 어린 시절도, 처음으로 검을 손에 쥐던 순간도, 승리의 순간을 동료들과 함께 나누던 순간도 아니었다. 생명의 빛이 꺼져가는 내 두 눈에 담은 것은 어떤 남자의 모습이었다.
바보 같을 만큼 순박하고 착했던 밀알 같은 금빛 머리카락의 남자. 웃는 모습이 상냥했고 속상한 일이 있어도 금방 훌훌 털어내고 일어서는 활기찬 사람이었다. 내겐 그 누구보다도 특별했던 유일한 사람. 여름 오후의 산들바람 같았던 그 사람.
리시타.
*
니플헤임에서 살아있는 자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스물 네 시간이 전부다. 여신 모리안의 가호조차 미치지 않는 저주받은 심연의 땅. 이미 이승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마족들이 울부짖었고, 그들을 만만하게 보고 섣불리 발을 내딛었던 사람들은 피눈물을 뿌리며 죽은 이들의 발밑에 쓰러져갔다. 그들이 에린에 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니플헤임은 마족의 저승. 심연중의 심연. 여신조차 버린 곳.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는 평생을 이곳에서 떠돌아야한다. 그를 쓰러뜨린 마족들에게 몇 번이고 다시 한 번 죽음을 맞으며 고통의 윤회는 반복된다.
나 역시 그들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얼굴 위로 떨어지는 축축한 비는 망자들의 원한을 담고 있기라도 한 듯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는 나의 피가 섞인 빗물의 도랑에 누워 숨이 끊어지기를 무력하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오랜 시간의 사투 끝에 죽어서도 사그라지지 않는 분노를 품은 자를 쓰러뜨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가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휘두른 도끼는 적어도 그에게 저승에서 함께 할 길동무를 만들어 주었다. 니플헤임의 태양은 바닷물처럼 새파랗다. 파란 태양빛을 받으면 저것은 다시 한 번 살아날 것이고, 나 역시 이곳을 떠도는 혼으로 되살아나 그와 함께 영원히 끝나지 않는 전투를 벌이게 될 것이다.
"적어도 저 세상에서까지 용병 일은 안 하길 바랐는데."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입꼬리를 올리고 스스로를 비웃었다. 눈앞에서 부모님께서 마족의 손에 쓰러지던 그 순간이 돌연 머릿속에 떠올랐다. 잔잔히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아름다웠던, 내가 살던 마을을 습격해 온통 불바다로 만들었던 소름끼치는 리자드맨들. 지하실 저장고에 숨어 있던 덕택에 목숨을 구할 수는 있었지만 문에 난 조그마한 틈새는 부모님의 최후를 목격하기에 충분히 넓었다. 그때 난 고작 열 살이었다. 잿더미가 된 마을에서 지나가던 떠돌이 퇴역 군인에게 구해졌던 나는, 그 날부터 마족을 토벌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표라고 생각했고 그대로 행동했다. 검술 연습에 매진하고, 눈에 띄는 대로 마족이란 마족은 전부 베어버렸다. 콜헨의 용병단에 들어오기 전 까지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리라고 다짐까지 한 터였다.
어떤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콜헨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친절했다. 먼 타지에서 흘러들어온 나 같은 이방인에게도 그들의 친절은 한결같았다. 함께 용병 일을 하는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간혹 심술 맞은 녀석도 섞여 있었지만 모두들 소중한 동료가 되었고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 중에 특별한 사람이 있었다.
약간 바보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강인하고, 상냥하고 다정하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리파. 언제나 유쾌했지만 한편으로는 아픈 과거를 갖고 있던 사람.
리시타와 친해진 계기는 종종 무기를 빌리거나 서로의 무기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해 바꿔가던 와중에 가까워지게 된 것이었다. 서로 닮은 점이 많아서였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어느덧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밀해져 있었다. 한 사람이 전장에 나가면 다른 사람은 기다리는 것을 지루해하고, 초조해하고, 이윽고 어디 다쳐서 돌아오는 것은 아닐지 걱정하는 그런 사이.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함께 있다면 뭐든지 행복했었다.
