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에 비친 눈 때문에 온 세상이 선홍빛으로 반짝였다. 노인은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늘어지게 하품했다.
‘언제 봐도 아름답군.’
일상적으로 보더라도 늘 새롭게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밤하늘의 별처럼. 노인에게는 이 풍경 또한 그러한 것이었다. 노인은 잠깐 저녁노을을 감상하다가 가게로 돌아갔다.
―슉!
이제 해가 지기 시작하니 오늘 장사를 끝낼 때가 되었다. 노인은 주섬주섬 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돈을 정산하고, 물건의 재고를 확인하고, 먼지를 떨어내고, 바닥을 청소했다.
가게를 마감하는 노인의 손길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빨랐다. 오랫동안 해온 일이라 손에 익었기도 하지만, 일을 빨리 끝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가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가서 함께 저녁을 먹고 재롱을 부리는 것을 볼 생각에 노인의 얼굴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슉! 슉!
그런데 어디선가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기분 탓인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요즘 들어 몸 여기저기가 말썽을 부렸다. 조만간 의원에게라도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할 때였다.
“저기, 혹시 누구 계신가요?”
가게 밖에서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손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딜 봐도 텅 빈 허공뿐이었다. 노인은 당황했다.
‘좀 더 빨리 갔어야 했나?’
의원이 아니라 성직자에게 가야 하나? 설마 이미 늦은 건 아니겠지? 노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저기, 어르신?”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일반적인 상황보다 훨씬 아래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숙이자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은빛 머리칼의 젊은 여자가 얼어붙은 맨땅에 누운 채 벌벌 떨며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네 거기서 뭐 하나?”
“아하하... 미끄러워서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더라고요...”
“아니, 그...”
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엘나스의 땅은 항상 얼음으로 덮여 있어 미끄럽다. 익숙해지거나 아이젠을 신으면 문제 될 것은 없지만, 처음 겪는 외지인이라면 힘들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보통 좀 허우적거리는 선에서 끝나지, 이렇게 바닥을 굴러다니는 경우는 드물다.
“어지간히도 몸치인가 보구먼.”
“그런 말 많이 듣긴 했어요.”
그리 말하는 여자의 입술은 추위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노인은 혀를 쯧쯧 차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모험가 장로분들의 관저는 저쪽으로 쭉 가면 있네. 이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이니 알아보기 어렵지 않을 게야.”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되물었다.
“감사합니다. 저, 근데 제가 모험가라는 건 어떻게 아셨나요?”
“딱 보면 알지. 오히려 못 알아보는 게 더 어렵지 않나 싶네만.”
모험가들의 전직시험이 이곳에서 치러지기에, 엘나스에는 가끔 모험가들이 방문하고는 한다. 노인은 오랜 세월 동안 그러한 모험가들을 많이 봐 왔으니 모를 수 없었다.
게다가 특유의 지팡이, 로브와 고깔모자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마법사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아이젠을 하나 구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저쪽에 가면 시장이 있네. 잘 보면 방어구점이 있을 텐데 그리로 가보게. 여관도 있을 테니 미리 봐두고.”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그런데 아이젠이 뭔가요?”
노인은 머리를 짚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손이 많이 가는 처자로군.
“얼음 위에서도 미끄러지지 않게 해주는 신발이네.”
여자는 ‘그런 물건이!’ 하고 감탄하고는 노인에게 감사하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누워 있었기에 모양새가 영 애매했지만. 이윽고 여자는 노인이 알려준 방향을 향해 이동했다.
―슉! 슉!
여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멀어져갔다. 노인은 그 모습을 신기해하며 바라보았다.
‘데굴데굴 굴러서 온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마법사들은 저런 기술을 쓰곤 했지. 맹해 보여도 마법사는 마법사군.’
마법의 마 자도 모르는 노인이 보기에 그것은 꽤나 놀라운 기술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니. 저런 것을 쓸 수 있다면 참 편리하겠거니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법사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노인은 가게로 들어가 정리하던 것을 마무리했다.
‘오늘은 옛날이야기나 해줘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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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진짜 안 미끄러지네!”
여자는 발로 땅을 몇 번 툭툭 차며 감탄했다.
어떤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있을 거라는 여자의 예상과 다르게, 아이젠은 단순히 밑창에 금속 스파이크를 박아 놓은 신발이었다. 키가 조금 높아진 탓에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아이젠을 신은 여자는 드디어 두 발로 설 수 있게 되었다.
오르비스 탑에서 처음 얼음을 본 뒤로 거의 반나절만의 일이었다.
따끈따끈한 호빵도 하나 샀다. 달콤한 맛과 온기에 얼어붙은 몸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했다. 여자는 호빵을 오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작은 마을이었던 만큼 도착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마을 한가운데에서 여자는 발견했다. 다른 건물들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커다란 크기, 눈 덮인 붉은 지붕, 방패 형태의 간판에 새겨진 검.
‘찾았다.’
이 건물이 바로 모험가의 3차 전직시험이 시작되는 곳, 장로의 관저였다. 여자는 마음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3차 전직이라니. 꿈만 같은 말이었다. 이제 클레릭을 벗어나 어엿한 프리스트, 진정한 한 명의 마법사가 되는 것이다.
클레릭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뛰어난 마법을 익힐 수 있고, 더욱 다양한 지역에 갈 수도, 더욱 많은 일을 할 수도 있게 된다.
물론 그러려면 먼저 시험에 합격부터 해야 하겠지만.
여자는 크게 심호흡한 뒤, 천천히 관저의 안으로 들어갔다.
관저의 내부는 인상적이었다.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 정결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었으며, 위층의 창문으로부터 들어오는 노을빛이 이러한 분위기와 근사하게 어우러졌다.
여자는 들뜬 표정으로 관저 내부를 둘러보았다.
“어험! 누군가?”
그때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한 중년 남자가 계단을 내려왔다.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둘러쓴 갈색 후드, 등에 메고 있는 커다란 대검. 장로가 틀림없었다. 여자는 자세를 다잡고는 공손히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마법사 메리엘이라고 합니다.”
“음. 나는 전사 전직관 타일러스일세. 무슨 일로 찾아왔나?”
“3차 전직시험을 치러 왔습니다!”
“그렇군. 추천서는 가지고 왔나?”
메리엘은 품속에서 하인즈에게 받았던 문서를 꺼내어 내밀었다. 문서를 받아 든 타일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했네. 자네도 알겠지만, 더 강해지기 위해서는 그 전에 자네에게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하네. 많은 이들이 더 높은 경지에 도전하지만, 실제로 자신을 증명한 경우는 드물지. 어떤가. 준비는 되었는가?”
“네! 물론이죠!”
메리엘은 들뜬 표정으로 외쳤다. 그러나 곧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만 놓칠 뻔했다. 메리엘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 그런데 타일러스 님은 전사 전직관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마법사 시험도 타일러스 님께서 맡으시는 건가요?”
“그렇네. 다른 장로들은 중요한 일로 자리를 비운 상태라, 내가 임시로 다른 직업의 시험도 맡게 되었네. 시험 진행은 문제없겠지만, 원한다면 장로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도 상관없네. 다만 시간이 좀 걸리긴 할 걸세.”
메리엘은 잠시 고민하고는 말했다.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겠죠.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어차피 같은 전직관이시고, 장로분들이 대책 없이 무작정 자리를 비우지는 않으셨을 것 같았다.
“시원하군. 좋네. 시험에 대한 설명을 해주겠네.”
이어진 타일러스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설산의 폐광에 있는 설원의 성지라는 장소로 이동한 뒤, 그곳에 있는 성스러운 돌을 만질 것. 그러면 어떠한 장소로 이동하게 될 것인데, 그 장소에서 검은 부적을 찾아 가져올 것.
메리엘은 행여 놓치는 부분이 있을까 봐 주의 깊게 타일러스의 말을 들었다. 설명을 끝낸 타일러스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자네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네. 그럼 힘내 주게나!”
근엄한 인상과는 달리 묘하게 유쾌한 타일러스의 응원을 뒤로한 채, 메리엘은 관저를 나섰다.
저녁놀은 지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어느새 해가 완전히 져 있었다. 밤이 되니 더욱더 시린 공기가 메리엘을 반겼다. 비교적 따뜻한 관저에 있다 나오니 더욱 그 차이가 크게 느껴졌다.
‘으으... 오늘 바로 출발하지는 못하겠네.’
설원의 성지는 설산의 꽤 깊은 곳에 있다고 했다. 마을만 해도 이 정도인데, 그런 곳까지 가려면 방한 대책을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초행길을 밤에 가기도 그렇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점검해야겠지. 포션도 사고, 장비도 점검하고.
달과 별들이 내려보는 가운데, 메리엘은 출발하기 전에 할 일들을 정리하며 여관으로 향했다.
메리엘은 미리 체크인 해놨던 방에 들어가 침대에 털썩 누워 뒹굴거렸다.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프리스트가 된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동안의 노력이 인정받은 듯한 느낌에 기쁘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했다.
막상 새로운 전직이 코앞까지 다가오니 싫지는 않았지만, 메리엘은 원래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에 뜻이 있지는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하루하루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니 자연스레 그동안 지나오며 겪었던 많은 일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어렸을 때 보았던 한 마법사가 피워낸 불꽃. 그 신비로움에 이끌려 마법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멋있어 보였을 뿐. 그렇게 무작정 엘리니아로 찾아갔다.
마법에 입문한 뒤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아.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었구나. 어렵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잠이 솔솔 오는 책을 하루 종일 끼고 살았고, 스태프를 휘두르느라 근육통이 생기고 주문을 외치느라 목이 쉴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재미있었다. 어렸을 적 상상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고는 해도, 마법을 배우는 건 즐거웠다. 나름대로 재능이 있었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다.
새로운 주문을 배우고, 그것을 더욱 가다듬고,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몬스터와의 실전을 치르기도 했다.
가끔 다른 마법사와 대련을 하기도...
어떤 기억을 떠올린 메리엘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한순간에 가슴이 차갑게 식는 듯했다.
메리엘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잠시 후, 메리엘은 길게 숨을 내뱉으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메리엘은 모로 누워 뒤척였다.
늦은 시간이었다. 시험을 위해서는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을 자야 한다. 메리엘은 억지로 잠을 청했다.
메리엘은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