단순히 친구 사이의 각별한 우정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을 그 사람도 알아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리시타를 볼 때면 나는 전장을 가로지르는 용병의 삶이 아닌, 작지만 아늑한 집에서 그와 함께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아내의 삶을 꿈꾸게 되었다. 더 이상 매일 매일을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보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무거운 갑옷 대신 다른 여자들처럼 예쁘게 차려입고서 그 모습을 자랑할 수도 있고, 그와 나를 꼭 닮았을 사랑스런 아이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다면, 정말 행복했을 텐데.
분노를 품은 자는 우리가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대상이었다. 수십 번이나 목숨을 잃을 위기가 있었고, 그의 도끼는 빗줄기마저 가를 듯 날카로웠으며, 그의 방패는 그 어떤 금속보다도 단단했다. 분노에 가득 차 불타고 있는 두 눈. 마침내 그를 쓰러뜨렸다고 생각한 그 순간 그것의 눈동자를 한번만이라도 바라보았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약속된 스물 네 시간의 기한이 끝나가 다급하게 전장을 벗어나려던 우리에게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도끼를 집어던졌고,
나는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괜찮아. 어서 가."
힘없이 바닥에 무너져 내린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기세로 울부짖는 리시타의 손을 잡아주며 애써 미소 짓는 일이 전부였다.
"곧 있으면 문이 닫힐 거야. 늦기 전에… 어서 달려."
아직 문을 빠져나가지 않았던 다른 동료 두 명이 오열하는 리시타를 양 옆에서 붙들고 거의 끌고 가다시피 문으로 향했다.
치명상을 입은 내가 니플헤임을 빠져나간다 해도 살아날 가망은 없었다. 정말 운이 좋게 살아난다고 해도 평생 다리를 쓸 수 없을 것이다. 젝칼리온의 도끼는 나의 하반신 신경을 아예 끊어놓았으니까. 온전하게 살아남은 리시타라도 데리고 나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동료들에 대한 서운함은 없다. 오히려 내가 가장 지키고 싶었던 사람을 끝까지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마저 들었다.
나는 동료들에게 팔을 붙들려 끌려가는 리시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나의 외침은 작은 속삭임이 되어 내 입 속에서만 맴돌았다. 차라리 같이 죽음을 맞고 이곳에서 떠돌겠다고 외치는 리시타의 목소리만이 빗소리에 섞여 전장에 흩어져갔다. 허나 그 목소리도 니플헤임의 문이 비정하게 닫힘과 동시에 촛불이 꺼지듯 일순간에 사그라졌다.
두 다리에는 이미 감각이 사라졌다. 죽은 이후에 영혼이 되어 다시 살아난 이후에도 다리를 쓸 수 없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게 된다면 저것과 다시 한 번 전투를 벌이는 것은 무리겠지. 에린에서는 생전의 모습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몸이 불편한 사람은 자유롭고 건강한 신체로 부활하게 된다고 했는데 니플헤임에서도 그럴지는 모르겠다. 곧 목숨이 끊어질 상황인데도 이런 사소한 생각이 든다니 우습다. 떨어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공허하게 웃어본다. 분명 웃고 있는데, 빗방울은 얼음 계곡의 웅덩이에 고인 물처럼 차갑기만 한데, 어째서 눈가가 뜨거워지는지 모르겠다. 리시타라도 무사히 돌아가서 다행이야. 지난번 내기에서 이긴 덕에 딸기주를 얻어 마시기로 했던 약속은 못 지키겠군. 같이 낚시하러 가기로 약속했는데. 내가 로체스트에서 사줬던 책은 다 읽었을까?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 두서없이 떠오른다. 시덥잖아 보이는 생각들 덕분인지 죽음에 대한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하필이면 니플헤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여신의 영광이 드리운 땅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면, 죽어서도 가끔은 그를 찾아갈 수 있었을 텐데.
얼굴에 떨어지는 비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그를 보고 싶다. 바다처럼 깊고 파란 그의 눈을 한번만 더 볼 수 있다면.
나는 살아있는 사람으로서의 마지막 숨을 길게 내쉬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